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FF FOSTER
THE DEEPEST ACCEPTANCE
Radical Awakening in Ordinary Life
I wish I could show you
When you are lonely or in darkness
The Astonishing Light
Of your own Being.
HAFIZ, from “My Brilliant Image”
Author’s Note
지은이의 말
It seems to me that all our problems, all our suffering and conflicts, both personal and global, stem from one basic problem: our ignorance of who we really are.
We have forgotten our inseparability from life, and so we have started to fear it, and out of that fear we have gone to war with it in various ways.
We have gone to war with our thoughts, our feelings, our emotions, our bodies, with the present moment itself. In our efforts to protect ourselves from pain, from fear, from sadness, from discomfort, from failure, from the parts of life we have been conditioned to believe are bad or negative or dark or dangerous, we have stopped being truly alive.
우리의 모든 문제, 우리의 모든 고통과 갈등은
개인적이든 지구적이든
하나의 근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우리는 자신이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리하여 삶을 두려워하기 시작 했고, 그 두려움 때문에
삶과 수많은 방식으로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감정과 전쟁을 벌이고,
우리의 몸과 전쟁을 벌이고,
지금 이 순간 자체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아픔이나 두려움, 슬픔, 불편함,
실패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고,
우리가 나쁘거나, 부정적이거나, 어둡거나, 위험하다고 믿게 된
삶의 부분들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로 살아 있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The armor we wear to protect ourselves from a full experience of life is called the separate self. But our armor does not really protect us—it just keeps us comfortably numb.
우리의 삶은 온전한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갑옷을 입고 있는데,
이 갑옷은 ‘분리된 자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갑옷이 우리를 실제로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를 편안하지만 무감각한 상태로 있게 할 뿐입니다.
Spiritual awakening—realizing that you are not who you think you are—is the answer to this basic problem of humanity. These days there are many books available on this topic, and it seems that more people than ever are discovering ancient teachings that used to only be available to a select few. But there is a trap here. Spirituality can easily become just another layer in our armor. Rather than facilitating our opening up to life, it can shut us off even more. Spiritual concepts and clichés like “There is no self” or “This is not my body” or “Duality is just an illusion” can simply be new beliefs to cling to, new ways of avoiding life and pushing the world away, which result in more suffering, for us and for those we love.
인류의 이 근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영적 깨어남입니다.
영적 깨어남이란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던 개인은
참된 자기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오랜 영적 가르침을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접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접하고 있으며,
이런 주제에 관한 책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영성(靈性)은 우리가 입고 있는 갑옷 속에 껴입는 또 한 겹의 옷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영성은 우리가 삶에 열리도록 돕는 대신,
오히려 삶과 더 분리게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없다”라거나 “이것은 나의 몸이 아니다”라거나
“이원성은 환상에 불과하다”와 같은 영적 개념과 상투적인 말은 우리가 집착하는 새로운 믿음이 될 수 있으며,
삶을 회피하고 세상을 밀어내는 새로운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개념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안길 수 있습니다.
The spiritual awakening I talk about in this book is not about protecting yourself more; it’s about realizing that who you really are does not need protection, that who you really are is so open and free and loving and deeply accepting that it allows all of life into itself. Life cannot hurt you, because you are life. So the present moment is not an enemy to be feared, but a dear friend to be embraced. Yes, true spirituality does not strengthen your armor against life— it destroys it.
내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영적 깨어남은 당신 자신을 더욱 방어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자기 자신은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참된 자기 자신은 너무나 열려있고 자유롭고 사랑하고 깊이 받아들이므로 삶의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있도록 허용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삶은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이 바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은 두려워해야 할 적이 아니라,
껴안아야 할 소중한 친구입니다.
참된 영성은 삶에 맞서는 당신의 갑옷을 강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파괴합니다.
Spiritual awakening is actually very simple. It is the timeless recognition of who you really are, the consciousness prior to form. But actually living that recognition in day-to-day life, not forgetting or losing it or letting it go to your head—that’s where the real adventure of life begins. And that’s where many people seem to struggle—spiritual seekers and spiritual teachers alike.
영적 깨어남은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곧 모습 이전의 ‘의식’임을 한결같이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실제 그런 앎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 앎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것,
그런 앎이 머리도 가 버리지 않게 하는 것,
삶의 진정한 모험은 그곳에서 시작합니다.
그곳은 또한 많은 사람이 애써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는 곳입니다.
영적 구도자들도, 영적 스승들도.
It’s one thing to know who you really are when life is easy and things are going well for you. It’s another thing to remember this in the heat of the moment, when things fall apart, when life gets messy and your dreams turn to dust. In the midst of physical and emotional pain, addictions, relationship conflicts, and worldly and spiritual failure, often we can feel less awakened and more separate from life, from each other, and from who we really are, than ever. Our happy dreams of our enlightenment can quickly evaporate, and acceptance can seem a million miles away.
삶이 편안하고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는 참된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삶이 엉망진창이 되고 꿈꾸던 일이 무산되어 버릴 때,
그럴 때 느낄 격정의 순간에도 이를 기억하고 있기는 어렵습니다.
신체의 통증이나 고통스러운 감정, 중독, 인간관계에서 겪는 갈등,
그리고 세속적인 실패냐 영적 실패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우리는 흔히 덜 깨어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삶에서, 서로에게서, 참된 자기 자신에게서 이전보다 더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이 깨달았다고 믿었던 행복한 꿈은 금세 증발해 버리고,
받아들임은 백만 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듯 보일 수 있습니다.
We can see the messiness and beauty of day-to-day human existence as something to be avoided, transcended, or even obliterated, or we can see it for what it really is: a secret and constant invitation to wake up now, even if we believe we already woke up yesterday. Life, in its infinite compassion, won’t let us rest on our laurels.
우리는 인간으로 살면서 일상생활 중에 겪는 혼란이나 아름다움을 피하거나 초월해야 하는 것,
심지어 없애 버려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지금 깨어나라는 은밀하고 끊임없는 초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설령 우리가 어제 이미 깨어났다고 믿더라도, 삶은 그 무한한 연민으로 우리가 이미 성취한 것에 안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If my earlier books were descriptions of spiritual awakening, this book addresses far more important questions: How can that awakening be lived dayto-day? How can we accept the present moment even when the present moment seems totally unacceptable to us? Is “How can we accept the present moment?” even the right question? Are we actually separate from the present moment in the first place?
나의 이전 책들이 영적 깨어남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훨씬 더 중요한 질문들을 다룹니다.
어떻게 하면 그 깨어남으로 일상생활을 살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심지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겨질 때도?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올바른 질문이 맞는가? 애초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과 실제로 분리되어 있는가?
I teach one thing and one thing only: a deep and fearless acceptance of whatever comes your way. This is not passive surrender or cold detachment, but an intelligent and creative emergence into the mystery of the moment. This book comes after many years of listening and speaking to thousands of people on the spiritual path—hearing their concerns, answering their challenging questions, meeting them in their pain and grief and daily struggles and fears, and gently pointing them not to a future enlightenment, but to a deep and unconditional acceptance within their present-moment experience, the deep acceptance that they are in their essence.
나는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을 얘기합니다. ‘어떤 일이 닥치든 그 모든 일을 깊이, 두려움 없이 받아들임.’ 이것은 수동적인 내맡김이나 냉담한 초연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신비 속으로 지성적이고 창조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나는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를 듣고, 그들의 까다로운 질문에 답했습니다. 괴로움과 고민, 일상의 힘든 일, 두려움에 시달리는 그들을 만나서 미래의 깨달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경험 가운데에 있는 조건 없는 깊은 받아들임을, 그들의 본성인 깊은 받아들임을 부드럽게 가리켰습니다.
Welcome to ordinary life, dear explorer—the final frontier of spiritual awakening. May you boldly go where no one has gone before!
사랑하는 탐험가 여러분, 평범한 삶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영적 깨어남의 마지막 미개척지인 여기로…
부디 이제껏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곳으로 대담히 가 보시기를!
With love from yourself, Jeff Foster
당신 자신으로부터 사랑으로, 제프 포스트
Part I
AWAKENING TO DEEP ACCEPTANCE
깊은 받아들임으로 깨어나기
The Wholeness of Life
온전한 삶
The real voyage of discovery consists not in seeking
new landscapes, but in having new eyes.
MARCEL PROUST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데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Artists talk about the self falling away when they are absorbed in painting.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데 몰입되어 있을 때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Musicians tell of how, while absorbed in their music, there is only the music, and they, as a separate entity, vanish into it, as if they’ve been absorbed by life. They are not playing the music—they are the music, playing itself.
음악가들은 음악에 몰입되어 있는 동안 어떻게 오직 음악만 있는지, 분리된 존재이던 그들이 마치 삶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 속으로 사라지는지 얘기합니다.
그때는 그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 자신이 음악이었고, 음악이 스스로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Athletes talk about getting into the flow or entering the zone, a place where running or riding or jumping happens effortlessly, and the body functions perfectly even though they no longer experience the body as their own.
운동선수들은 달리기나 타기, 도약이 노력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그들이 몸을 자기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몸이 완벽하게 움직이는 자리나 영역, 흐름으로 들어가는 경험에 관해 얘기합니다.
Actors talk about disappearing into their characters, about losing themselves in a role, about how when they are really acting, there’s nobody there acting. When they are later congratulated on their performance and asked how they managed to achieve it, they have to admit that they really don’t know.
배우들은 자신이 연기하는 배역의 인물 속으로 사라지는, 배역 속에 자기를 잃는 경험을, 그들이 진정으로 연기하고 있을 때 어떻게 연기하는 사람이 없는지를 얘기합니다.
나중에 그들의 연기에 대해 축하를 받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신도 사실은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Or you’re walking through the park, and suddenly there’s no you walking— there is only the wind on your face, the rustle of leaves, the laughing of children, and the barking of dogs. You disappear, and you become everything—or everything disappears, and you become nothing.
Words simply don’t do it justice.
또는 공원을 걷고 있는데, 문득 걷는 ‘당신’이 없습니다.
오로지 얼굴에 와 닿는 바람,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아이들이 웃는 소리, 개들이 짖는 소리만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사라지고, 당신은 모든 것이 됩니다.
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당신은 어떤 것도 아니게 됩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Science has a hard time explaining these experiences—or nonexperiences or whatever you want to call them—for they take us beyond the world of cause and effect, subject and object, observer and observed, absolute and relative, inside and outside, even time and space.
과학은 이런 경험- 또는 비(非)경험, 또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을 아직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은 우리를 원인과 결과, 주체와 객체, 관찰자와 관찰대상, 절대와 상대, 안과 밖, 심지어 시간과 공간의 세계 너머로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They are hard to prove or demonstrate logically, scientifically, philosophically. But to those who experience them, they are more real than anything. Call them awakenings or peak experiences or simply raw encounters with life as it is. It doesn’t really matter what you call them, because in the end, the words always come later.
그런 경험은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그건 경험이 다른 무엇보다 더욱 실제적입니다.
그런 경험을 깨어남, 또는 절정의 경험, 또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삶과 생생한 만남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런 경험을 뭐라고 부르든 별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말이란 언제나 나중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istence is rich with mystery and wonder, and sometimes, without warning, light can shine through the cracks in the separate self. For a few brief moments, there is the cosmic suggestion that life is somehow infinitely more than what it appears to be. The most ordinary of things can easily turn extraordinary, making us wonder if, perhaps, the extraordinary is hidden in the ordinary always, just waiting to be discovered.
존재는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며, 때로는 분리된 자아의 갈라진 틈 사이로 예고 없이 빛이 비칠 수 있습니다. 그때 짧은 순간, 삶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 이상이라는, 무한히 ‘그 이상’이라는 우주적인 통찰이 있습니다. 가장 평범하던 것들이 쉽게 비범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며, 그럴 때 우리는 아마 비범한 것이 평범한 것들 속에 늘 숨겨져 있으면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는 게 아닐까 하고 느끼게 됩니다.
Perhaps all of those things we take for granted are actually divine, sacred, infinitely precious expressions of a wholeness, a Oneness that cannot be expressed in thought or language.
아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은 실제로는 생각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전체임, 하나임의 신성한, 성스러운, 한없이 귀중한 표현일 것입니다.
And perhaps this wholeness is not “out there,” somewhere else or in the future, waiting to be uncovered. Perhaps we don’t need to go to the farthest reaches of the universe to find it. Perhaps it is not in the heavens or hidden away in the deepest depths of our souls. Perhaps wholeness is right here, where we already are—in this world, in this life—and perhaps we have somehow blinded ourselves to it in our obsession with our search for it.
아마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우주의 가장 먼 곳까지 찾아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것들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마 전체임은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이미 있는 곳에- 이 세계에, 이 삶에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느라 바빠서 보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Modern physics is now confirming what spiritual teachings throughout the ages have always been pointing to: everything is interconnected, and nothing exists separately from anything else. We have invented many words over the years to try to point to this cosmic wholeness, words like spirit, nature, Oneness, Advaita, nonduality, consciousness, awareness, aliveness, Being, Source, Existence, Isness, Tao, Buddha Mind, and presence.
현대 물리학은 영적 가르침이 먼 옛날부터 줄곧 가리킨 것 –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아무것도 다른 것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을 이제야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이 우주적인 전체임을 가리키기 위해 많은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영(靈), 자연, 하나임, 아드바이타, 비이원성, 의식, 앎, 살아 있음, 실재, 근원, 존재, 있음, 도(道), 불성, 그리고 현존(現存).
You call it the Tao. I call it Life. She calls it God. He calls it consciousness. Someone else calls it nothing, and someone else calls it everything. Someone else likes to keep silent about it. An artist paints pictures about it. A musician writes music about it. A physicist tries to touch it through complex calculations and mind-bending theories. A poet or philosopher juggles with words to try to reach it. A shaman gives you strange substances so you may see it for yourself. A spiritual teacher points you to it both with language and silence.
당신은 그것을 도(道)라고 부릅니다. 나는 ‘삶’이라 부릅니다.
그녀는 신(神)이라 부릅니다. 그는 의식이라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무(無)라 부르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라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싶어 합니다.
화가는 그것에 대해 그림을 그립니다.
음악가는 그것에 대한 곡을 씁니다.
물리학자는 복잡한 계산고 난해한 이론을 통해 그것과 접촉하려 합니다.
시인이나 철학자는 단어들로 곡예를 부림 그것에 닿으려 애씁니다.
주술사는 당신이 스스로 그것을 보도록 이상한 물질을 줍니다.
영적 스승은 언어와 침묵으로 그것을 동시에 가리킵니다.
The point is, whatever it is will never ultimately be put into words. Thoughts and words fragment wholeness; they break up a unified reality into separate things: bodies, chairs, tables, trees, the sun, the sky, me, you. The world of thought is the world of duality, the world of things.
요컨대,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언어로는 옮길 수 없습니다.
생각과 단어는 전체임을 조각조각 나누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인 실재를 분리된 것들로 쪼개버립니다.
몸들, 의자들, 탁자들, 나무들, 해, 나, 너.
생각의 세계는 이원성의 세계, 사물들의 세계입니다.
But the most important thing to remember is that it’s not about the words. It’s about the wholeness of life itself—and that comes before all words, even the word wholeness. There is a great silence and rest that permeates all of these words, and it is this inner stillness that I speak from. This entire book is a love letter from stillness to itself—from who I really am, to who you really are.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사리키는 것은 삶 자체의 전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는 말 이전에, 심지어 ‘전체임’이라는 단어 이전에 있습니다.
이 모든 말에는 거대한 침묵과 쉼이 스며 있으며, 내 말이 나오는 근원은 이 내면이 고요함입니다. 이 책 전체는 고요함에서 고요함으로- 참된 나에게서 참된 당신으로 –전해지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Being present has nothing to do with time. Why does it often take extreme life situations to bring back an awareness of the magic and mystery of life? Why do we often wait until we’re about to die before discovering a deep gratitude for life as it is? Why do we exhaust ourselves seeking love, acceptance, fame, success, or spiritual enlightenment in the future? Why do we work or meditate ourselves into the grave? Why do we postpone life? Why do we hold back from it? What are we looking for exactly? What are we waiting for? What are we afraid of? Will the life we long for really come in the future? Or is it always closer than that?
현존은 시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삶의 경이로움과 신비함을 알아차리는데 왜 자주 극단적인 삶의 상황이 필요한 걸까요?
우리는 왜 흔히 죽을 때가 닥쳐서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삶에 대한 깊은 감사를 발견하는 걸까요?
우리는 왜 미래의 사랑과 받아들임, 명성, 성공, 또는 영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느라 삶을 소모해 버리는 걸까요?
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일을 하거나 명상을 하는 걸까요?
왜 삶을 미루는 걸까요?
왜 삶을 억제하는 걸까요?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찾으려 하는 걸까요?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요?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미래에 정말로 올까요?
아니면, 그 삶은 언제나 그보다 더 가까이 있는 걸까요?
This book is about the wholeness of life and about the possibility of discovering that wholeness right now—not next year, not tomorrow, not “one day,” but right now, in the midst of present experience, in the midst of whatever is happening, even if what’s happening is discomfort and pain and a longing to be free.
이 책은 삶의 전체임에 관해, 그리고 그 전체임이 ‘바로 지금’ 발견할 가능성에 관해 얘기합니다.
내년이 아니라. 내일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현재 경험의 한가운데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의 한가운데서…
설령 지금 불편함과 아픔을, 자유롭고 싶은 갈망을 경험하고 있더라도..
This book is about finding out who you really are, beyond who you think you are, beyond who you’ve been taught you are, beyond your story about who you are, beyond all your concepts and images of who you are. And it’s about discovering the ways in which, in forgetting who we are, in our attempts to build and hold up what basically amounts to a false, thought-constructed image of ourselves, we go to war with present experience, with each other, with the planet. Our inner conflict becomes outer conflict. When I am at war within myself, I go to war with you. What I reject in myself, I reject in the world. And that rejection leads to suffering of every kind. We addict ourselves to substances or habits, even seemingly good ones, to avoid what we don’t like about ourselves. We battle with painful emotions. We search for another person and a relationship that will complete us. We desperately seek to escape discomfort by becoming enlightened.
이 책은 참된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는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너머의, 자신이 누구라고 교육받은 자기 너머의, 자신이 누구라는 이야기 너머의, 자신이 누구라는 모든 관념과 이미지 너머의 참된 자신이 누구인지를…
또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생각으로 이루어진 거짓된 자기 이미지를 쌓아 올리고 유치하려 애쓰면서, 우리가 현재의 경험과, 서로와, 지구와 전쟁을 벌이는 온갖 방식을 알아차리는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우리 내면의 갈등은 외부의 갈등이 됩니다. 내 안에서 전쟁을 벌일 때,
나는 당신과도 전쟁을 전쟁을 벌입니다. 내 안에서 거부할 때, 나는 세상 안에서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 거부는 갖가지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자기의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회피하기 위해 어떤 물질이나 습관에, 또는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것들에 중독됩니다.
우리는 괴로운 감정들과 싸웁니다. 자기를 완전하게 해 줄 다른 사람을 찾으려 하고 어떤 인간관계를 추구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불편함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Remember, any suffering within you will inevitably get projected out into the world. You and the world are one, as we will discover. Anything you are at war with in yourself, you will eventually go to war with in the world. If there is violence and separation alive in you, you will bring it into your close relationships, into your family, into your workplace, into the world at large. The world is nothing but your projection of it, as spiritual teachers, saints, sages, and mystics throughout the ages have been reminding us.
기억하세요, 당신 안의 모든 고통은 반드시 저 바깥의 세상으로 투사될 것입니다.
당신과 세상은 하나입니다. 당신이 자기 안에서 어떤 것과 전쟁을 벌인다면,
결국 세상에서도 그것과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만일 당신 안에 폭력과 분리가 남아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가까운 인간 관계로, 가족으로, 직장으로, 세상으로 두루 가져올 것입니다. 세상은 당신의 투사일 뿐입니다.
먼 옛날부터 영적 스승들, 성자들, 현자들, 신비가들이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Why Do We Suffer?
우리는 왜 고통을 받는가?
I had built up many ideas about how life should be. I had collected many beliefs about reality, many assumptions about the way things really were, many concepts about what should and shouldn’t happen in the world. I had come to many conclusions about what was right and what was wrong, what was good and what was evil, what was normal and what was abnormal, what was proper and what was improper.
나는 살아오면서 ‘삶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수많은 견해를 쌓았습니다.
현실에 관한 수많은 믿음을, 현실이 실제로 어떠하다는 수많은 억측을, 세상에서 어떤 일은 일어나야 하고, 어떤 일은 일어나야 하고, 어떤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수많은 관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무엇이 적합하고 무엇이 부적합인지에 수많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And I had many images of myself that I had been trying to uphold, many demands regarding how I wanted to be seen and how I wanted to see myself. I wanted to see myself, and to be seen, as successful and attractive and intelligent and kind and good and compassionate and talented. But life kept getting in the way of these demands. Life simply wouldn’t let me be who I wanted to be. Life just didn’t understand me. People just didn’t get me. Nobody would ever understand me! My frustrated expectations of life and my constant judgments of myself brought pain, and I hated the pain and didn’t want to experience it any longer.
나 자신에 관해 갖고 있던 수많은 ‘이미지’를 지키려고 애썼고,
내가 그렇게 보고 싶고 남들도 그렇게 보아 주기를 원하는 나의 모습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삶은 이런 나의 바람을 계속해서 방해하기만 했습니다.
삶은 나의 기대들을 좌절시켰고, 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난했습니다.
그러자 고통을 받았는데, 나는 고통이 싫었고 더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Seeing that nothing outside of ourselves really causes our suffering is the key to incredible freedom. Circumstances can never really cause our suffering; it is always in our response to circumstances that we suffer. We suffer only when we seek, when we try to escape certain aspects of our present experience and, in doing so, separate ourselves from life and go to war with ourselves and with others—sometimes in obvious ways, sometimes in very subtle ways. Our suffering is rooted in our unwillingness to feel what we feel, to experience what we are experiencing right now. Suffering is there in our war with life as it is.
It is there in our failure to see that everything in the moment is always accepted, in the deepest sense.
우리가 고통을 받는 까닭은 언제나 환경에 대한 우리의 반응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은 오직 우리가 추구할 때뿐이고, 오직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일의 어떤 면을 피하려 애쓸 때뿐이며, 그렇게 애쓰고 추구하면서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때론 명백한 방식으로, 때로는 매우 미료한 방식으로- 전쟁을 벌일 때뿐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자신이 느끼는 것을 느끼지 안으려는, 바로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경험하지 안으려는 태도에 원인이 있습니다.
What I’m saying is that if we are to be truly free, we must face this reality with open eyes. We must move away from denial, wishful thinking, and hope, and tell the truth about life as it is.
우리가 정말로 자유롭고 싶다면 눈을 똑바로 뜨고서 이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부정, 소망적 사고, 희망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Acceptance is all about seeing reality, seeing things as they actually are, not as we hope or wish them to be.
받아들임이란 오로지 현실을 보는 것이며,
우리가 바라거나 희망하는 대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Life itself comes before all of these labels; it comes before all our judgments about life. Life cannot be good or bad
삶 자체는 삶에 대한 우리의 모든 판단보다 먼저 옵니다.
삶은 좋은 수도 없고 나쁠 수도 없습니다.
COMPLETING OURSELVES IN THE FUTURE
미래에 완전해지기
We seek wealth, power, love, success, and enlightenment in the future, in the “one day,” because these things symbolize home to us. We think that getting what we want, finding what we are looking for, will take us home. Our cosmic homesickness is the root of everything.
우리는 미래의 ‘언젠가’의 부유함, 힘, 사랑, 성공, 그리고 깨달음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집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고 찾으려는 것을 찾으면 집을 돌아가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집에 대한 그리움이 모든 것의 뿌리입니다.
Sometimes we even get what we want—the new car, the new relationship, the new job, the slim and toned body, the new spiritual experience, the fame, the adulation, the success. And we feel whole and complete for a while. But soon that empty, unfulfilled feeling returns, and the seeking starts up again. It’s as if there is something in us that is perpetually unsatisfied with what is; it always wants more. No matter how much it gets, it wants more. No matter how much it owns, or achieves, or possesses, it wants more. No matter how many experiences it has, no matter how much it adds to itself, it wants more.
때때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새 차, 새로운 인간관계, 새 직장, 날씬하고 탄력 있는 몸매, 새로운 영적 경험, 명성, 사람들의 칭송, 성공…
그러면 우리는 잠시 온전하고 완전하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곧 그 텅빈, 채워지지 않은 느낌이 돌아오고, 다시 추구가 시작됩니다.
마치 ‘지금 있는 것’에 늘 만족하지 못하는 무엇이 우리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 이상’을 원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그 이상을 원합니다.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자신에게 더해도 그 이상을 원합니다.
PRESENT-MOMENT RESISTANCE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저항
The question “What are you seeking in the future?” is identical with the question “What are you running away from right now?”
It is crucial to understand this: our search for something abstract in the future —enlightenment, wealth, power, success, love—is always deeply rooted in present-moment resistance.
“당신이 미래에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은
“당신은 바로 지금 무엇을 피해 달아나고 있나요?”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미래에 어떤 추상적인 것 – 깨달음, 부유함, 힘, 성공, 사랑 – 을 얻으려 추구할 때,
그 추구의 깊은 근원에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저항이 자리합니다.
“Well, what do you mean by the word enlightenment? When you become enlightened, how will your experience be different from the way it is right now?” And often in response they will say something like, “I think that when I become enlightened, my fear will go away. I think my sadness and my pain will disappear. I think enlightenment will take away all the bad things about myself.” You see, nobody really wants to become “enlightened.” They want to escape present feelings of dissatisfaction, sadness, pain, anger, frustration, boredom, or feelings of being unloved, unwanted, and unfulfilled. They simply want to end their suffering.
But instead of facing that suffering head on, right now, and seeing the wholeness within it, they are waiting for a future event or state or experience to come and end it for them.
“당신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슨 뜻인가요? 당신이 깨닫게 돌 때, 당신의 경험은 바로 지금 있는 그대로와 어떻게 다를까요?” 그러면 대개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내가 깨닫게 되면 두려움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슬픔과 아픔도 사라지겠죠. 깨닫게 되면 나의 온갖 안 좋은 것들이 사라질 것 같아요.”
보시다시피, 정말로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불만족, 슬픔, 아픔, 분노, 좌절, 지루함이라는 ‘현재’의 느낌을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그 고통을 바로 지금 똑바로 직면하여 그 안의 전체임을 보는 대신, 자신에게 다가올, 자신을 위해 고통을 끝내줄 미래의 사건이나 상태를 기다립니다.
Because of our conditioning, we don’t see pain, fear, sadness, anger, and all kinds of other feelings as part of the completeness, as part of the wholeness of life.
In other words, we have been taught, trained, even brainwashed, to see some parts of our experience as threats to life itself.
사회에서 받은 교육 때문에 우리는 아픔이나 두려움, 슬픔, 분노뿐 아니라 온갖 감정을 완전함의 일부로, 삶의 전체임의 일부로 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경험의 어떤 일부를 삶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보도록 배우고 훈련 받았으며,
그렇게 세뇌까지 당한 것입니다.
Put very simply, we seek purity, perfection, and completeness outside of this present experience because we see our present experience as broken, as incomplete, as imperfect, as not whole in some way.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이 현재 경험의 ‘바깥’에 있는 순수함, 완벽함, 완전함을 추구합니다.
TRYING TO CONTROL THIS MOMENT
지금 이 순간을 통제하려 하기
Attacking another human being is the perfect way to distract yourself from your own deeply uncomfortable feelings—feelings you simply don’t want to allow in yourself. It is often when we feel most helpless (and cannot see our helplessness or admit to ourselves and others that we feel this way) that we become the most irrational, the most violent, and sometimes end up hurting those we love. Instead of allowing ourselves to feel hurt, we hurt others. And then we blame them;
다른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깊이 불편한 느낌들, 자기 안에 허용하고 싶지 않은 느낌들로,
자기 안에 허용하고 싶지 않은 느낌들로부터 딴 데로 관심을 돌리는 완벽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가장 이성을 잃고 가장 폭력적이며, 간혹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는 우리 자신이 몹시 무력하다고 느끼는 (그리고 우리가 무력감을 직시할 수 없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느낀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할 수 없는) 때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아픈 감정을 경험하도록 허용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고는 그들을 비난합니다.
Much of our suffering comes from deeply unaccepted feelings of helplessness, powerlessness, weakness, insecurity, and uncertainty in the face of this moment.
우리가 겪는 고통의 상당 부분은 지금 이 순간에 직면하여 깊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무력감, 무능함, 나약함,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에서 나옵니다.
Accepting his feeling of helplessness meant he was no longer a victim of life. Helplessness was no longer controlling him, because it was now allowed to appear and disappear in him. And what he discovered was that, in finally allowing himself to feel weak and helpless—totally helpless—he felt less helpless and more in control than ever. Strength is not the opposite of weakness. Real strength lies in the total embrace of weakness.
무력감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가 더는 삶의 희생자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무력감이 그를 통제하지 모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무력감이 그의 내면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자신이 나약하고 무력하다는 느낌, 전적으로 무력하다는 느낌을 느끼도록 허용하자, 그는 어느 때보다 덜 무력하며 화를 더 잘 제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힘은 나약함의 반대가 아닙니다. 진정한 힘은 나약함의 전적인 포용 속에 있습니다.
The Ocean of Acceptance
받아들임이라는 바다.
There is no greater mystery than this, that we keep
seeking reality though in fact we are reality.
RAMANA MAHARSHI
우리는 사실 실재임에도 불구하고
실재를 추구합니다.
이보다 더 큰 미스터리는 없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Now, from the perspective of what you ar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ocean, although the waves are all different in appearance, they are the same in essence. They are all water. And so, using this metaphor, you could say the ocean knows that all the waves are simply part of itself.
Every thought, every feeling, every sensation that appears in you is simply the ocean dancing. From the strong, violent waves to the soft, gentle waves—they are all water.
There is, therefore, a deep okayness with all the waves, a peace beyond understanding, which comes from recognizing their basic inseparability from the ocean.
참된 당신의 관점에서 보면, 바다의 관점에서 보면, 물결들은 저마다 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같습니다. 물결은 모두 물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쓸 때, 바다는 모든 물결이 자기의 일부임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삶은 언제나 단순히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물결들의 춤이며,
모두가 참된 당신인 드넓은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WAVE MANAGEMENT
물결 관리
We want to control the ocean by managing the waves, so the waves that appear are only those we want to appear. All human suffering is a variation on this theme—trying to control the waves, trying to control our present-moment experience so it conforms to our ideas and concepts of how it should be.
우리는 물결들을 관리하여, 오로지 우리가 원하는 물결만 나타나도록 바다를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물결들이 어떠해야 한다는 우리의 견해와 관념에 들어맞도록 물결들을 통제하려는 시도,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을 통제하려는 시도..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이 주제의 변주곡입니다.
Yes, often we don’t realize we are seeking until we experience loss. Loss can be a terrible thing, or it can be a real opportunity to see that, to be complete, you never needed what you thought you needed.
상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자신이 무엇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상실은 가혹한 일 일수도 있지만, 당신이 완전해지는데 필요했던 것이 실제로는 전혀 필요하기 않았음을 볼 진정한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What do you think you need to be complete?
What do you fear losing?
What, if you lost it, would make you ncomplete?
당신이 완전해지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무엇을 잃으면 당신이 불완전해질까요?
True freedom does not depend on any external source.
True freedom is the freedom from dependency on outside sources to complete you.
참된 자유는 외부의 어떤 원천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완전해지기 위해 바깥의 원천에 의지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THE TRUE MEANING OF ACCEPTANCE
받아들임의 참된 뜻
Actually, it’s not a question of trying to achieve this deepest acceptance; it’s a question of recognizing it, seeing it, noticing it in every single experience.
깊은 받아들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낱낱의 경험에서 그것을 인식하고, 보고, 알아차리는 문제입니다.
Accepting done with any kind of hope, motive, or expectation is not real acceptance—it is rejection in disguise.
어떤 희망이나 동기, 기대를 품고서 하는 받아들임은 참된 받아들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장된 거부입니다.
All waves are accepted by the ocean, and if what’s happening right now is nonacceptance of pain, then that is accepted too.
The pain is okay, and your dislike of pain, your wanting to be free from it, is okay.
The seeker is accepted even in their failure to accept.
만일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이 통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라면, 그 역시 받아들입니다.
통증도 받아들이고, 통증을 싫어하는 마음도 통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도 받아들입니다. 받아 들임에 실패하는 추구자도 받아들입니다.
An Exploration of
Present-Moment Awareness
지금 이 순간의 알아차림
The spiritual teacher Nisargadatta Maharaj made this beautiful statement:
“Wisdom says I am nothing. Love says I am everything. Between the two my life flows.”
영적 스승인 나사르가디타 마하라지는 이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지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내가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둘 사이로 내 삶이 흐른다.”
You are not a me or a you. What you are is the vast open space in which everything happens, and the recognition of that brings clarity and wisdom. But clarity and wisdom are not complete without their reflection: love. And love comes from the recognition that, as open space, as the ocean, what you are unconditionally and deeply accepts all the waves that appear—all the sights and sounds and smells and sensations that are appearing now. Everything is inseparable from the
nothing that you are. In your eyes, everything is beloved.
The recognition of wisdom is truly incomplete without the recognition of love.
당신은 한 명의 내가 아니고 한 명의 당신이 아닙니다.
참된 당신은 활짝 열린 드넓은 공간이며, 그 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맑음과 지혜가 옵니다. 하지만 맑음과 지혜는 그들의 반영인 사랑 없이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열린 공간이며 바다인 참된 당신이 지금 나타나는 모든 물결- 지금 나타나는 모든 모습과 소리와 냄새와 감각 –을 조건 없이 깊이 ‘받아 들인다’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서 나옵니다.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인 ‘아무것도 아닌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눈 안에서는 모든 것이 사랑 받습니다.
지혜를 알아도 사랑을 알지 못하면 그 지혜는 진실로 불완전합니다.
“IT’S ALL IN YOUR MIND”
그 모든 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
There’s an idea common in spiritual teachings and espoused by some scientists and philosophers, that the world exists only in our minds or in our brains—that the world is merely our imagination or even worse, that it is just a mistake of
perception. But is this ever part of your direct experience of life? Do you experience the world as inside something else, something called a mind? Where exactly is this mind that the world is supposed to be in? And whose mind is it?
Mine? What is “mine” in direct experience?
영적 가르침에서 흔히 보이고 일부 과학자와 철학자도 지지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세계는 오직 우리의 마음속이나 두뇌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세계는 우리의 상상에 불과하다고, 또는 심지어 지각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것을 삶의 일부로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있나요?
세계가 그 안에 있다고 하는 이 개인의 마음은 정확히 어디에 있나요?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마음인가요? 나의 것인가요?
직접 경험하는 것 가운데 ‘나의 것’은 무엇인가요?
All I ever find, when I look, is present experience. I do not find past or future, I find now—and if I do find past and future, they appear as memories and ideas appearing now. It’s all now.
내가 바라볼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의 경험뿐입니다.
나는 과거나 미래를 발견하지 못하며, 오로지 ‘지금’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과거와 미래를 발견한다면, 그것들은 지금 나타나는 기억과 상상으로 나타납니다. 늘 지금 뿐입니다.
Experience has no location; it’s not located in the head or in the brain. It is everywhere, just as the ocean is present in all of its waves. It is the mug of tea I’m drinking. It is the sky and the stars. It is the leaves crunching beneath my
feet as I walk to the post office.
The world is not “out there,” nor is it “in my mind.”
It is intimate with what I am. It follows me everywhere.
I cannot shake it off. I don’t enter and leave the world; the world is always right here. I don’t move through the world; it moves with me. And there is no me separate from it.
마치 바다가 그 모든 물결 속에 있듯이 경험은 모든 것에 있습니다.
경험은 지금 내가 마시는 차 한잔입니다. 하늘과 별들입니다.
내가 우체국으로 걸어갈 때 발에 밟히며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입니다.
세계는 ‘저 바깥’에 있지 않으며, ‘내 마음 속’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참된 나 자신과 친밀합니다.
그것은 어디를 가든 언제나 나를 따릅니다.
나는 그것을 떨쳐 낼 수 없습니다.
나는 세계로 들어가지 않으며 세계를 떠나지도 않습니다.
세계는 언제나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세계 속에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나와 함께 움직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분리된 나는 없습니다.
THE STORY OF THE WORLD
세상에 관한 이야기
You can experience something in your world—a car, a tree, pain, frustration, a cheese sandwich, the sun, a spoon—only if on some level you tell yourself what you are experiencing. In order to experience anything, you must have a thought
story about what that thing is. Otherwise, you have no way of knowing what you are experiencing. Without the story, you really have no way of knowing what you are looking at. Thought labels everything that appears. How do you know
you are looking at the sun unless thought tells you it is the sun?
당신의 세계에서 어떤 것- 자동차, 나무, 아픔, 좌절, 치즈 샌드위치, 해, 숟가락 –을 경험하려면, 어느 수주에서는 당신이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것을 경험하려면 반드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하나의 ‘생각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경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생각은 나타나는 모든 것에 꼬리표를 붙입니다. 해를 바라볼 때 그것이 해라고 생각이 말해주지 않으면, 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Now, some people have taken this message too far.
They say that without thought, there is nothing.
This is a misconception because “nothing” is just
another thought—the opposite of something.
어떤 사람들이 이런 메시지를 과도하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생각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음은 어떤 것의 반대 개념으로
또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In order to experience your mother, father, sister, or brother, on some level, you must tell yourself (or remind yourself) who they are. Without your story about who they are, you have no way of knowing who they are, do you? Without
your story, you meet them, quite literally, for the very first time. Without the story, there is only total intimacy. Beyond the story, there is love. Love means “not two.”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 자매, 형제를 경험하려면, 어느 수순에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자기에게 말해(또는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누구라고 말해 주는 ‘자기의 이야기’가 없다면, 당신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면, 오로지 전적인 친밀함만이 있습니다. 이야기 너머에 사랑이 있습니다.
However, we forget that we are experiencing our own stories about the world —our own thoughts, our own labels, our own interpretations, our own memories, our own prejudices, our own fears, our own conditioning, our own dreams.
And we fall into the belief that there is actually a separate world out there, with separate objects and people, and that we are experiencing this world objectively and reporting back on it. We forget that we are experiencing a projection of our own dream, and we live as if we are separate from—and slaves to and victims of —a world “out there.”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생각, 꼬리표, 해석, 기억, 편견, 두려움, 배운 것, 꿈 –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그리고 저 바깥에 실제로 하나의 분리된 세계, 분리된 대상과 사람이 있다는 믿음, 자신이 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믿음에 빠져듭니다.
자신이 꾸는 꿈의 투사를 경험하고 있음을 잊고서, 우리가 마치 ‘저기 바깥’에 있는 세계와 분리된 것처럼, 그리고 마치 그 세계의 노예와 희생자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THE STORY OF MYSELF
나에 관한 이야기
Not only do you not have an inside and an outside, but you also never actually experience yourself directly as a person. (Try telling this to a psychiatrist!) All you ever find are thoughts appearing, sounds appearing, feelings appearing in
what you are. And then thought says, “These are my thoughts, my feelings, my emotions. Life is happening to me.” That’s where the story of the person begins:
in identification with the forms that pass through awareness, identification with thoughts and feelings, identification with the waves that appear and disappear in the ocean that is you.
당신은 안도 없고 바깥도 없을 뿐 아니라, 자기를 한 명의 사람으로 직접 실제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당신이 언제나 발견하는 것은 오로지 참된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생각, 소리, 느낌뿐입니다.
그 뒤 생각이 말합니다. “이것들은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감정이야, 삶은 언제나 나라는 개인에게 일어나고 있어.” 이 지점에서, 즉 알아차림(앎)을 거쳐 지나가는 모습을, 생각과 느낌을, 참된 자기인 바다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물결은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데에는 개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Your physical appearance has changed totally; in fact, there is not a single cell in your body that remains from that me. Your face, your voice, your hair— everything has changed.
But you still somehow still feel like you, in a way that you can’t explain.
There is a certain sense of being here that hasn’t changed. The sense of “I am” has remained constant. The ocean has remained; it’s just the waves that have moved. Millions of thoughts have come and gone. All kinds of feelings have
appeared and disappeared. But this basic feeling of Being has remained.
어릴 때 나와 지금의 나는 생각, 목소리, 키, 꿈, 세포 등등이 다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왠지 모르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낍니다.
여기에는 바뀌지 않은 어떤 ‘여기 있음’의 느낌이 있습니다.
‘내가 있다’라는 느낌은 늘 변함없이 남아 있습니다.
바다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물결들만이 움직였을 뿐입니다.
수 없이 많은 생각이 왔다 갔습니다.
온갖 느낌이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존재’의 느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You already know who you really are. You are already completely you, no matter what happens. This
simple recognition is at the heart of what this book is all about.
당신은 당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당신은 이미 완전한 당신입니다.
이 단순한 알아차림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THE DIFFERENCE BETWEEN FEELING AND BEING
느낌과 존재의 차이
As the open space in which all waves appear, you cannot actually be defined by any of the waves that appear. Anger, fear, sadness, boredom, joy—these waves
simply appear and disappear in what you are.
참된 당신은 모든 물결이 나타나는 열린 공간이며, 그 안에서 나타나는 어떤 물결도 당신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화, 두려움, 슬픔, 지루함, 기쁨…. 이런 물결들은 단지 참된 당신 안에서 나타나고 사라질 뿐입니다.
You are the movie screen that no movie can ever stick to.
Anger can come and go in what you are, but there is no angry person. There is fear, but no fearful person. There is sadness, but no sad person anywhere to be found.
You are not a limited person—you are unlimited and unbounded capacity for all of life.
당신은 어떤 영화도 절대로 들러붙을 수 없는 스크린과도 같습니다.
화는 참된 당신 안에서 오고 갈 수 있지만 화가 난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움은 있지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슬픔은 있지만, 슬퍼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한 명이 제한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모든 삶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하고 매이지 않은 능력입니다.
To understand what it means to be the capacity for every wave,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difference between feeling something and being something.
모든 물결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무엇을 느끼는 것과 실제로 무엇인 것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You are the space that holds all of humanity. You allow the entire river of human consciousness to flow through
you. You are the nothing that holds everything as it flows through.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경험하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공간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이 통과하여 흘러갈 때 ‘그 모든 것’을 수용하는 ‘어떤 것도 아닌 것’ 입니다.
Much of our suffering rests on the assumption that if we feel something for too long or too intensely, or at all, we will become it.
우리가 겪는 괴로움의 상당 부분은 어떤 억측에 바탕을 둡니다.
즉, 만일 어떤 느낌을 너무 오래 또는 너무 강렬하게 느끼면,
우리는 그것이 되어 버릴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Why can we not control the waves? Why do our unwanted waves appear?
Because in the world of duality, the opposites must appear together. This truth is very important to understand too.
Our experience is in perfect balance. If there is beautiful, there must be ugly. If there is success, there must be failure.
If there is enlightened, there must be unenlightened.
If there is loved, there must be unloved. This is the way things are, and it’s not a problem until we go to war
with the way things are, until we go against the balance of life.
우리는 왜 물결을 통제할 수 없는 걸까요?
우리가 원치 않는 물결들은 왜 나타나는 걸까요?
왜냐하면 이원성의 세계에서는 반대되는 짝들이 반드시 함께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은 완벽한 균형 상태에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으면 추함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공이 있으면 반드시 실패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 방식은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삶의 자연스러운 방식과 전쟁을 벌이지만 않으면,
삶의 균형에 맞서지만 안으면…
In reality, feelings have no opposite. Energy in the body has no opposite. Life itself has no opposite.
Does the sound of a bird singing have an opposite? In this moment, listening to the bird singing, is there such thing as an opposite? Thought might say, “The opposite of the bird singing is the bird not singing,” but that is just another
thought, another image, appearing right now. Does the actual tweet-tweet of the bird—listen to it now—have an opposite, in reality?
Does this moment have an opposite? Does the presence of life here and now have an opposite? Does anything actually oppose it?
Does a sensation have an opposite? Pinch yourself now. Bring awareness to the intense sensations that result. Can you find an opposite to these sensations?
Yes, thought would say, “The opposite of this pain is the absence of this pain,” but again, that’s just another thought appearing now.
In reality, does present sensation have an opposite that you can actually find in present experience?
Is an ugly feeling the opposite of a beautiful feeling? Or are they two very different experiences, with different sensations, different tastes? Is a happy feeling the opposite of a sad feeling? Thought would say they are opposites, but
outside of thought, can you find an opposite?
그렇지만 실상 느낌들은 반대되는 짝이 없습니다.
몸 속의 에너지는 반대되는 짝이 없습니다.
삶 자체는 반대되는 짝이 없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반대가 있나요?
어떤 감각에 반대가 있나요?
아픔의 반대는 아픔의 부재야 하지만 그 여기 지금 나타나는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지금 느끼는 감각에 반대되는 것을 당신의 현재 경험에서 실제로 발견할 수 있나요?
행복한 느낌이 슬픈 느낌의 반대인가요?
생각은 그 둘이 반대라고 말하겠지만, 생각의 바깥에서도 반대를 발견할 수 있나요?
In reality, there is no such thing as an opposite of a feeling or emotion. Every feeling and emotion is a complete experience in itself.
Experience itself has no opposite.
실재로는 어떤 느낌이나 감정과 반대인 것은 없습니다.
모든 느낌과 감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경험입니다.
경험 자체는 아무 반대가 없습니다.
THERE IS NO SUCH THING AS
A NEGATIVE THOUGHT
부정적인 생각이란 없다.
All thoughts are allowed
to come and go in what you are. You can project any movie onto a movie screen —a romantic comedy; a war epic; a horror flick; a “positive,” happy movie or an upsetting, “negative” movie—and the screen remains untouched. The screen cannot be damaged by any of the movies that appear on it. You are like this movie screen—it cannot be hurt, contaminated, corrupted, or broken by any thought, however “negative.” Any and all thoughts are allowed on the screen of awareness. You are not the thinker; the thoughts simply appear.
모든 생각은 참된 우리 자신 안에서 오고 가도록 허용됩니다.
우리는 영화 스크린에 어떤 영화든 – 로맨틱 코미디 영화든,
전쟁영화든, 공포영화든, ‘긍정적’이고 행복한 영화든,
불쾌하고 ‘부정적’인 영화든 – 투사할 수 있지만,
스크린은 그 어떤 것에도 닿지 않은 채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자가 아닙니다. 생각들이 그저 나타날 뿐입니다.
We are afraid that thinking about something will lead to it becoming real, but as I have said, this is superstition.
The truth is, the more I simply allow a thought to appear, the less likely it is that I will end up acting it out.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면 그 일이 실현될까 봐 두려워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그건 미신입니다.
진실은 어떤 생각이 나타나도록 더 많이 허용할수록 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질 가능성은 더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Again, lashing out is a way to get relief and release from “dangerous” thoughts.
The irony is, the real danger is in the lashing out to escape the thoughts—not in the thoughts themselves.
The thoughts are innocent; it’s in our judgment and
rejection of thoughts that the trouble begins.
맹렬한 분노는 ‘위험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놓여나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위험은 그런 생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맹렬히 분노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생각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괴로움이 시작되는 까닭은 그런 생각들을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We are afraid to allow the most “negative” thoughts,
because we are afraid of what they say about us, and we somehow imagine that allowing them to be there, in the space of who we are, will mean they will take us over.
In fact, it’s the other way around—when we reject thoughts, try to escape them, and punish ourselves for thinking them, they tend to grow and grow and grow in size and in importance. The seeking, the desperation to escape,
becomes so intense that even the most seemingly peaceful person can end up becoming violent.
우리는 두려워서 가장 부정적인 생각들을 허용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거부할 때, 그런 생각을 벗어나려 할 때,
그런 생각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처벌할 때, 대체로 그런 생각은 점점 더 켜지고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벗어나려는 욕구와 추구가 몹시 강렬해지면, 심지어 가장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조차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It’s very strange, but in the total allowing of violent thoughts, violence ends.
참 신기하게도, 폭력적인 생각을 온전히 허용할 때 폭력이 끝납니다.
Positive thinking has become quite a craze in recent years. But this tactic ultimately doesn’t work, because the opposites always arise together. Most often, when we think we are thinking positively, we are really just covering up
negative with positive. The negative is still there, rumbling underneath, ready to spoil all our fun when we least expect it!
You could say that in seeking the positive, we actually create the negative.
They cannot exist without each other. Positive thinking actually creates negative thinking.
요즘 긍정적인 생각이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결국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반대되는 생각이 언제나 함께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덮을 뿐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추구할 때 실제로는 부정적인 생각이 창조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Remember, though, that what we are cannot be attacked—only an image can. So any time you experience a thought as being negative, any time you feel personally attacked, it is a sign that you are defending an image of yourself.
참된 우리 자신은 공격받을 수 없습니다.
공격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미지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부정적인 것으로 경험하거나, 개인적으로 공격받는다고 느낄 때는 자기의 어떤 이미지를 방어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If you are honest you can find everything in yourself—and then thought cannot be your enemy.
Every thought you call “negative” is actually a dear friend, trying to show you the false image of yourself that you are still defending.
우리가 정직하다면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그럴 때 생각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여기는 모든 생각은 실제로 소중한 친구입니다.
So the thought “I am ugly” is simply an invitation to deeply allow feelings of ugliness. The thought “I am a failure” invites us to deeply allow feelings of failure in the moment.
그래서 “나는 못생겼어”라는 생각은 못생겼다는 느낌을 깊이 허용해 보도록 부르는 초대장입니다.
“나는 실패자야”라는 생각은 우리가 그 순간 실패자라는 느낌을 깊이 허용하도록 초대합니다.
Yes, even a spiritual identity such as “I have no identity” or “I am nobody” can become yet another identity, another trap, another image to hold up, another story to defend. If you hold up an image of yourself as nobody, you’ll secretly
go to war with anyone who doesn’t buy into that image.
심지어 “나은 어떤 정체성도 없다”라거나 “나는 아무도 아니다” 라는 영적 정체성조차 또 하나의 정체성, 또 하나의 함정, 또 하나의 지키고 싶은 이미지, 또 하나의 방어하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아무도 아니라는 이미지를 지키려 한다면,
그 이미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 마음속으로 전쟁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All suffering, all conflict, contains within it an invitation to cease to identify yourself as an image and to discover the deepest acceptance in present experience.
모든 고통, 모든 갈등에는 자신을 어떤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짓을 그치고, 지금 이 순간의 경험 속에 있는 가장 깊은 받아들임을 발견하도록 부르는 초대장이 담겨있습니다.
Deep acceptance is not something you achieve—it’s what you are in your essence.
깊은 받아들임은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질입니다.
We run away from the negative and try to reach the positive, and this attempt to escape life we call suffering.
Suffering is always an invitation to discover, in the moment,
what we are not deeply accepting and to see that what we are not accepting is already accepted.
우리는 부정적인 것을 피해 달아나고 긍정적인 것에 도달하려 애쓰는데, 삶을 피하려는 이 시도가 바로 고통입니다.
고통은 언제나 우리가 지금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부르는 초대장입니다.
You cannot find yourself in the past or future.
The only place where you can find yourself is
in the Now. To be a seeker implies that you
need the future. If this is what you believe, it
becomes true for you: you will need time until
you realize that you don’t need time to be
who you are.
ECKHART TOLLE
“과거나 미래에서는 당신 자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지금’입니다.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믿으면 당신에게는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시간이 필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으로 있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까지”
- 에크하르트 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