인간의 일생은
짧은 한 막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데,
이 연극의 한 장면이 막이 되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연출하던 그 의식은
그만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육체는 부글부글 썩어버리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그 동안인들
일분의 자유가 있었던가?
밥을 먹다가라도 불의(不意)의 죽음이 닥치면
씹던 밥도 못 삼키고 죽어야 하고,
집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찬란하게 짓다가도
느닷없이 화재(火災)라도 만나면
방 안에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되지 않는가?
직접 내 자신의 일에도 이렇게 늘 자유를 잃어 버리는데
인생의 집단인 사회와 국가를 세운다는 일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자유의 바탕을 얻어야 근본적 자유를 얻게 될 것이 아닌가.
자유가 어디에서 얻어지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쌀도 없이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는 이야기만으로 떠드는 셈이니라.
인생은 자기 업신(自己業身)의 반영(反映)인
이 몽환(夢幻) 세계를 실상(實相)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이성(異性)으로 감응(感應)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니라.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생의 연속이 아니라,
생멸(生滅)의 연속으로
인간이 죽는 순간도 죽기 전후 생활도 다 잊어 버리고,
입태(入胎), 출태(出胎)의 고(苦)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현실적 육식(六識)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 생활만 느끼고 사는데,
천당에 갔다가 지옥에 갔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짐승으로 떨어졌다가 하는
그러한 생이 금세 지나가고,
또 한 생이 금세 닥쳐오는 것이
마치 활동 사진의 영상(影像)이 연속해 교환 이동되어
빠른 찰나에 다른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인생은 과거를 부를 수도 없고,
미래를 보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현재가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파악하게 되어야
과거, 현재, 미래의 생활을
일단화(一單化)한 생활을 할 수 있나니라.
인생은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요.
다만 현재에만 살고 있는데,
현재란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동하는 순간이니,
그 순간에 느끼는 불안정한 삶을
어찌 실(實)답다 할 수 있으랴!
과거와 현재가 합치된 현실이 있나니
현재는 과거의 후신(後身)이요, 미래의 전신(前身)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 상상할 수 없는 최고 문화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벌어져 있고,
아래로 저열극악(低劣極惡)한
그 양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지옥의 세계가
다 함께 몽환 세계(夢幻世界)인 것이니,
과연 어떤 것이 실세계(實世界)인지
그것을 알아 얻는 것이
곧 진아 세계(眞我世界)를 체달(體達)하게 되는 것이니라.
나의 현재 생활이 일체(一切) 세계라,
현재 생활에서 자족(自足)을 못 얻으면
다시 얻을 도리가 없나니라.
인간들은 모두 자기에게는
좋은 것이 와야 할 희망을 갖고 생을 이어 가지만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곧 언짢은 것을 얻는 원인인 줄을
알지 못하나니라.
인간 생활의 주체(主體)가 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노애락(喜怒愛樂)까지도
다생(多生)으로 익혀 온
망령된 습관의 취집(聚集)이요 결과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생사를 벗어나게 되나니라.
이 우주에는 무한 극수적(無限極數的)
이류 중생(異類衆生)이 꽉 차서
각각 자기 습성에 맞는 생활권을 건립하고 있지만,
우리 육식(六識)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로 점점 고정화(固定化)하여
우리 사바 세계 인간으로는 어느 한도를 넘어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나니,
천인(天人)이니 지옥이니
신(神)이니 귀(鬼)니 하는 것도
결국 우리 육식으로는 판단할 수도 없는
이류 중생의 명상(名相)이니라.
습관은 천성이라
천재(天才)니 소질(素質)이니 하는 것도
다생으로 많이익혀서
고정화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업(業)이라는 것이다.
물체는 결합(結合), 해소(解消)의
이중 작용(二重作用)을 하기 때문에
영겁을 두고 우주는 건괴(建壞)되고,
인생은 생사를 반복하고 있나니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한 개체에 국한된
소아적(小我的)인 생활을 하는
사람짐승, 벌레 등으로
일체 자유를 잃어 버리게 되어
다만 업풍(業風)에 불려서
사생 육취(四生六趣)에 헤매게 되는 것이요,
불(佛)이라 하는 것은
일체 우주를 자신화(自身化)하여
일체 중생이다 내 한 몸이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내 한 집이라,
어느 집이나 어느 몸이나
취하고 버리는 것을
내 임의로 하나니라.
완인(完人)은 만유(萬有)를
자체화(自體化)하였기 때문에
만유의 형상을 임의로 지으며,
만유의 도리를 자유로 쓰게 되나니라.
천당은 갈 곳이요,
지옥은 못 갈 곳이라면
우주가 내 한 몸이요,
천당과 지옥이 내 한 집인데,
중생은 한 세계를 두 세계로 갈라 놓고,
한 몸을 분신(分身)시켜 천당, 지옥으로 나누어 보내는데,
이것은 중생의 업연으로 됨이니라.
인격(人格)이 환경에 휘둘리는 사람은
영원한 평안(平安)을 얻을 길이 없나니라.
세상 사람들은
똥과 피의 주머니로 몸을 삼아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만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길이 윤회(輪廻)의 고취(苦趣)를 면치 못하나니라.
우리가 느끼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식은
장소에 따라 변하고, 때에 따라 흩어지나니,
이렇게 시시 각각으로 천류(遷流)하는 육식으로
어찌 인생이 근본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