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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받아들임: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Radical Acceptance:Tara Brach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10.19|조회수44 목록 댓글 2

잘함과 잘못함의 개념 너머에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겠다.

영혼이 그 잔디에 누울 때,

세계는 너무 충만해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개념,언어, 문구는 서로

어떠한 의미도 만들지 않는다.

ㅡ루미 (Rumi)

옮긴이의 이야기 <서문에서...>

'늪에서 빠져 나오려면?'

늪에 빠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나 몸에 힘을 주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은 늪 속으로 더 깊이 빨려 들어간다. 빠져 나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깊이 빠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때는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허우적거리는 행동을 멈추고 마치 늪을 끌어안듯이 엎드려서, 가능한 한 수평으로 최대한 넓게 몸을 늪에 밀착시킨다.

그런 다음 천천히 낮은 포복을 하듯이 기어서 나온다.

이 책에서 자주 사용되는 '트랜스(trance)'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이 말을 "의식이 없고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 못하는 가수면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무가치감의 트랜스'는 자기 스스로 불완전하고 무가치하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다. 이는 마치 늪과 같아서 일단 빠지면 거기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 든다. 어떤 사람들은 무가치감의 트랜스에 빠져들어 속으로는 자기를 무가치하다고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자기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와는 달리 무가치감의 트랜스를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삶을 체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저항하든 체념하든 결과는 같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공허를 메우려고 음식이나 술 또는 약물을 탐닉하거나, 인간관계에 집착하거나,

일중독에 빠져도 트랜스는 강화되고, 연약한 자기를 지켜줄 보호막 안에 숨어도 트랜스는 강화된다.

트랜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늪에서 빠져나올 때처럼 먼저 트랜스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트랜스를 받아들여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받아들일 때 변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매 순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감싸안는 훈련을 하면, 자유와 사랑이 우리 본연의 모습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스토리에 빠져 미래를 위해 살거나

과거를 재탕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미래를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놓치는 것이다.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근본적 수용'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가치감의 트랜스에서 벗어나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그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근본적 수용은 마음챙김으로 자신의 경험을 명확히 보고 자비로 감싸 안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아기 새가 수많은 비행 연습 끝에 허공을 자유롭게 날듯이, 우리도 훈련을 통해 마음챙김과 자비라는 근본적 수용의 양 날개를 단련해야만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다. ..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일하고, 같이 사랑한다.

붓다는 "좋은 사람들과의 우정과 교제의 유대는 성스러운 삶의

전부"라며 상호간의 지지가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깨우는데 중요함을 강조했다. 저자는 마음챙김과 자비가 함께하는 인간관계는 영적자유를 담는 성스러운 그릇이 될 수 있다고 썼다. 모든 인간관계는 우리를 트랜스에서 온전하게 하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어느 누구도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을 만난 당신은 이제부터 행복해지는 연습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깨닫는다면, 자신이 사랑이고 자유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너 자신을 사랑하라!'

자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면

공허감이 생기고...

그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음식이나 술, 약물을 탐닉하고

인간관계에 집착하거나, 일중독에 빠지고

결국은 스스로 무가치감의 트렌스에 빠지게 된다고...

'조금 슬퍼도 괜찮아! 조금 힘들어도 괜찮아!'라고

자기자신를 위로하고 사랑하면

세상도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

"오늘 하루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나요?"

.

선물로 받은 오늘!

나 자신을 위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불완전하고 무가치하다는 믿음은 우리가 진실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다른

사람들과 늘 가깝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우울감이나 절망감이 깔려 있다. 만약 사람들이 우리가 지루하거나 어리석고, 이기적이거나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만약 우리가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다면 결코 친근하고 낭만적인 방식으로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편하게 느끼고, 맘 편히 충분히 수용된다고 느끼는 일체감을 경험하길 열망한다. 그러나 무가치감의 트랜스에 빠지면 일체감의 달콤함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 …

우리는 신체적 질병이나 정서적 우울을 나쁜 유전자 혹은 자기관리와 의지력 결여에 따른 결과라고, 즉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실직이나 고통스러운 이혼이 개인적 결함의 반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단지 조금 더 잘했더라면,

좀 달랐더라면 일이 제대로 되었을 거라고 여긴다. 다른 누군가를 탓할 수도 있지만, 애당초 그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것에 대해 여전히 자신을 탓한다.

 

자신이 고통을 겪고 있지 않더라도 가까운 배우자나 아이가 고통스러워한다면, 우리는 이를 자신의 부족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증거로 여기기도 한다. (27~28)

자신을 탐탁하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대개 결점을 정화하고 초월할 가능성을 제안하는 이상적인 세계관에 끌린다. 이러한 완벽을 향한 탐구는 제자리를 찾도록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우리는 전체성과 선함이 언제나 우리의 본질이라는 메시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경청하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삶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 느낀다. (32)

우리 대부분은 가족, 이웃, 지역사회 등에 대한 긴밀한 유대감 없이 성장했기 때문에, 자신이 이방인 같고, 혼자이고,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게 당연할 수 있다. 사람의 초기에 우리는 가족이나 학교 친구 혹은 직장 동료 같은 소속 집단이 모두 우리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배운다. 성공하라고, 똑똑하고 매력 있고 능력 있고 힘 있고 돈이 많아 남보다 뛰어나 보이라고

압력을 받으며 서로 경쟁한다. 누군가 항상 점수를 매기고 있다. (33)

불완전한 우리 부모 역시 불완전한 부모들 밑에서 컸다. 두려움, 불안정, 욕망이 세대에 걸쳐 전승된다. 부모는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녀들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또한 아이들이 특별하기를, 다시 말해 경쟁적인 우리 문화에서 남보다 더 똑똑하고, 더 많이 성취하고, 더 매력적이기를 원한다. 부모는 아이들을 두려움(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욕망(아이들이 자신들의 뜻을 잘 따라주기를 바라는 욕망)의 필터를 통해 본다.

우리 문화의 전달자로서, 부모는 보통 아이들에게 분노와 두려움이 나쁘다고, 즉 그들의 소망과 좌절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전한다. 야단치는 상황에서의 메시지는 "너는 나쁘다. 너는 걸림돌이다. 너는 쓸모없다"이다. 그러나 덜 극단적인 상황에서조차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욕구와 두려움과 견해가 별 영향력이 없다는 것과, 소속감을 느끼려면 달라지고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을 학습한다. (36)

 

불완전함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존재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45

 

나는 정말로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던가? 아마 내담자나 친구들을 돕는 것은 단순히 칭찬이나 인정을 얻는 수단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박사학위를 따고, 좋은 요가 수행자가 되고, 착해지려고 했던 나의 모든 노력은 불안정하고 결함 있는 사람의 스토리에 모두 딱 들어맞았다. 나에 관한 한 그 어떤 것도 순수하다거나 믿을 만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65)

나는 밤새도록 상처의 고통과 커지는 열린 마음 사이를 오갔다.

비난의 목소리가 더 커지려고 할 때마다, 그 배려의 존재를 기억할 수 있다면 비난을 들어도 그걸 믿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았다.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거나 내가 아닌 무엇인 척하는 스토리가

몇 차례 떠올랐을 때, 나는 그 생각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단지 가슴에서 아리는 타박상 정도만을 느꼈다. 저항하지 않고 고통에 마음을 열자,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유연해지고 더 부드러워졌다.

내 마음속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이 주장한 것처럼

내게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수용하기를

원한다." 나의 노력과 불안정이 내가 '에고에 붙잡혀 있음'을 의미할지라도, 나는 나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고 존중하고 싶었지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이기적이고 비판적인 면까지도 조건 없이 수용하고 싶었다. 나는 이러한 끊임없는 모니터링과 비판을 멈추고 싶었다.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수용하기를."이라고 기도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치 내가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나를 통해 움직이는 모든 삶의 파도를 함께 수용할 수 있었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어."라고 말하는 두려움의 목소리조차 수용되어 이 깊고 진정한 보살핌을 오염시킬 수 없었다. (66)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루미(Rumi)는 우리의 상처와 깨어있음

간의 관계를 분명히 알았다. 그는 "외면하지 마라. 붕대를 감은 곳에 시선을 유지하라. 거기가 당신에게 빛이 들어가는 곳이다."라고

조언했다. 우리가 부정하거나 피하지 않고 붕대 감긴 부분을 직접

볼 때, 우리의 인간적 취약성에 유연해진다. 우리의 주의가 지혜와 자비의 빛이 들어오게 한다. (68)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중요한 통찰을 제시했다. “신기한 역설은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적 속성은 깨어나서 번성하는 것이다. 우리 경험의 모든 부분에 대해 근본적 수용을 적용하는 것은, 진정한 지속적 변화로 가는 길을 여는 근본적 변화임을 나는 거듭 확인했다. (70)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의 경계는 우리 자유의 경계다. 77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면 내면의 어둠은 더 커진다.

91

우리 마음에서 만나거나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모든 신경증과 고통의 원천이다. 94

만약 훈련받지 않은 어린아이가 노력 없이 타고난 방식으로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면, 그런 상태는 인간 존재의 자연스러운 부분임이 틀림없다. 97

우리 삶 속의 모든 용은 우리가 단 한 번 아름다움과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공주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은, 가장 깊은 본질에서는 우리의 사랑을 원하는 무기력한 존재일 것이다. 105

아주 잠깐만이라도 오해의 악순환을 멈출 때, 문제 뒤에 숨어 있는 무의식적 신념과 느낌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107

질문하기는 분석적 파헤침이 아니다. "왜 이런 슬픔을 느끼는가?"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더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현재 상황을 야기한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거로 더 거슬러 올라가 스토리를 파헤치는 서양심리학의 접근과 달리, 질문하기는 정확하게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경험에 깨어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질문이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것에 관한 판단과 사고를 드러낼 수도 있지만, 즉각적인 느낌과 감각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120)

삶을 바라보는 고정된 생각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에 자유롭게 온 마음을 다해 "예스"를 말하게 된다. (131)

 

비난이나 현재 상황에서 물러남을 통해 삶을 통제하려는 모든 전략들은 우리를 바로 그런 순간의 생생한 경험으로부터 차단시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우리는 멈춤을 통해, 반사적 생각과 행동에 매몰되는 대신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직접 의식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마음과 몸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시작한다. 분노가 일면 몸은 긴장되고 가슴은 터질듯한 압박감으로 가득 찬다.

몸의 감각은 삶의 모든 양상을 직접 경험하는 시작점이다. (145)

유쾌하거나 불쾌한 감각은 너무 빠르게 정서와 정신적 스토리의 연쇄반응을 촉발시키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즉각적인 감각 경험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 수행에서 중요하다. 153

 

우리는 경험에는 결코 확실하거나 고정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감각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감각은 나타나고 사라지며, 강도, 특징, 위치도 수시로 변한다. 우리가 신체적 경험에 긴밀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것이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이 사실이 불편하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할 수 있다. (154~155)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159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아니라

“경험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다. 192

욕구는 대개 불편하긴 해도 나쁜 것은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구의 끌어당김은 생존 장치의 일부다. 그것은 우리가 먹고, 성행위를 하고, 일하러 가고, 하고 있는 일을 잘하도록 유지해준다. 또한 욕구는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자비로운 의식을 깨달으면서 살게 도와주는 영적 수행을 할 마음을 우리에게 준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삶의 에너지가 심오한 깨달음을 위한 연료가 되기도 한다. 욕구는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장악해버릴 때만 문제가 된다.

'중도'의 가르침은 욕구에 붙잡히거나 욕구에 저항함 없이 욕구와 관계 맺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음식과 성, 사랑과 자유 등 욕구의 모든 종류와, 약한 선호부터 가장 강렬한 열망까지 욕구의 모든 강도에 적용된다. 욕구에 마음챙김할 때 욕구를 구체적인 의식으로 경험할 수 있고, 욕구의 감각과 생각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쉽지는 않지만 근본적 수용의 명확한 바라봄과 자비를 기를 때, 이 자연적인 힘에 온전히 열리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193)

만약 우리의 욕구가 단순하고 일시적으로 만족될 수 있다면, 우리의 대응방식도 단순해진다. 목마르면 마시고, 피곤하면 자고, 외로우면 친구와 대화할 뿐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렇게 단순한 것은 극히 드물다. 우리의 욕구는 대부분 그렇게 쉽게 만족되지 않는다. 무가치감의 트랜스에 붙잡힌 우리의 욕구는 결국 불완전함에서

오는 불안을 완화시키는 데 고착된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분투한다.

일, 자녀 양육, 인간관계, 건강, 외모 등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항상

충분히 좋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이 항상 행복하고

건강하며, 우리를 사랑하고 존중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뭔가가 빠졌거나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끌려 다닌다. 우리를 괴롭히는 매일의 욕구는 우리가 편안해지고 더 근원적인 갈망을 의식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우리는

미래가 현재 순간에 얻지 못하는 만족을 제공해주기를 희망하며

끊임없이 다음 순간에 기댄다.

욕구(Desire)라는 단어의 라틴 어원인 desidus는 '별로부터 멀리'라는 의미다. 이것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별은 모든 생명의 에너지 원천이고 순수한 의식의 표현이다. 이 살아 있음과 깨어있음은 우리가 가장 깊이 열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별 안에 있기를, 우리 자신의 본성을 깨닫기를 열망한다. 하지만 우리의 욕구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에 습관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우리는 '별로부터 멀리'있다고 느낀다. 다시 말해 삶으로부터, 우리 존재의 핵심인 의식과 사랑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존재의 원천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느끼면, 우리는 욕구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식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195~196)

로렌스(D. H. Lawrence)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을 때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 인간은 오직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만 자유롭다." 당장의 만족감을 얻으려는 동기로 "그저 좋아하는 것"을 한다면, 우리는 계속 끌려다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생산성이나 열중도가 아무리 높아도,

어떠한 큰 인정을 받더라도 무가치감의 트랜스를 타개할 수 없으며, "내면 깊은 곳의 자기"와 만날 수 없다. 로렌스가 지적한 것처럼, 내면 깊은 곳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은 "뛰어드는 것"이다. 우리 가슴의 열망을 듣고 반응하기 위해서는 헌신적이고 진정한 깨어있음이 필요하다. 대체물을 쫓아가는 껍데기 세계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뛰어드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203)

중독된 욕구가 우리 삶을 장악할 때

욕구가 강해질 때 마음챙김은 사라진다. 윌라 캐더(Willa Cather)는 "단지 하나의 큰 덩어리, 욕구만 있을 뿐이다. 욕구가 클 때 그 앞에서 모든 것은 작아진다."고 말한다. 욕구를 생명력으로 존중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삶을 장악하면 괴로움을 야기한다. 음식에 대한 자연스러운 갈구는 아이스크림, 사탕, 감자칩 같은 음식, 기분 좋은 음식 혹은 우리의 느낌을 무디게 하는 음식에 대한 통제할 수 없는 열망이 될 수 있다. 성과 애정에 대한 갈망은 우리를 규정하고 기쁘게 해주는 어떤 사람에 대한 고통스러운 의존이 될 수 있다.

집과 옷에 대한 욕구는 세 채의 집과 신지도 않은 새 신들로 가득 찬 신발장을 소유하도록 강요하는, 채워질 수 없는 탐욕이 될 수 있다. 소속되고 사랑받으려는 근본적인 열망은 대체물에 대한 끈질긴

갈망이 된다. (203~204)

유대-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교 등 대부분의 주류 종교는 우리의 욕구, 열정, 탐욕이 고통을 야기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분명 진실일 수 있긴 하지만, 욕망의 위험성에 관한 일방적 가르침은 흔히 자기혐오를 심화시킨다. 우리는 신체적, 정서적 존재의 갈망을 초월 혹은 극복하거나 어떻게든 관리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야성적이고 강력한 우리 본연의 열정을 믿지 말라고, 그것들이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오드르 로드(Audre Lorde)는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깊은 열망을…… 두려워하도록 길러졌다. 그리고 깊은 열망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그것들을 의심하게 만들고, 우리를 고분고분하고 충실하고 복종적이게 만들며, 스스로 만든 많은 억압들을…… 받아들이게 한다." (207~208)

욕구에 끌려간다고 느낄 때 '멈춤'

우리는 자신이 바라는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집착 때문에 더 근본적인 갈망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거기에 붙잡혀 있게 된다. 멈추어서 우리의 경험에 더욱 깊이 주의를 기울일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된다. (224)

멈춤 후에도 당신이 욕구하는 것을 여전히 원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욕구의 아래에 깔린 긴장과 고통을 알아차리면서 행동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경험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다고 느껴지던 갈망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사라지게 된다. 그 욕구가 자연스럽게 다시 일어나겠지만,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행위를 멈추고 욕구를 관찰하게 되면, 그로 인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할 자유가 더욱 커질 것이다. (225)

때로는 먼저 타인의 괴로움에 주의를 집중했다가 그다음에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친절과 연결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가 괴로움을 느낄 때, 그 괴로움을 저항이 아니라 보살핌으로 대할 때 자비의 마음이 깨어난다. (284)

누군가의 관심이 우리가 두르고 있는 철갑을 녹여내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속상할 때 누군가가 관심을 기울여 얘기를 들어주거나 포옹해주는 순간, 우리는 봄 눈 녹듯 녹아내리고 울음이 난다. 틱낫한 스님이 제안한 것처럼, 누군가 우리에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고통을 염려합니다."라고 말할 때 깊은 치유가 시작된다.

우리는 남에게는 그런 관심을 아주 기꺼이 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드러운 주의를 우리 자신에게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잠자는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듯 자신의 뺨이나 가슴에 부드럽게

손을 올려놓을 수 있다. 친절과 이해의 말로 자신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285)

삶의 고통이 보편적 괴로움의 표현이라는 깨달음은 근본적 수용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우리의 우울, 두려움, 분노는 문제라기보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고", 우리의 깨어남을 위해 쓰일 수 있다. 우리의 고통을 저항의 괴로움이 아니라 수용의 친절함으로 맞이하면 우리 가슴은 무한한 자비의 바다가 된다. 우리는 '세상의 어머니'처럼 일어나고 사라지는 괴로움의 파도를 애정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자비로운 존재가 된다. (303)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 앞마당의 나무 혹은 가지에 앉아 있는

다람쥐에게 온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일 때마다, 이 살아 있는

에너지는 우리 존재의 친밀한 일부가 된다. 영적 스승인 크리슈나무르티(J. Krishnamurti)는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 실제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주의는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삶에 감동받고,

자연스럽게 마음이 더 열리고 더 연결된다.

 

사랑하고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 간에 그리고 우리 주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마음이 열려있고 관대하고 사랑으로 채워져 있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느낀다. 마음이 딱딱하거나 무감각하다고

느낄 때조차 우리는 여전히 보살핌에 관심을 갖는다. (312)

마하트마 간디는 자기가 밟아온 영적인 길을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미워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랜 기도 수행을 하며 40년 넘게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없다. 나는 이것이

거창한 주장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겸허히 그렇게 주장한다." 자신의 삶이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우리는 미움과 분노 및 모든 형태의 증오가 우리 삶의 보편적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싫은 감정이 생겨나는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된 다른 존재로 느끼도록 아주 깊이 조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간디가 발견했듯이, 스스로 훈련을 해야만 이러한 습관을 녹여내고 모든 존재를 근본적 수용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312~313)

우리가 겉모습 너머를 보는 훈련을 한다면 모두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더 테레사에게 이것은 모든 사람이 신성한 불꽃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참된 본성은 영원히 빛나는 의식이다. 자신과 타인을 조건없는

자비로 수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수인 순수한 의식과 우리 본연의 인간적 취약성 둘 다를 인정함을 의미한다. 자신에 대한 자비는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자비를 일으킨다. (313)

다른 사람의 요구에 자비로 반응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분노, 부담감, 역겨움, 무력감, 죄책감, 두려움 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방어적으로 딱딱해진다 해서 보살로서 실패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타인에 대한 자비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에 앞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친해져야 함을 우리가 알도록 해준다. (329)

우리는 때로 가장 가까운 사람을 비(非)실재로 대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의 인생을 잘 안다고 여기기 쉬우며, 그들도 우리처럼 항상 변화하며 늘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그들 또한 살면서 상처와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으며 힘든 내면의 삶을 살고 있을 수 있음을 보지 못한다. (332)

주의를 더 온전하게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삶에서 친절이 가장

중요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타인의 취약성에 마음을 열면, 분리의 장막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도움의 손길을 뻗게 된다. (335)

밝은 해가 얼음덩이를 녹이듯, 우리가 연결성과 친절을 느끼는

순간 주변 사람들이 편안하게 마음을 열도록 고무하는 따뜻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미소, 포옹, 경청, 기도로 자비의 원을 넓힐 때마다 잔물결이 끝없이 퍼져 나간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줄 때 우리의 친절은 세상을 통해 퍼져 나간다.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든 남에게 주어지든 상관없이, 부살의 자비는 편견 없이 모든 생명을 어루만져주는 보슬비다. (338)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남에게 해를 끼칠 때 그것은 우리가 악해서가 아니라 무지해서다. 무지하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의 삶과 이어져 있고, 집착과 미움이 더 많은 소외와 괴로움을 가져온다는 진신을 모른다는 뜻이다. 무지하다는 것은 의식의 순수성과, 우리의 근본적 선을 표현하는 사랑의 능력을 모른다는 뜻이다. (347~348)

용서받았음을 알게 되면 우리는 진정 자유로워진다. 특히 그 용서가 우리의 모자람을 자비로 감싸 안을 때는 더욱 더 그렇다. (363)

타인을 용서하기: 그 누구도 마음 밖으로 밀어내지 않기

삶의 모든 부분들처럼, 용서도 자연스러운 전개 과정이 있다. 대개 자기 자신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우리는 의지로 용서할 수는 없다. 용서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열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용서하려는 의도가 용서 과정에서 그처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하고자 하지만 별로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을 조금 열어 놓은 것이다. (365)

우리가 자신의 상처나 두려움을 드러내면, 실제로 사람들은 더 진실해질 수 있다. 하지만 남들이 그들 자신의 분노나 혼란 때문에 그같이 열린 태도로 이해하거나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런 상황을 잘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낼 때 우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때로는 상처를 입을 각오도 해야 한다. 그러나 철갑을 두르고 고립된 상태로 있는 것이 더 큰 상처가 되고 진짜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드러낸다.

취약성을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보상은 달콤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자비와 참된 친밀감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408~409)

그의 세계는 어느 날 한 친구가 "변하지 마. 난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멈췄다. 그 단어들이 가슴과 마음을 관통해서 흘러가게 하는 것이 마치 순수한 은총처럼 느껴졌다. "변하지 마, 변하지 마, 변하지 마. …… 난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역설적이게도, 그가 변화에 자유롭다고 느꼈던 순간은 그가 변화하지 않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을 때였다. (409)

근본적 수용이 인간관계에서 꽃피면,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자라나서 참나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좋은 양육이란 아이들이 스르로 사랑스런 존재임을 알 수 있도록 그들 내면의 사랑스러움을 거울에 비춰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남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그들 내면의 가치와 소속감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이 같은 근본적 수용을 받으면 우리 삶이 변화된다. 누군가에게 그에게 존재하는 선함을 비춰 보여준다면, 우리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을 준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선물의 축복은 그의 생애 전반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416)

질병이나 우울증이 개인의 책임이고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문화와 달리, 잠비아의 한 부족의 구성원들은 고통에 대해 비난받거나 고통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은 공유된 관심이고 모든 사람들의 삶의 일부이다. 고통은 한 개인에 속한 것이 아니다. 고통을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근본적 수용의 핵심이다. 삶의 어려움은 개인만의 것도 아니고 개인이 야기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변화하는 상태는 무수히 많은 변인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고, 마음을 열어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서로 수용하면 우리는 함께 치유된다. (418~419)

영적 깨달음은 아주 먼 또 다른 시간 혹은 장소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깨달음이 수 세기 전의 아시아나 수도원에서 가능했거나 우리보다 훨씬 더 헌신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길을 따를 때조차 우리는 사향노루 같을 수 있다. 실제로는 바로 우리의 내면에 있으며, 단지 멈춰서 주의를 깊게 하면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는 데 우리의 삶을 쏟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마음이 산란해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길 위에서 삶을 허비한다. (428)

공(空), 즉 '아무것도 없음'은 삶이 비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빈 의식은 생생하게 인식하는 깨어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의식의 이런 성질은 인식, 즉 경험의 흐름에 대한 연속적인 앎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순간, 소리가 들리고, 떨림이 느껴지고, 형태와 색깔이 보인다. 이 앎은 즉각적이고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햇빛이 빛나는 하늘처럼, 의식은 의식 안에서 빛나며 또한 무한하여 모든 생명을 담는다. (437)

우리의 주의는 누군가의 아첨, 다음 주말 계획, 지저분한 주방의 모습, 반복되는 언쟁 등 항상 무언가에 고정되어 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마음속 영화에서 보는 드라마고 생각이다. 우리는 자신의 스토리와 욕망을 내려놓고 의식으로 방향을 돌림으로써 그물 너머로 발을 내딛게 된다. 이는 마치 프로젝터를 돌아보며, 영상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실제로는 빛임을 깨닫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든 스토리와 감정을 창조하는 근원인 '공'을, 모든 존재를 낳는 무형의 비옥한 공간을 바라본다. 거기서 우리는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본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의식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환상이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당신이 생각과 생각 사이의 공간을 바라볼 때, 그물에 난 구멍들을 통해 의식 자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잠시 조용히 앉아서 단지 들을 수 있다. 소리들이 어떻게 생겨나고 무형의 의식 속으로 사라지는지 알아차려라. 소리의 시작과 소리의 끝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그 사이의 공간도? 이 모든 것이 의식에서 일어나고 있고 의식을 통해 지각된다.

바라보고 놓아주고 자유로워져라. 이는 획기적이며 직관에 반하는 명령이다. 경험을 통제하고 해석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우리의 집착을 내려놓는 훈련이다.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깨어서 바라보면, 우리의 심오한 성품인 신비와 아름다움이라는 고향에 도달하게 된다. (438~439)

“사랑에 찬 현존(loving presence)’이라는 글귀를 좋아합니다.

이 사랑의 현존을 실현하고 그것을 신뢰하며 그 속에 머무는 것이 저의 깊은 열망입니다. 제게 부드럽고 연민에 찬 자각은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자, 우리 존재의 본질로 여겨집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어떤 순간이라도 은총으로 가득 찬 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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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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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까치발 | 작성시간 23.11.0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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