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음 공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아무것도 할 일은 없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9.09|조회수24 목록 댓글 1

아무것도 할 일은 없다.

다만 마음을 툭 터놓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저 꽃의 아름다움을 응시해보라.

 

자기를 포기함에 있어서 엄숙함은 곧 아름다움이다. 엄숙함이 없는 곳에 사랑은 없고 자기 포기가 없으면 아름다움에는 아무런 진실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엄숙함이란 성자나 승려, 또는 인민회가 자랑삼아 하는 자기부정의 엄격한 수행이나 계율,권력이나 명성을 얻는 수단으로써의 수행이 아니다.
또한 청빈이나 정결을 맹세하는 것도 아니다. 엄숙함이란 이지의 총화이며 그것은 자기포기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비롯되는 것이며 결코 취사선택, 의지적 행위, 신중한 계획에서 생기지 않는다.

 

 

포기란 아름다움이 스스로 이루는 행위이며 엄숙함에 의한 내적 깊은 명증을 가져다 주는 것이 사랑이다. 아름다움이란 일체의 비교를 초월한 곳에 있는 이같은 사랑과 다를 바 없다.
사고가 스스로의 위험성을 명확히 깨닫고 그로말미암아 스스로 행하는 깊은 자기 포기로부터 정신은 그 모든 구조와 더불어 조용해진다.
그것은 순수한 注意의 상태로 되고 그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복이다. 말로 표현하면 이미 진실이 아니다.

 

 

사람은 어떠한 짐도 짊어지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거나 혹은 어떠한 신전이나 기념비 또는 사회적 종교적인 영웅에도 정신을 팔지 않고 다만 "홀로" 아름다움과 사랑을 간직하고 여행을 해야만 한다.


"다만 혼자"라고 함은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고 천진난만하며 자유롭고, 그리고 활발히 흩어지지 않는 한 개의 전체로서 당당하게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와 같이 홀로 존재일 때,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항상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으리라. 다만 혼자있을 때 비로소 완벽한 행위와 능력이 비롯된다. 왜냐면 사람은 언제나 한 개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얼토당토않은 신념이나 구별에 둘러싸인 삶의 방식, 모든 사무소나 공장에서 소비되는 생활의 무의미성을 그대로 정면에서 전적으로 응시해야만 한다.


그대는 그러한 모든 것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으며 단순히 싫다고 그것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산을 볼 때에는 오감으로 순수히 반응하고 세속을 볼 때에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말이나 이지에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써 몸과 마음은 매우 예민해진다. 그렇게될 때 우리들은 골짜기 와 산꼭대기의 쌍방에서 살 수 있는가를 깨닫게 되며 그때에 비로소 양자사이의 대립이나 모순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명상이란 정신이 부지런히 축적해 왔던 일체의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이미 알려져 있던 것이 관찰자의 내실이며 그 때문에 관찰자는 이미 알려진 것을 통하여 사물을 볼뿐이다.


이미지는 과거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명상이란 과거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다.
그대는 온갖 집단, 온갖 종교, 그리고 모든 사회도덕에 대해 아웃사이더가 되어야하며 그렇지 않다면 다소의 수정은 가해졌다 하더라도 종전과 필경 동일한 패턴에 빠지고 말것이다.
선망이나 악의에 구애되지 않고, 성공을 숭배하거나 그 동기로서의 권력욕에 충동을 받지 않을 때 비로소 그대는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으리라.

 

 

부정이야말로 가장 적극적 행위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묻는 대신에 허위 속에서 겉보기의 진실을 부정하고 허위로서 부정해 버릴 것, 이것이야말로 사고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이 취해야할 즉각적인 행위다. 여기에 사고가 만들어낸 이미지로 꽃을 보는 것과 그 이미지를 배제하고 직접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관찰자는 꽃과 이미지를 통하여 꽃과 관계하고 있으며 그로인해 양자에는 큰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미지가 없을 때, 비로소 시간의 격차가 소멸된다.

 

 

사고는 에너지의 낭비와 다를 바 없다. 본다라고 함은 결의하여 행하는 노력이 아니다. 거기에는 내가 본다라는 요소가 없으며 다만 오로지 볼 뿐이다. 오로지 관찰하는 곳에는 관찰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으며 그 상태에는 아무런 에너지의 낭비도 없다.

 

 

심신이 다같이 예민하지 않는 한, 즉 심정이 예민하며 밝고 맑은 관찰력이 없다면 예지는 있을 수 없다. 감격이나 감상에 몸을 맡기는 것은 감수성을 무디게 한다.


어느 분야에서는 예민하나 다른 분야에서 둔감한 때는 모순이나 갈등이 생기고 그로인해 예지는 흐려진다. 예민한 감수성이란 주의력을 총동원하는 일이며 이것이 곧 예지다.
예지는 정보나 지식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지식은 과거의 것인지라 그것을 현재로 불러내 작용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에 제약을 부여할 뿐이다. 예지는 언제나 현재의 순간에 작용하므로 시간의 테두리밖에 있다.

 

 

정신을 시간에서 텅비게 하는 데서 진리의 침묵이 비롯되고 그것을 깨닫는 일은 즉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는 것과 행하는 것은 아무런 구별이 없다. 다만 보는 것과 행하는 것과의 틈에 갈등이나 불행, 혼란이 발생한다. 현재에 살기위해서는 정신이 어제의 기억이나 빛나는 내일에의 희망에 의해 분단되어서는 안된다. 정신은 과거도 미래도 가져서는 안된다.

 

 

만일 당신이 빵집이나 카메라점, 레스토랑, 서점 등 많은 가게가 늘어선 작은 도시의 가로를 빠져나와 다리 밑을 지나고 양장점 곁을 지나 또다른 다리를 건너고 제재소를 빠져나와 그로부터 숲속으로 들어가 계곡을 따라 계속 걸을 때, 자신의 눈과 감각을 모두 완전히 깨우쳐 더욱이 정신에 추궁도 사고함이 없이 지나쳐온 그 모든 사물들을 응시할 수 있다면 분리가 없는 본연의 자세가 어떤지를 알리라. 그 흐름에 따라 1~2마일 정도 걸으면서 또다시 일체의 사고를 적용시키지 않고 급류를 응시하고 그 소란스런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색채를 보고 회녹색의 산을 거쳐 내려오는 흐름을 보고 사고와 말을 멈춘 채 나무들을 응시하고 나뭇가지를 통해 푸른하늘을 바라보고 녹음이 짙은 나뭇잎을 정지한다면 그때 사람과 풀잎과의 사이에 빈틈이 없다는 말이 어떠한 뜻인지 알 게 될 것이다.

 

 

원칙이나 이상을 갖지 않고 산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시시각각으로 직면하며 사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정신상태를 인식하였다. 그것은 감정과 욕망의 도구라는 것, 그보다는 정신은 감정과 욕망 그 자체이며 그리고 그것은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상황에 속박되고 만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정신은 새로운 것을 더듬어 찾거나 조금만이라도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데 그 이유는 새로움이란 항상 낡은 감정을 초월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계적 과정과 그 과정에 따른 감정들은 끝장이 나야한다. 상징과 어휘와 심상들과 그들이 지닌 감각을 추구하는 그 모든 것까지...... 그후에야 정신은 새로움이란 창조상태에 이를 수 있다.

 

 

분명히 삶이란 단순히 일자리나 직업에 불과한 것은 아닌 놀랄만큼 광범위하고 광대무변한 터전이다. 만일 그냥 밥벌이를 하기 위한 준비를 스스로 갖추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라면 삶을 놓쳐버린다. 삶을 이해한다는 것, 본다는 것, 행위한다는 것은 시험준비나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당신이 좋아하는 무엇에서 아주 '뛰어나다는 사실보다는 훨씬 중요하다.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라도 있으면 당신은 그 높은 지성을 얻을 수가 없다.

 

 

두려움은 당신을 둔감하게 만들 뿐 아니라 창의력을 짓밟고 우리들이 공감이나 너그러움이나 애정이나 사랑이라고 일컫는 그 불꽃을 파괴한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이 행동의 규범에 맞춰 훈련이 되도록 놔두지 말고 스스로 발견해야하는데 그것은 당신이 의문을 품고 탐구할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부패의 원천이고 이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어떤 시험이나 어떤 학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사랑은 진실이어서 그것은 감정적인 것도 아니고 눈물을 흘려야하는 어떤 대상도 아니며 감상적인 정도 아니다. 사랑에는 감상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응시 가운데 만약 정신이 목표나 목적을 갖지 않고 그 자체의 활동을 한층 더 깊고 넓게 추적한다면 그때 "사고하는 사람"과 "사고"가 하나로 된 상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 상태 속에는 노력도 없고 도달해야할 목적도 없으며 자기를 변혁시키려는 욕구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도없다.

 

 

집중은 명상이 아니다. 왜냐면 우리는 흥미가 있을 때 에만 비교적 열중하기 쉽다. 그런 집중은 단순히 집중함으로써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명상은 이해하는 일이지 배제가 아니다. 이해를 가져오는 것은 자기인식이다. 자기인식이란 가만히 응시하는 것, 그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정지되고 종식되었을 때, 당신은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 또는 당신이 하나의 대상에 애착심을 가지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을 때에만 당신은 사랑을 알 수 있다. 순수함을 방해하는 것은 경험의 각인이다. 경험이 가하는 끊임없는 압력으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야말로 명상이다.

 

 

두려움은 당신을 어지럽게한다. 믿음은 두려움에서 오고 또한 그것은 가장 파괴적인 것이다. 두려움이나 믿음으로 마음이 흐려있다면 어떠한 이해도, 진실이 어떻다라는 어떠한 깨달음도 할 수 없다. 그러한 마음은 환각 속에 젖어들 게 할 뿐이다. 그것은 기쁨과 황홀함과 관계가 있는데 그렇다고 결코 쾌락은 아니다. 쾌락에는 항상 노력하려는 희미한 형태가 있다.


즉, 찾고 요구하며 그 상태를 지키고 얻고자 투쟁하는 것, 정열에는 투쟁도 요구도 없다. 정열에는 만족의 그림자도 고통도 좌절도 없다. 그것은 차라리 만족과 고통의 핵심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열은 "당신"이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것의 자기부정이자 절제이다. 그것은 현재의 즉각적 삶일뿐이며 그래서 움직임을 계속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고할 수 있는 기능이 소유하고 붙잡는 모든 문제를 야기할 때 그 정열은 사라진다. 정열없이는 진정한 창조가 없다. 창조는 또한 자유이다. 환경에 의존해 살아야하는, 환경의 생성물인 "나"로부터의 자유이다. 그 나는 사회와 생각에 의하여 조립되는 것이다. 이 자유는 명료함이며 과거로부터 영향받거나 가려지지 않는 참 빛이다. 정열이란 오직 현재, 현재일 뿐이다.

 

 

누구든 어떤 사람도 따라서는 안될 때가 왔다. 당신은 누구에게도 귀를 기울일 필요없이 오로지 당신 자신의 직관, 당신 자신의 이해에만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당신에게 해설을 들려주는 자들에게는 결연히 거부의 뜻을 표명해야 할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9.09
    댓글 이모티콘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