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XTRAORDINARY ABSENCE
경이로운 부재(不在)
JEFF FOSTER
제프 포스터
If you could get rid of yourself just once,
The secret of secrets would open to you.
The face of the Unknown, hidden beyond the universe,
Would appear on the mirror of your perception.
- Rumi
단 한 번이라도 그대 자신을 없앨 수 있다면,
비밀 중의 비밀이 그대에게 열리리라.
삼라만상 너머에 숨겨진, 알 수 없는 분의 얼굴이
그대 지각의 거울 위에 드러나리라.
-루미
Love says “I am everything”.
Wisdom says “I am nothing”.
Between the two, my life flows.
- Nisargadatta Maharaj
사랑은 ‘나는 모든 것이다.’라도 말합니다.
지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도 말합니다.
그 둘 사이로 내 삶이 흐릅니다.
-마하라지
A New Beginning
새로운 시작
This book is a love letter from Silence to Silence.
이 책은 침묵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이다.
The words emerge from Silence and return to it.
말은 침묵에서 흘러나와 침묵으로 돌아간다.
Words are merely ripples on the surface of the vast Ocean of Being.
말은 존재라는 단지 거대한 대양의 표면 위에서 일어나는 잔물결일 뿐이다.
They dance and play and sing their song, and then dive back into that infinite expanse of aliveness.
말은 춤추고, 뛰어 놀며, 노래하다가
한없이 무한한 생명력으로 다시 들어간다.
All words can do is point. They are pointers. Signposts.
They cannot touch Life, they cannot capture it, but perhaps, just perhaps, they can point to it.
Perhaps, just perhaps, they can communicate something of the taste of it, something of the fragrance of it.
모든 말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르키는 것이다.
그 말들은 지시봉, 이정표이다.
말은 삶에 닿을 수 없고, 삶을 담아 낼 수 없다.
하지만, 아마도, 말들은 삶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마도, 말들은 삶의 맛, 삶의 향기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These words in this book are pointing to something very simple.
이 글의 말들은 아주 단순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
To Life as it unfolds.
To the simple and obvious present appearance of everything.
지금 펼쳐지는 삶을 위하여.
모든 것의 단순하고 명백한 현재 모습을.
To present sights, sounds and smells.
To the aliveness that is behind everything,
that fuels everything,
that transcends everything, that is everything.
눈앞에 드러난 모습들, 들리는 소리들, 냄새들,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살아있는 것,
모든 것의 에너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And beyond even that:
그리고 그 너머
To the absence of a separate, solid person.
To a vast openness which holds everything and is not
separate from everything.
To the extraordinary absence at the heart of life which
finally reveals itself as a perfect presence.
분리되거나 고정된 개인이 없다는 것.
모든 것을 수용하고 모든 것과 분리되지 않는 광대한 개방성으로,
삶의 핵심에 있는 비범한 부재로 인해
결국 완벽한 존재로 드러난다.
The seeming paradox at the heart of creation:
창조의 핵심에 있는 역설처럼 보이는 것
Absence is presence.
부재(不在)가 현존(現存)이다.
Emptiness is form.
공즉시색(空卽是色)
Awareness is not separate from its content.
알아차림은 그것의 내용물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And when absence and presence meet each other and implode,
when emptiness and form become each other and disappear,
when the one who sees collapses into what is seen,
when subject and object become mad, mad lovers and
vanish into thin air,
what remains?
부재와 현존이 만나 합쳐질 때,
비어 있음이 형상이 되고, 형상이 비어 있음이 되어 사라질 때,
보는 자가 보이는 대상 속으로 사라질 때,
주체와 객체가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무엇이 남아 있을까?
When all the concepts in the world
are seen to be just concepts,
when thought falls back into its natural rhythm,
when the futile seeking of the ‘monkey mind’ comes to
rest at last,
what is there?
세상의 모든 관념이 단지 관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때,
생각이 자기의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돌아갈 때,
‘원숭이 같은 마음’이 마침내 무익한 추구를 멈출 때,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Beyond awakening, beyond enlightenment, beyond the
real and the unreal,
beyond existence and non-existence, beyond what is and
what is not,
beyond self and no-self, beyond duality and nonduality,
beyond life and death,
beyond all beyonds, what shines?
깨어남의 너머, 깨달음의 너머, 실재와 비실재의 너머에,
존재와 비존재의 너머, 존재와 비존재의 너머,
이원성과 비이원성의 너머, 삶과 죽음의 너머,
모든 너머들의 너머에, 무엇이 밝게 빛나고 있는가?
What gave life to you, what brought you out of itself,
aeons ago, so that it could know itself? So that it could
touch, taste, feel, see itself?
무엇이 당신에게 생명을 주었고,
무엇이 당신을 그런 형상으로 나오게 했습니까?
그리하여 자신을 알 수 있도록,
만지고, 맛보고, 느끼고, 볼 수 있도록?
What holds you, loves you, embraces you, always, the
way a mother embraces her newborn baby?
엄마가 갓난아기를 품에 안듯이 그대를 항상 안고 있고,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를 품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What has always been calling you back to itself, right
from the very beginning?
무엇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처음부터 항상 그대를 부르고 있는가?
This.
이것
Only this.
오직 이것
Always this.
언제나 이것
Forever this.
영원히 이것
I respectfully ask that you forget everything you know,
everything you’ve been taught, everything you’ve ever
read about spiritual awakening, nonduality, Advaita,
Oneness, and enlightenment, and consider a new possibility:
the possibility of liberation, right here in the midst
of this seemingly ordinary life. The possibility of absolute
freedom, right where you are.
영적인 깨어남, 비이원성, 아드바이타, 하나임,
그리고 깨달음에 대해 그대가 지금까지 읽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부디 새로운 가능성을 한번 고려해 보기를…
평범해 보이는 이 삶의 가운데에서, 바로 여기에서 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절대 자유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And now, let’s begin again.
이제, 다시 시작하자.
The Wave and the Ocean
파도와 바다
And, for no reason,
I start skipping like a child.
And, for no reason, I turn into a leaf
That is carried so high
I kiss the sun’s mouth
And dissolve.
- Hafiz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나는 아이처럼 줄넘기를 하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나는 나뭇잎이 되어
높이높이 솟아올라
태양의 입술에 입 맞추고는
녹아 없어지네’
- 하피즈
Out Beyond Ideas
생각 너머로
I am not a teacher. I don’t have anything that you don’t.
I am not special in any way. I mean that.
나는 스승이 아닙니다. 당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나 역시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조금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If we had to give a name to what this is,
we could call it a sharing.
A sharing, in friendship and openness, of something that’s already known, something that’s already intimately known.
Really, I don’t need to tell you a single thing about this.
만약 이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눔’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 이미 친숙하게 알도 있는 어떤 것을 친구로서 마음을 열고 함께 나누는 것,
사실은 이것에 대해 단 한마디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You’ve always known this. I’m just here to remind you.
당신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단지 상기시켜드릴 뿐입니다.
Sometimes people talk about a recognition or a resonance that can happen when you read or listen to words that emanate from Clarity. This resonance is completely beyond the thinking mind, beyond the intellect, beyond our understanding. It is this resonance that goes right to the heart of what is being communicated in this book.
맑은 본성에서 나오는 말을 듣거나 읽는 동안
알아차림이나 공명이 일어날 때가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공명은 전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의 너머에서,
우리의 이해 너머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공명을 통해 우리는 이 책에서 얘기되는 것의 핵심에 곧장 들어갈 수 있습니다.
In that resonance there is always the possibility of something else shining through. That’s really what all these words are trying to point to: an illumination that’s beyond understanding.
A recognition that’s beyond thought.
An opening up into something more extraordinary – and more ordinary – than the mind could ever hope to grasp.
그러한 공명 속에는 언제든 다른 무엇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해를 넘어선 깨침, 생각을 넘어선 알아차림, 너무 비범하여 ㅡ그리고 너무 평범하여 –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무엇 속으로 열리는 것, 이 모든 말이 정말로 가리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 * *
When we talk about nonduality we often have to resort to using metaphors and paradoxes, because we’re trying to point to something that is living and whole using words that fragment and divide.
It’s like trying to catch water in a fishing net. Impossible.
비이원성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비유와 역설을 자주 사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성질상 부분으로 쪼개고 나누게 되는데 이 언어를 이용하여, 살아 있으면서 나뉘지 않은 전체인 어떤 것을 가리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 잡는 그물을 가지고 물을 잡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능합니다.
This book is full of such paradoxes and contradictions.
And so the mind that’s trying to understand all of these words intellectually is going to get very confused.
The mind so desperately wants to understand, because if it can understand it can possess and if it can possess it can control.
It wants to be the master. It has spent the past few million years being the master, and it’s not going to give up easily!
이 책은 그러한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말을 지적으로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은 몹시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마음은 지독히도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이해할 수 있다면 소유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면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주인으로 있기를 원합니다.
마음은 과거 수백만 년 동안 주인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Don’t try to understand anything in this book, but be open to the possibility that an illumination can occur. Just let the words wash over you. Sunbathe in their presence.
If you find some of the concepts in this book challenging, that’s because they are. They are going to challenge every single idea you have about spirituality and life and the world and yourself.
You may even find some of the words quite threatening to your sense of self, to your ideas about who you are, to your notions of truth.
이 책의 글을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다만 깨침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스스로를 열어 두기만 하십시오.
말들이 스쳐 가도록 놓아두십시오. 일광욕을 하듯이 말 앞에 가만히 있어보십시오. 만약 이 책의 어떤 말들이 도전적으로 느낀다면, 그 말들이 도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들은 당신이 영성과 삶,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관념에 도전할 것입니다.
어떤 말들은 당신의 자아감과 정체성, 그리고 당신이 진실이라 믿는 개념들에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Be open to this other possibility. And know that the one who wrote this book is the one who is reading it. If anything in this book sounds harsh or cruel or uncaring, that is not the intention. The intention is not to shock or upset but to share the possibility of absolute, unconditional love.
이 다른 가능성에 스스로를 열어 두십시오.
그리고 이 책을 쓴 존재는 이 책을 읽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만약 이 책의 어떤 말이 가혹하거나 무자비하거나 무정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내 의도가 아닙니다.
내 의도는 충격을 주거나 기분 나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가능성을 나누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In your dream, this book has appeared out of nowhere,
in order to remind you of what you already know.
당신의 꿈에서 이 책은 난데없이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And with our attention so fixed on the future - and its reflection, the past -what’s presently happening gets reduced to a means to an end, just one moment in a series of many.
We hope that future moments will be better than this one.
We just never seem to be content with this.
우리의 관심은 미래에, 그리고 그 반영인 과거에 너무나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일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없이 이어지는 순간들 중 단지 하나의 순간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됩니다. 우리는 미래의 순간들이 이 하나의 순간보다 낫기를 희망합니다. ……
This is what I call the search. This is what I call seeking.
We are all seekers. We are all looking for something.
이는 찾는 것입니다. 이는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And the search manifests itself in a million different ways.
그리고 추구는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My goodness, we have so many ideas of what liberation is! But right now, what else could they be but thoughts, concepts, memories, carried over from the past?
Our ideas about liberation are always second-hand.
우리는 해탈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무 많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지금, 그것들은 과거에서 넘어온 생각들, 관념들, 기억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해탈에 관한 우리의 선입관들은 언제나 남에게서 전해들은 간접적인 것입니다.
But the beauty of this is that it cannot be contained by any of those ideas and concepts. It’s too alive for that, too present for that.
그러나 '이것'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견해나 관념으로도 '이것'을 담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너무나 생생히 살아 있고 너무나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This is the death of the separate individual, the death of the seeker, and a plunge into something far more mysterious.
이것은 분리되어 있는 개인의 죽음이며, 추구하는 자의 죽음이자, 훨씬 더 신비로운 어떤 것 속으로 뛰어드는 일입니다.
What’s actually happening here - and not just here but everywhere else of course - is quite extraordinary. What’s happening here is Oneness meeting itself. Seeing itself in a million different forms and delighting in that.
실제로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여기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만, 놀랍도록 비범합니다.
'하나임'이 자기 자신을 보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Right now, Oneness appears as this. It appears as a body sitting on a chair, holding a book. And it appears as the floor, the walls, the heart beating, breathing happening, colours, smells, sounds and everything else that’s going on right now.
바로 지금, '하나임'이 '이것'으로 나타납니다.
책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몸으로 나타납니다.
바닥으로, 벽으로, 심장 박동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숨으로,
색깔로, 냄새로, 소리로,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으로 나타납니다.
Oneness appears as everything that’s presently happening, absolutely everything. Well of course it does. It is everything.
'하나임'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것으로, 어떤 예외도 없는 모든 것으로 나타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나임'이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This extraordinary aliveness is staring us in the face, and it always has been. So how come we don’t see it all the time? It’s so obvious when it is recognised, and yet until then, it appears to be hidden. There appears to be a game of hide and seek going on!
이 경이로운 '살아 있음'은 우리 눈앞에 있으며,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알아차리기만 하면 아주 명백한 것이지만, 그러기 전에는 숨겨진 것처럼 보입니다.
The Offering
In the dream of separation, you are an individual with choice and free will. In the dream, you apparently chose to start reading this book. You chose to go to the book-shop, or borrow the book from a friend, and then today you chose to pick up the book and sit down and start reading. And you’re choosing to sit on the chair in a certain way now, and you’re choosing to move your eyes across the pages, and you’re choosing to believe me or not, to like what I’m saying or not, to be bored or excited by the words, or not.
In the dream, you’re certainly doing a lot of choosing!
분리라는 꿈속에서, 당신은 선택권과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입니다. 꿈속에서, 당신은 이 책을 읽기를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 꿈속에서, 당신은 분명히 수많은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In the dream you chose your way towards this.
In the dream you made all of this happen.
In the dream you can take credit for all of this.
In the dream you appear to be a creator.
꿈속에서 당신은 이것을 향해 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꿈속에서 당신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꿈속에서 당신은 자기가 이 모든 일을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꿈속에서 당신은 창조주처럼 보업니다.
In the falling away of the story of choice, the story that you’re a separate, solid person at the centre of your life, the story that you are doing everything, that you created all of this, you really have no way of knowing how any of this came to be. In the falling away of choice, you have no way of knowing how you got here. How any of this happened.
스스로 선택한다는 이야기, 자신이 분리되고 고정불변한 개인이라는 이야기, 자신을 중심으로 자기의 삶이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 자신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자신이 이 모든 일을 일어나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떨어져 나가면, 당신은 이런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진실로 알 길이 없습니다.
선택권이라는 것이 떨어져 나가면,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And then, like a newborn baby, you open your eyes, and you find this. In the falling-away of the individual, you’re seeing this for the first time. And you look down and you find yourself perched on a chair. And there’s the sense that the chair doesn’t have to be there, but it is anyway.
그리고 마치 갓난아기처럼 당신은 눈을 뜨고 ‘이것’ 을 발견합니다. 개인이라는 것은 떨어져 나가고, 당신은 난생처음 이것을 보고 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의자가 꼭 거기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그것은 거기에 있습니다.
And there is only gratitude for it all.
그리고 오직 그 모든 것에 대한 고마움만 있습니다.
You look down, and my goodness there’s a chair there, offering itself, supporting you unconditionally, asking nothing of you. What grace.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에, 거기에 의자가 있습니다.
의자는 자기를 제공하고,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을 떠받쳐 주지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The chair doesn’t care who you are. Who you think you are. It doesn’t care what you’ve done or haven’t done. It doesn’t care what you’ve achieved or haven’t achieved, what you believe or don’t believe. It doesn’t care if you’re a success or a failure, if you’ve reached your goals or not. It doesn’t care whether or not you think you’re enlightened. It doesn’t care what you look like, what clothes you are wearing. It doesn’t care whether you’re sick or healthy, whether you’re a Buddhist or a Jew or a Christian, whether you are young or old, whether you understand or don’t understand. It only offers itself, unconditionally.
의자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당신이 자기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했든 무엇을 하지 않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
의자는 자기를 아무 조건 없이 내줄 뿐입니다.
And not just the chair, but all things: all things offer themselves unconditionally.
의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아무 조건 없이 내줍니다.
The secret is this:
Life is not really life at all. It is an offering.
비밀은 바로 이것입니다.
삶은 사실 삶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
And breathing is happening. In and out, in and out, effortlessly. Again, asking nothing of you. And even in deep dreamless sleep, when you aren’t even there to know it, breathing is happening. Breathing even happens in the absence of you! You don’t even have to be there, and yet the offering just goes on.
숨이 쉬어지고 있습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쉽니다.
아무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숨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잘 때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당신조차 거기에 없을 때에도, 숨은 쉬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없는 동안에도 숨은 쉬어집니다! 당신은 거기에 있을 필요조차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은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And the heart’s beating, pumping blood around the body, asking nothing of you. It’s just offering itself freely. One day it won’t be. One day the heart won’t be beating anymore, but it is now. One day breathing won’t happen anymore, but it’s happening now. You’re not guaranteed anything, you’re not guaranteed another day, another hour, another moment. And yet you get all of this. For free.
언젠가는 숨이 더 이상 쉬어지지 않겠지만, 지금은 쉬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하나의 하루도, 또 하나의 시간도, 또 하나의 순간도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얻습니다. 공짜로.
Sensations in the body, and sounds, and the cool breeze. And even thoughts coming out of nowhere and dissolving back into nothingness. You get all of that as well, for free. This is grace. This is Oneness.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들, 소리들, 시원한 산들바람. 그리고 어디선지 모르게 나왔다가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생각들까지. 당신은 그 모든 것도 역시 공짜로 얻습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이것이 ‘하나임’입니다.
And of course, the mind will reject this message. You see, this is the end of its story of control. The end of its future.
The end of its seeking. To the mind, this is a bit like death.
물론 마음은 이러한 메시지를 거부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통제한다는 허구적인 이야기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미래의 종말, 마음의 추구의 종말. 마음에게는 이것이 일종의 죽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The mind says this is too ordinary.
마음은 이것이 너무나 ‘평범’ 하다고 말합니다.
But you see, it was always the search for the extraordinary that made this ordinary.
하지만 이것을 평범하게 만든 것은 항상 비범한 것에 대한 추구였습니다.
The spiritual search was always rooted in a rejection of the present. The search of a lifetime was always a movement away from what is.
영적인 추구는 언제나 현재에 대한 거부에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평생의 추구는 언제나 지금 있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We become so heavy, so lost in our seeking, in our search to be someone in the world, in our drive to succeed, in our desire to make everything perfect. And it’s all so exhausting.
우리는 너무 심각해졌고 추구하는 일에 너무 빠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고,
성공을 위해 계속 매진하며,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 추구는 몹시 피곤한 일입니다.
Underneath all of the seeking, we’re still just newborn babies. We’re still seeing the world for the first time. We just got a little lost in the game of becoming, that’s all.
그런데 모든 추구의 수면 아래에서는 우리는 여전히 갓난아이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난생 처음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무엇이 되기 (becoming)’ 게임 속에 조금 빠져 있을 뿐입니다. 그뿐입니다.
Rearranging the Furniture
Now, nothing in that dream has to change. You don’t wake up in the morning and try to change the dream, do you? The seeing of the dream as a dream is enough. In the seeing of the dream as a dream, the dreamer is no more, and nothing that happened in that dream can touch you anymore.
꿈 가운데 바꿔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뒤 꿈을 바꾸려 애쓰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꿈을 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꿈을 꿈으로 보게 되면, 꿈꾸는 자는 더 이상 없으며, 그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은 어떤 것도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It’s the same as when you’re watching a movie. You’re not sitting in the cinema trying to change or manipulate the movie. You’re just watching. And in fact, in the watching, there is no longer a separation between the one who watches and the movie that is being watched. When you are totally absorbed in a movie, there is only what’s happening. You laugh and cry along with the movie as if it were happening to you. You forget yourself. You dissolve into the movie.
영화를 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영화관에 앉아 있으면서 영화를 바꾸거나 조작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냥 지켜볼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지켜봄 가운데에는 보는 사람과 보이는 영화 사이의 분리가 없습니다.
당신이 영화 속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을 때는 오로지 지금 일어나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영화를 보면서 그 모든 일이 마치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인 양 울고 웃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잊습니다. 영화 속으로 녹아듭니다.
That’s why we love going to movies. When you’re watching a movie, you don’t have to do a damn thing: you just let what’s happening wash over you. Or more accurately, you are washed away by the movie. You and your past and future disappear in favour of what’s happening. And because what’s happening on the screen isn’t essentially real, you can fully engage with the experience, you can fully let yourself go and enter into what’s happening without reservation, and laugh and cry and cheer along with what’s happening as if it were really happening. It’s because it’s not real that - for a while, anyway - it’s fully real. This is the apparent paradox at the heart of experience. Life is just one great big movie. The greatest movie ever made.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당신은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스쳐 가도록 내버려두기만 하면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은 영화에 씻겨 없어집니다.
당신과 당신의 과거와 미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위해 사라집니다.
스크린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본질적으로 실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당신은 완전히 경험 속에 빠져들 수 있으며, 완전히 자기 자신을 놓아 버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속으로 거리낌 없이 들어가서, 마치 지금 일어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양 울고 웃으며 환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한동안이지만 어쨌든, 완전히 실제인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이 실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험의 핵심에 있는 명백한 역설입니다.
삶이란 아주 거대한 한 편의 영화일 뿐입니다.
이제까지 만들어 진 것 가운데 가장 거대한 영화.
So in the waking up, the movie remains a movie. In the waking up, the dream remains a dream. It’s not essentially real but when you’re engrossed in it, it appears to be.
The story of ‘you’, your past and your future, isn’t essentially real - it only appears to be when there is mesmerisation with the dream-movie of life. At any point in the story, the invitation is there to wake up from the story. In that, the story does not cease. It goes on, but is seen through. It becomes transparent. The movie continues to play, but it’s seen for what it is.
‘당신’ 의 이야기, 당신의 과거와 미래는 본질적으로 실제가 아닙니다. 오직 삶이라는 꿈—영화에 매료되어 있을 때만 실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야기의 어떤 지점에서든 이야기에서 깨어나라는 초대는 항상 주어집니다. 그런 경우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지만,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이 간파됩니다. 그것은 투명해집니다. 영화는 계속해서 상영되지만, 영화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This isn’t a special state that I’m in.
It’s true for all of us: you are just a thought. Your whole past and future is just a thought arising now.
당신이 단지 하나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진실입니다.
당신의 과거와 미래 전체가 단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As long as you think you’re awakened, or enlightened, or liberated, there’s a ‘you’ there who thinks that. That idea of personal achievement is the hardest thing to let go of. For a long time, I thought that I was enlightened. And you know, that was just a belief. That was separation. “I’m enlightened, you’re not!” Separation. And there was a sense of superiority there. I thought I had something special.
당신이 깨어났다거나 깨달았다거나 해탈했다고 생각하는 한,
거기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 이라는 개인이 있습니다.
그것을 개인적인 성취로 여기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놓아 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것은 단지 하나의 믿음에 불과했죠.
그것은 분리였습니다. “나는 깨달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 분리죠.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언가 특별한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죠.
But all of that fell away too. It wasn’t real. It was the final illusion to fall away. But it was an illusion. The ego loves to feel that it’s enlightened. Then it can go round the world telling everyone it’s enlightened!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역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것은 실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떨어져 나가야 할 마지막 환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환상이었습니다. 에고는 자신이 깨달았다고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에게 자기가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온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요!
this...
There is only this.
Only what’s happening.
오직 ‘이것’ 만 있습니다.
오직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만 있습니다.
In liberation, life goes on,
it’s just that you’re not there anymore.
Life lives itself,
as it always has done.
해탈 속에서, 삶은 계속됩니다.
단지 당신이 더는 거기에 있지 않을 뿐입니다.
삶이 스스로 살아갑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It’s the shift from
a person sitting on a chair,
to sitting on a chair just happening.
그것은 의자에 앉아 있는 개인으로부터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 그저 일어나고 있음으로의 전환입니다.
The shift from a person walking down the street,
to walking down the street just happening.
거리를 걸어 내려가는 개인으로부터
거리를 걸어 내려가는 일이
그저 일어나고 있음으로의 전환입니다.
From a person living their life, to life just happening.
This shift doesn’t happen in time.
In truth, it’s already happening.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으로부터
삶이 그저 일어나고 있음으로의 전환입니다.
How wonderful it is to have no idea what is going to happen.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To let life surprise you.
삶이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하도록 놓아두는 것은.
To wake up every morning like a newborn baby, with the past wiped clean.
과거가 깨끗이 지워진 채,
갓 태어난 아이처럼 매일 아침 깨어나는 것은.
To know that everything will happen exactly as it should.
모든 일은 정확히 일어나야 하는 대로
일어날 것임을 아는 것은.
To know that there is nothing higher,
more spiritual or more noble
than getting out of bed in the morning, brushing your teeth,
putting on clothes and walking out into the fresh air.
아침에 침대 밖으로 나와서
이를 닦고 옷을 입고
신선한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가는 것보다
더 고귀하거나 영적이거나 숭고한 일은
없음을 아는 것은.
To understand that there is nothing to understand.
이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이해하는 것은.
To see presence in each and every little thing.
모든 작은 것들 하나하나 안에서 현존을 보는 것은.
To look at the world and see only a love with no name reflecting back at you.
세상을 바라보면서,
아무 이름 없이 당신에게 되비치는
사랑만을 보는 것은.
People sometimes ask me “Jeff, what’s it like for you? What’s it like being awakened? What’s it like being in a place of Oneness?” I find these questions impossible to answer. I simply don’t know what it’s like. All those questions are directed at a person, and there isn’t one here. Enlightened? Awakened? Oneness? That’s all for the person. When there’s nobody here, there’s nobody here to get enlightened, there’s nobody who could awaken, there’s nobody who could know anything about something called Oneness.
사람들은 가끔 묻습니다. 제프, 그게 당신한테는 어떤가요?
깨어 있는 것은 어떤가요? 하나임 의 자리에 있는 것은 어떤가요?” 나는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질문들은 모두가 어떤 개인을 향한 질문인데, 여기에는 그런 개인이 없습니다.
깨달음? 깨어남? 하나임? 그것은 모두 개인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도 없다면, 여기에는 깨달을 사람도 없고, 깨어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하나임’ 이라는 것에 대해 뭔가를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And so when questions are asked, there is a response here. That’s the character functioning. When someone asks “Jeff, what’s your preference, red or white wine?”, the response that often comes is “White, please.” Preferences continue to function. Out of nothing, it speaks: “White, please.” And when someone calls out in the street “Hey, Jeff!”, the head turns and the mouth smiles and something here says “Hi!” back, and that’s part of the mystery too. Nobody here, somebody here. This cannot be contained by either of those conceptual positions.
질문들이 주어지면, 여기에서는 응답이 나옵니다.
그것은 등장인물의 활동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프, 적포도주와 백포도주 가운데 어떤 것을 더 좋아하나요? 라고 물으면, 자주 나오는 대답은 “백포도주요.”입니다. 선호하는 것들은 계속 작용합니다. 아무 근거 없이 그것은 “백포도주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 거리에서 “제프!”하고 부르면, 고개를 돌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여기에서 무언가가 “안녕!”하고 말합니다. 그것도 불가사의한 신비의 일부입니다.
여기에 아무도 없는데, 여기에 누가 있습니다.
When the reference point of the ‘I’ drops away, you cannot say anything about yourself.
And yet, words may come out. But they are no longer your words.
‘나’ 라는 기준점이 떨어져 나가면,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나오겠지만, 그 말들은 이제 당신의 말이 아닙니다.
Words are used, but they can never be believed. And so, you ask my name, and I say “Jeff’, or something says “Jeff’ and it’s as simple as that. Right there, right there in normal, everyday interactions, the miracle shines. We don’t need to fly off to India or meditate for the next thirty years in order to see it. It’s already happening.
말을 사용하지만, 말을 믿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 이름을 물으면 내가 또는 무언가가 “제프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단순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평소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상호작용에서, 기적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기 위해 인도로 날아가거나 다음 30년 동안 명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What is given in this moment is already a perfect expression of life. Life expresses itself totally right here, and hides nothing from view. Nothing is absent here. And of course, before you can even call it a ‘moment’, it’s already gone.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지는 것은 이미 삶의 완벽한 표현입니다. 삶은 자기를 바로 지금 완전히 표현하며, 아무것도 감추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결여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당신이 그것을 '순간'이라고 부르기도 전에, 그것은 이미 사라집니다.
At the heart of this present appearance, at the heart of this astounding show of sights and sounds and smells, there is no person, no centre, no reference point, no puppeteer pulling on the strings. The lights are on, but nobody is home. There are sounds, feelings, thoughts, but there is simply no person there hearing the sounds, feeling the feelings, thinking the thoughts. Life is not happening to anyone or for anyone -it’s just happening. It’s happening for no-one.
지금 보이는 이 모습의 한가운데에는, 보이는 것들과 소리들과 냄새들로 이루어진 이 경이로운 쇼의 한가운데에는 개인도 없고 중심도 없고, 기준점도 없고, 줄을 당기며 꼭두각시를 부리듯 조종하는 자도 없습니다. 불은 켜져 있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소리들, 느낌들, 생각들은 있지만, 소리를 듣고 있는, 느낌을 느끼고 있는, 생각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삶은 누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삶은 그냥 일어납니다. 삶은 어느 누구를 위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Your absence is identical with the presence of the world.
당신의 부재는 세상의 현존과 같은 것입니다.
Liberation has nothing to do with an individual. It’s not something that you could ever get. It’s not something that some people have and others don’t. It’s not a state, not an experience. It’s not something that happens in time.
It’s not mine and it cannot be yours. It’s not a thing.
It’s nothing and it’s everything.
If there is liberation, it’s for nobody.
해탈은 개인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해탈은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은 어떤 사람들은 갖고 다른 사람들은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은 어떤 상태가 아니며 경험도 아닙니다. 해탈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은 나의 것이 아니며, 당신의 것도 될 수 없습니다.
You could never find this in a book, and no teacher can teach you this. Nobody can give this to you.
이것은 결코 책 속에서 찾을 수 없으며, 어떤 스승도 이것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이것을 당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Being is already being everything, perfectly. It’s playing all the roles. The carpet, the ceiling, the walls, the windows. Yes, it’s there even in the lowest things, in the smallest things, in the most insignificant things.
'존재'는 이미 완벽하게 모든 것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배역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카펫, 천장, 벽들, 창문들. . . 그것은 가장 사소한 것들 속에도,
가장 작은 것들 속에도, 가장 하찮은 것들 속에도 있습니다.
What’s seen is that the attempt to block out life only ever led to exhaustion, frustration and despair. The attempt to block out life didn’t work. Because life will always prevail. It will destroy any attempts to block it out. It will burn up everything in its place. It is pure aliveness. It is raw energy. It cannot be blocked out. It won’t stand for that.
삶을 가로막으려는 시도는 지독한 피로와 좌절, 절망을 가져올 뿐입니다. 삶을 가로막으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언제나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그것을 가로막으려는 모든 시도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삶은 자기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것입니다.
삶은 순수한 살아 있음입니다. 삶은 날것의 에너지입니다.
삶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삶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