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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The Direct Way직접적인 길 Adyashanti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09.23|조회수25 목록 댓글 1

The Direct Way

Adyashanti

 

There is an always and already peaceful, silent, and aware condition of consciousness that is present right now in your own experience, prior to any attempt to search for or attain this condition.

Instead of trying to attain it through some form of seeking or mental effort, notice and acknowledge that there is background quietness and wakefulness that is already present in your experience before you search for it.

 

늘 그리고 평화롭고, 고요하고. 아는 의식 상태가 있는데,

그것은 당신의 경험에서 바로 지금 현존하며,

이 상태를 찾거나 이루려는 시도보다 먼저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추구나 정신적 노력으로 그 상태를 이루려고 애쓰는 대신,

늘 배경에 있는 고요와 깨어 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찾으려 하기 전에 경험 속에 이미 현존합니다.

 

Spiritual awakening refers to an experiential insight that feels and is experienced much like when you wake up from a dream in the middle of the night.

It is the experience of waking up from the dream of the separate “me” and the way it experiences life, to the reality of universal Being and non-separation.

This awakening is neither an escape from life nor a rejection of oneself or the world. It’s an embrace of the truth of Being, both your own being and the Being of all beings.

 

영적 깨어남이란 한밤중에 꿈에서 깨는 것처럼 느껴지고 경험되는 체험적 통찰입니다.

그것은 분리된 ‘나’와 그런 ‘나’가 삶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꿈으로부터 모든 곳에 두루 있는 존재의 현실, 어떤 분리도 없는 현실로 깨어나는 경험입니다.

이 깨어남은 삶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나 세상을 거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자기의 존재와 모든 것의 존재)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Awakened Awareness:

Awakening as the formless Being of Awareness

깨어난 앎: 앎의 형상 없는 존재로 깨어남

 

Awakened awareness practices focus on dis-identifying with the conceptual mind, specifically the false self or ego that we imagine ourselves to be. To call the ego a “false self” is not to disparage it or even judge it. It is to name it as what it is: a psychological process with which we have become overly accustomed to identifying. The false self has no enduring quality—it is neither thing, noun, nor person. It is a process that we mistake for who we are.

 

깨어난 앎은 실습은 관념적 마음, 특히 우리가 자기라고 상상하는 거짓자아 즉 에고와의 동일시를 끝내는 데 중점을 둡니다.

에고를 ‘거짓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에고를 폄하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에고의 정체– 우리가 지나치게 동일시하게 된 심리과정-에 알맞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거짓 자아는 지속하는 성질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아니고, 명사도 아니며, 개인도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오해하는 심리적 과정일 뿐입니다.

 

I often call this false self the thought-created self or the psychological self. The false self grows and thrives in unconscious being. When we are asleep to Being, our attention becomes entranced by mind—the vast array of ideas, images, beliefs, habits, opinions, and judgments that we have been conditioned to identify as self. However, these are not self; they are conditioned psychological processes masquerading as who you are.

 

나는 종종 거짓 자아를 생각이 만들어 낸 자아 혹은 심리적 자아라고 부릅니다.

거짓 자아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살아갈 때 자라고 번성합니다.

우리는 존재에 대해 잠들어 있을 때 마음에 주의를 빼앗깁니다.

우리가 자기라고 믿도록 길들여진 다양한 관념, 이미지, 믿음, 습관, 견해, 판단에 주의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 자신이 아니며,

우리 자신인 척 가장하는 조건 지어진 심리과정입니다.

 

Remember, you existed long before you had any thoughts and ideas to identify with. You did not suddenly pop into existence when you acquired an ego. At best, the ego is a functional tool to help you navigate through the world for a while, and at worst it is a nightmare appearing to be all too real. Either way the ego becomes a false self the moment we take it to be who and what we are. The great news is that we can, quite literally, wake up from the illusion of the false self and reclaim our essential identity.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어떤 생각이나 관념을 자기 자신으로 믿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에고가 생겼을 때 갑자기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에고는 기껏해야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한동안 도와주는 기능 수단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너무나 실제처럼 보이는 악몽일 뿐입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에고를 참된 자기라고 여기는 순간, 에고는 거짓 자아가 됩니다. 우리는 거짓 자아의 망상에서 실제로 깨어나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주 좋은 소식입니다.

 

 

We begin by acknowledging the always and already present presence of awareness. This is the awareness that is cognizant of reading these words and wondering what they mean. That awareness, as ordinary and common as it may seem, is the doorway to awakening to your true nature of Being. It is the very awareness that is so easy to dismiss, because it is always present and more essentially you than you could ever conceive or imagine. Take one simple inward step away from your thoughts and recognize what you are prior to the whole array of mental activity and self-image making. It’s as easy as an exhale, as simple as a willingness to be amazed by your intangible presence.

 

우리는 앎이 늘 그리고 이미 현존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다는 것을 아는 이것, 이 글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한다는 것을 아는 이것이 바로 앎인 것입니다.

그런 앎은 평범하고 흔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 존재의 참된 본성으로 깨어나는 관문입니다. 이 앎은 늘 현존하고, 우리가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이므로 간과되기 쉽습니다.

생각에서 한 걸음만 내면으로 물러나, 온갖 정신 활동과 자아상 만들기보다 먼저 있는 자기를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은 숨을 내쉬는 것처럼 쉽고, 자기 무형의 현존에 놀라워하는 마음만큼 단순합니다.

 

Awakening to this aspect of Being happens when awareness spontaneously dis-identifies from the content within awareness and becomes conscious of itself as your self-nature. In other words, awareness is not something that you do, it is that which you essentially are. You can experience this for yourself if you begin by recognizing that everything you think and imagine you are is essentially mental content appearing to and within the intangible field of awareness. The content within awareness—including all the ideas, judgments, and images that make up the false self—comes and goes.

 

앎이 자기 안의 내용은 자기 자신이 아님을 문득 깨닫고,

앎 자체가 당신의 본성임을 알아차릴 때, 존재의 이 측면(앎)으로 깨어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앎은 당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당신 자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자기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무형의 앎의 장(場)에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나는 마음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그렇게 됩니다.

앎 안의 내용- 거짓 자아를 이루는 관념, 이미지 –은 오고 갑니다.

 

Although much of this content persistently reoccurs, none of it is enduring, and none of it is who you are. The point is not to believe this, but to experience it as a living reality and the inherent freedom of the aware aspect of your essential Being.

 

비록 앎의 내용 중 많은 것이 계속 다시 일어나지만,

어느 것도 지속되지 않으며, 어느 것도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현실로서 경험하고,

당신의 본질적 존재의 아는 측면에 본래 내재한 자유로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Let’s put this into practice.

실습해 봅시다.

 

• Begin by resting in whatever experience you are having right now.

Don’t try to change or figure out why you are having the experience you are having.

Leave both your current experience as well as all your thoughts about it alone.

 

지금 무슨 경험을 겪든 그 경험 안에서 편히 쉬십시오.

지금 겪는 경험을 바꾸려 하거나, 이 경험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경험도, 이 경험에 관한 모든 생각도 그대로 놓아둡니다.

 

• Relax into awareness with the same feeling through which you relax your body into bed at night.

 

밤에 침대에 누워 몸을 이완하는 듯한 느낌으로 이완하며 앎으로 들어갑니다.

 

• Notice your thoughts as simply thoughts, your feelings as feelings, the sounds you hear as sounds, and the sights you see (if your eyes are open) as sights.

 

생각을 그저 생각으로, 느낌을 느낌으로, 들리는 소리를 소리로, (눈을 뜨고 있다면)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알아차립니다.

 

• Relax your awareness from focusing on the content of experience and ease into the open and silent space of awareness itself.

Let’s call this the conscious context.

 

앎을 이완하여 경험의 내용에 집중하지 않게 하고,

앎 자체의 열린 침묵의 공간으로 서서히 들어갑니다.

이것은 ‘의식하는 배경’이라고 합시다.

 

• Notice that awareness is witnessing your thoughts and feelings and sights and sounds. Don’t try to understand awareness; notice that your perceptions and experiences are already being witnessed by awareness, not by your idea of being someone who possesses awareness or who is trying to be the witness, but by awareness itself. You don’t need to try to be aware because awareness is always and already present as the conscious context within which all experience happens.

 

앎이 당신의 생각, 느낌, 보이는 모습, 소리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앎을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지각과 경험이 이미 앎에게 보이고 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것을 보는 것은 앎 자체이지, 앎을 소유한 사람, 보는 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라는 관념이 아닙니다.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앎은 그 안에서 모든 경험이 일어나는 ‘의식하는 배경’으로서 늘 이미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 Notice that awareness is not something you can see, touch, or taste. Awareness sees but cannot be seen. Awareness hears but cannot be heard. Awareness observes all the mind’s thoughts and images, but it is not a thought or image.

 

앎은 우리가 보거나 만지거나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십시오.

앎은 보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앎은 듣지만, 들리지 않습니다.

앎은 마음의 모든 생각과 이미지를 보지만, 앎은 생각과 이미지가 아닙니다.

 

• Notice that all your thoughts, ideas, judgments, and images about yourself are arising within and being witnessed by the conscious context called awareness.

 

자기에 관한 당신의 생각, 관념, 판단, 이미지는 앎이라는 ‘의식하는 배경’ 안에서 일어나고 알려짐을 알아차리십시오.

 

This practice helps us to realize that there is something (awareness) that is more fundamental about who and what you are than all your ideas about yourself. Your thoughts about yourself, experiences, and perceptions continually arise and change, come and go, but awareness remains. Don’t try to grasp or understand awareness; notice that it is fundamental to you. Awareness is the conscious context within which the content of experience arises, changes, and passes away. You can never see awareness, but you are always looking from and as awareness.

 

이러한 연습을 하면 자신에 관한 모든 생각보다

자신에 관해 더 근본적인 것인 앎이 있음을 깨닫는데 도움이 됩니다.

자신에 관한 생각, 경험, 지각은 끊임없이 생기고 변하고 오고 가지만,

앎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앎을 파악하거나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앎이 자신에게 본질적임을 알아차리십시오.

앎은 그 안에서 경험의 내용이 생기고, 변하고, 사라지는 ‘의식하는 배경’입니다.

 

The key to awakening as the formless being of awareness is to let go of grasping at it with your mind and relax into the simple, quiet, and open intuitive sense of awareness itself.

 

앎의 형상 없는 존재로서 깨어나는 비결은 마음으로 앎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앎 자체의 단순하고, 고요하고, 열린 직관적 감각으로 이완하여 들어가는 것입니다.

 

ONE

Awareness Is the Conscious Context of Experience

앎은 경험의 의식하는 배경이다.

 

The Direct Way is an exploration of the three aspects of Being—Awareness, Heart, and the Ground of Being—your Being and the Being of all beings. We begin by practicing awakened awareness—awakening from mind, from all thought and created and maintained identities, to the formless aspect of Being by acknowledging the always and already presence of awareness. Awakening to this aspect of Being happens when awareness spontaneously dis-identifies from the content within awareness and becomes conscious of itself, as our own self nature. In other words, awareness is not something that we do, it is that which we are.

 

‘직접적인 길’은 존재의 세 측면인 앎, 가슴, 존재의 바탕을 탐구합니다.

여기서 존재란 당신의 존재와 모든 것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깨어난 앎을 실습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즉, 늘 그리고 이미 있는 앎의 현존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으로부터,

곧 모든 생각과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정체성으로부터 존재의 형상 없는 측면으로 깨어나는 것입니다.

앎이 자기 안의 내용은 자기가 아님을 문득 깨닫고 앎 자체를 알아차릴 때, 앎이 우리의 본성임을 알아차릴 때, 존재의 이 측면으로 깨어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앎은 우리가 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As you rest in whatever experience you are having, don’t try to change or figure out why you are having an experience as you have it; leave both your current experience as well as your thoughts alone.

As you do, pay attention to your thoughts as simply thoughts, your feelings as feelings, the sounds you hear as sounds, and the sights you see (if your eyes are open) as sights.

 

어떤 경험이든 지금 하는 경험 안에 편히 쉬면서, 그런 경험을 바꾸려 하거나 그런 경험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려 하지 마십시오.

일어나는 경험과 생각을 그냥 놓아두십시오.

그리고 생각을 그저 생각으로, 느낌을 느낌으로, 들리는 소리를 소리로, (눈을 뜨고 있다면)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보면서 주의를 둡니다.

 

As you do so, all your thoughts and sensations are being witnessed by awareness. Again, don’t try to analyze or understand awareness; instead, notice that awareness is witnessing all of your perceptions and experiences. Awareness is not something you can see, touch, or taste. Awareness sees but cannot be seen. Awareness hears but cannot be heard. All your thoughts, ideas, judgments, and images about yourself are arising within and being witnessed by awareness.

 

그럴 때 앎이 당신의 모든 생각과 감각을 봅니다.

이때도 앎을 분석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말고, 앎이 당신의 모든 지각과 경험을 본다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앎은 보거나 만지거나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앎은 보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앎은 듣지만,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에 관한 모든 생각, 관념, 판단, 이미지는 앎 안에서 일어나고 앎에게 보입니다.

 

As you practice within the conscious context of experience, you will learn that there is something (awareness) that is more fundamental about who and what you are than any ideas about yourself. Awareness is the only thing that does not come and go even as your thoughts, experiences, and perceptions continually change.

 

경험의 의식하는 배경 안에서 실습할 때, 자신에 관한 생각보다 자신에 관해 더 근본적인 것(앎)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생각, 경험, 지각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앎은 오고 가지 않는 유일한 것입니다.

 

 

 

Awakened Heart: Awakening into the Body and Unity of all Phenomena

깨어난 가슴: 모든 현상의 하나임과 몸으로 깨어남

 

Evoking the Spiritual Heart

영적 가슴 불러 일으키기

 

 

앎에는 가슴이 있습니다.

이 가슴의 특징은 정서적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하나임을 지각하는 직관적 능력이며, 거기에서 한없고 조건 없는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영적 가슴은 감정적 가슴이 아니며, 열리고 닫히는 그런 가슴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정한 곳에 있지 않지만, 감정적 가슴과 같은 신체 부위 흉부에서 공명합니다.

 

앎의 가슴은 항상 열려 있다는 면에서는 앎과 같지만,

그 열린 상태는 가슴으로 충만합니다.

앎의 가슴은 친밀하게 연결되고 사랑하는 앎입니다.

그것은 집착도 요구도 없는 친밀함입니다.

그것은 닫힐 수 없고 열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늘 이미 앎 자체만큼 열려 있고 광대하기 때문입니다.

 

앎의 가슴, 즉 영적 가슴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예 있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그것에 민감해서 보고 그것에 고요한 현존의 주의를 두어 영적 가슴을 서서히 불러일으켜 보십시오.

 

 

앎이 머리 안과 주위에서 몸으로 내려와 흉부에 가슴 부위로 들어가게 합니다.

잠시 감정적 가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감정적 가슴이 그보다 큰 영적 가슴의 공간 안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어떤 감정이든 감정적 가슴에서 있는 그대로 일어나도록 허용합니다.

감정보다 훨씬 미묘한 것에 주의를 둡니다.

내가 가슴이라고 부르는 흉부의 고요함에 주의를 둡니다.

 

가슴에 주의를 둘 때마다 고요한 현존의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영적 가슴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이 미묘하고 고요한 현존을 알아차리고 느낍니다.

이러한 가슴의 현존은 주위를 가슴 쪽으로 돌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가슴의 현존에 머무르면 영적 가슴의 활짝 피어남에 자신을 열게 되지만,

가슴의 활짝 피어남을 강렬하거나 몹시 행복한 느낌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임을 경험하는 가슴의 지각 능력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한계 없는 영적 가슴의 고요한 현존이 앎의 전체 장에 미묘하게 충만함을 느낍니다.

앎의 가슴이 현존함을 경험하면 영적 가슴의 잠재력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앎을 가슴에 둘 때 앎의 느낌을 키우십시오.

앎을 가슴에 둘 때 앎이 뛰는 현존의 질을 감지해 보십시오.

일상생활을 할 때 가슴속에 현존의 느낌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는지 봅니다.

 

자신을 늘 깊이 아끼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영적 가슴은 감정적 가슴보다 훨씬 미묘하고 고요하며 모든 생명과 깊고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지각할 수 있습니다.

앎을 영적 가슴으로 향하게 하려면 앎이 가슴 센터로 내려가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앎이 가슴으로 내려가면 자신을 둘러싼 미묘한 고요와 함께 미묘한 현존감 혹은 생동감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영적 가슴 안에 현존하는 것은 가슴 센터를 채우고 그곳에서 발산되는 따뜻한 햇살을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현존은 온화한 것으로 경험될 때도 있지만, 이따금은 강렬하게 경험될 때도 있습니다.

 

가슴 안과 주위의 고요한 현존에 주의를 둡니다.

아무것도 붙잡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감각이 평온하고 고요해질 때, 앎이 가슴으로 내려가도록 허용합니다.

영적 가슴에 시간과 주위를 드릴 때, 거기에서 발산되는 현존의 미묘한 햇살을 느껴 보십시오.

사랑과 헌신을 겸손히 드리는 행위로서 가슴에 주의를 두십시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가슴의 현존에 앎을 바칠 때,

그렇게 하는 사랑과 헌신과 성실함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받는 것보다 드리는 성실함에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가슴속 미묘한 현존감에 주의를 드리는 태도에 중점을 둡니다.

가슴에 주의를 되돌릴 때마다 곡물을 바치듯이 헌신의 행위로서 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삶에서 가장 귀중한 두 가지인, 시간과 주위를 영적 가슴의 현존에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의미 깊은 큰 선물을 드리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몇 분 뒤 가슴 센터로부터 주위를 둘러보고, 보이는 것을 가슴이 어떻게 지각하는지 알아차리십시오.

 

고요의 눈과 가슴속 현존에 부드러운 빛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십시오.

가슴에 기반한 현존으로부터 볼 때, 경험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차리십시오.

 

영적 가슴은 감정과 반응의 센터인 감정적 가슴의 너머에 있으며 대다수 인간 안에 잠들어 있는 지각센터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감정적 상처를 받은 우리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어렸을 때나 사춘기 초기에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 감정적 가슴을 닦고 영적 가슴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자기 보호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가슴이 다치게 되고 모든 생명과 공유하는 하나임 이라는 지고의 본성을 지각하고 경험하는 타고난 능력과 단절되며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자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주 좋은 소식은 영적 가슴이 감정적 가슴과 다른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적 고통에 대해 순진하지만 잘못된 반응을 하여 영적 가슴을 외면할 수 있지만, 그래도 영적 가슴은 전혀 손상되지 않습니다.

영적 가슴은 다치거나 파괴될 수 없으며 두려움이나 판단 혹은 절망 없이

압도 당하지 않으면서 삶에 불가피한 비극적 측면을 담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가슴은 시공간에 물리적 차원에서 작용하지만

그 근원은 앎의 형상 없는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적 가슴과 달리 영적 가슴에는 경계, 한계, 선호, 혹은 자아 중심적 판단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적 가슴을 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영적 가슴은 절대로 다치지 않으며 한 번도 다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지하여 외면하면 영적 가슴에 빛이 흐려진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참된 존재의 친밀한 측면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가슴은 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그것은 늘 이미 현존합니다.

가슴 센터의 고요하고 미묘한 빛나는 현존으로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것의 첫 번째 깜빡이는 빛은 가슴 속과 주위에 있는 현존의 희미하고 조용한 속삭임으로 일어납니다.

그것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것을 붙잡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통제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말고 그것에 사로잡히려 하지도 마십시오.

단순히 그것에 모든 주의를 두기만 하십시오.

 

영적 가슴이 감각, 시각, 청각, 미각, 촉각과 섞이도록 허용하십시오.

세상을 바라볼 때 그 가슴의 아는 현존에 머무르면서 보십시오.

소리를 들을 때 영적 가슴의 고요함으로부터 소리를 들으십시오.

어떤 것을 맛볼 때 영적 가슴의 천진함으로부터 맛보십시오.

영적 가슴의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감지하십시오.

영적 가슴의 현존이 어떻게 보고, 듣고, 맛보고, 감촉하는 방식에 새로운 수준을 가져오는지 알아차리십시오.

더 친밀해짐을, 모든 생명과 가까운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영적 가슴이 누구를, 무엇을 지각하든, 우리는 그에게서 혹은 그와 함께 전체임, 천진함, 친밀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적 가슴에 고요한 현존 안에 감각들을 쉬게 하여 감각들이 어떻게 점점 더 민감하고 생생해지는지 알아차리십시오.

감각들이 제각기 작용하기보다 전체로서 작용하기 시작하고,

영적 가슴이 각 감각을 통해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며,

온 몸과 마음이 생기 있고 생동감 넘치며 모든 생명과 친밀히 연결될 것입니다

 

 

사랑이 그렇듯이 사랑인 하나임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하고 연결되어 있는 경험입니다.

하나임에는 추상적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 하나임은 당신의 온 몸과 마음에서 경험됩니다.

앎이 머리 안과 주위에서 내려와 흉부 가슴 부위에 머무르게 합니다.

이렇게 하면 더 친밀히 연결된 존재의 경험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가슴에서 시작하여 몸에서 하나임을 느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가슴으로부터 보는 것을 감지해 보십시오.

세상은 물질의 형태로 가득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응축된 에너지, 혹은 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나무들, 벽들, 발 밑의 바닥, 자기 몸을 바라보고,

그것들이 모두 응축된 에너지의 형태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영, 즉 의식이 있고 생기를 주는 존재의 힘이 다양하게 발현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명에 대한 감을 잡아 보십시오.

 

우리는 영적 가슴을 깨우고 하나임이라는 실재를 느끼고 지각하는 그 가슴에 잠재력을 깨우려 하고 있습니다.

잠시 멈추고 가슴에 고요한 마음에서 편히 쉽니다.

하루에 몇 차례 이렇게 합니다.

 

자기 몸과 보이는 모든 것이 형태 없는 에너지, 혹은 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은 신, 부처, 의식의 살아있는 발현입니다.

영적 가슴이 깨어나면 당신은 생명을 그렇게 보고 경험할 것입니다.

상상 속에 세상을 포함하여 세상을 이런 식으로 만날 때 세상을 지각하거나 경험하는 자기의 방식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아차리십시오.

어지러운 환상 속에서 길을 잃지 말고 가슴을 통해 직접 경험하고 지각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앎이 가슴으로부터 세상을 감지하는 것을 느껴 보십시오.

영적 가슴에 고요한 현존 안에 거하는 앎의 텅 빈 눈으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은 형상 없는 것이 발현된 것입니다.

지각할 수 있는 모든 존재는 하나인 존재, 즉 보편적 존재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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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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