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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라마나 마하리쉬- 세속에서의 삶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9.11|조회수52 목록 댓글 1

 

힌두교에서는 진지한 구도자들의 경우에, 다음과 같은 인생의 네 단계(asramas)를 밟아 나가도록 권장하는 것이 잘 확립된 전통으로 되어 있다.

 

1. 독신학습기(brahmacharya-梵行期) : 결혼하기 전까지의 오랜 경전 공부 기간. 보통 베다학學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육 기관에서 공부한다.

2. 결혼가정기(grihastha-家住期) : 경전 공부가 끝나면 결혼해서 직업과 가정적 의무를 양심적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3. 산림은둔기(vanaprastha-林棲期) : 가정적 의무를 모두 완수하면 보통 자녀들이 다 결혼해 나갔을 때를 뜻한다], 홀로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은퇴 한다. 보통 숲 속으로 들어가서 종일 명상에 전념한다.

4. 유랑승려기(sannyasa-遊行期) : 마지막 단계에서는 세상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 유랑하는 탁발승이 된다. 물질적, 사회적 및 재정적 얽매임 을 벗어났으므로, 이 수행자는 이전까지 진아 깨달음을 향한 그의 전진 을 장애하던 모든 집착을 이론적으로는 다 제거한 것이다.

 

이러한 유서 깊은 전통으로 인해서 인도에서는, 만약 누가 진지하게 진아를 깨닫고자 한다면 그의 가족을 버리고 독신 금욕의 명상 생활에 들어가야 한다는 믿음이 보편화되어 있다.

 

슈리 라마나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여러 번 질문을 받았으나, 그는 항상 그러한 믿음에 찬성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그의 헌신자들이 그들의 세속적 책무를 포기하고 명상 생활에 전념하기를 희망한 경우에도 시종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깨달음은 그가 어떤 물리적 환경에 처해 있느냐에 관계없이 누구나 똑같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몸의 출가(physical renunciation)를 권하는 대신, 그의 모든 헌신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육체가 하는 행위들을 자기가 한다거나 혹은 그 행위들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진다고 하는 개인적인 '나'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정상적인 직무와 의무를 계속 수행遂行하는 것이 그들에게 영적으로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영적인 진보에 있어서 물리적 환경보다는 정신적인 자세가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환경을 조금만 바꾸기만 해도 영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질문자들에 대해서도 끝내 그렇게 하는 것을 만류하였다.

 

단 한 가지 그가 허락한 물리적 변화는 식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먹는 음식이 어떤 것이냐가 사람의 생각의 양과 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힌두교의 지배적인 음식 이론을 수긍했으며, 영적인 수행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음식으로서 적당량의 채식을 권하였다.
슈리 라마나가 지지한 힌두교의 음식 이론은, 그것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음식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1. 순수성(sattva) 식품 : 낙농 식품, 과일, 채소 및 곡류는 순수성 식품 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식품을 위주로 한 식사는 수행자가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2. 활동성(rajas) 식품 : 육류, 생선 그리고 고추, 양파, 마늘과 같은 맵 고 자극성 강한 음식들이 활동성 음식이다. 이러한 음식을 섭취하면 마음이 지나치게 활동적으로 된다.

3. 나태성(tamas) 식품 : 부패하거나 상한 음식, 그리고 발효시킨 식품들 은 나태성 식품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음식을 섭취하면 마음이 무디 고 무감각해져서 분명한 사려 분별을 못하게 된다.



[ 문 ] 저는 이제 제가 하는 일을 그만두고 항상 슈리 바가반의 곁에 머무르고 싶습니다.


[ 답 ] 바가반은 항상 그대 곁에, 그대의 안에 있으며, 그대 자신이 바가반입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 그대의 직업을 그만두거나 집에서 도망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출가(renunciation-세속포기)란 옷을 벗고, 가족 인연을 끊고, 집을 떠나는 외관상의 버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애정과 집착을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대의 직업을 내놓을 필요는 전혀 없으며, 다만 그대 자신을, 저 모든 짐을 떠맡아 주는 신에게 내놓기만 하면 됩니다.

 욕망을 버리는 사람은 실은 세상 속에 합일되면서 자신의 사랑을 우주 전체로 확산합니다. 신에게 진정으로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포기라는 말보다는 사랑과 애정의 확산이라는 말이 훨씬 좋은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인연들(immediate ties)을 포기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 애정과 사랑의 인연을, 계급과 종교와 인종의 경계를 넘은 보다 넓은 세계로 뻗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출가자(sannyasi)가 옷을 벗고 집을 떠나는 것은 그의 가까운 인연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의 사랑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산의 때가 오면, 그는 집에서 도망간다고 느끼지 않으며, 마치 다 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그렇게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집을 떠나거나 직업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1)


 

[ 문 ] 재가자在家者(grihastha)가 어떻게 해탈(moksha)을 추구하는 공부를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탁발 수행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답 ] 그대는 왜 자신이 재가자라고 생각합니까? 그대가 비록 출가 수행자(sannyasi)로 나선다 해도, 자기가 출가 수행자라는 생각이 그대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가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건, 그것을 버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건, 그대의 마음은 그대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에고가 생각의 근원입니다. 그것이 육체와 이 세계를 만들어 내고, 그대로 하여금 자신이 재가자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대가 가정을 버린다 해도, 그것은 재가자라는 생각을 출가자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가정이라는 환경을 숲 속이라는 환경으로 바꾸어 놓을 뿐입니다. 마음의 장애들은 여전히 그대에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습니다. 환경을 바꾸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일한 장애물은 마음이며, 그대가 집에 있건 숲 속에 있건, 그대는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만약 숲 속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집에서라고 왜 못하겠습니까? 그러니 왜 환경을 바꾼단 말입니까? 환경이 어떠하든, 그대는 바로 지금 공부할 수 있습니다.

[ 문 ] 세간의 일에 바쁜 가운데서도 삼매(samadhi)[실재의 자각]를 즐길 수 있습니까?


[ 답 ] '내가 일한다'하는 느낌이 장애물입니다. '누가 일하는가?'하고 자문해 보십시오. 그대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일이 그대를 속박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도 말고, 그만두려고 노력하지도 마십시오.

 

그대의 노력이 속박입니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은 일어납니다. 만약 그대가 일을 하지 않도록 정해졌다면, 그대가 일을 찾아서 하려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일을 하도록 정해졌다면, 그대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일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더 높은 힘에 맡겨 두십시오.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것을 그만두거나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 문 ] 바가반께서는 어제, 우리가 '내면적으로' 신을 찾는 동안에도, '외면적인' 일은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슈리 짜이따니야(Sri Chaitanya)의 생애를 보면, 그는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도 실제로 내면에서는 끄리슈나를 추구하여, 그의 육신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고 끄리슈나에 대해서만 계속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일을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신체적인 일에 대해서 주의의 일부라도 계속 기울여야 합니까?


[ 답 ] 진아는 모든 것입니다. 그대는 진아로부터 떨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일이 진아 없이 진행됩니까? 진아는 작용하지 않는 데가 없으며, 따라서 모든 행위들은 그대가 그것에 관계하려고 노력하든 하지 않든 진행될 것입니다. 일은 스스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끄리슈나는 아르쥬나(Arjuna)에게 까우라바(Kauravas) 일족을 죽이는 것을 괴로워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1) 그들은 신에 의해서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일에 착수할지를 결정하고 그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는, 자신의 본성으로 하여금 더 높은 힘(신)의 의지를 수행遂行하도록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2)

[ 문 ] 그러나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일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 답 ]진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대는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대가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포함해서, 육체와 그것이 하는 행위들은 진아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대가 일에 주의를 기울이든 않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걸어갈 때, 그대는 걷는 발걸음에 주의하지 않지만 잠시 후에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걷는 일이, 그대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이처럼 진행된다는 것을 압니다. 다른 종류의 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2

[ 문 ] 진아를 기억하여 잊지 않고 있으면, 그의 행위들은 항상 올바르겠습니까?


[ 답 ]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행위들은 신의 행위이며 따라서 올바른 것입니다.

[ 문 ] 다른 사람들보다 마음을 더 많이 써야 하는 저는, 어떻게 하면 제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교장 선생의 일을 그만두고 홀로 있고 싶습니다.


[ 답 ] 아닙니다. 그대는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그 일을 계속해도 됩니다. 마음을 살아 움직이게 하며 마음이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그 저변의 흐름(undercurrent)은 무엇입니까? 물론, 진아이지요! 따라서 그것이 그대 행위의 진정한 근원입니다. 그저 일을 하는 중에도 진아를 자각하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그대 마음의 뒷바탕(background) 안에서 그것을 관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마십시오! 느긋하게 하면서, 일하는 동안에도 그대의 참된 성품을 기억하여 놓치지 말며, 급하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서두르면 잊어버립니다. 침착하십시오. 정진精進(meditation)을 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그것을 받쳐주는 진아와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하도록 유도하십시오. 일을 하고 있는 자가 그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일을 하는 것은 저변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그대 자신을 그 흐름으로 보십시오. 만약 서두르지 않고 자신을 기억하면서 일한다면, 그대의 일이나 직무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3)

[ 문 ] 초기 단계에서는 우리가 자기 삶의 외부적 의무들을 포기하고 홀로 있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답 ]포기(renunciation)란 항상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숲 속이나 한적한 곳으로 들어간다든지 자신의 의무를 포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고 안으로 향하도록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포기하든 않든, 그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운명에 따라 일어납니다. 육체가 겪어야 할 모든 행위들은 그것이 처음 태어날 때 결정됩니다.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대가 가진 유일한 자유는 마음을 내면으로 돌려, 거기서 행위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 문 ] 그러나 특히 초심자에게는, 마치 어린 나무의 둘레에 쳐주는 울타리처럼, 도움이 되는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여러 책에서는 성지를 순례하거나 상합(sat-sanga)을 가져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 답 ]누가 그런 것들이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까? 다만 그런 일을 하고 않고는 그대에게 달려 있지 않으며, 그대가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는 일만이 그대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대가 말하는 성지 순례나 상합을 원하지만, 다 그것을 하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 문 ] 왜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는 일만이 우리에게 달려 있고, 다른 외부적 일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 답 ] 그대가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그대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탐구하고, 자유나 운명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대는 누구이며, 이러한 한계를 가진 이 육체를 왜 얻었습니까?(4)


[ 문 ] 자기탐구를 하려면 홀로있음(solitude)이 필요합니까?


[ 답 ]홀로있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개인은 항상 홀로입니다. 그가 할 일은 그 자신의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5)


홀로있음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세간의 번잡한 곳에서도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홀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숲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홀로 있다 할 수 없습니다. 홀로있음은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욕망에 집착한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홀로있음을 얻지 못하지만, 집착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항상 홀로 있습니다.

[ 문 ] 그렇다면 우리는 일을 하면서도 욕망에서 벗어나, 홀로있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군요. 그렇습니까?


[ 답 ] 그렇습니다. 집착을 가지고 하는 일은 속박이 되지만, 집착 없이 하는 일은 그 행위자에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일하는 사람은, 일을 하는 동안에도 홀로 있는 것입니다.(6)

[ 문 ] 우리의 일상 생활은 그러한 노력과 양립하지 않습니다.


[ 답 ]왜 그대는 그대가 행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대가 여기 도착하는 과정을 아무렇게나 예로 들어봅시다. 그대는 달구지(cart)를 타고 집을 나서, 역에서 기차를 타고, 여기 역에서 내려 다시 달구지를 탔다가 내리면, 이 아쉬람에 와 있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면, 그대가 사는 마을에서부터 줄곧 여행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대는 말합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대는 있는 그대로 있었고 운송 수단이 줄곧 움직여 온 것 아닙니까?

 

그 운송 수단의 움직임이 그대 자신의 움직임으로 혼동되는 것과 꼭 같이, 그대의 다른 행위들도 그대 자신의 행위로 혼동되는 것입니다. 그 행위들은 그대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의 행위들입니다.(7)

[ 문 ] 
'내가 행위자다'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진아지眞我知(Self-knowledge)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의 확립된 원칙이지만, 재가자在家者(householder)인 공부인이 이러한 느낌 없이 그의 직무를 적절히 수행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 답 ] 행위자라는 느낌이 있어야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어떤 행위가 '행위자' 없이 혹은 그 '하는 행위' 없이도 일어날 수 있겠느냐를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고를 담당하는 관리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루 종일 주의 깊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나는 이 모든 돈과 아무런 실질적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마음속에 아무런 집착 없이, 그리고 개입한다는 느낌 없이 자신의 직무를 해나갈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명한 재가자도 그의 과거의 업에 따라 그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재가 임무를, 마치 남의 손에 쥐어진 연장이 일을 하는 것처럼, 아무 집착 없이 해나갈 수 있습니다. 행위하는 것과 아는 것은 서로 방해되지 않습니다. (이 문답은 역자 증보이다.)

[ 문 ] 그 성격상 끊임없는 행위를 요하는 재가 업무를 하는 속에서 어떻게 행위의 그침(nivritti)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 답 ] 현명한 사람(자신이 행위자가 아님을 아는 사람)이 하는 행위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만 행위로 보이고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으므로, 그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해도 실제로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행위들은 행위의 그침과 마음의 평안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행위들이 단지 그의 면전에서 일어날 뿐,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의 말없는 주시자(silent witness)로 남을 것입니다.8

[ 문 ] 서양인들은 내면으로 물러나기가 더 어렵습니까?


[ 답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활동적(rajasic)이며, 그들의 에너지는 밖으로 향합니다. 우리는 진아를 잊음이 없이 안으로 고요하면서도, 밖으로는 행위를 계속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무대 위에서 여자 역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남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삶이라는 이 무대 위에서 우리의 맡은 역을 해야 하지만, 우리 자신을 그러한 배역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문 ] 다른 사람의 영적인 게으름을 어떻게 하면 없애줄 수 있습니까?


[ 답 ] 그대 자신의 게으름은 없앴습니까? 그대의 탐구를 진아 쪽으로 돌리십시오. 그대 안에서 정립된 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작용할 것입니다.9

[ 문 ] 그러나 다른 사람이 문제나 고민을 안고 있을 때, 어떻게 그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 답 ] 다른 사람이라니 이 무슨 말입니까? 단 하나만이 존재합니다. 나도, 너도, 그도 없고, 그 모든 것인 단 하나의 자기(진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노력하십시오. 만약 그대가 다른 사람의 문제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대는 자기(진아)의 밖에 뭔가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대는 외부적 행위로써보다는, 일체가 하나임을 깨달음으로써 남을 가장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10

[ 문 ] 독신수행(brahmacharya)은 필수적인 것입니까? 결혼한 사람도 진아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 답 ] 물론입니다!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우리는 진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진아 깨달음)은 마음의 성숙도의 문제입니다. 배우자와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 문 ] 구원을 얻는 데는 결혼한 것과 독신의 어느 쪽이 더 낫습니까?


[ 답 ] 어느 쪽이든 그대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위 두 문답은 역자 증보이다.)

[ 문 ] 결혼은 영적인 진보에 장애가 됩니까?


답: 가정 생활은 장애가 아니지만, 가정을 가진 사람은 자기 절제를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보다 차원 높은 삶을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면, 성性을 추구하는 습[色習](sex tendency)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마음이 소멸되면 다른 욕망들도 소멸됩니다.

[ 문 ] 성적인 생각을 어떻게 뿌리뽑을 수 있습니까?


[ 답 ] 육체가 자기(진아)인 줄 아는 그릇된 생각을 뿌리뽑으면 됩니다. 진아에는 성이 없습니다. 진정한 자기가 되십시오. 그러면 아무런 성적인 고민이 없을 것입니다.3)

[ 문 ] 당신께서는 성적 금욕을 찬성하십니까?


[ 답 ] 진정한 독신(brahmachari)은 브라만 안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욕망이라는 문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문 ] 슈리 오로빈도(Sri Aurobindo)의 아쉬람에서는, 부부는 동침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거기 사는 것이 허용된다고 하는 엄격한 규칙이 정해져 있습니다.


[ 답 ]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만약 마음속에 욕망이 남아 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금욕하게 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11

[ 문 ] 
저는 성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 답 ]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그 뒤에 그대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한 문제는 없습니다. 진아는 어떠한 죄도 알지 못하며, 성의 포기는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입니다.

[ 문 ] 저는 이웃집 젊은 여인의 가슴을 보면 정신을 빼앗기고, 종종 그녀와 정을 통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낍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답 ] 그대는 항상 순수합니다. 그대를 유혹하는 것은 그대의 감관感官과 육체이며, 그것을 그대는 진정한 자기(진아)와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누가 유혹을 느끼며, 누가 유혹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설사 그대가 통정通情을 한다 하더라도, 나중에 그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 자신 항상 순수하기 때
문입니다. 그대는 죄인이 아닙니다.12

[ 문 ] 단식으로 성적인 욕구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까?


[ 답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정신적 단식(mental fast)입니다. 단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거기에는 영적인 발전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완전한 단식은 마음도 매우 약하게 만듭니다. 단식이 영적으로 도움이 되려면, 단식 기간 동안 영적인 탐구가 올바르게 유지되어야 합니다.13

[ 문 ] 단식에 의해 영적으로 진보할 수 있습니까?


[ 답 ] 단식은 주로 정신적인 것[생각을 끊는 것]이어야 합니다. 음식을 끊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이익이 없으며, 오히려 마음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발전은 식사를 조절함으로써 더 이루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 달간의 단식 기간과 단식을 트고 10일 가량의 보식補食기간 동안(그것도 올바르게 트고 신중한 보식을 했을 때) 영적인 주시注視가 잘 유지되었다면, 마음은 순수해지고 안정되며, 그 상태가 지속될 것입니다.14


제가 여기 오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저는 눈을 감고 선정禪定(meditation)에 깊이 들어서, 낮인지 밤인지도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먹지도 않았고 자지도 않았습니다.

 몸을 움직이게 되면 음식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게 되면 잠도 자야 합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잠을 잘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주 적은 음식으로도 충분합니다. 저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제가 눈을 뜰 때마다 누군가 한 컵 가득 유동식流動食을 건네주곤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먹은 음식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기억하십시오. 몰입되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집중 상태에 들었을 때가 아니면, 잠이나 음식을 아주 끊기란 불가능합니다. 몸과 마음이 삶의 일상적인 활동에 종사하고 있을 때, 만약 그대가 음식과 잠을 끊으면 몸이 휘청거리게 됩니다.


수행자가 얼마나 먹어야 하고 얼마나 자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녁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2시에 일어나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그것은 네 시간 수면이면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네 시간은 부족하고, 여섯 시간은 자야 한다고 합니다. 요컨대, 수면과 음식은 지나치게 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둘 중 하나를 완전히 끊으려고 들면, 그대의 마음은 항상 그것에로 쏠릴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해야 합니다.15


하루에 서너 번 먹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음식은 좋고 저런 음식은 싫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마십시오. 더욱이 이러한 식사는 깨어있는 12시간(주간) 중에 할 것이며, 잠자는 12시간(야간) 중에는 먹지 마십시오. 잠이 그대를 해탈로 이끌어 줍니까? 단순한 무행위(inactivity-아무것도 하자 않고 가만히 있는 것)가 해탈로 인도한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16

[ 문 ] 식사는 어떤 것으로 해야 합니까?


[ 답 ] 음식은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올바른 음식은 마음을 더욱 순수하고 조화롭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종류의 요가를 수행하든, 채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문 ] 육식을 하면서도 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 답 ] 그렇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것을 버리고 순수성 식품(sattvic foods)을 먹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그러나 일단 그대가 깨달음을 성취하면, 그대가 무엇을 먹든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불길에 어떤 연료를 더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17


[ 문 ] 저희 유럽인들은 특정한 음식에 길이 들어서, 음식을 바꾸면 건강에 영향이 있고 마음(의 힘)이 약해집니다. 신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 답 ] 필요하고 말고요. 몸이 약해질수록 마음은 강해집니다.4)

[ 문 ] 우리가 통상적인 식사를 하지 않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마음의 힘(strength of mind)이 빠질것입니다.


[ 답 ] 마음의 힘이란 것은 무슨 뜻입니까?


[ 문 ]세속적 집착을 제거하는 힘 말입니다.


[ 답 ] 음식의 질은 마음에 영향을 미칩니다. 마음은 섭취한 음식 기운으로 유지됩니다.

[ 문 ] 그렇고 말고요! 그렇다면 유럽 사람들은 순수성 식품만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겠습니까?


[ 답 ] 습관이란 환경에 대한 적응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어떤 음식들을 맛있고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하게끔 길들여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음식 재료는 채식으로나 비非채식으로나 똑같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것이 익히 길든 음식을 원하며, 그것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문 ] 깨달은 사람도 음식과 관련하여 어떤 제약이 있습니까?


[ 답 ] 아닙니다. 그는 한결같으며 섭취하는 음식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 문 ] 고기 음식을 마련하는 것은 살생 아닙니까?


[ 답 ] 불살생(ahimsa)은 수행자들의 계율 가운데 으뜸갑니다.

[ 문 ] 식물들도 생명이 있습니다.


[ 답 ] 그대가 앉아 있는 석판石板(slabs) 바닥도 마찬가지입니다!

[ 문 ] 저희들도 채식에 점차 습관을 들일 수 있겠습니까?


[ 답 ] 예, 바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18

[ 문 ] 고기와 술도 먹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까?


[ 답 ]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처음에는 유용한 도움이 됩니다. 그것을 끊기 어려운 것은 그것들이 정말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그것에 습관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음식에는 어떤 미묘한 기운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진아를 찾기 위해 명상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식사법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순수성 식품들은 명상을 증진시켜 주지만, 육류와 같은 활동성 식품(rajasic food)과 나태성 식품(tamasic food)은 그것을 장애합니다. (이 문단과 바로 아래 문답은 역자 증보이다.)

[ 문 ] 당신께서는 왜 우유는 드시면서 계란은 안 드십니까?


[ 답 ]가축 젖소들은 자기들의 송아지가 먹어야 할 양보다 많은 우유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짜내 주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계란에는 잠재적인 생명체가 들어 있습니다.

[ 문 ] 흡연을 계속해도 해가 없습니까?


[ 답 ]그렇지 않습니다. 담배는 일종의 독毒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피우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담배는 일시적인 자극을 줄뿐이며, 그 뒤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있어 그것을 더 갈망하게 됩니다. 흡연은 또한 명상 수행에도 좋지 않습니다.19

[ 문 ]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행자가 따라야 할 행위 준칙은 무엇입니까?


[ 답 ] 적당한 음식, 적당한 잠 그리고 적당한 말입니다.20

주:

1) 이것은 {바가바드 기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2) '신의 의지를 수행한다' 함은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 자연스러운 인연의 흐름을 따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에고의 의지를 신의 의지로 착각(또는 합리화)하여 무슨 일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과보가 따를 것이다.
3) 이 부분은 확고한 진아의 관점, 즉 '그대는 진아이므로 진아 아닌 육체가 한 행위들을 전혀 돌아보지 말라'는 취지이다. 에고적 욕망의 관점에서 자기 편리할 대로 해석하여 성적인 비행을 합리화하면 안 될 것이다.
4) 이 말은 몸 쪽으로 쏠려 있는 기운이 마음 쪽으로 모아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뱃속에 음식이 적을수록 영적인 힘은 강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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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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