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옹 선사
나옹선사
나옹화상의 법명은 혜근이며
아버지는 선관령(膳官令)을 지낸 서구(瑞具)이며,
어머니는 정(鄭)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20세 때 이웃의 친한 친구가 죽는 것을 보고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라고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하자
사불산 묘적암(妙寂庵)으로
요연(了然)화상을 찾아가 삭발하였다고 합니다.
묘적암은 현재 대승사의 암자입니다.
요연화상이 ‘너는 무엇 때문에 출가하려 하는가’ 하니
‘삼계를 뛰어넘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대답하자
다시 요연화상이 ‘지금 여기 온 너는 어떤 물건인가’ 하니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여기 왔을 뿐이니
다만 수행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요연화상이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모른다.
다른 스승을 찾아서 물어보라’ 라고 권하자
이후 나옹스님은 요연화상을 하직하고
스승을 찾아 여러 절을 돌아다니다가
25세 때인 1344년 양주 회암사로 들어가
4년 동안 정진하다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옹스님은 처음 삭발한 요연을 제외하고는 수행과정에서
다른 선지식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후 그는 여러 선학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공부를 시험하고자 원(元)나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원에 들어가 먼저 인도에서 온 지공(指空)스님을 찾아가
인가를 받았고, 2년 동안 지공의 문하에서 보림을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평산(平山) 처림(處林)을 찾아가 법을 인가받았습니다.
평산 처림은 임제 의현의 법맥을 이은 고승으로
평산과의 선문답은 나옹의 경지를 잘 보여줍니다.
평산은 묻습니다. “일찌기 어떤 사람을 보았는가?”
스님이 대답하기를 “서천의 지공을 보았는데
그는 날마다 천검을 씁니다.” 하니 평산은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을 가져오라” 합니다.
스님이 평산에게 좌복(座服)을 내어밀자
평산이 선상에 쓰러지면서 “이 도적이 나를 죽인다” 라고 소리칩니다.
스님이 “나의 검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하면서 부축해 일으키자
평산스님이 설암이 전한 급암의 가사와 불자로
믿음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나옹은 오광(悟光), 설창(雪窓), 무상(無相), 요당(了堂) 등
여러 선사들을 만나 선기를 닦았습니다.
그는 다시 밥원사로 돌아가 지공스님을 만났으며,
지공스님으로부터 삼산양수지기(三山兩水之記,
세개의 산과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 양주 회암사)를 받고
귀국을 결심하게 됩니다.
1358년(공민왕7) 귀국한 나옹스님은
평양, 동해, 오대산 등을 거치며
설법과 수행을 계속합니다.
1361년 공민왕은 나옹을 왕궁으로 초청하여
마음의 요체에 대한 법문을 청하고,
그에게 만수가사와 수정불자를 하사하였습니다.
이해부터 신광사에 2년 동안 주석하였으며,
청평사·회암사 등에 옮겨다니다가 1371년 왕사로 책봉되고
왕명으로 송광사에 주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해 지공의 삼산양수지기(三山兩水之記)를 생각하고
회암사로 돌아와 그곳을 중수하고 크게 낙성회를 베풀었습니다.
나옹은 이 때 자신의 스승인 지공의 영골과 사리를 가져와
회암사 북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안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376년(우왕2) 대간의 건의에 따라
밀양 형원사로 옮겨 가다가 신륵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원사(瑩源寺)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왕명이나 나옹스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옮긴 것이 아니라
대간의 건의에 의하여 옮겼으며,
또 형원사로 가는 길을 관리들이 재촉하였다는 점입니다.
나옹이 왕명에 의하여 회암사를 떠나는 순간부터
입적하는 순간까지를
문인 각굉(覺宏)이 편찬한 「행장」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침 대간이 평가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아주 가까우므로
사중(四衆)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니
혹 폐업하지 않을까’ 하였다.(많은 사람들이 절에 출입하게 되면
생업을 소홀히 하게 될까 염려했다는 말이나
워낙 많은 대신들과 일반 백성들이 많이 따르니 일부 대신들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이야기도 있음)
그리하여 임금의 명령으로 형원사로 옮기게 되어 출발을 재촉하였다.
스님이 마침 병이 있어 남여를 타고 삼문을 나와
남지 가에 이르렀다가 스스로 남여꾼을 시켜 도로 열반문으로 나왔다.
대중은 모두 의심하여 목놓아 울었다.
스님은 대중을 돌아보고 “부디 힘쓰고 힘쓰시오.
나 때문에 중단하지 마시오. 내 걸음은 여흥에서 그칠 것이요.” 하였다.
5월 2일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卓詹)에게 말하였다.
“나는 지금 병이 너무 심해 배를 타고 가고 싶소” 하고
문도 10여명과 함께 물을 거슬러 올라간 지 7일 만에
여흥에 이르러 다시 탁첨에게 말하였다.
“내 병이 너무 심해 이곳을 지날 수 없소. 조정에 알리시오”
탁첨이 달려가 조정에 알렸으므로 스님은 신륵사에 머물게 되었다.
며칠을 머물렀을 때 여흥원 황희직(黃希直)과
도안감무(道安監務) 윤인수(尹仁守)가
탁첨의 명을 받고 출발을 재촉하였다.
시자가 이 사실을 알리자 스님은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장차 아주 가리라” 하였다.
그 때에 어떤 중이
“이런 때를 당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스님은 주먹을 세웠다.
중은 또 묻기를
“사대가 흩어지면 어디로 갑니까?” 하자
스님은 주먹을 맞대어 가슴에 대고
“오직 이 속에 있다” 하였다.
“그 속에 있을 때는 어떻습니까?”
“별로 기특한 것이 없다” 하였다.
또 어떤 중이 묻기를 “어떤 것이 기특한 그 도리입니까” 하자
스님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자세히 보면서
“내가 그대를 볼 때 무슨 기특한 것이 있는가?” 하였다.
또 어떤 중이 불병자의 화두를 들어 말하자,
스님이 분부하되 “왜 그런 것을 묻는가?” 하고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노승이 오늘 너희들을 위해 불사를 지어 마치리라” 하고
진시가 되어 고요히 돌아가시니 5월 15일이었다.(각굉, 행장)
나옹스님이 법을 인가받고 법맥을 계승한 곳은 두 군데입니다.
하나는 서천 지공이고, 다른 하나는 평산 처림입니다.
지공은 나옹을 인가하면서 법의와 불자를 내려주었고,
처림 또한 가사와 불자를 전해주었습니다.
두 법맥이 모두 소중하지만 나옹이 좀 더 의존한 쪽은 지공이었습니다.
처음 원에 들어갔을 때 지공의 문하에 2년 동안 수학하였고,
문집에도 지공을 추모하는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습니다.
또한 지공의 유골이 고려에 전해지자
나옹은 제자의 예를 다하여 모셨습니다.
또 1367년에는 지공의 가사와 수서(手書)가 나옹에게 전해졌으며,
그것은 지공의 유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나옹스님은 간화(看話)로 참선하는 것을 주장하였고
그것은 견고한 신심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나옹스님은 수행방법에 있어서 염불도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염불을 미타 일념으로 청정심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삼악도를 벗어나는 정각의 지름길로 보았습니다.
이로써 옛 선사들은 참선을 하더라도
염불을 소중하게 병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옹스님의 제자로는 무학스님이 있습니다.
지공선사의 문하에서 같이 수학하기도 했던 무학은
귀국 후 왕명으로 신광사에 주석하던 나옹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옹의 제자들 가운데 무학을 시기하던 사람이 있어
무학은 스스로 나옹을 하직하고 고달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나옹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제쳐두고
그에게 의발을 보내어 법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나옹이 임종하던 해에 거행된 회암사의 낙성회에
무학을 불러 수좌로 삼고자 하였으나
무학은 이를 극력 사양하였고 나옹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산을 유력하면서 뜻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편 나옹화상에게는 누이가 있었는데
산문을 찾아온 누이에게 보낸 답가가 <나옹집>에 전해 내려옵니다.
<매씨(妹氏)에게 답함>
나는 어려서 집을 나와
연월(年月)도 기억하지 않고
친소(親疎)도 생각하지 않으며,
道만 생각하며 오늘에 이르렀소.
인의(仁義)의 도에 있어서는
친하는 정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지마는,
우리 불도에서는 그런 생각이 조금만 있어도 큰 잘못인 것이오.
이런 뜻을 알아 부디 친히 만나겠다는 마음을 아주 끊어버리시오.
그리하여 12시간 동안
옷을 입고 밥을 먹거나,
말하고 서로 문답하거나,
모든 일 할 때나, 또 어디서나,
항상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생하되,
끊이지 않고 생각하며, 쉬지 않고 기억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나는 경지에 이르면,
나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나고
또 억울하게 六道에 헤매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간절히 부탁하고 부탁하오.
게송을 들으시오.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있는가? (아미타불재하방)
마음에 생각하여 부디 잊지 마시오 (착득심두절막망)
생각이 다하여 생각이 없는 곳에 이르면 (염도염궁무념처)
6문(六門)에서 언제나 자금광(紫金光)을 놓으리라 (육문상방자금광)
이 게송은 너무도 유명하여
수 많은 사찰의 주련에 많이 쓰여져 있습니다.
다음은 이 게송을 주시게 된 배경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약간씩 다릅니다.
위 게송에서는 누이가 스님을 만나려하나 스님께서는
만나려는 마음을 끊으라 하며 내치시는 내용이기에...
단지 뜻만 새기면 될 것 같습니다. )
이 누이가 스님 계시는 절에 와 머무르며 사는데
스님은 사중에 존경을 받는 스승이심에도
누이는 사중의 규율을 지키는 일이나
예불을 모시는 등에는 등한히 하면서
자기 눈에 조금이라도 나는 일을 보면
나옹스님을 믿고 조용하던 사중에
분란을 일으키기 일쑤였습니다.
대중들 마음에 은근히 원망이 쌓여 갈 때
나옹스님은 누이에게 조석 예불도 참례하고
사중에 같이 힘을 모아 운력을 하는 일에
젊은 힘을 도우라 간곡히 말하십니다.
그래도 누이는 스님의 말을 들으려 않고
‘아니 오라버니가 이렇게 큰 스님이신데
내가 무엇을 닦고 무엇을 노력하란 말입니까?
나야 스님이 공부하시는 덕으로
아무런 염려가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어느 날 스님은 누이가 없는 자리에서
대중들에게 누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 이르니
그날부터 누이는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공양간에 가서 떼를 써도 안되고
스님에게 가서 하소연을 해도 들은 척 않고
그렇게 몇날 며칠을 굶고 나니
눈에는 헛것이 보이기도 하고
배고픈데는 장사가 없는지라 하는 수 없이
공양간 공양주에게 가서 자기에게
밥을 주지 않는 이유를 말하라 다그치니
나옹스님의 지시라는 말을 듣습니다.
한달음에 스님에게 달려가
공양주의 말이 사실이냐 하고 따져 물으니
스님은 말하시기를 ‘네가 앞서 말하기를
오라버니가 훌륭한 스님이신데
내가 무엇하러 마음을 닦고 운력을 하느냐
나는 오라버니 스님 덕분에
아무런 걱정 없다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나는 네가 그정도로 도를 통했으면
내가 먹으면 네 배도 부를 것이고
내가 마시면 네 목도 축여질 것이라 생각해
그리 한 것인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
하고 조목조목 답변을 해 오는데
누이로서는 오라버니의 말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께 참회의 절을 올리고 나온 뒤로
스님이 두 번 이상 다시 말하지 않고도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밤이 저물도록
나옹스님의 누이는 도량 안팎을 소제도 하고
전각 청소도 하며 부지런히 염불하더니
다음과 같은 멋진 화답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이 시는 서산대사의 임종게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 역시 뜻으로만 새기면 좋을 것 같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날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고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과 같네
뜬 구름은 자체에 실체가 없나니
나고 죽고, 오고 감도 모두 이와 같도다
홀로 한 물건 있어 항상 홀로 드러나
담연히 생사를 따르지 않는다네".
"空手來空手去是人生(공수래공수거시인생)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연)
獨有一物常獨露 淡然不隨於生死(독유일물상독로 담연불수어생사)
한편 나옹스님은 게송을 많이 남기셨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산거(山居)>
발우 하나, 물병 하나,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 들고
깊은 산에 홀로 들어가 되는 대로 지내노라
대바구니 들고 나가 고사리를 캐어다가 뿌리째 삶나니
누더기 옷으로 지내는 일이 아직은 서툴도다
내 진공(眞空)을 깨닫고 본래 적정의 경지에 들어
바위 사이 돌을 베고 누워 한가로이 잠을 잔다
누군가 문득, 어떤 일이 기특하냐고 물으면
‘한 벌 헤진 옷으로 백 년을 지내노라’고 답할 뿐이로다
솔 나무 보이는 창에는 온 종일 세상 번잡함이 없고
돌로 만든 물통에 담긴 물은 늘 맑도다
다리 부러진 솥에는 맛난 음식 넉넉하노니
애써 세상의 명리와 영화를 구할 일이 없도다
흰 구름 노니는 곳에 초가 삼간 있으니
내 한 몸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도다
차고 맑은 시냇물은 반야(般若)를 말하고
맑은 바람은 달빛에 실려와 온 몸을 맑히도다
그윽한 바위에 고요히 앉아 세상의 헛된 이름 여의고
돌 병풍에 의지하여 세속의 정리(情理) 다 잊는도다
꽃잎은 뜰에 가득하고 찾는 이 없으니
때때로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로다
내 산에 들면서 산 싫어하는 마음이 없나니
사립문 초가집은 세상과 같지 않도다
맑은 바람 달빛과 어울려 추녀 끝을 스치노니
시냇물은 내 온 몸을 맑게 씻어 주는도다
한편 <모기>라는 재미있는 시도 있습니다.
문자(蚊子)
제 힘 본래 약한 줄 모르고
욕심껏 피를 빨아 날지를 못하는구나
남의 소중한 것은 탐내는 법 아니로다
뒷날 반드시 돌려 줄 때가 있을 것이로다
이런 시 들 보다 더 유명하게 알려진 게송은
아마도 다음의 시일 것입니다.
불자라면 거의 모두 한번 쯤은 읇조렸을 시입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이 시는 '토굴가' 중 일부입니다.)
나옹스님은 이외에도 아침예불 올릴 때 발원하는
행선축원을 직접 지으신 분입니다.
여러 염불 의식을 정리하고 때론 직접 만드신 나옹스님,
그래서 나옹스님을 '일체작법의 증명법사'라고 합니다.
懶翁和尙歌頌중에서
<1首>
深沈無語意彌長 <심침무어의미장>
깊고깊어 말없어도 뜻은 기니
妙理誰能敢度量 <묘리수능감도량>
오묘이치 누가능히 헤아리리
坐臥行來無別事 <좌와행래무별사>
앉고 눕고 가고옴에 일이없이
心中特念最堂堂 <심중특념최당당>
마을으로 뜻을지켜 당당하소
<2首>
自性彌陀何在處 <자성미타하재처>
자성미타 어디곳에 계시는가
時時念念不須忘 <시시념념부수망>
시시각각 생각생각 잊지마소
驀然一日如忘憶 <맥연일일여망억>
하루동안 잠깐만도 잊는다면
物物頭頭不履藏 <물물두두불이장>
물건마다 일일마다 감춤없네
<3首>
彌陀憶念不須閒 <미타억념불수한>
미타생각 잠깐만도 쉬지마소
二六時中子細看 <이육시중자세간>
하루내내 자세하게 살피다가
驀得一朝親憶着 <맥득일조친억착>
하루아침 몸소알아 깨닫으면
東西不隔一毫端 <동서불격일호단>
동서간이 터럭만큼 차이없네
<4首>
人人錯步不還鄕 <인인착보불환향>
사람마다 잘못들어 고향못가
山野段勤又發揚 <산야단근우발양>
산과들은 은근하게 나타나니
忽憶念頭俱熱處 <홀억념두구열처>
생각마다 번뇌자국 남았으니
?天覆地覺花香 <번천복지각화향>
천지변해 꽃향기를 깨닫구나
<5首>
念念無妄憶自持 <념념무망억자지>
생각마다 잊지 않고 자성지켜
切忌求見老阿彌 <절기구견노아미>
늙은아미 부디뵙길 그만두소
一朝忽得情塵落 <일조홀득정진락>
하루아침 정의티끌 없어지면
倒用橫拈常不離 <도용횡념상불리>
뒤집든지 비껴잡든 항상하리
<6首>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재하방>
아미타불 어느곳에 계시는가?
着得心頭切莫忘 <착득심두절막망>
마음깊이 새겨두고 잊지마소
念到念窮無念處 <염도염궁무염처>
생각다해 무념처에 이르러면
六門常放紫金光 <육문상방자금광>
여섯문에 금색광명 나투리라!
<7首>
幾劫勞勞六道廻 <기겁로로육도회>
다겁동안 수고롭게 육도윤회
今生人道最爲希 <금생인도최위희>
금생인도 무엇보다 회유하네
勤君早念彌陀佛 <근군조념미타불>
권하노니 아미타불 생각하게
切莫閑遊失好時 <절막한유실호시>
노느라고 좋은시절 허비마소
<8首>
六道輪廻何日休 <육도윤회하일휴>
육도윤회 어느때나 끝이려나
思量落處實爲愁 <사양락처실위수>
떨어질곳 생각하니 근심되네
唯憑念佛勤精進 <유빙념불근정진>
오직염불 의지하여 정진하면
?透塵勞驀到頭 <찰투진노맥도두>
고통떨쳐 바로닿게 되는구나
가송중 제6首는
나옹선사께서 출가를 한후 누이동생이 나옹선사에게 보낸편지에 대하여 답장을 보낸 문장으로 肉親의 정을 잊지 못하는 동생에게 이를 끊고 오로지 念佛修行을 한 것을 勸諭하였다. 모든 세상사의 일을 끊어버리고 自性을 친견해야 된다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하루종일 옷을 입든, 밥을 먹든, 말을 하든, 일을 하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阿彌陀佛을 생각하면 無念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일부러 念佛을 하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되며‘나’라는 생각도 없어지고 육도윤회의 고통도 면해질 수 있으니, 부탁하고 투탁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게송은 한국불교에서 유심정토를 주창하는 念佛禪의 대표적인 게송으로 애송되고 있으며 莊嚴念佛에는 반드시 애송되고 있다. 和尙께서는“노는 입에 염불하라”는 속담을 처음으로 유행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