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ap: The Psychology of Spiritual Awakening
By Steve Taylor
Foreword by Eckhart Tolle
You are a human being.
These two words not only describe who you are as a member of a particular species but, if examined more deeply, also point to the twofold nature of your identity.
우리는 ‘인간 존재’이다.
이 두 단어는 우리가 특정 생물 종에 속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말은 우리 정체성을 이루는 두 가지 성격을 하나씩 드러낸다.
Human is who you are on the level of form; that is to say, your body and mind. Those two aspects of your form identity make up your conditioned self. That self is conditioned by genetics and the environment, as well as other factors as yet unknown to science.
먼저 ‘인간’은 형태 수준에서 우리가 누군지 말해준다.
우리 형태의 이 두 측면은 조건화된 자아와 관계가 있다.
이 자아는 유전, 환경, 그리고 과학적으로 아직 규명되지 못한
요소들에 의해 조건화된다.
Being, on the other hand, points to the essence of who you are as timeless, formless, and unconditioned consciousness. Human and being, form and essence, are ultimately not separate, in the same way that a wave or ripple on the surface of the ocean is not separate from the ocean or from any other wave or ripple, although it may appear to be so.
반면 ‘존재’는 형태 없고 조건화되지 않은 영원한 의식으로서
우리 본질을 말해준다.
인간 그리고 존재, 이 형태와 본질은 대양과 그 표면의 파도가
그렇듯 궁극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파도는 대양과 또 다른 파도들로부터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다만 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Being, or pure consciousness, emanates from the Universal Source of all life – God – as light emanates from the sun. Unlike the sun, however, the Source does not exist in space and time. It is unmanifested and therefore inconceivable, so there is nothing you can say about it. However, your consciousness emanates from the Source, so you can never be separate from it, just as a ray of sunlight cannot be separate from the sun but always remains connected with it. The Source emanation pervades the entire cosmos – which is to say, our dimension of space and time – and it is the intelligence underlying and guiding the evolution of what we perceive as the physical universe. So the universe, including human beings, was not just created in the distant past but is still in the process of being created. It’s a work in progress, so to speak.
이 ‘존재’, 다른 말로 ‘순수 의식’은
모든 생명의 보편 원천(혹은 신)으로부터 나왔다.
마치 빛이 태양으로부터 터져 나오듯 그렇게 터져 나왔다.
하지만 태양과 달리 이 원천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는 없는 듯하다.
보이지 않으므로 상상할 수 없고, 묘사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이 원천에서 나왔고,
지금도 나오고 있으며,
따라서 이 원천과 결코 떨어질 수 없다.
태양빛이 태양과 떨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 이 원천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 차원의 우주 전체에 스며 있고 퍼져 있다.
이 원천이 배후의 지성으로 작용해 물리 우주의 진화를 이끈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를 포함한 이 우주는 먼 과거에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창조되고 있다.
이른바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Evolution is not just behind us, but in front of us as well.
진화는 옛날 일이기도 하고 미래의 일이기도 하다.
Furthermore, and contrary to the creed of our mainstream culture, there is direction and purpose behind the evolutionary process.
Where it is going, however, is beyond all imagination. What we can say is that the evolutionary impulse behind the process is the growth of consciousness.
이세상의 주류 문화가 믿고 있는 것과 달리
이 진화의 과정에는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구체적으로 어디로 향할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진화의 과정 그 배후의 원동력이
바로 우리의 ‘의식’.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의식의 성장’이라는 것뿐이다.
The universe wants to become more conscious, and the main life purpose for all human beings, is to come into alignment with that universal purpose. Seen from a higher perspective, of course, all that exists is already in alignment with it, even if it seems to be opposed to that purpose, but it is aligned only unconsciously. Entering into conscious alignment with the universal purpose is an amazing evolutionary leap.
우리가 사는 물리적 우주는 (무의식에서 벗어나) 좀 더 의식적이 되는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우리 삶이 주요 목적이 그런 우주적 목적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물론 더 높은 관점에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다 그 목적과 함께하고 있다.
지금 그 목적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아직까지는 무의식적으로만 그 목적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그 목적과 의식적으로도 함께하는 때가 되면
그때 비로소 진화적인 큰 도약 하나가 완수될 것이다.
However, what does it really mean for human beings at their current evolutionary stage to “become more conscious” or to “awaken”? If I had to put it in a nutshell, I would define it as “disidentification from thinking.”
그렇다면 진화의 현재 단계에 있는 인간 존재에게
‘좀 더 의식적으로 된다는 것’ 즉 ‘깨어난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간단 명료하게 말하면 더 이상 자신의 생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않게 되는 것이다.
When you realize that the voice in your head, your incessant compulsive thinking, is not who you are, then you have begun to awaken. A new dimension of consciousness has arisen, which we could call awareness, presence, or wakefulness. You haven’t fallen below thought; you have risen above it. Now you can use thought instead of being used by it. Your sense of self shifts from identification with your mental positions and narratives to the alive presence within you, which is consciousness itself. You realize the being behind the human, so to speak. Something that transcends your conditioned personality begins to emerge. You realize your essential identity as unconditioned consciousness itself, and you can verify within yourself the truth of Jesus’s words: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박적인 생각들,
그 목소리가 ‘내’가 아님을 알 때 ‘나’는 깨닫기 시작한다.
그때 의식이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면서 순간을 살고, 알아차리고, 깨어난다. 생각에 빠지지 않고 생각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면 생각에 이용당하지 않고 오히려 생각을 이용할 수 있다.
머릿속 수다, 생각, 피상적 느낌 등에서 정체성을 찾다가 이제는 내면에 살아 있는 존재, 의식 그 자체에서 정체성을 찾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 그 배후에 있는 ‘존재’를 깨닫는다.
조건화된 인격을 초월하고 조건화 없는 의식 그 자체로서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깨닫는다.
그럼 “네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했던 예수의 말이 사실임을 스스로 증명하게 될 것이다.
you cannot truly understand the meaning of awakening except through awakening, which means going beyond discursive thinking and concepts. The concepts, however, can be helpful if used rightly, as pointers toward realization rather than as ultimate explanations or mental constructs that you need to believe in.
머릿속 산만한 생각과 개념들을 극복한 후 스스로 깨닫지 않는 한 깨달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깨달음 개념들은 제대로 이용될 경우 깨달음을 위한 지표로서 매우 유용하다.
‘깨달은 상태’와 같은 개념들을 확정된 것으로 믿지만 않는다면.
The fact that enormous collective challenges almost certainly lie ahead for humanity —most of them self-created by the unawakened, egoic state of consciousness that still has the majority of humans in its grip —should not be interpreted as an indication that a more widespread awakening is not going to occur. The opposite is probably the case: the crises we are experiencing, and the greater turmoil to come, may act as a catalyst for a collective shift in consciousness. As Steve Taylor puts it: “The evolutionary leap was already under way before these problems became so serious, but perhaps it has become —and is becoming — more powerful as a result of them.”
인류는 머지않은 미래에 거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의식의 그 이기성이 자초해온 문제들 말이다. 아직까지 우리 대다수는 그 이기성에 집착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류가 깨어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위기와 앞으로 오게 될 큰 격변의 시기가 의식의 집단적 전환에 촉매로 작용할 것이다.
스티브 테일러의 말을 빌리면 “지금처럼 문제들이 심각해지기 전부터 이미 진화적 도약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들 때문에 도약은 더 강력해져 왔고, 지금도 더 강력해지고 있다.”
Challenges are the lifeblood of all evolution. Every life-form, from plants to animals to humans, evolves as a response to the challenges it encounters. Your comfort zone is not the most likely place where you are going to find spiritual awakening, although the ego may tell you otherwise. If you look to people, places, things, or circumstances for fulfillment or happiness, you will be disappointed again and again.
‘문제’란 모든 진화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간으로 치면 피와 살 같다. 식물부터 동물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문제에 직면한 후 도전을 거듭하면서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안전한 곳에만 있을 때 영적 깨달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에고는 다른 주장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어떤 곳에 가고 어떤 물건을 갖기만 하면 만족하고 행복할 거라고 믿고 있다면 실망만 거듭하게 될 것이다.
Don’t tell the world, “Make me happy!” You would be placing an impossible demand on it and condemning yourself to perpetual frustration. Instead, allow the world to make you conscious. You may find that every challenge, every obstacle that life seems to put in your path, is an opportunity for awakening, for becoming present, or for deepening the state of presence. Many challenges you encounter, whether of a personal or collective nature, will have been created by human unconsciousness, either your own or that of other people.
세상을 향해 ‘나를 행복하게 해 줘!’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이고 끝없는 좌절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보다는 좀 더 알아차리는데 세상을 이용하자.
삶이 던져주는 모든 문제나 장애가 있기에 현재에 살 수 있고,
깨어날 수 있고, 최소한 현재의 상태를 심화할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하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수많은 도전들은 ‘나’에 의해서든 타인에 의해서든 인간의 무의식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Every seeming obstacle to your happiness or fulfillment is a potential portal into presence! Just modify your response to it and see what happens. Your life is not determined by what happens to you, but by how you respond to what happens. Most importantly, don’t add to the collective unconsciousness, which manifests particularly in the media and politics, through your reactivity. Bring the light of consciousness to every encounter, every problem, and every Facebook post!
우리의 행복이나 자기실현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모두 활짝 열린 대문 같은 것이다.
그 문만 넘으면 현재의 이 순간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제 문제가 생기면 다르게 반응하자.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일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미디어나 정치권이 조장하는 집단 무의식에 선동되거나 기여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직면하게 되는 모든 문제에,
심지어 페이스북 포스팅에도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빛을 전달하자!
—Eckhart Tolle,
Introduction
I used to think that spiritual awakening was out of the ordinary – an extremely rare state that is practically impossible to attain, unless you’re prepared to become a hermit and spend decades meditating for hours a day in solitude and silence. I thought that probably only a small number of human beings in history had ever become awakened, that is, attained an ongoing state of inner peace and wholeness with a sense of connection or unity with the world around them, and a selfless desire to love and support their fellow human beings. I certainly hadn’t met anyone like that, and I didn’t expect to — at least not in this lifetime. It goes without saying that I didn’t consider myself to be awakened either.
예전에 나는 깨닫는 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꺼이 은둔자가 되어 혼자 조용히 수십 년 동안 하루에 몇 시간이고 명상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극도로 드문 존재 상태라서,
실질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도 믿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극소수만 깨달았고, 그렇게 깨달은 사람은 내면이 늘 평화롭고 세상이나 우주와 언제나 합일되어 있으며,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는 오직 조건 없는 사랑과 지지만을 보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사람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고,
또 만나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 최소한 이생에서는 못 만난다 생각했다.
그러니 나 자신이 깨달은 사람일 거라고는 더더욱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I associated spiritual awakening with Eastern traditions, such as Buddhism and Hinduism.
The term enlightenment conjured images of monks with shaved heads and red robes, or gurus with long beards surrounded by flowers and prostrating devotees.
I assumed that if there were any spiritual awakened people alive, most of them were in India, or perhaps Tibet or China. After all, that is where the greatest and purest spiritual traditions and the world’s most profound spiritual texts such as the Upanishads and the Dao De Jing came from.
내가 생각하는 깨달음은 항상 불교나 힌두교 같은 동양적인 것이었다.
깨달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승복을 입은 삭발 승려나 꽃과 신봉자에 둘러싸인 수염 긴 구루의 미미지가 떠올랐다.
이 시대에도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분명 인도나 티베트나 중국에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우파니샤드>나 <도덕경> 같은, 세상에서 가장 심오하고 경전들을 배출했고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순수한 영적 전통들이 살아 숨 쉬는 곳들이 바로 그 나라들이니까 말이다.
In comparison, my own Western European culture seemed like a spiritual desert. I liked reading about Christian mystics, and it was clear that some of them had been spiritually awakened (or at least had had glimpses of awakening), but the Christian religion itself seemed too laden with beliefs and concepts to serve as a framework for spiritual awakening. The happiness paradigm of my culture meant doing well at school and college, getting a good job with good prospects, buying a nice house where I could entertain myself by watching television and surround myself with possessions and comforts. Life was all about achievement and entertainment, material goods and fun. Surely if I wanted to find enlightenment or awakened individuals, I had to go to the East.
그런 의미에서 내가 태어난 서양-유럽 문화를 보면 황량한 모래사막을 보는 듯했다.
물론 즐겨 읽던 기독교 신비주의 서적들을 보면 유럽에도 분명 깨달은 사람들(최소한 깨달음을 일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깨달음을 위한 틀로 작용하는 개념들과 믿음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 속으로 함몰되어 버렸다.
멀리 갈 것 없이 서양문화가 말하는 행복 패러다임만 보아도,
결국 열심히 해서 안정된 직장을 잡은 다음 비싼 집을 장만하고
안락한 건물들에 둘러싸여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를 보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깨닫고 싶거나 깨달은 사람을 만나려면 동양으로 가야 했다.
I was wrong. This book describes how I came to learn that spiritual awakening is far from uncommon. It describes how I came to learn that it doesn’t just happen to Eastern sages but to seemingly ordinary people in all walks of life. It describes how, after a number of encounters with ordinary awakened people, I began to study spiritual awakening as a psychologist.
하지만 내가 틀렸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영적 깨달음이 결코 드문 일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
그리고 깨달음은 동양의 현자들만이 아니라 동서양 할 것 없이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언뜻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증명하고 싶다.
깨달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로서, 그리고 이미 깨달은 보통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보고 내가 알게 된 사실이 그렇다.
My study began with the dissertation for my master’s degree, then my PhD, and then my research as an academic. I began to seek out people who had undergone a shift into a higher — a more expansive and harmonious — state of being. Initially, for my master’s dissertation, I sought out people who had undergone this shift following intense trauma and turmoil in their lives. I was surprised how easy it was to find cases, and many more people contacted me to share similar experiences once my initial research was published. Then I decided to broaden my research and investigate cases of spiritual awakening that weren’t specifically linked to turmoil and trauma. I investigated other types of awakening — people who had undergone a gradual awakening through years or decades of spiritual investigations or practice, and a small number of people who simply seemed to be naturally awakened; that is, people who have been awake for as long as they can remember, without making any special effort or undergoing any transformative experience.
석박사 논문을 비롯해 여러 연구 논문을 쓰는 동안 나는 더 높고, 더 확장되고, 더 조화로운 존재 상태로 전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처음에 석사 논문을 쓸 때는 인생에서 격동의 시기나 큰 사건을 겪은 후 그런 전환을 경험한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찾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논문이 발표되자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자꾸 연락해왔다.
나는 연구 범위를 넓혀 격동의 시기나 큰 사건들을 겪지 않고도
깨달은 사람들을 찾았다.
다시 말해, 수십 년 동안 연구나 수행을 해 오면서 꾸준히 깨달은 사람들은 물론, 소수이긴 하지만 아무런 수행이나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깨달은 사람들- 태어날 때부터 깨달은 사람들- 도 만나 본 것이다.
The vast majority of people I interviewed aren’t spiritual teachers and don’t see themselves as part of any particular spiritual tradition or religion. These people have conventional jobs and no backgrounds in spiritual traditions or practices. (As a result, in many cases, they were initially confused by what happened to them.) Partly because of this, I began to detach the concept of awakening from religious and even spiritual traditions. I began to see it as a particular state of mind and being that could be interpreted in terms of spiritual traditions but didn’t necessarily belong to them.
내가 인터뷰한 대부분이 영적 지도자이기는 고사하고 그 어떤 종교적. 영적 믿음도 갖고 있지 않던 보통 사람들이었다.
보통의 직업을 가진, 수행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이런 경험들이 크게 작용해 나는 깨달음을 영적. 종교적 전통과 별개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깨달음의 상태를 그 어떤 특정한 마음. 정신 상태로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상태가 영적. 종교적 전통 내에서 그들의 언어로 해석될 수 있지만, 꼭 그 전통들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Throughout history, the shift into wakefulness has often happened to people who were part of religious or spiritual traditions, and so it was usually interpreted in terms of those traditions.
If it happened to a Buddhist monk, the shift was described as bodhi, or “enlightenment”; if it happened to a Hindu, it might be termed moksha (freedom) or sahaja samadhi (permanent or ongoing oneness);
if it happened to a Sufi, it might be described as baqa, or “abiding in God”; if it happened to a Christian, it might be termed deification, or union with God. However, the shift into wakefulness can also occur — and most often does, according to my research — outside these traditions and so doesn’t have to be interpreted in religious or spiritual terms.
역사는 깨달음이 영적. 종교적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고 말해 왔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깨달음을 그 전통들의 언어에 의해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 승려가 깨달았다면 그 깨달음을 보리(앎. 깨달음)라고 했고, 힌두교도가 깨달았다면 목샤(자유. 해방) 혹은 삼매(적멸. 적정. 영원하게 지속되는 하나임 상태)라고 했다. 수피교도가 깨달았다면 바까(신 안에 거주)하고 했고, 기독교도가 깨달았다면 신격화 혹은 신과의 합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하지만 전환은 이 전통들 밖에서도 일어나며, 내 연구에 따르면 주로 전통들 밖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반드시 영적. 종교적 용어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Different spiritual traditions explain and interpret this shift in different ways, emphasizing different aspects. It’s as if they offer different views of the same landscape, magnifying, filtering, and selecting certain features. But when the shift occurs outside spiritual traditions — that is, in people who don’t have a spiritual background and so don’t have a ready framework within which to interpret it — it’s as if we’re given a view of the landscape itself, in a more naked and unconstructed state.
각각의 전통마다 깨달음에 이르는 전환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강조점이 다 다르다.
같은 풍경을 각자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듯이, 깨달음에 대한 여러 특장을 취사, 선택 혹은 확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환이 그런 전통들 밖에서 일어날 경우, 즉 영적. 종교적 배경이 없는 사람에게 일어나 미리 준비된 해석의 틀이 없을 경우, 그것은 오히려 온전한 그 전체 풍경, 그 본래의 민낯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Through my research as a psychologist I’ve attempted to identify the characteristics of this shift, the different ways in which it can occur, and the reasons why it occurs. What are the triggers or causes of awakening? Why does it occur to some people and not others? What actually hap- pens inside a person’s being or psyche when they experience awakening? In what way do awakened or wakeful people experience the world differently than others? How are their relationships, values, and goals different? How does wakefulness relate to our species as a whole and to the overall evolution of consciousness?
나는 그 전환의 특징, 전환이 일어나는 여러 방식, 그리고 전환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규정하는 일을 꾸준히 해 왔다.
깨달음의 원인이나 동기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왜 누구는 깨닫고, 누구는 깨닫지 못하는가?
깨달은 사람의 심리는 정확히 어떻게 변하는가?
깨달은 사람의 세상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 정말 그렇게 다를까?
깨달은 사람은 어떤 가치와 목표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어떤 인간관계를 영위하게 되는가?
깨달음은 인류의 진화, 구체적으로는 인류 의식의 진화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These are some of the main topics I’ll be discussing throughout this book.
There’s a great deal of confusion about enlightenment — partly because it has been interpreted in so many different ways by different teachers in different traditions — and I’d like to dispel some of this.
Terms such as spiritual awakening and enlightenment often have dif- ferent meanings to different people.
If you ask a hundred different spiritual teachers how they define wakefulness or enlightenment, you will probably get a hundred different answers. Many people have an impulse to wake up but, because of this general confusion, they aren’t completely sure where they’re heading or where they should go. I hope to clear up some of this confusion by clearly identifying the characteristics of wakefulness and by establishing exactly what it means to live in the state.
이것들이 이 책을 통해 내가 논의하려는 큰 주제들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커다란 혼란을 동반해 왔다. 서로 다른 전통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그런 혼란들을 부분적으로나마 없애 보려 한다.
사람들은 영적 깨달음, 해탈 같은 용어들을 각자 다르게 해석한다.
백 명의 영적 지도자에게 정의해 보라고 하면 모르긴 몰라도
백 가지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해탈을 열망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런 혼란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는 깨달음의 성질을 규명하고, 깨달은 상태의 삶이 정확하게 어떤지 살펴보는 것으로 이런 혼란들을 해결해 보려 한다.
1. Falling Asleep, Longing to Awaken
잠에 빠지다, 깨어나길 열망하다
When we use terms such as wakefulness and awakening it’s important to understand what we’re waking up from.
In other words, it’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normal” state of being that we transcend when we wake up.
깨어남, 깨어나기 같은 용어를 쓸 때 어디로부터 깨어나는지를 아는 것이 무어보다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깨어날 때 우리가 초월하게 되는 ‘일반적인’ 존재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
As my terminology suggests, what we wake up from is essentially a state of sleep — a state of constricted, limited awareness, and of discord and suffering.
This state is so familiar to us that we assume it’s natural and normal, and we take it for granted. But, in fact, this state is aberrational, even pathological.
It’s a kind of madness that we confuse with sanity simply because we experience real sanity so rarely.
깨어남은 기본적으로 잠에서 깨어남을 시사하는데, 이는 내가 깨달음보다는 깨어남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잠을 자는 상태란 알아차림이 제한적이며 불화와 괴로움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이 상태에 너무 익숙해서 이 상태가 자연스럽고 정상이라고 여기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이 상태가 일탈이고 심지어 병적이다.
우리는 제정신을 거의 경험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제정신이 뭔지 햇갈리는 일종의 정신 착란 상태에 살고 있다.
Here I’ll discuss the main characteristics of this state of sleep.
Bear in mind that there are variations in these characteristics. There are different degrees of sleep, just as there are different degrees of wake- fulness. Some people are more asleep than others, just as some people are more awake than others.
이 장에서는 이 수면 상태의 주요 특징들을 알아보려 한다.
수면 상태의 특징들은 그 변이의 폭이 크다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길 바란다.
깨어남의 정도가 다르듯이 수면의 정도도 사람마다 다르다.
남들보다 더 잠들어 있는 사람이 있고, 남들보다 더 깨어있는 사람이 있다.
Affective Characteristics of Sleep
수면 상태의 내면적 특징
The affective characteristics refer to the inner experience of being asleep, how it feels to live in a sleep state. The main aspect of this experience is our sense of separation and disconnection.
잠자고 있는 상태에서는 특히 어떤 내면의 경험들을 하게 될까?
다시 말해 이 상태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때 우리는 주로 분리와 단절을 느끼고 경험한다.
Separation and Disconnection
분리와 단절
As I suggest in The Fall and Waking from Sleep, prehistoric humans — and later, the people who became known to us as indigenous peoples — experienced the world in a very different way than most of us in the modern world. One of the main differences is that they appear to have had very little sense of separation from the world. They felt closely connected to nature, to their land, and to the whole of the earth, to the ex- tent that they didn’t see themselves as individuals in the same way that we do. Their sense of identity extended into their land and their whole community. This is part of the reason why indigenous peoples have been so horrified by European people’s rapacious attitude toward na- ture, their treatment of it as nothing more than a supply of riches and resources to be ransacked. Indigenous peoples feel a strong empathic connection to nature, that it’s part of their own being, and so recoil from hurting the earth in the same way they recoil from harming themselves.
나의 책 <자아폭발-타락>과 <잠에서 깨어나기>에서 이미 말했듯이, 선사시대 사람들- 그리고 후대에 우리가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은
현대의 우리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점은 세상과의 분리를 거의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연과 땅, 그리고 지구의 거의 모든 것과 하나인 듯 느꼈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도 현재의 우리와는 다르게 보았다.
즉 그들의 땅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 전체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탐욕스런 유럽 사람들이 자연을 오직 부를 위한 약탈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모습을 보고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그렇게 겁에 질렸던 것도 부분적으로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원주민들은 감정적으로 자연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므로, 자연이 그들의 일부와도 같고, 따라서 자연을 해치는 것이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The collective psychological shift that our ancestors underwent thousands of years ago — the point when human beings began to “fall” asleep — occurred when they lost this sense of connection.
A new, highly individualized sense of self developed.
People began to experience themselves as egos enclosed within their own mental space, looking out at the world.
For the first time, they experienced themselves as separate from the natural world — not beings who were living in nature, as a part of it, but beings who were somehow outside nature.
수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심리적 집단 전환은 바로 그런 연결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할 때 일어났다. –바로 그때 인간은 수면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그때 고도로 개인적인 자아에 대한 느낌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인간은 에고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에고는 자신만의 정신적 공간 속에 갇혀 바깥세상을 내다봤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 세상과 분리된 자신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 속에 사는 존재가 아닌 어쩐지 그 자연 밖에서 사는 존재 말이다.
This new separate self brought a sense of ego-isolation, of apartness and aloneness. There was a new duality; our ancestors were “in here” with the rest of reality “out there.” There was also a fragmentedness, as if human beings were fragments broken off the whole, with a feeling of loss and incompleteness. Other people were also “out there.” As human beings, we became less connected to one another, with a weakened sense of empathy and community. Our own needs and desires as individuals began to take precedence over the welfare of the whole group.
이 새롭게 등장한 자아가 고립, 분리, 외로움 같은 느낌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원성이 생겨났다. 이 우리의 조상들은 자신들이 ‘여기게’ 있는 반면 나머지 세상은 ‘저기 바깥에’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전체에서 부서져 나온 파편 같다는 느낌도 있었는데, 이 느낌이 상실감과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동반했다.
다른 사람들도 ‘저 바깥’에 존재했다. 이제 공동체 의식과 공감 능력이 약해진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소원해지게 된다. 그리고 전체 집단의 안녕보다 각자만의 개인적인 필요와 욕구가 우선시되기 시작했다.
This sense of separateness even extended to the body. Rather than see the body as an integrated part of our being, we saw the self — our own ego — as an entity trapped inside a body that was somehow other to us; the body was a vehicle that was carrying us but wasn’t actually part of us.
At the same time, we became disconnected from our own being — from our essence or spirit.
Our sense of identity became constricted to a very narrow focus — our own ego. In the same way that a city can become so large and prominent that it seems to be a separate entity from the rest of the land that it’s a part of — and in the same way that the inhabitants of the city can lose touch with the rest of the land and see themselves just as city dwellers — we lost contact with the expansive radiance and spaciousness of our whole being.
심지어 우리 몸에 관해서도 분리의 느낌이 엄습했다. 몸을 우리 존재에 통합된 한 부분으로 보기보다 우리 자아– 에고 -가 하나의 개체로서 어쩌다 갇혀 버린 공간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몸은 우리와 다른 어떤 것이었다.
우리를 데리고 다니는 운송 수단이지만 실제로 우리 일부는 아닌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 그 고유의 존재,
우리의 본질 혹은 영혼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
그리고 에고라는 작고 제한된 것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동시에 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도시가 부각되며 커질수록 나머지 땅들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민들도 같은 방식으로 나머지 땅과의 연결 고리를 잃게 되었고,
자신들을 도시 거주자로만 보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존재 전체의 광활함과 그 넓게 퍼져 나가는 빛과 이별했다.
Thought-Chatter
머리속 수다
One of the strangest characteristics of our sleep state is the associational chatter — the endless stream of images, memories, anticipations, reflections, and snippets of information — that usually runs through our minds when we don’t occupy our attention with external things. Again, we largely take this for granted, so it’s difficult for us to understand how bizarre it really is.
Why should we experience this random and involuntary thought-chatter whenever we turn our attention into our own minds?
It seems to be a quirk of our strongly developed sense of ego, perhaps one that occurs when our ability to self-reflect combines with our abilities to recollect the past, anticipate the future, and imagine different scenarios.
It seems also to be related to our sense of ego-isolation and the constrictedness of our sense of self, almost as if our thoughts become restless and agitated in response to the atmosphere of anxiety and lack of space.
수면 상태의 가장 기묘한 특징이 바로 머릿속 수다이다.
수면 상태의 우리 머릿속은 끝없는 이미지, 기억, 기대, 생각, 조각 정보들로 시끄럽다. 외부의 어떤 것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오락가락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런 현상을 당연하게 생각하므로 이것이 실제로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주의를 내면으로 향할 때마다 우리는 왜 이런 원치도 않는 제멋대로의 머릿속 수다를 지켜봐야 하는 걸까?
이것은 강해진 자아의 기벽처럼 보이는데, 우리의 자기 반추 능력이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기대함 서로 다른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능력과 만날 때 생겨나는 듯하다.
그리고 이 기벽은 우리 에고가 느끼는 소외감, 갑갑함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이 두 느낌이 낳는 불안감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머릿속 수다로 이어지는 것이다.
Abstraction
관념
Because of our ego-isolation and the thought-chatter that almost constantly runs through our minds, we spend much of our time in a state of abstraction.
Rather than live in the world, we live in our minds.
We per- ceive the world dimly, through the mist of our thought-chatter and filters of preexisting concepts.
Rather than live in a state of mindfulness, genuinely experiencing the reality of our sensations and perceptions, we live in a state of elsewhereness (as I refer to it in my book Back to Sanity).
에고의 소외감이 강력하고 머릿속 수다가 거의 쉴 새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관념 속에서 살아간다.
즉 세상 안에서 살기보다 우리 머릿속에서 살아간다.
세상은 머릿속 수다라는 안개와 이런저런 개념의 필터를 통해 희미하게 인식할 뿐이다. 우리 감각과 지각의 세상을 진정으로 경험하며 알아차리기보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살아간다. (나의 책 <조화로움- 불안과 충동을 다스리는 여덟 가지 방법> 참조)
In Back to Sanity I suggest that there are three different modes of attention that we experience as we live our lives: abstraction, absorption, and awareness (the “three As”).
Abstraction is when we immerse our attention in our thoughts.
Absorption is when we immerse our attention in external objects such as activities or entertainment.
Awareness is when we give our attention fully to our experience, our surroundings, and the perceptions and sensations we’re having in the present moment.
<조화로움>에서 나는 우리가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집중하며 살아간다고 했는데,
추상화, 몰두, 알아차림이 그것이다. (이것을 3A라 부른다.)
추상화는 물론 우리 생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알아차림은 순간순간 우리의 경험, 주변, 인식, 감각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When I teach courses and workshops (either at my university or independently), I often ask participants to estimate how much time they spend in each of these modes in a typical day. People tell me, almost without fail, that they spend the least amount of time in a state of aware- ness. Typically, people estimate that they spend most time in a state of absorption (an average of around 60 percent), with their attention immersed in tasks, chores, hobbies, or distractions. They spend the second greatest amount of time in a state of abstraction (around 30 per- cent), and only around 10 percent of the time in a state of awareness.
내가 일하는 대학이나 외부에서 강의를 하고 워크숍을 열 때면
나는 종종 참가자들에게 하루에 보통 이 세 방식으로 각각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는지 묻곤 한다. 그러면 거의 모든 사람이 알아차림 상태에서는 최소한의 시간을 보낸다고 대답한다. 보통은 직장일, 가정 일을 하거나 취미, 오락 활동을 하며 몰두 상태에서 대부분의 시간(평균 60퍼센트)을 보낸다. 그리고 추상화 상태에서 두 번째로 많은 시간(약 30퍼센트)을 보내고, 알아차림 상태에서는 단 10퍼센트의 시간만을 보낸다.
Anxiety and Discontent
불안과 불만
The internal mental atmosphere of the sleep state is a negative one. It’s a dark, dank, and oppressive place, the mental equivalent of a small room with no windows and hardly any light. The constant chatter of our minds creates a sense of disturbance and restlessness inside us, and the frequently negative tone of our thought- chatter generates negative emotions and an overall negative mood.
수면 상태에서 내면의 정신적 기운을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창문이 없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작은 방 같다.
어둡고 축축하며 억압적이다.
끝없는 머릿속 수다가 내면에서 동요와 소란을 일으키고,
그 부정적인 목소리는 대체로 부정적인 정서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Meanwhile, our ego-separateness creates a sense of lack, of “something missing,” as well as a sense of isolation. Finally, there’s a sense of narrowness, with our sense of self confined to the tiny space of our own ego, disconnected from the wide-open space of our whole being and its quality of radiance.
그리고 세상에서 단절된 에고가 소외감과 ‘무언가 빠진 듯한’ 결핍의 느낌을 야기한다. 마지막으로 그곳은 좁디 좁아서 편협함과 옹졸함의 느낌이 도사리고 있다.
자아가 우리 존재 전체의 넓디 넓은 공간으로부터 단절된 채, 그 찬란한 빛까지 모두 잃고, 에고의 작디 작은 공간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In our sleep state there’s also a sense of fear. Our separateness creates a sense of vulnerability and insecurity, of being threatened by the world and by other people. This insecurity is exacerbated by our chattering thoughts, which anticipate the future and create fear-based scenarios that we imagine repeatedly. There’s also usually an underlying fear of death, which we may not even be conscious of. Death threatens us by seeming to represent the end of everything we are, and everything we achieve or accumulate. It generates a sense of absurdity and meaninglessness, and so we do our best not to think about our own mortality.
수면 상태에서는 두려움도 있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곧 다치기 쉽고 위험하다는 뜻이다. 세상과 타인이 ‘나’를 위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위험은 두려운 나머지 미래의 시나리오를 반복 상상하는 머릿속 수다에 의해 가중된다. 보통은 죽음에 대한 기본적인 두려움도 깔려 있는데,
이 두려움은 미처 의식조차 못 할 수도 있다.
죽음은 우리가 성취한 것 혹은 축척해 온 것 그리고 우리 자체까지, 모든 것이 끝이라고 말하며 우리를 위협한다. 또 삶이 부조리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하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능한 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A Perceptual Characteristic: Deintensified Perception
수면 상태의 지각적 특징; 옅어진 지각
Another major characteristic of prehistoric and indigenous peoples’ experience of the world was their intense perception of their surroundings.
They seem to have had a sense that natural things were alive and sentient, and pervaded with a spiritual force.
Different peoples with no connection to each other had different names for this spiritual force.
선사시대 사람들과 그 후의 원주민들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서 보이는 또 다른 주요 특징이 있다. 바로 이들은 주변 세상을 강렬하게 지각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연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감지했고, 그 안에 영적인 힘이 퍼져 있다고 보았다.
이 영적인 힘에 서로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름들을 지어 주었다.
In the Americas, the Hopi called it maasauu, the Lakota called it wakan-tanka, and the Pawnee called it tirawa.
The Ainu of Japan called it ramut (translated as “spirit-energy”), while indigenous peoples in parts of New Guinea called it imunu (translated as “universal soul”).
In Africa, the Nuer called it kwoth and the Mbuti called it pepo.
These concepts are strikingly similar to the universal spirit-force that spiritual and mystical traditions speak of — for example, the concept of brahman in the Indian Upanishads.
This spiritual force was also part of the reason for indigenous peoples’ respectful attitude toward nature and their dismay at European peoples’ exploitative attitude toward it. In addition to feeling a sense of kinship with the natural world, they felt it was spiritually alive and therefore sacred.
북미 원주민 호피족은 그것을 마사우라고 불렀고,
라토타족은 와칸-탕타라고 했으며, 포니족은 티라바라고 했다.
이론의 아이누족은 라무트(영적에너지), 뉴기니의 원주민들은 이무누(보편영혼)이라고 불렀다.
아프리카의 누에르족은 크워트, 음부티족은 페포라고 불렀다.
이 개념들은 영적. 신비주의 전통들이 말하는 영적인 힘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인도 <우파니샤드> 전통 속 브라흐만 개념이 그 한 예이다.
이 영적인 힘을 알았기에 원주민들은 자연을 존경했고 유럽인들의 자연 착취에 경악했던 것이다. 원주민들은 자신이 자연 세상과 친족이라고 느꼈다. 자연 세상이 영적으로 살아있고 따라서 신성하다고 느꼈다.
How did we lose this intense perception of nature and this awareness of a spirit-force in the world? How did the natural world become less real to us, more mundane and less sacred and beautiful?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이러한 강렬한 지각을 왜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걸까?
그리고 세상 속 영적인 힘을 어떻게 더 이상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 걸까?
어쩌다 자연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고,
일상적일 뿐이며 살아 있지도 않게 된 걸까?
This is partly because we live so much inside ourselves, in a state of abstraction. Our experience of the world is therefore less direct and immediate. But this loss of vividness is also related to energy. Our powerful sense of ego — and our constant thought-chatter — uses up a massive amount of energy, and as a result there’s little energy available for us to use through perception. It may even be that, when the Fall occurred, our perception became automatized as a kind of energy- conserving measure so that the powerful new ego could have more energy at its disposal. Our attention was switched off to the world around us so that we didn’t have to “waste” any energy in perceiving it.
부분적으로는 관념 상태에서 더 많이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세상 경험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생생한 경험을 더 이상 못 하게 된 것은
에너지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강력한 에고와 머릿속 수다가 끊임없이 에너지를 대량으로 써 버린 결과, 자연을 지각하는 데 쓸 에너지가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런 에너지 자동 보존 방식 탓에 전락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지각 방식이 바뀌어 버렸다. 그래야 강력한 새 에고가 자기 마음대로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주변 세상으로 향한 주위를 거둬들였다.
주변 세상 지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As a result, the world became an inanimate place to us.
We no longer sensed the aliveness of rivers, rocks, and the earth itself.
We no longer sensed the sentience of trees and other plants, nor the consciousness of insects and other animals.
The world became full of objects, which we were free to use and abuse for our own devices. We lost the awareness of a spirit-force pervading the world and all the things in it.
그 결과 세상은 우리에게 무생물의 장소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이제 강도, 바위도, 지구 그 자체도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나무나 다른 식물들이 생명체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곤충이나 다른 동물들이 의식을 가진 존재임을 보지 못한다.
세상은 물질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그 물질을 우리는 자유롭게 이용하고 마음대로 오용해도 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우리는 세상과 그 세상 속 모든 것에 퍼져 있는 영적인 힘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Rather than see all things as infused with this force and therefore all interconnected, we began to perceive separateness. The world became made up of distinct material objects with empty space stretching be- tween them. As a result, we also lost the meaning and harmony that many indigenous peoples perceive in the world, and the sense of being at home in it. For us, the world became a neutral and even hostile place,
and life became an empty space between birth and death for us to try to fill with enjoyment and any sense of meaning we could create through our own efforts.
모든 것에 그 영적인 힘이 스며있고 그래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대신, 우리는 분리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상은 서로 구별되는 물질 덩어리와 그것들 사이에 펼쳐져 있는 빈 공간으로 구성된다.
그 결과 우리는 원주민들과 달리 세상 속의 의미와 조화를 지각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집 같은 편안함을 느끼지도 못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세상은 기껏해야 중립적인, 그러나 대부분은 적대적인 장소가 되었다.
삶은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는 백지가 되었다.
그러한 백지를 우리는 직업을 찾고 어떤 의미를 찾으며 우리만의 노력으로 채워 나가야 한다.
Conceptual Characteristics
수면 상태의 관념적 특징들
The sleep state is characterized not only by a certain kind of perception but also by a type of conception — that is, a certain outlook on the world, and sense of our identity and our place within it.
수면 상태에서는 지각적 특징만이 아니라 관념적 특징들도 있다.
다시 말해 수면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해 특정 관점들을 갖게 된다.
Egocentric Outlook
자기중심적 관점
In conceptual terms, one of the main characteristics of sleep is a narrowness of outlook. In sleep, people tend to be immersed in a narrow personal world of problems and concerns. They aren’t particularly interested in other people’s problems, or in social or global issues.
편협한 관점은 수면 상태의 가장 큰 관념적 특징들 중 하나이다.
수면 상태일 때 인간은 자기만의 문제와 걱정으로 가득한 개인적인 세상 속으로 빠져든다. 다른 사람의 문제나 사회적. 세계적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 두지 않는다.
Group Identity
집단 정체성
In sleep, people have a strong need for identity and belonging.
They feel a powerful impulse to belong to groups and to identify themselves as members of those groups in terms of religion, ethnicity, nationality, and any other label they can find.
수면 상태의 인간은 정체성과 소속감을 반드시 갖고 싶어한다.
종교, 인종, 국가 등 뭐든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에 소속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Accordingly, they see themselves as distinct and different from those who belong to other groups, and are liable to fall into conflict with those groups whose interests may conflict with theirs. They feel the urge to help expand the power and influence of their group — for example, to convert people to their religion — and feel a sense of pride when their group prospers, such as when their nation expands its territory or when their sports team wins a trophy.
그래야 자신을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 다른 존재로 볼 수 있고, 그래야 이해관계가 상충할 경우 그들과 쉽게 싸울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힘과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려고 한다.
예를 들면 포교 사업과 같은 일을 벌인다.
나라가 영토를 확장하거나 국가 대표팀이 우승하는 등 자신이 속한 집단이 번영하면 자랑스러워한다.
This need for identity and belonging is largely because of the sense of vulnerability and fragility generated by our separateness. We feel alone within our own mental space, with an overwhelmingly vast and complex world “out there,” on the other side. We feel threatened and so need some support, to feel part of something bigger than ourselves, to provide shelter and protection.
이런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는 자신이 분리된 탓에 약해지고 상처 받기 쉬워졌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긴다.
우리는 우리만의 정신적 공간 속에서, 압도적으로 크고 복잡한 ‘저 바깥’ 세상을 봄 외롭다고 느낀다. 위협을 느끼므로 지지가 필요하다.
피난처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 같은 더 큰 무언가에 소속되고 싶어 한다.
As we’ll see later, in wakefulness there’s a completely different perspective. Awakened individuals have little or no sense of group identity. They see distinctions of religion or ethnicity or nationality as superficial and meaningless. They see themselves purely as human beings, without any external identities, who are no different from anyone else. As a result, they don’t put members of their own group before others, but rather treat all people equally. They don’t feel any pride in their nationality or ethnicity; they feel just as connected to “foreigners” as they do to their own “people.”
깨어남의 상태에 다다르면 이것들과 정반대의 관점들을 갖게 된다.
깨어난 사람들은 집단 정체성을 거의 갖게 된다.
깨어난 사람들은 집단 정체성을 거의 갖지 않거나 전혀 갖지 않는다.
종교적. 민족적. 국가적 구별이 피상적이고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자신을 사회가 부여하는 정체성이 필요 없는 순수하고 특별한 존재로 본다.
그 결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람들을 우위에 두지 않고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우한다. 자신의 국가나 민족이 자랑스럽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동족이나 ‘외국인’이나 모두 똑같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뿐이다
Behavioral Characteristics
(수면 상태의 행동적) 특성들
Because the sleep state brings so much discord and discontent, the effort to escape from their psychological suffering dominates many people’s lives..
수면 상태는 너무 많은 불화와 불만족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런 정신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고픈 노력이 우리 일생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here are two major ways that people try to alleviate their unease. First, they try to simply divert themselves from their inner discord by immersing their attention in external things.
Second, people try to overcome their basic sense of separateness and lack by adding things to themselves.
They try to make themselves more significant by accumulating possessions and wealth, collecting achievements, or increasing their success, status, or power.
그런 노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는 외부적인 것에 주의를 집중하여 내면의 불화에서 벗어나려 한다.
둘째, 우리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우면서 분리의 감정을 극복하려 한다.
우리의 소유물이나 돈을 축적하는 것으로, 그리고 성취하고 위상을 높이고 권력을 얻는 것으로 자신을 좀 더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The sense of vulnerability and fragility I mentioned above also has a major impact on our behavior. Along with creating the need to join groups and take on different identities, it creates a strong need for acceptance. It makes us keen to fit in, to do what we feel is expected of us rather than follow our deeper impulses. As a result, we’re in danger of living inauthentically, of suppressing our true selves for the sake of acceptance.
앞에서도 언급했던, 분리 후 느끼게 되는 유약함과 나약함도 우리 행동에 큰 영향을 준다. 이런 느낌이 소속감과 정체성에 대한 욕구는 물론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보다 주변에서 하길 바라는 일을 해서라도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싶어한다. 그 결과 오직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위험하게도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억누르며 진정성 없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This sense of vulnerability also generates a strong sensitivity to slights or insults.
Because we feel fundamentally insecure, it’s easy for us to feel disrespected, to feel wounded by other people’s behavior toward
us, even if they don’t intend to offend us. These emotional wounds often fester inside us for a long time, giving rise to resentment, creating grudges, and often leading to conflict between individuals and groups.
사람들은 자신이 나약하다고 느낄 때 약간의 무시나 모욕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근본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에서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쉽게 상처 받고 모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상처가 내면에서 오랫동안 곪게 되면 원한과 적의가 생겨나고, 이것이 또 개인 혹은 집단 간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So this is our normal state of sleep: a state of separation and discord, in which we feel trapped inside our own mental space and subjected to the random chatter of thoughts and associations, and in which we’re preoccupied with our personal concerns and dominated by a desire to escape our discord through diversion and accumulation.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수면 상태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았다.
수면 상태란 분리와 불화의 상태로,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정신적 공간 속에 빠져 마구잡이식의 머릿속 수다와 집단 연대를 꼼짝없이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개인적인 걱정들에 압도당하고, 주의 돌리기와 물질 축적을 통해 그런 불화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욕망에 짓눌린다.
Temporary Wakefulness
일시적 깨어남
This state of sleep holds a great deal of power over us.
Apart from during childhood, some people never experience any other way of being.
They spend every moment of their lives asleep, without ever realizing that they’re asleep. Consequently, they don’t realize that it’s possible to wake up. They’re like prisoners who don’t realize they’re in prison, and so never think about escaping.
수면 상태는 우리에게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유년기를 제외하면, 수면상태에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방식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인생의 모든 순간을 수면 상태에서 자신이 그렇게 자고 있음을 알지도 못한 채 보낸다.
따라서 깨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조차 모른다.
감옥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탈옥은 꿈도 꾸지 않는 죄수들 처럼.
Very occasionally, however, most of us do experience brief moments of wakefulness, when the limitations to our normal awareness fall away and we glimpse a more intense reality.
In Waking from Sleep, I examine accidental and temporary experiences of wakefulness.
I define an awak- ening experience as “an experience of clarity, revelation, and joy in which we become aware of a deeper (or higher) level of reality, perceive a sense of harmony and meaning, and transcend our normal sense of separateness from the world.”
가끔이기는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분명 짧은 순간이나마 깨어나고는 한다.
알아차림의 한계를 넘어갈 때 우리는 강렬한 현실을 일견한다.
<잠에서 깨어나기>에서 나는 사고처럼 다가오는 그런 일시적 깨어남에 대해 논한 바가 있다.
이 글에서 나는 깨어나는 경험을 “현실의 더 깊은 (혹은 더 높은) 수준을 알아차리고, 조화와 의미를 지각하여,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그 일반적인 느낌을 초월하는,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기쁨이 넘치는 경험”으로 정의했다.
Awakening experiences occur when we temporarily transcend our normal state of being — or, more strictly speaking, our normal self- system. The structure of our normal self-system — with its strong sense of ego, firm boundaries, and automatic perception — dissolves away, like a tent swept away in a wind. This can happen in times of inner relaxation and stillness, when our normal thought-chatter fades away and there’s a higher level of energy inside us, infusing our perceptions and enabling us to perceive the world more vividly. This is why awakening experiences are often generated by contact with nature, meditation, watching or listening to arts performances, and other sedate, mind-quieting activities.
우리는 보통의 존재 상태,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보통의 자아 체계를 일시적으로 초월할 때 깨어남을 경험한다.
에고, 경계, 자동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는 우리 보통의 자아 체계가 작은 텐트가 강풍에 날려 가듯 사라져 버리는 때가 있다.
보통의 긴장이 완전히 풀리고, 고요가 찾아올 때, 머릿속 수다가 멈췄을 때,
즉 내면에 더 높은 수준의 에너지가 생겨나 우리의 지각 능력에 영향을 주며 세상을 좀 더 생생하게 지각할 수 있을 때 그렇다.
그래서 자연과 함께할 때나 명상할 때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혹은 그 외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다른 차분한 활동을 할 때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Alternatively, our normal self-system may be temporarily swept away as a result of intense stress and psychological turmoil.
In fact, my research shows that intense psychological turmoil — perhaps caused by loss, failure, divorce, or bereavement — is the most common trigger of awakening experiences (with contact with nature, meditation, and watching or listening to arts performances following closely behind). Turmoil and stress can be like an earthquake, breaking down the structure of the normal self and allowing a more expansive and intense state of being to unfold.
반대로 스트레스를 크게 받거나 심리적 격동이 있을 때, 그 결과로 우리 보통의 자아 체계가 일시적으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사실 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 어떤 상실, 실패, 이혼, 가족 친지의 사망 등에 뒤따르는- 강한 심리적 격변 후 깨어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자연과의 접촉, 명상, 예술 작품 감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경우도 많기는 하지만 전자가 조금 더 많다.) 스트레스와 심리적 격동은 마치 지진처럼 기존의 자아 구조를 깨고 보니 크고 강렬한 존재 상태를 펼쳐 보여준다.
Different intensities of awakening experiences and different characteristics emerge at different intensities. A low-intensity awakening experience may be an experience of heightened awareness in which your surroundings become more real, alive, and beautiful.
A medium-intensity awakening experience may include a powerful sense of connection, a feeling that you’re no longer separate from your surroundings. You might feel a strong sense of compassion or love toward other human beings (and other living beings), sensing that you’re not separate from them either.
You might have an awareness that all things are pervaded with — or are manifestations of — a radiant spiritual energy so that all are essentially one. In a high-intensity awakening experience, the whole material world may seem to dissolve into an ocean of pure consciousness or blissful radiance, which you feel is the essence of the universe.
You might sense that this is the essence of your own being, too, so that in a sense you are the universe.
깨어나는 경험에는 여러 강도가 있고, 각각의 강도에 따라 그 성격도 다르다.
저강도로 깨어나는 경우, 알아차림 능력이 고양되어 주변이 더 생생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실재처럼 느껴진다.
중강도로 깨어나는 경우, 주변과 ‘내’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때 다른 사람들 (다른 생명체 포함)과의 단절도 사라지기 때문에 그들로 향한 사랑이나 자비심을 강하게 느낀다. 그리고 모든 것에 스며 있는 빛나는 영적 에너지가 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하나라고 느낀다.
고강도로 깨어나는 경우, 모든 물질이 우주의 본질, 그 순수 의식의 대양 혹은 축복 가득한 광채 속으로 녹아 들어간다. 그리고 그 순수 의식이 우리 존재의 본질이라고 느끼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체가 우주가 된다.
The more intense awakening experiences are, the less common they are. Probably most of us have had low-intensity awakening experiences, and probably only a small number of us have had high-intensity ones.
강도가 낮은 깨어남일수록 더 흔하다. 모르긴 몰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저강도 깨어남 경험 정도는 한 번쯤 다 해 볼 것이다.
하지만 고강도 깨어남은 아주 소수만 경험한다.
However, awakening experiences are, by definition, only temporary. They might last a few seconds, a few hours, even a few days, but at some point the normal self-system reemerges and reestablishes itself, and we return to our normal state of being. It’s almost as if our normal self-system exists as a kind of psychic mold or template, which is always able to reform. Or to use another metaphor, it’s as if a tree has been blown down but its roots are still intact so that it can grow again.
그런데 이런 깨어남 경험은 경험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일시적이다.
몇 초, 몇 시간 지속되고 심지어 며칠 동안 지속될 수도 있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보통의 자아 체계가 다시 살아나 재구축되고,
우리는 일반적인 존재 상태로 돌아간다.
자아 체계는 마술 형판 혹은 틀을 갖고 있어서 언제나 복구 가능하다.
아니면 잘려져 나갔지만 뿌리는 튼튼한 나무와 같아서 언제든 다시 자랄 수 있다.
But in permanent wakefulness the structure doesn’t reform. Our nomal self-system dissolves away permanently — not only the structure but also the mold or template so that it isn’t able to reform. The tree is completely uprooted. In permanent wakefulness a new, higher- functioning self-system takes over, with a more expansive and intense awareness. The shift is so fundamental that the person may feel that they have been reborn, that they are a different person living in the same body.
그런데 영구적 깨어남의 경우 옛 자아의 구조가 영원히 사라지므로 복구되지 않는다. 구조만이 아니라 형판 자체도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제작될 수 없다.
나무라면 그 뿌리까지 뽑혀 나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더 확장적이고 더 강렬한 알아차림이 가능한 고기능의 새 자아 체계에 들어선다.
이것은 매우 근본적인 전환이어서 당사자는 다시 태어난 것 같으며, 같은 몸 안에서 다른 사람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것 같다.
In many ways the permanently wakeful state is a stable, ongoing variant of the temporary awakening experience, with the same fundamental characteristics. Perhaps the only major difference is that permanent wakefulness includes conceptual and behavioral aspects — such as a loss of group identity, a strong tendency to altruism, and a lack of interest in materialism or status seeking — that aren’t so apparent in temporary awakening, simply because these characteristics don’t have the opportunity to express themselves on a temporary basis.
많은 면에서 영구적 깨어남 상태는 일시적 깨어남 경험의 좀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변형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기본 특성들도 비슷하다.
둘 사이의 유일한 주요 차이점이라고 하면, 영구적 깨어남의 경우 – 집단 정체성 상실. 강력한 이타적 경향, 물질이나 위상에 대한 흥미 상실 같은 – 관념적. 행동적 특성들이 드러난다는 것일 텐데, 일시적 깨어남의 경우에도 이런 특성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짧은 기간의 경험이라 이런 특성들이 드러날 기회가 없다고 보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I would therefore loosely define permanent wakefulness as a higher- functioning state in which a person’s vision of and relationship to the world are transformed, along with their subjective experience, their sense of identity, and their conceptual outlook. This shift brings a sense of well-being, clarity, and connection. The person develops a more in- tense awareness of the phenomenal world, and a broad, global outlook, with an all-embracing sense of empathy with the whole human race and a much-reduced need for group identity.
그러므로 나는 영구적 깨어남을 세상에 대한 비전과 세상과의 관계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 정체성, 생각과 함께 극적으로 바뀌는 고기능 상태라도 거칠게나마 정의하고 싶다. 이런 전환이 자신이 안녕하다는 느낌,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는 느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부른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더 강렬하게 알아차리고 더 넓고 세계적인 관점을 가진다. 인류 전체를 포용하는 공감 능력을 계발하며 집단 정체성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You might doubt that it’s actually possible to live in this state. Wouldn’t permanent wakefulness make it impossible for us to focus on the practicalities of everyday life? How would we concentrate on earning a living, cooking our food, paying our bills, and so on, while living in a state of ecstasy and oneness?
이런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지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영구적으로 깨어나면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못하게 되지 않을까?
엑스터시와 하나임 상태에 살면서 생계를 위해 돈을 벌고, 요리를 하고, 청구서를 지불하는 일에 과연 집중할 수 있을까?
It’s important to remember that people who live in this state can con trol their experience.
They don’t helplessly swim in an ocean of blissful oneness all the time — they can still concentrate on practical tasks when they need to. They can still make decisions and plans, and organize their lives. But their sense of well-being, connection, and wholeness is always there as an undercurrent, in the background, which they can tune into at any moment.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상태로 살아도 자신의 경험을 통제할 수 있다.
영구적으로 깨어났다고 해서 모든 순간 축복 가득한 ‘하나임의 대양’ 속을 속절없이 헤엄만 치고 있지는 않다.
깨어났어도 여전히 필요하다면 실용적인 일들에 집중할 수 있다.
여전히 결정을 내리고 계획을 짜며 삶을 설계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항상 그 저변에는 온전하다는 느낌, 안녕하다는 느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깔려 있어서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그 느낌으로 돌아갈 수 있다.
The wakeful state is higher functioning in a variety of ways. Along with having a richer perception of the world and a more intense awareness, awakened individuals don’t feel a sense of incompleteness or disconnectedness. Their minds aren’t constantly assailed by buzzing, chattering thoughts that create a sense of discord and anxiety. They feel a fundamental sense of groundedness and wholeness, and a lack of self- centeredness. They’re no longer preoccupied with their own concerns and desires; they feel a high degree of compassion and a strong capacity for altruism and self-sacrifice. And as my definition mentions, they have a wide sense of perspective and a decreased need for group identity or belonging, which means that they can extend compassion equally to all members of the human race (and other species) beyond all differences of culture and ethnicity.
깨어남의 상태는 다양한 면에서 고기능이 가능한 상태이다.
세상을 더 풍성하게 인식하고 더 강렬하게 알아차리며, 덧붙여 더 이상 불완전함이나 단절을 느끼지 않는다.
불화와 불안을 이야기하는 머릿속 수다, 그 시끄러운 공격에서 벗어난다.
온전해졌다고 느끼고 기본적으로 탄탄한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다고 느낀다.
더 이상 자신만의 걱정거리나 욕망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자비심이 대단히 커지고 이타주의와 자기희생 능력도 월등해진다.
그리고 앞의 정의에서 언급했듯이 더 많이 포용하는 관점을 갖게 되며, 집단 정체성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즉 모든 문화적, 민족적 차이를 초월하므로 모든 존재에 똑 같은 자비심을 보여준다.
As with temporary awakening experiences, there are different varieties and degrees of permanent wakefulness. Some people’s wakefulness may be fairly low level; the characteristics of the state aren’t particularly intense for them. For example, they may still experience some disruptive involuntary thought-chatter and occasionally find themselves identifying with it; and they may occasionally find themselves getting caught up in self-centered desires or ambitions. At the same time, they may experience a constant richness of perception, and a constant sense of participation in and connection to the world, rather than a sense of separation. They may also have little sense of group identity and a wide sense of perspective, in which social or global issues seem as important as their own personal issues.
A person who experiences wakefulness to a high degree, however, may have little or no involuntary thought- chatter, and may experience a sense of unity with the world around them rather than simply connection. Again, as with awakening experiences, the more intense and the deeper the state of wakefulness is, the less common it is.
일시적 깨어남의 경험이 그렇듯 영구적 깨어남도 그 정도와 양상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상당히 낮은 수준의 그다지 강렬하지 않은 깨어남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원하지 않아도 여전히 머릿속 수다의 방해를 받을 수 있고, 또 그 자아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수도 있다.
때로는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풍성한 지각 경험을 끊임없이 하게 되고, 단절보다는 세상과의 연결과 참여의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집단 정체성도 거의 의식하지 않을 것이고, 개인적인 문제보다 사회적. 세계적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관점을 갖게 된다.
물론 더 높은 수준에서 깨어난 사람은 원치 않는 머릿속 수다가 주는 방해를 거의 받지 않고, 세상과 단순히 연결되어 있다 는 느낌에서 나아가 세상과 합일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나아가 세상과 합일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일시적 깨어남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더 강렬하고 더 깊은 깨어남일수록 더 드물게 나타난다.
In gradual wakefulness, there are many steps along the journey between sleep and wakefulness, and many different shades between the two states. We could say that, at different points, a person may be slightly awakened, moderately awakened, or highly awakened. Sudden awakening is slightly different in that there’s a dramatic shift from a state of sleep to a state of wakefulness without moving through the intermediate ground. But even here, there are different gradations of wakefulness. People can shift into higher or lower intensities of wakefulness.
점진적 깨어남의 경우, 수면 상태에서 깨어남 상태로 가는 여정에 많은 단계가 있고 그 과정에 다양한 굴곡들이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조금 깨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돌연한 깨어남은 중간 단계 없이 수면 상태에서 깨어남의 상태로 극적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하지만 여기서조차 깨어남의 단계적 차이들은 존재한다.
즉, 깨어남 그 강도의 높낮이가 존재한다.
You could think of the journey from ordinary consciousness to wakefulness as a path that leads up the side of a mountain (although it would be accurate to think in terms of many different paths up the mountain rather than just one). In gradual wakefulness, there’s a slow and steady journey up the path, which passes all points along the way. But in sudden wakefulness, a person shifts dramatically to a point much further along the path, as if they have been teleported there. Even so, there’s still a variety of different points that they can shift up to, in the same way that a helicopter might lift someone up to different heights of a mountain.
일반 의식에서 깨어난 의식으로 가는 여정은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길 같은 것이다.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길은 물론 다양하다.)
점진적인 깨어남의 경우 그 길이 더디고 안정적이며 모든 지점을 통과한다.
하지만 돌연한 깨어남의 경우 마치 순간 이동을 하듯 그 한참 먼 길을 극적으로 건너뛰어 버린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도달하는 지점은 여전히 다양하다.
헬리콥터가 태워다 주는 곳이 늘 꼭 같은 곳일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