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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환’과 ‘실재’] 스리 란지트 마하라지 (Shri Ranjit Maharaj)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10.07|조회수40 목록 댓글 1

Illusion vs. Reality

 

This world is nothing but a long dream, take it granted.

- Shri Ranjit Maharaj

 

‘환’과 ‘실재’

언젠가 몸은 사라지겠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태어나지 않고 누구도 죽지 않습니다.

그 자신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이해를 의미합니다.

일체가 환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늘 행복할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마음이 진리라고 축적하고 받아들여 온 모든 것, 그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대는 자신이 하는 말의 진리성을 믿지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대가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지知 때문이지만,

지知는 무지에서 옵니다. 이 무지는 어디서 옵니까?

영(0)에서 옵니다. 그래서 그것의 근원은 무無입니다.

 

일체가 무이고 일체가 환입니다.

그럴 때 '나는 누구인가?'를 이해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일체가 시작되는 근원을 이해하십시오.

그것은 모두 영에서 시작됩니다.

세계는 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늘이 영이고, 그래서 일체가 영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실재는 영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리 찾아도 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다들 신을 숭배하지만, 신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무지로 인해 여러분은 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은 어디에도 전혀 없습니다.

저 신, 저 힘은 여러분 안에 있고, 여러분 안에서 작용하며,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신을 이해하면

누구를 숭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세간적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세계를 잊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잠이 들면 그대는 세계를 잊고 행복합니다.

이 세간적인 것들은 모두 속박인데,

그대는 그것을 실재라고 여깁니다.

그것을 실재로 여기지 않으면

그대에게 어떤 속박도 없습니다.

 

실재에 집착하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실재가 됩니다.

 

그대 자신을 잊어버리면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이 그대의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환이라는 것,

몸과 마음 그리고 그대가 보고 지각하는 모든 것이 환이라는 것을 이해하며, 그대는 올바른 길 위에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대 자신을 이해한 것입니다.

무엇을 이해합니까?

그대가 그입니다.

누가 누구를 이해하겠습니까?

무지가 사라져야 할 뿐, 달리 무엇도 필요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참되다고,

내 몸이 참되고 내 이름이 참되다고 말하면, 그것은 에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에고를 알아야 합니다.

그대의 에고를 알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머무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찾겠습니까?

그것이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그대가 그입니다.

그러나 에고는 "나는 이거야"라고 말합니다.

에고는 결코 그대를 떠나지 않겠지요.

그대가 그것을 떠나야 합니다.

에고는 하나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것이 그대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마음속에 머무릅니다.

 

마음이 있는 한 이원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없이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이 뭔가 대상적인 것을 원하지만,

스승은 그대에게 대상적인 지知가 아니라 이해 쪽을 가리켜 보입니다. 이 이해 속에는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그대의 진아만이 있고,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을 단일성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원성도 없는데,

그것은 어떤 슬픔도, 어떤 공허함도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십시오.

 

실재에게는 해당되는 단어가 없고,

사용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이나 영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실재라는 단어도 이야기합니다.

그것에게는 해당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말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거기서 돌아 나옵니다.

 

가장 단순한 길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하나의 농담으로, 그대의 농담으로 여기십시오.

그런 다음 그 농담이 그대의 새끼손가락 위에서 춤추게 하십시오. 에고는 일체를 원하고,

그대로 하여금 일체가 참되다고 느끼게 합니다.

그것을 하나의 농담으로 여기고,

그것은 참되지 않다고 말하십시오.

거기서 벗어나십시오.

 

 

 

그대 자신이나 생각하십시오! 남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대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대는 남들을 걱정합니다.

왜입니까? 그대 자신을 어떤 것으로 여기면서 '나는 안다.

내가 더 많이 안다. 내가 1번이 되고 그들은 2번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그것이 주안점입니다.

일체를 잊어버리십시오. 누군가가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비교를 할 때 그대는 하나의 원 속으로 들어갑니다.

"저 사람은 이해했고, 저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대가 걱정해야 합니까? 그대 자신을 이해하십시오.

 

'모두가 나 자신'이라고 말하십시오.

 

바로 지금 그대는 그(실재)가 될 수 있는데,

왜 다음 생이 필요합니까?

그대는 태어남과 세계를 좋아합니다.

그대가 사랑하는 그 세계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세계는 하나의 미로이며, 달리 무엇도 아닙니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합니다.

무지 속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것이 최선입니다.

일체를 잊어버리십시오.

그대는 무지로 인해 일체가 참되다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참되지 않다고 말하십시오.

그것이 스승이 주는 진정한 진언입니다.

 

 

이 세계는 하나의 긴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십시오.

 

이 세계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긴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가 깨어나면(깨달으면)

이 화면이(세계가) 마치 티비 스크린 상의 그것처럼 진행됩니다.

그것을 끄면 화면은 사라집니다.(꿈 없는 잠)

다시 켜면 화면이 나옵니다.(생시, 꿈)

그대가 죽으면 화면이 사라집니다.

다시 태어나면 화면이 켜집니다.

그것이 일어나는 일의 전부입니다.

 

‘환’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환’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꿈일 뿐입니다.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대의 마음이 접촉을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깨달은 존재는 세상 안에 살고 있어도

결코 세상에 의해 접촉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 것에 의해 접촉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무인데,

이 무가 어떻게 그대에게 영향을 주거나 접촉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계는 ‘환’입니다.

‘환’은 실제로 ‘환’이라는 것을 그대가 이해할 때,

그것이 어떻게 그대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환 속인 세간에서 산다고 해도 아무런 해가 없습니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가 접촉을 당하지 않습니다.

연꽃은 물 속에 있어도 물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대는 일체가 ‘무’라는 것과,

이 ‘무’가 그대에게 접촉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설사 아무것도 그대에게 접촉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해도 그대는 여전히 ‘환’ 속에 있습니다.

 

 

행복은 세계를 잊는 데 있습니다.

그대가 해야 할 일을 하되 이해로써 초연해지십시오.

왜냐하면 그대가 느끼고, 지각하고, 성취하는 것이 무엇이든,

모두 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마음이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의 행위에도 일체가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행위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환입니다.

그대는 그 힘이 그것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힘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햇볕에 옷을 말릴 때, 해가 그것을 압니까?

해는 빛도 모르고 어둠도 모릅니다.

그 힘 안에는 어떤 분별도 없습니다.

 

 

누가 일체를 합니까? 누가 말을 합니까?

‘나’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 ‘힘’이 있을 때만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하기는 나 자신이 아니고,

'지知’는 나 자신이 아니고,

‘무지無知’는 나 자신이 아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생각일 분입니다.

지와 무지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뭔가를 알고 싶으면,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지’가 있어야 합니다.

‘지’를 가지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 즉 실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내가 했다”고 합니다.

 

 

지는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실재는 잊혀지고 이 모든 지가 생겨났습니다.

무지와 망각에서 지가 생겨났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참될 수 있겠습니까.

원 재료가 쓴 맛이면 여러분이 맛보는 것도 씁니다.

일체가 지이며 달리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는 참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해해야 될 점입니다.

저는 지금 깨닫기 전의 마지막 상태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가 있을 때 일체가 이 지에 의해 행해집니다.

그러나 이 지가 어디서 옵니까? ‘영(제로)’에서 옵니다.

이 세계는 거대한 환이며 꿈입니다.

그것은 무이고 무에서 모든 것들이 나왔습니다.

영이 없다면 ‘나’가 나올 수 없습니다.

실재는 이런 모든 것과 무관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아무개다”라고 합니다.

아무 실체가 없는 것에 왜 서로 다른 많은 이름을 붙여야 합니까?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無’이기 때문입니다.

실재는 실재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해되었습니다.

누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물으면,

성자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오”라고 합니다.

가해자도 ‘그’이고, 피해자도 ‘그’입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체고 그릇되었습니다.

그대는 모두 참되다고 말할테죠.

어떻게 그것이 참될 수 있습니까?

눈은 늘 그릇된 것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대가 꿈을 꿀 때는 눈이 감겨져 있습니다.

한 생각이 오고,(그에 따라 세계가 생겨나고)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참됩니까? 그대는 어느 눈으로 그 꿈을 보았습니까?

 

 

 

행위들은 머무르지 않습니다. 행위는 그 순간 사라집니다.

행위는 무행위가 됩니다. 그것은 마음속에만 머무릅니다.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일체를 간직합니다.

여러분이 보고, 지각하는 모든 것, 그리고 여러분이 이해하는

모든 것은 ‘무’입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실재의 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림자는 참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참되다고 여기면 여러분이 잃어버려집니다.

 

 

허공 또는 공간이 ‘영(제로)’인데,

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어떻게 참될 수 있겠습니까?

‘영’에서 나온 일체는 ‘영’으로 돌아갑니다.

‘영’은 ‘무’이지만 그 ‘무’는 너무 강력합니다.

그래도 그것은 ‘무’입니다. 그래서 ‘힘’과 ‘지’도 참되지 않습니다. 그대는 “나는 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힘이고 지입니다. ‘영’의 창조주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꿈을 꿀 때 누가 그 꿈의 창조주입니까?

그대는 자고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꿈이 드러납니다.

깨어나면 그대는 “그것은 꿈일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잊어버리는데, 그것은 ‘영’을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 일체가 시작됩니다.

궁극적 실재는 잊혀지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타납니다.

‘무’에서 일체가 나옵니다. ‘지’ 역시 ‘영’(‘무’)에서 나옵니다.

그대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이 ‘지’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지입니다.

 

 

상태는 실재가 아닙니다.

궁극적 실재는 상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평안을 원한다“고 말할 때, 그것도 하나의 생각입니다.

평안이 있을 때는 어떤 간섭이 들어오고,

그러면 평안을 잃습니다.

잃어버려질 수 있는 것은 참될 수 없습니다.

어떤 성자들은 평안이 천국의 지복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평안을 넘어서야 합니다. 평안은 마음의 것입니다.

늘 뭔가가 일어나서 평안을 깨트립니다.

궁극적 실재에서는 평안도 없고

그 상대물(평안하지 않음)도 없습니다.

그대가 잠이 들면 평안이 있습니다. 그것이 머무릅니까?

평안은 깨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구름이 끼었을 때 아무도 해를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해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름이 사라지고 해가 드러날 때

그대가 느끼는 기쁨도 환입니다.

왜냐하면 해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코 가려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해를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왜 해가 기쁨을 느껴야 합니까?

기쁨과 행복은 여전히 환의 징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이런 저런 체험을 하지만,

다시 세계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세계가 무엇입니까?

세계는 환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에 신경씁니까?

세계를 기억할 때 어떤 꿈을 기억하듯 해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설사 여러분이 악몽을 꾼다 해도 깨어나서 그 악몽을 기억해보면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여러분을 붙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꿈 속에서 누군가를 죽여도 깨어나면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세계는 환입니다. 왜 그것에 신경씁니까? 이런 결의가 여러분을 뚫고 들어오면 누구도 여러분을 막지 못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아무것도 아닌 것(세계)을 우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작은 중생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대가 보고 지각하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의해 마음이 정화됩니다.

마음은 어떻게 해서 오염되었습니까?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을 실재로 여기고, 그리하여 실재를 잃어버립니다. 세계는 실재가 비친 모습일 뿐인데, 비친 모습은 참되지 않습니다. 비친 모습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대가 실재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정화입니다.

 

 

일체가 거짓임을 이해하면 마음 자체가 사라집니다.

마음은 그대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에 대한 생각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생각일 수도 있지만, 생각은 생각을 뿐입니다.

그것은 무지에서 옵니다.

그러니 그 생각을 잊고 ‘지’를 잊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바로 실재입니다.

 

 

여러분은 경찰서에 가서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하지는 않습니다. 무지 속에서도 그대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하면 경찰관이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뭔 소리요. 당신은 지금 내 앞에 있소.” 그대는 결코 잃어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대 자신을 찾으려고 무언가를 합니까?

그대가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찾을 때입니다.

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

만약 뭔가를 하면 그대는 속박 안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유롭습니다.

“비록 하고 있어도, 나는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참된 사마디입니다.

 

 

질문: 당신의 말을 듣는 것도 뭔가를 하는 것입니까?

답: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체가 환이기 때문입니다. 듣는 것도 환이고 제가 하는 말도 환입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환이라면 무엇이 남습니까?

궁극적 실재만이 존재합니다. 그 이해가 여러분을 뚫고 들어오면 그것이 진리입니다. 실재 안에는 진리도 없고 무지고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재는 늘 실재입니다. 이것이 세계의 기적이고 마법입니다. 일체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카드 트릭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체험에 대해 얘기하지만,

뭐든 경험되는 것은 모두 환입니다.

어떤 체험이 있자마자

‘경험하는 자’ ‘경험되는 대상’ ‘경험’의 세 가지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재에는 단일성이 있을 뿐입니다.

실재 속에는 세계가 없습니다.

세계가 나타나는 듯이 보이기는 해도 말입니다.

단일성을 체험하는 것은 늘 환입니다.

“나는 단일성을 체험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된 주장입니다.

단일성은 경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그러면 실재가 있습니다.

 

 

무지로 인해 “내가 무엇인가를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성품상, 자신이 행위지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모든 것과 여러분의 모든 습관은, 여러분이 이해할 때 사라집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자는 자신이 말할 때, 실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잠을 자지만, 실은 자지 않습니다. 그것을 그는 압니다.

 

 

실재를 발견하려고 하거나 그것을 회상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기억하면 즉시 여러분이 잃어버려집니다.

그 때, 여러분은 실재 아닌 어떤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실재를 하나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실재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태가 없습니다.

 

 

질문: 그런데 폭력의 꿈은 왜 꾸는 것입니까?

(이 세계를 ‘꿈(사람을 죽이는 꿈)’에 비유한 가르침을 듣고

질문함)

답: 왜라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왜’라는 문제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왜?’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생에 대해서는 잃어버리십시오. 에고가 다시 몸을 받아 옵니다. 그대의 죽은 몸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거짓말을 합니다. “나는 아무개다”라고 합니다.

그대의 서명은 위조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대는 여러 생을 감옥에 갇힙니다.

그대가 일단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면,

세계가 그대에게 실재하게 됩니다.

그대는 가장 작은 중생이 됩니다.

늘 “나는 ‘그(실재)’이지 이것(몸)이 아니다.”고 말하십시오.

그대의 두려움은,

존재한다고 그대가 생각하는 것(몸, 세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것이 무지입니다.

그 무엇도 그대를 건드리거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것(세계)이

아무것도 아닌 것(‘나’)을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를 건드리고 있다고 느낄 때,

그것이 무지입니다.

 

 

모든 신들은 ‘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신에 대한 두려움이 그대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누구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이 ‘최고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곧 창조력입니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지만 그것이 ‘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왜 두려워하겠습니까?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 그것은 그대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이 되십시오. 그것이 주안점입니다.

모든 ‘힘’은 그대의 ‘힘’입니다.

모든 사람의 '힘‘은 그대 자신일 뿐입니다.

‘나’라는 생각 때문에 누구도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이 있고, 그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전의 두 면과 같습니다.

면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그’입니다.

왜 이 모든 난센스를 걱정합니까?

그대는 누군가의 즐거움을 위해 태어나서, 평생을 고통받습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나는 신이 준 이 몸이 아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그대는 늘 행복합니다.

 

 

의식이 있는 동안은 여러분이 모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일체가 의식 안에 있고 달리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간, 공간, 거리, 일체가 거기서 나옵니다.

그 힘은 모두의 안에 있고 모두가 그 힘으로 일합니다.

그것을 이해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무지의 원 밖에 있습니다. 궁극적 실재 안에는 시간, 공간, 거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늘 있습니다. 그리고 결코 ‘나’를 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없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세간적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세계를 잊어버리는데 있습니다.

잠이 들면 그대는 세계를 잊고 행복합니다.

세간적인 것들은 모두 속박인데,

그대는 그것을 실재라고 여깁니다.

그것을 실재로 여기지 않으면 그대에게 어떤 속박도 없습니다.

그대는 늘 ‘그’입니다.

 

 

 

 

[단일성, 전부임으로서의 실재]

 

 

이해가 있을 때는 단일성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이원성이 전혀 없습니다.

 

 

실재에는 이원성이 없는 단일성만이 있으며,

그 무엇도 그것의 밖에 있지 않습니다.

 

 

금은 자신이 장신구라는 물건에서 어떤 형상을 취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의 형태일 수도 있고 신의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금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물들에(이름과 형상을 취한 것들에) 무관심하십시오.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 안에는 단일성만 있고 이원성은 아예 없습니다.

모두가 ‘그’(진아)인데 왜 걱정합니까?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생각일 뿐입니다.

 

 

“나는 도처에 있고, 달리 어떤 것도 전혀 없다.”를 닦아야 합니다. 단일성만이 있으므로, 그대가 보고 지각하는 것은 뭐든지

‘그’입니다.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도 마음의 차이와 긴장들이 있습니다.

단일성만이 있는 곳에는 어떤 긴장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도처에 있고 모든 사람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조차 필요치 않습니다. 믿음도 필요치 않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이 ‘그’입니다.

스승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결코 어떤 것과도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대가 ‘그’일 때는 그대가 도처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리의 문제도 나오지 않습니다.

분리는 몸의 분리일 뿐입니다. 그대가 바로 ‘그’입니다.

 

 

모든 문제들은 이원성이 왔음을 의미합니다.

‘나’가 있을 때 ‘너’와 ‘그’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가 없을 때 누가 있겠습니까?

그 때는 단일성이 자동적으로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문제들은 나중에 오게 되어 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왜 걱정합니까? 그대가 다리 하나를 잃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절름발이가 되지만, 왜 걱정합니까?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다. 나는 실재다.”라고 하십시오.

그대는 몸이 아니고 이름이 아니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늘 자유롭습니다.

 

 

사실 그대는 어떤 오해로 인해

자신이 별개의 한 개체라고 믿습니다.

각자는 의식(지)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대가 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대의 의식이 보편적으로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무)이 많은 것을 만들어 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다양한 것들이 옵니다.

오직 하나가 있는데 어떻게 다양성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어떤 다양상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양성을 원하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보는 것은 그대의 생각들일 뿐이고,

그것은 무에서 시작해 무로 끝납니다.

금은 “나는 귀고리다, 사슬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금은 금일 뿐입니다.

일체가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면 아무곳도 남지 않습니다.

 

 

성자에게서 보여지는 행복의 표현도 환입니다.

그 기쁨을 표현할 누가 있으며, 누구에게 기쁨이 있습니까?

실재는 비이원성, 즉 단일성입니다.

 

 

모든 것은 단일성의 열매입니다.

속성들은 서로 다른 조합일 수 있으나,

그래도 단일성밖에 없습니다. 일체가 내 것입니다.

모든 손, 다리, 마음들이 다 내 것입니다.

그럴 때는 대립이 머무르지 않습니다.

세계 안의 그 무엇도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이름과 형상은 참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참되지 않다는 완전한 확신을 가져야합니다.

모든 금으로 된 장신구는 그냥 금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다른 무엇일 수 있습니까?

모두의 안에 있는 실재는 도처에 편재합니다.

그러니 누가 ‘그’를 보겠으며,

어느 눈으로 ‘그’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대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일체를 잊어버리십시오. 그러면 ‘그’가 있습니다.

 

 

만일 제가 “나는 스승이다”라고 한다면, 저는 스승이 아닙니다.

누구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리가 사라집니다.

무지의 원 바깥에 있으십시오.

“나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지’의 병이 최악의 병입니다. 하나의 개체가 되지 마십시오.

‘어떤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하십시오.

 

 

‘나’는 ‘환’이고 그 ‘나’가 하는 말도 환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스승과 그가 하는 말고 ‘환’입니다.

왜냐하면 실재에는 단일성만 있을 뿐 이원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나’와 ‘타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몸과의 동일시]에 대하여.

 

 

그대가 “나는 메리다”고 한다면 그대는 메이리니 어떻게 합니까? 그대는 즐겁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불행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대는 평생 ‘몸’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지만

그것은 말 한마디 없이 갑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이것이 나이다”고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나는 몸이다”라고 말하면 죽음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태어난 것은 몸이지, 여러분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대가 “나는 이것이다”(예: “나는 몸이다”)고 말할 때

일체가(모든 문제가) 옵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일체가 사라집니다.

 

 

자식이 죽었다고 합시다. “그 아이는 제 아이입니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웁니다.

여러분이 “저는 몸입니다”라고 할 때 에고가 옵니다.

 

 

질문: 당신도 신체적 고통을 느낍니까?

답: 통증은 마음의 접촉[마음이 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몸이 고통 받지, 저는 고통 받지 않습니다.

그대의 이웃이 문제를 안고 있을 때, 그대는 “내 이웃들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알지만 어떤 느낌도 없습니다.

몸을 그대의 이웃으로 간주하십시오.

그러면 몸의 문제는 그대의 이웃이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대가 고통 받는 것은 “나는 몸이다”라고 말할 때입니다.

 

 

성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은 하나의 송장이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것이 ‘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 내적인 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바로 지금 몸은 죽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단언컨대, 그대는 질병이나 그 어떤 것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몸을 그대 자신이 아닌 하나의 이웃으로 여기십시오.

 

 

그대는 늘 ‘그’입니다. 신체적 일들은 오라고 하십시오.

왜 걱정합니까? 아들이 병에 걸리면 엄마가 걱정하지만,

그 병을 그녀가 대신 가져갑니까?

 

 

사람들은 언젠가 몸이 죽을 거라고 말하지만,

저는 그것이 지금 이미 죽어있다고 말합니다.

그대는 몸이 아니며, 몸은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죽게 하십시오. 그와 같이 일체를 잊어버립시오.

에고를 잊고 몸을 잊으십시오. 그러면 가장 큰 행복을 얻습니다. 그대가 잠을 잘 때는 몸을 잊습니다. 그때 그대는 행복합니다.

잠에서 깬 뒤의 상쾌함은 어디서 옵니까?

그대의 진아에서 옵니다.

 

 

모든 세간적인 것들, 생각들, 연관들은 몸의 한 결과로 나옵니다. 그래서 그대가 “나는 몸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는 이런 관계들이 머무르지 않습니다.

 

 

에고는 태어나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태어나기를 바라는 이유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태어남 없이, 몸 없이는 내가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몸이 하나의 송장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그 ‘힘’이 됩니다.

눈은 보지 못하고, 보는 것은 그 힘이지만,

그 힘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기가 나가면 어떤 전구도 켜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그 힘이다”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 힘은 모두의 안에서 작용합니다.

그대가 죽으면 에고와 그 힘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해에 의해, 에고는 자동적으로 사라집니다.

몸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은 에고일 뿐 달리 무엇도 아닙니다.

 

 

성자 뚜까람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고추를 팔라고 했습니다.

그는 시장에가서 고추를 내놓고 “아무나 원하는 만큼 가져가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세간적인 노력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세간에서 사업을 하고, 세간적 지혜를 보이면 늘 함정에 빠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환’입니다.

그대가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는 누구도 그대를 함정에 빠트릴 수 없습니다. 모든 두려움은 몸에서 올 뿐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을 때 세간의 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뭔가가 되고 싶어 하고 뭔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세간의 지혜가 그대를 함정에 빠지게 합니다.

뚜까람의 방식과 같이 우리는 에고를 피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달리 무엇도 할 것이 없습니다.

실재를 위한 지혜만이 좋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꿈 속에서는 많은 일이 오고가지만,

꿈을 꾸는 사람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깨어나면 그는 어떤 일도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긴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십시오. 그래서 이해로서 몸의 속박을 내던져 버려야 합니다.

 

 

에고는 말합니다. “내가 머무를 곳이 없다.”

에고는 늘 더 나은 어떤 것을 원합니다.

먼저 에고를 잊고, 그 다음 모든 것을 잊으십시오.

그대가 “그것은 내 집이다”라고 할 때 모든 문제가 그대에게 남습니다. 실재를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집이 내 집이라는 것을 압니다. 별도의 장소를 원하는 것은 몸입니다.

그대가 몸이 아닐 때는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아닌가?”라고 물으십시오.

이런 식으로 에고를 이해해야 합니다.

세계의 파산을 얻으면 그대가 행복합니다.

 

 

그대는 아주 열려있을 수 있는데도 몸으로 인해 작은 중생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몸과 관련된) 걱정을 합니까?

좋은 음식과 좋은 것들이 좋은 관념들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속박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신다고 해서 제가 그를 나쁘다고 해야 합니까? 아무 느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단일상의 관념이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채식이니 육식이니 하는 신체적인 문제는 저의 관심사가 아니니, 그런 것에서 벗어나 있으십시오.

 

 

그대의 몸에 종기가 나면 그것을 절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몸의 일부이지만 그대는 그것을 없애고 싶어합니다.

‘힘’이 그대 안에서 작용할 때 그대는 “내가 한다. 내가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하는 것은 그 힘입니다.

몸은 하나의 장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자신이 힘인 줄도 모릅니다.

“내가 한다. 내가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의 에고이며,

그것이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떠안습니다.

에고는 그대의 이름일 뿐인데,

그대의 모든 욕망과 두려움이 거기서 나옵니다.

‘힘’은 이 모든 것과 무관합니다.

그대의 모든 욕망과 두려움은 신체적 문제이고,

그대의 괴로움과 고통의 원인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나는 몸이다”고 말합니다.

이 몸은 그대에게 난 하나의 종기입니다.

이해로서 그것을 잘라내야 합니다.

 

 

[마음]에 대하여

 

 

마음이 ‘힘’의 대리인입니다.

마음이 일체의 분별을 만들어 냅니다.

창조주와 창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그대에게 닥쳐온 첫 번째 장애이지만,

그대는 무념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것일 뿐입니다.

 

 

그대의 마음은 그대의 생각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의 생각들을 이해하십시오.

그러면 생각들이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은 왜 생각을 합니까?

마음이 소음을 일으키는 것은

그대가 일체를 참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참되다. 나 자신은 참되다.’고 말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고는 환일 뿐인데, 에고가 바로 ‘지’입니다. 마음이 ‘지’입니다. 이 ‘지’가 감각대상들과 접촉하면 정념과 습관으로 드러납니다. 이 습관과 정념들이 그대를 괴롭게 만듭니다.

세간에 머무르되 “아무것도 참되지 않다”고 말하십시오.

정념의 요구를 들어주지 마십시오.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십시오.

 

 

 

[이해의 길, 새의 길]

 

 

우리 전통에서는 명상을 ‘개미의 길’이라고 하고,

이해는 ‘새의 길’이라고 합니다.

새의 길은 생각(이해)만으로 됩니다.

처음에 더없이 중요한 것은 ‘스승의 말이 옳다’는 관념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헌신입니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마음 자체가 속박이고, 마음 자체가 해탈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명상이 필요하지만, 얼마 후에는 놓아야 합니다. 이해가 그대를 ‘그’로 만들어주면, 그대가 남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이해의 변화만이 필요합니다.

‘무지의 원’ 바깥에 있으십시오.

 

 

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이해만이 필요합니다.

그 이해를 얻는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라고 하십시오. 상관없습니다.

그 이해가 아주 강해져서, 누군가가 여러분을 죽이려고 해도

내버려 둘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에고와 ‘지’의 죽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비가 억수같이 오는 꿈을 꾼다고 합시다.

깨어나면 뭐가 젖어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스승에 의해 깨어날 때도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참되지 않다”고 말입니다.

마음을 깨어나게 하면 되고, 달리 무엇도 필요치 않습니다

 

 

일체가 무이고, 환입니다.

그럴 때 ‘나는 누구인가’를 이해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최고의 이해는 나 외에 아무것도 없고

모두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싫어하겠습니까?

 

 

“일체가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하십시오.

만일 “그것은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면

그대는 길을 잃고 문제들이 다가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대상적으로 되어 “나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때, 모든 쾌락과 고통이 태어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무’)은 늘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떤 것’(‘유’)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지입니다.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일체가 들어옵니다.

그것은 모두 영(제로)에서 옵니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모두 ‘무’에서 옵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에고가 사라집니다.

 

 

개미가 되지 말고 사자가 되십시오.

“나에게 죽음은 없다”고 말하십시오.

나고 죽음의 모든 관념은 마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마음속의 화면들입니다, 그 제작자가 되십시오.

이 화면들은 내가 만드는 것입이다.

일체가 그대로부터 시작하는데도,

그대는 그 화면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자신이 이 생각들의 제작자라는 것일 잊어버립니다.

그대가 없다면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를 갖되, “나는 무지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안다”고 하십시오.

 

 

“모든 것은 참되다”고 할 때 여러분은 노예이며,

"모든 것은 그릇된 것이다”고 말하면 왕입니다.

 

 

그대는 자신이 제한되어 있거나 속박되어 있다고 느끼지만,

그것은 하나의 생각을 뿐입니다.

제한이나 속박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속박이고,

그럴 때 그대는 어떤 것이 됩니다.

그대는 무엇에도 결코 속박되지 않지만,

“나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대가 단일성을 체험할 때는

그대고 보고 지각하는 모든 것이 ‘그’입니다.

이원성이 그대에게 혼란을 야기합니다.

 

 

속박과 해탈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생각일 뿐입니다.

 

 

이름이 왜 필요합니까?

그대는 이름이 없고 생각이 없습니다.

그대는 저에게 인도를 보여줄 수 있습니까? 지도가 인도입니까? 이름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대가 태어날 때는 무엇이 그대의 이름이었습니까?

그대는 아무 존재성 없는 것에 이름을 부여합니다.

 

 

진아는 너무나 열려 있는데 왜 걱정합니까?

행복이 오든 문제가 오든 ‘그’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뭐든 한 번에 다 오라고 하지. 나는 바위처럼 끄떡없다.”

그런 식으로 하면 걱정들이 사라지고,

매우 빨리 이해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몸은 하나의 속박이지만,

자신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자유롭습니다.

그럴 때 그대는 그대 안의 그 ‘힘’이고, 그대는 도처에 있습니다. 그 ‘힘’은 열려 있고 분명하며 그대는 늘 행복합니다.

그리고 결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을 하고, 무엇을 해도 좋지만, 그대 자신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실재에 집착하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실재가 됩니다.

 

 

모든 세간적, 신체적 문제들이 올 때,

그것은 뭔가 좋은 일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십시오.

어떤 것도 나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무지한 사람은 불운한 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불운이 내게 오라지”라고 말합니다.

그는 일어나는 모든 일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에고만이 늘 자신을 위해 뭔가 이익이 되는 것을 찾습니다.

 

 

그대가 왕이라고 합시다.

옥좌에서 통치하되, 그것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아십시오.

 

 

성자 뚜까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분께 내 재산을 다 드렸다.

몸도 신께 바치고, ‘나’도 신께 드린다.

이제 내 것이 무엇인가?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것도 없을 때는 무엇이 남습니까?

그대의 진아, 곧 실재입니다.

 

 

그대가 있을 때는 ‘그’가 없습니다.

‘그’가 있을 때는 그대가 없습니다.

그대가 “나는 이것이다”라고 할 때,

즉 에고일 때, ‘그’는 침묵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일체가 참되다.”고 말한다면,

“나 자신을 포함해서 아무것도 참되지 않다”를 닦아야 합니다.

 

 

‘나는 몸이 아니다’는 이해가 있을 때,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몸 안에 있는 그 ‘힘’입니다.

하지만 그 ‘힘’도 참되지 않습니다.

‘힘’조차 남지 않습니다. 그럴 때 그대가 ‘그’입니다.

 

 

“나는 몸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고, ‘지’가 아니고, 에고가 아니다”를 닦아야 합니다.

그대의 습이 변해야 하고, 그래서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대가 태어났을 때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존재성이 “나는 여기 있다”로서

그대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 ‘나’는 에고이며, 달리 무엇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가 있다”고 말할 때 일체가 오니 어떡합니까?

거듭 거듭 생각(탐구)해야 합니다.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여러분은 중생이 되었습니다.

생각하기에 의해 여러분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생각하기는 실재 안에 흡수되고 ,

여러분은 남지 않습니다. “나는 세계의 창조주다”고 말하십시오. 커지십시오.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창조한 것은 참되지 않다.

나는 없다”고 말하십시오.

먼저 ‘나는 누구인가?’를 이해하십시오.

그러면 그 ‘나’가 이해에 의해 흡수될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했다”고 말하면 그대는 그 업에 고착화 됩니다.

그러니 무지의 원에서 어떻게 빠져나오겠습니까?

이해로서만 가능합니다.

아무것도 참되지 않고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무엇이 남습니까?

 

 

궁극적 실재 안에는 시간이나 공간이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행위들은 그 순간 무행위로 됩니다.

일단 했으면 그것은 끝났습니다.

 

 

어떤 표현을 부여할 때,

그것은 체험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대가 조금이라도 존재성을 느낄 때 그것은 여전히 무지이고,

그 즉시 진아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실재가 없는 단 하나의 지점도 없습니다.

그대는 대상들을 통해 그것의 존재를 경험하지만

이 모든 것은 무입니다.

그것은 무소부재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그대가 실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무지를 제거하려면 ‘지’가 필요하지만,

결국 둘 다 실재 속으로 해소되어야 합니다.

진아에는 무지도 지도 없습니다.

 

 

그대가 교회나 사원에 기도하러 갈 때,

그대는 신 앞에서 거지가 됩니다.

그대는 먼저 자신을 위해 구걸하고,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십시오. 매일이 오늘입니다. 실재 안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어떤 과거-현재-미래도 없습니다.

일체를 환영한 다음 그것을 던져버리십시오.

 

 

여러분 모두는 하나입니다. 형상과 이름만이 다를 뿐입니다.

잠을 잘 때는 여러분은 존재하지 않는데, 더 말해 무엇합니까?

그 ‘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왕과 거지 모두 잠이 들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습니다.

깨어나면 “나는 왕이다.”, “나는 거지다.”고 합니다.

그 마음으로 인해 일체가 진행됩니다.

마음을 ‘무심’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무심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를 뜻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려고 달려갑니다.

어떤 일도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때,

그 때가 무심입니다. 세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것은 하나의 송장이라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힘이 있는 동안은 몸이 활동하지만 연결이 끊어지면

몸은 끝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면,

그 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세계의 주요 요소로 볼 때는 “나는 아무개다”라고 말합니다. 이해로 일체를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말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토대는 참된데, ‘그대 없는 그대’입니다.

그것은 늘 있지만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누구도 ‘보는 자’가 아니고, 누구도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토대는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토대가 없으면 세계가 어떻게 남아 있겠습니까?

‘보는 자’가 되지 말고, ‘피고인(행위의 책임자)’이 되지 마십시오. 덕, 사랑, 선행과 그 상대물들 같은 마음의 소산에 대한 이끌림이 속박을 창조합니다. 여러분은 이원성을 동반자로 데리고 있고,

죽을 때에는 그 선행과 악행들이 남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반사됩니다.

 

 

기쁨, 고통,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십시오.

이해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안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조사해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화분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1초만에 깨트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원합니다.

그래서 평화로운 곳에 가기를 좋아하지만,

그 때 그대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평화롭습니까?

그것(평안)을 넘어서야 합니다.

평안은 하나의 개념 혹은 상태일 뿐입니다.

그와 같이 이해하십시오.

 

 

모든 감각기관이 ‘힘’과 더불어 작동하지만

여러분은 그 힘을 볼 수 없습니다.

일체를 돌아가게 하는 너무나 미세한 그 힘을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무’이기 때문입니다.

그 힘은 ‘영’에서 시작하지만, 실재는 ‘영’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래서 찰나만에, 마치 꿈속에서 그것을 보듯이 일체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겁니다.

 

 

만약 에고가 깨어지면 그대는 보편적 의식, 즉 ‘모든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의식 또한 환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실은 무지가 ‘의식’이나 ‘지’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의식의 근원’ 그 자체가

곧 궁극적 실재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대는 전체 창조계, 곧 세계 의식(‘지)이 되지만

이 역시 환입니다,

소위 ‘보편적 의식(우주의식, 신의식)’이 되는 이 에고가

에고들 중 최악입니다.

 

 

“나는 의식이다”고 말하는 것도 무지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재를 향한 길에 있어서는 장애입니다.

궁극적 실재 안에는 의식도 없고 무지도 없는데,

그것이 그대의 실체입니다.

 

 

세계의 모든 중생은 이 의식(‘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깨달았다”는 식으로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환을 먹여 살릴 뿐입니다.

 

힘은 힘으로 돌아가고, 5대 원소는 5대 원소로 돌아갑니다.

 

 

그대가 잠을 자면 몸과 마음 둘 다 잠듭니다.

그대가 ‘영(제로)’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대는 말합니다.

뭔가가 그대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힘’입니다. 그대 자신의 근원으로 나아가면 그대가 사라집니다.

그것을 ‘힘’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전기가 힘인데, 그것이 전구에 연결되면 빛을 발합니다. ‘힘’이 몸 안에 들어가면 ‘지’가 됩니다.

‘지’에 접촉하면 ‘지’는 사라집니다.

‘지’가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대의 실체가 ‘지’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 실재는 ‘지’와 ‘무지’를 넘어 있습니다.

만약 ‘지’를 이해하거나 접촉하면

그것은 사라지고 ‘그대’가 남습니다.

‘지’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것은 에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는 “나는 안다. 내가 본다”고 하지만 그것은 꿈속에 있습니다. 지금 그 행위자가 누구입니까? 누구도 행위자가 아닙니다.

선풍기에 전기를 연결하면 그것은 돌아갑니다.

전기가 ‘내가 선풍기를 돌린다’고 말합니까?

전기는 그냥 ‘힘’일 뿐입니다.

‘힘’이 몸에 연결되면 ‘지’가 옵니다. ‘지’는 “나는 안다. 이해한다”를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 에고가 옵니다,

‘나’는 “내가 안다”고 말할 때 옵니다.

실재가 무엇인지 그대는 모릅니다.

왜입니까? 바로 그대가 ‘그’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없애려면 눈을 감으십시오. ‘그대’와 ‘힘’만 남습니다.

하늘 혹은 허공으로 인해 우리 눈이 모든 것을 봅니다.

그런데 즉각적으로 일체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눈을 감을 때).

이 탁자에 불이 붙으면 그것은 재가 됩니다.

아무 존재성이 없습니다. 바람이 불어오가 불어갑니다.

그것이 어디서 왔고, 어디서 끝나겠습니까? 이해가 와야 합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마음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대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그대는 자지 않고, 말하지 않고, 그 밖에 무엇도 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느끼는 것들도 마음이니 그것도 잊어버리십시오.

‘나는 하고 있지 않다’는 그 생각은 그대가 분별하는 것을 도와주는 하나의 가시와 같습니다.

그러면 그 생각 역시 실재에 흡수됩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나 저것을 하고 있지 않다.” 역시

하나의 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는 실제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은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 마음도 흡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도처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에 내가 없습니까? ‘나는 안다. 내가 한다. 나는 이해한다’와 같은 생각들을 무효화하여 이 마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참되지 않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수행을 하십시오. 마치 잠 속에서 일체가 일어나지만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나는 말하고 있지 않다. 나는 먹고 있지 않다.’

그것이 그대의 이해여야 합니다.

‘나는 옳고 그는 틀렸다.’와 같은 온갖 생각들이 그대의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감정이나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올 때는,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여 그릇된 관념들을 제거하십시오.

일체는 영(제로)에서 시작해 영으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를 갖고 있다.” 거나 “나는 스승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에고입니다. 조심하십시오.

 

 

공간이 있는 한 그대가 일체를 봅니다.

공간이 없으면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 안의 일체가 그릇된 것입니다.

에고가 ‘지’이고, ‘지’가 마음이고, 에고가 마음입니다.

진정한 이해가 올 때 일체가 버려집니다.

 

‘힘’으로 인해 여러분은 일체를 합니다.

‘힘’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비난받거나 공적을 취하지 않습니다. 힘은 “나는 힘이다”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본다”고 말할 때 ‘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저 ‘힘’을 가지고 여러분이 봅니다.

그 ‘힘’은 보지 않습니다. 마음은 ‘힘’과 함께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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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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