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후 빨랫감 - 깨달음, 그 뒤의 이야기들
After the Ecstasy, the Laundry:
How the Heart Grows Wise on the Spiritual Path
This being human is a guest house.
Every morning a new arrival.
이 존재, 인간은 여인숙이라
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당도한다.
A joy, a depression, a meanness,
some momentary awareness comes
as an unexpected visitor.
한 번은 기쁨, 한 번은 좌절, 한 번은 야비함
거기에,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온다.
Welcome and entertain them all
Even if they’re a crowd of sorrows,
who violently sweep your house
empty of its furniture.
그들을 맞아 즐거이 모시라
그것이 그대의 집안을
장롱 하나 남김없이 휩쓸어 가버리는
한 무리의 슬픔일지라도.
Still treat each guest honorably,
He may be clearing you out
for some new delight.
한 분 한 분을 정성껏 모시라.
그 손님은 뭔가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 내면을 비워주려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The dark thought, the shame, the malice,
meet them at the door laughing,
and invite them in.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이 모든 것을
웃음으로 맞아
안으로 모셔 들이라.
Be grateful for whoever coms,
because each has been sent
as a guide from beyond.
그 누가 찾아오시든 감사하라.
모두가 그대를 인도하려
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리니.
- 페르시아 신비주의 시인 <Rumi>
Midway along our road of life I woke to find
myself standing alone in a dark wood.
삶의 행로를 한참 가다가, 나는 문득 깨어 어두컴컴한 수속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i
우리를 영적인 행로로 몰고 가는 그 모든 힘들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 안의 어떤 것이 우리가 고생스럽게 일만 하려고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내야 할 신비한 힘이다.
때때로 내면의 무엇인가가 깨어나서 우리 영혼을 일상적인 현실의 테두리 바깥으로 밀어낸다.
무수한 문들이 영의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그것이 찬란한 아름다움이었든 혼돈과 슬픔의 어두운 숲이었든간에, 중력만큼이나 확실한 어떤 힘이 우리를 끊임없이 영적인 행로로 끌어당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영적인 빛 없이, 그리고 연결감이 없이 살 때,
우리는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내면의 깊은 공허를 느끼게 된다.
꼭 있어야만 할 어떤 것이, 시야의 가장자리를 어른대는 어떤 것이,바람이 불 때까지 그 존재를 잊어버리곤 하는 공기처럼 항상
우리와 함께 있던 그 어떤 것이 빠져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빛속에 머물라. 그것은 물질적인 차원의 빛이나 어떤 이미지가 아니다.
진정한 빛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신비함 자체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힌트는 주변에 언제나 널려 있다.
마음이 열리면 몸도 변한다.
가슴이 열리면 영적 삶의 모든 요소들이 드러난다.
하루하루의 삶이 저마다 크게든 작게든, 놀랍게든 대수롭지 않게든, 우리를 향해 영혼의 본래 고향으로 돌아오라며 손짓을 보내고 있다.
'신비로운 부름'은 우리 눈 앞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자신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The true task of spiritual life is not found in faraway places or unusual states of consciousness, it is here in the present. Learning to live joyfully in the present, to 'let go', to accept whatever comes our way, to live in the moment, is the journey inward toward spiritual enlightenment."
영적 생활의 진정한 일거리는 어느 머나먼 곳이나
비범한 의식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현재에서 즐겁게 사는 것, 생각을 '내려 놓아라'는 것,
우리의 길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
그 순간에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은
영적 깨달음을 향한 내면적인 여행이다."
그것은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지혜롭고 공손하며 친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환영의 정신을 요구한다.
When the bird and the book disagree,
always believe the bird,
새와 책이 서로 다른 말을 하면,
늘 새의 말을 믿도록.
제임스 오뒤봉James Audubon
내가 인도와 아시아 지역에서 만난 수많은 스승들 가운데 어느 누굴도 미국에 데려다놓고 집과, 두 대의 자동차, 배우자와 세 명의 자녀들과 직업을 갖게 하고, 보험금과 세금을 지불하면서 살게 한다면 .... 그들은 하나같이 허우적거릴 것이다.
- 피르 빌라얏 칸의 말
슬픔이든 분노든 갈망이든 불안이든 간에.
마음을 닫히고 웅크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 안의 '못 다한 볼일'때문임을 우리는 알게된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향해 마음을 닫게 만들었던 힘들과
다시 대면해야 한다.
깨어나면서 우리는 우리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그것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 우리가 자신에게 지껄이는 모든 이야기들- 심판, 문제,
작은 자아의 느낌을 주는 모든 정체성, '두려움 덩어리'- 이 한 순간에 풀려나가고 은총과 해방의 영원한 느낌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무(無)이자 모든 것: 공(空)의 문
'무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비어있음 이나 무아(無我)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혼란스러워진다.
물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물고기는 그것을 설명하기가 힘들듯이,
그것은 설명하기가 어렵다.
명상 속에서는, 모든 것을 '나의 경험'이라고 무의식적으로 뭉뚱그려 버리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좀더 고요하고 덜 소유적인
관찰 행위로 주의를 되돌릴 수 있다. 이 고요한 관찰을 통해 소위 무아, 혹은 에고가 없는 상태를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을 분리되고 고정된 존재하고 느끼던 평소의 인식이
단지 마음이 지어낸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누구라는 일상적인 자아의 느낌은 고요와 평화 속으로 사라지고 존재의 순수한 경험만이, 그 경험을 소유할 누구도 없는 가운데 경험된다. 그것은 모든 현상의 비어있음 이다.
이 문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데
가장 흔한 세 가지 방법은
명상, 깨어난 이와의 만남, 그리고 자신이 투명해질 정도로 깊은
고독 속에 몰입하는 것을 들 수 있다.
홀로 있어도 반드시 침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홀로 있어도 매우 소란할 경우가 많다.
초감 트룽빠가 말하는 소위 '잠재 의식의 가십' 곧 몸과 마음이 쉴새 없이 지껄여대는 말로 마음은 꽉 찬다.
명상 수행은 이 소란을 뚫고 진정한 침묵으로 가는 길을 찾게 해 준다. 외부로부터의 침묵 몸의 침묵과 마음의 침묵 등 수십 가지 각기 다른 수준의 침묵이 있다.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의 가슴은 빛으로 충만하다.
깨달음은 실재한다. 깨어나는 것은 가능하다.
끝없는 자유와 환희, 신과의 합일, 영원한 은총 속에서 깨어남…..
이러한 황홀한 체험은 사실 당신이 아는 것보다 흔하며, 그리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가지 진실이 덧붙는다.
그 황홀한 체험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깨달음은 우리 눈앞에 세상의 참모습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 우리 혼의 변성變性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것은 지나가버린다.
깨달은 상태 그대로 삶에서 은퇴하게 되지는 않는다.
밀월 여행 이후에는 결혼 생활이, 선거 당선 이후에는 고단한
정사政事가 뒤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영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황홀경에서 깨어나면 생활이라는 이름의 밀린 빨래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의 수행담은 깨달음의 환희와 영광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 후 그들이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본다면? 깨달음을 성취한 선사禪師가 처자식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황홀경 이후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하면 깨달은 상태 그대로,
환희심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의문을 밝히기 위해 나는 영적인 수행에 오랜 세월을 바친 명상 지도자들이나 수도원장들 같은 서양의 스승들과, 라마(Lama,
‘더없이 훌륭한 사람’, 라마교의 고승)들을 만나서 대화했다.
그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입문과 깨달음 그리고 그 후
여러 해에 걸쳐 이어오고 있는 공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한 서양인 선사는 첫 견성見性이 58세 때 일어났는데, 당시 몇몇 도반들과 여러 해 동안 수행을 해왔고 동시에 가족을 부양하고
직업적 경력도 쌓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일주일씩 진행되는 참선 수련은 언제나 나에게 매우 강력했다.
마치 탄생 과정을 다시 반복하는 것처럼 강한 통증과 함께 묵은
감정이 풀려나오고 강렬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것은 수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몇 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번 참선 수련도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첫날, 나는 강렬한 감정
그리고 온몸을 훑으며 흘러나오는 에너지와 싸워야 했다.
나는 마치 죽거나 산산이 부서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승은 내 곁에 바위처럼 앉아서 어둡고 거친 바다 위의 방향타처럼 나를 확고히 붙잡아주었다. 그는 내가 공안公案 속으로 몰입하여 자신을 그 속에 완전히 맡기도록 채근했다. 나는 내 삶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끝났는지도 분간할 수도 없었다.
그러더니 놀랍도록 감미로운 느낌이 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창 밖에 세 그루의 어린 자작나무가 보였다. 그것은 마치 내 가족 같았다. 나는 내가 이 나무들에게 다가가 나무의 부드러운 껍질을 쓰다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나무가 되어 나 자신을 만졌다. 나의 명상은 빛으로 가득 찼다.
물론 전에도 이런 지복감至福感을 느껴본 적은 있었다. 참선하고 난 후 육체적인 통증에서 벗어나면서 지복감의 큰 물결을 느꼈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모든 안달과 몸부림이 사라지고 마음이 하늘처럼 광활하게 열리며 환하게 빛을 발했고, 자유와 깨어남의 황홀한 향기가 가득했다. 나는 마치 붓다처럼, 온 우주의 품에 안겨 몇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끝없는 평화와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세계였다.
삶의 위대한 진리는 너무나 명확했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었다. 그릇된 에고, 작은 자아의 욕망을 쫓아 우리는 마치 인색한 지주地主처럼 부질없는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모든 불필요한 슬픔 에 울었다. 그러다가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몇 시간 동안 터져나왔다. 모든 것이 완벽하며, 자신을 열어놓기만 한다면 매순간이 곧 해탈임을 깨달았다.
이런 체험이 있고 나서 여러 날 동안, 나는 이 한결 같은 평화 속에 잠겨 있었다.
몸은 붕 뜨고 마음은 비어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사랑과 환희의 에너지가 내 의식을 물결처럼 훓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통찰과 계시가 하나하나 찾아왔다.
카르마(業)의 패턴 속에서 삶의 스토리가 전개되어가는 과정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속세의 삶과 쾌락에 대한 집착을 버리려고
출가한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 깨달음은 너무나 환희에 가득 찬 경험이라서, 그에 비하면
우리가 집착하는 쾌락들은 너무나 시시하며 조잡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출가란 세상을 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얻는 것이다.
대개는 이 같은 위대한 깨달음의 묘사가 수행담의 대미를 장식한다. 깨달음이 오고, 그는 지혜로운 존재들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저절로 흘러간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 깨어난 사람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식의 인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내지 말고 이야기를 좀더 들어본다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몇 달 후 이 황홀경이 지나가자 좌절이 찾아왔다.
직장 동료가 나를 배신했고, 가족과 아이들과도 예전처럼 옥신각신했다. 여전한 것은 나의 가르침뿐이었다. 나는 영감에 찬 강의를 할 수 있었지만, 아내에게 물어봤다면 그녀는 남편이 시간이 지나니까 예전과 매한가지로 참을성 없고 짜증스러워 지더라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위대한 영적 계시가 거짓이 아니며, 현실의 배후에 늘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전과 그대로인 부분도
적지 않음을 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내 마음과 인격은 옛날이나 다름없고 신경질도 더 나아진 게 없다. 어쩌면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 그것을 더 예민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주적 계시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일상의 잘못을 바로잡아주고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훈을 가르쳐줄 요법을 찾고 있다.
영적 ‘전문가’가 되다 보니, 나는 운 좋게도 현대의 존경할 만한 수행자들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기독교 수도원의 성스러운 수녀들과 지혜로운 수도원장들을 비롯해, 유태교 신비주의자들, 힌두교도들,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들, 불교의 스승들, 그리고 융 심리학과 초개인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 다층의 의식 상태를 가정하여 초감각적인 자각을 중시하는 심리학 연구의 한 경향)의 지도적인 인물들과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런 이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보고 들음으로써 나는 문제점들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1990년대 초부터 나는 다양한 불교 종단의 스승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회합을 주선하는 일을 돕고 있다. 이것은 그 중에서도 다람살라 궁에서 가진 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주최한 회합에서
생긴 일이다. 방 안에는 자비로운 선사들과 라마들, 승려들 그리고 명상 지도자들로 가득했다. 동서양에서 온 스승들은 불교 수행이 오늘날의 세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과,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문제점들에 대해 토론했다. 우리는 많은 성공담과 기쁨을 서로
나누었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를 정직하게 털어놓는 시간이 되자, 영적인 삶이 조화롭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겪는 몸부림과 개인적인 신경증도 반영해주고 있었다.
독일에서 온 불교 지도자인 질비아 베첼Sylvia Wetzel은 불교계에서 여성이, 그리고 여성의 지혜가 제대로 존중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하소연했다.
그녀는 우리가 앉은 방을 둘러싸고 있는 황금 불상과 티베트 탱화들을 가리키면서, 그 성인들이 모두 남자임을 지적했다. 그리고는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라마승들과 다른 모든 지도자들에게, 눈을 감고 함께 명상을 통해 다음과 같은 영상을 그려보도록 권했다. 즉, 여성의 몸으로 화한 14대 딜라이 라마가 앉아 있는 방 안으로 자신이 들어서고 있는 광경을 떠올려보도록 했다. 개인차는 있었지만, 영적 지도자들의 영상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성 달라이 라마의 주위에는 역시 여성인 수많은 원로들과 붓다와 성인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또 그녀가 안내한 명상이 끝나자 방 안의 남자들은 모두 눈이 새롭게 뜨여진 듯한 표정이었다.
그 다음에는 영국 출신의 티베트 불교 비구니인 애니 텐진 팔모Ani Tenzin Palmo의 차례였다. 그녀는 티베트 국경 지대의 동굴 속에서 지낸 12년을 포함하여20년 동안 헌신적인 수행을 해온 승려로, 여성 수행자가 겪어야 했던 엄청난 시련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수도원의 변두리 지역에서만 지낼 수 있었으며, 가르침과 음식을 비롯해 어떤 식의 지원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달라이 라마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여성이 좀더 평등한 지위를 보장받도록 최대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모든 불교 국가의 원로들 대부분이 전통의 명목으로, 또는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을 내세워 이 개혁을 거부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이 회합에서 어느 참선 수련원 원장은 어머니와의 고통스러운 관계 때문에 여성 수행자들을 지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음을 고백했는데, 그러자 다른 이들도 이런 종류의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음을 털어놓았다.
우리의 토론은 이어 다른 형태의 무지들 – 이를테면 종파주의라든지, 일부 불교 스승들과 교계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는 권력 다툼이라든지, 또는 명상 지도자의 역할이 초래하는 외로움과 단절감이라든지, 혹은 지도자가 제자들을 권력이나, 재력으로, 또는 성적으로 학대한 사례 등등 –에 대한 이야기로 옮아갔다. 우리는 사적인 대화의 자리에서 좀더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모두들 고통스러운 이혼 경험, 두려움과 좌절의 시간, 다른 단체들이나 가족들과의 갈등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명상 지도자들은 또 스트레스와 병, 십대 자녀의 비난- “아빠는 수행자라면서 왜 그렇게 집착이 강해요?” 식의- 때문에 겪는 고충에도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몸과 인격, 가족 그리고 단체 속에서 문제를 겪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우리가 가진 공통적인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다행스럽게도, 이 거칠고 급변해가는 세계 속에서도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수행이 가져다 준 놀라운 선물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을 나눌 수 있었다.
놀랍고 새로웠던 것은, 서로 숨김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은 우리의 정직성이었다.
그것은 달라이 라마의 겸손과 자비심에 고무 받은 덕분이었다.
그는 언제나 기꺼이, 심지어는 자신의 실수에서도 배우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방법과 우리의 인간적인 속성까지도 포용하는 방법을 서로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각각의 지혜와 깨달음의 꽃이 여럿의 전일성全一性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현대의 환경 속에서 영적 삶의 지혜로운 표현법을 찾고자 할 때 겪게 되는 어려움은 동양의 수행 전통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메인 주에 있는 100년 전통의 한 가톨릭 수녀원의 수녀원장은 17세 때부터 1960년대까지 한적한 수녀원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23세는 개혁 정신의 일환으로 미사를 라틴어에서 영어로 바꾸었고, 수도 교단의 엄격한 침묵의 규율을 개방했다. 이런 변화는 수십 년 동안 성스러운 침묵의 보호 속에서 살며 날마다 묵상과 기도로 일관해온 이들에게는 정말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말하는 법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입을 열기 시작하자, 그것은 때때로 엄청난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묵상과 기도라는 그릇 밑바닥에 감춰져 있던 온갖 비판과 원망과 편협함과 두려움이 모두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수녀들은 지혜롭게 말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입을 열고 각자의 영적 생활과 씨름해야만 했다. 많은 이들이 수녀원을 떠났다.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은총을 인간적인 언어 속에서 발견하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다. 하지만 영적 삶은 양쪽을 다 필요로 한다. 호흡이 들고나는 것처럼, 영적 삶은 내적 지혜와 외적 표현을 아울러야만 하는 것이다. 영적 각성을 살짝 맛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계시대로 실제로 온전히 살아내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완전한 깨달음에 대한 책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서양의 모든 스승들과 지도자들 가운데서 그러한 지극한 완성의 경지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큰 지혜, 깊은 자비심, 자유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밀려오는 순간들은, 안타깝게도 두려움과 혼돈과 신경증과 몸부림의 시간들과 교차하며 지나간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이 사실을 서슴없이 시인할 것이다. 물론 불행히도, 그늘 없는 해탈과 안성의 경지를 얻었다고 주장하는 서양인 구루들이 몇 명 있다. 하지만 그들의 단체에서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그들은 자기 부풀리기를 통해 가장 권력 중심적이고 파괴적인 단체를 만들어내곤 한다.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하다. 예컨대 스노매스 수도원의 토마스 키킹Thomas Keating 신부나 샌프란시스코 참선 센터의 노먼 피셔Norman Fischer 같은 이들은 “난 배우고 있습니다” 또는 “난 모릅니다.”라고 하는 말을 자주 한다. 간디, 마더 테레사, 도로시 데이Dorothy Day, 달라이 라마 등은 영적 완성이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지혜 안에서 자라나는 인내와 사랑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영적 성취와 해탈은 이 인간적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자비심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의문이 생길 것이다. 아시아의 나이 많은 스승들은 어떠한가? 서양의 선사들이나 라마승들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에는 다만 아직 너무 젊고 미숙한 것이 아닐까? 서양의 많은 지도자들이 이것이 자신에게는 사실임을 시인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겉모습은 단지 원형적 차원과 인간적 차원을 혼동하는 데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티베트에는 속담 중에는 스승은 최소한 세 골짜기 너머에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골짜기들은 큰 산이 가로지르고 있어서 스승을 만나려면 여러 날을 걸어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그만큼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만 스승의 완벽한 이미지에 고무될 수 있다는 뜻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위대한 성자로 생각하는 우리 주지 스님인 아잔차에게 내가, 스승님은 늘 완전히 깨달은 존재처럼 행동하지만은 않는다고 불평했을 때, 그는 웃으면서 그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네가 아직도 네 밖에서 붓다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여기엔 없어”
실제로 가장 매력적이고 존경 받는 아시아의 많은 스승들도 자신이 아직도 실수로부터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학생이라고 말한다.
스즈끼 선사 같은 일부 스승들은 자신이 깨달았다는 주장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 엄밀히 말하자면 깨달은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엔 깨닫는 행위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놀라운 말은, 깨달음은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가 없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단지 해탈의 순간에 존재할 따름이다.
수피 교단의 서구 지도자인 75세의 피르 밀라얏Pir Khan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했다.
내가 인도와 아시아 지역에서 만난 수많은 위대한 스승들 가운데 어느 누구라도 미국에 데려다 놓고 집과, 두 대의 자동차와, 세 명의 자녀들과, 직업을 갖게 하고, 보험금과 세금을 지불하면서 살게 한다면….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허우적거릴 것이다.
영적 삶에 대해 가졌던 처음의 이미지야 어떠하건 간에, 엄정하게 말하자면 깨달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성취되어야만 한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 부대끼는 서양인들의 영적 행로는 어떠할까?
25년, 30년, 혹은 40년씩을 영적 수행에 바친 사람들은 어떻게 일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을 어떻게 터득했을까? 내가 서양의 선사들과 라마승, 랍비, 수도원장, 순, 요가 수행자 그리고 그들의 가장 오래된 제자들에게 던지기 시작한 질문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영적 생활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 우리를 영적 삶으로 이끄는지, 그리고 그 길에서 어떤 어려움을 거쳐야 하는지를 물어보았고, 어떤 선물과 깨달음을 얻었는지, 깨달음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황홀경 이후 영적 삶의 새로운 사이클을 통해 살아나가는 동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물어보았다. 과연 영적 황홀경과 일상의 빨랫감, 이 양쪽을 다 포용하는 어떤 지혜가 있을까?
우리 안의 어떤 것이 우리가 고생스럽게 일만 하려고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내야 할
신비한 힘이다.....
우리가 예감하고 있는 어떤 완전성, 즉, 아름다움이 우리를 이끈다. 수피들은 이것을 '연인의 목소리'라고 부른다.....
영적인 빛 없이, 그리고 연결감이 없이 살 때, 우리는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내면의 깊은 공허를 느끼게 된다. 꼭 있어야만 할 어떤 것이, 시야의 가장자리를 어른대는 어떤 것이, 바람이 불 때까지 그 존재를 잊어버리곤 하는 공기처럼 항상 우리와 함께 있던 그 어떤 것이 빠져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결국 하나의 영적 순례이며,
이것을 다시 깨닫기 위한 여행임을 깨닫게 되었다.
삶이란 위험을 무릅쓴 모험일 뿐,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 헬렌 켈러
우리는 내면에서 배신과 상실로 인한 분노와 증오의 목소리를 발견할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퍼붓던 끝없는 혐오와 저항의 감정을 발견할 것이다. 명상 속에서 발견하는 '깨어 있는 의식'은 심판과 비난으로 짜여진 생각의 천을 올올이 풀어내기 시작한다. 우리는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비판하는 마음을 발견하고, 그 마음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삶과 끊임없이 싸우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의 마음은 의심, 야망, 두려움, 믿음, 혼란스러운 자아상,
과거와 미래의 무수한 층들로 이루어진 정신적 요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또는 다른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마음이 얼마나 쉽사리 '지금 여기'를 등져버리는지를 깨닫곤 한다. 기도나 명상이나 無我의 봉사를 하다 보면, 우리는 습관적인 생각과 한정된 믿음이 우리의 자아를 작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생각이 담긴 컵은 에고로 가득 차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어갈 수 없다. 우리를 '지금 여기'에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한 혼잡한 생각과 믿음 때문이다.
용서는 영적 생활에서 하나의 준비 과정이자, 동시에 목표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수히 되돌아오게 되는 주제이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배신과 좌절의 고통과 슬픔에 직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불사하고 용서로 열리는 마음의 움직임을 발견해야 한다.....
훌륭한 스승에 의한 입문식은 어김없이 타인에 대해, 자신에 대해, 삶 자체에 대해 용서를 요구한다. 용서할 줄 아는 지혜로운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과거의 짐을 평생 지고 다녀야만 한다.....
우리는 과거와, 그리고 삶 자체와의 전쟁을 이끌어오면서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과 타인을 심판해왔다. 용서하는 마음 속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자비와 정의로써 절을 올린다. 용서와 함께 우리의 마음은 잠시 깨끗하고 온전해진다. 용서하는 용기가 우리를 해방하여 입문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눈을 감고서 한 숨만 넘어가면 있을 내 삶의 종말을 느낄 수 있었다. 탄생과 죽음의 모든 세계가 나를 둘러싸고 도는 것을 느꼈다. 고통과 쾌락의 추구, 그것은 내 온 몸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악랄한 두려움에 직면하자 마자 마치 내가 조금 죽은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자 순순한 앎이 일어났다. "이것은 너의 본체가 아니다." 요가 수행자들이 가르쳐주었던 그것이 진실임을 알았다. 그리고 저항이 떨어져 나갔다. 죽지 않는 그것이 있으며, 그것은 오직 우리가 죽음에 직면할 때만 발견된다. 나는 치유되고 겸손해진 인간이 되어서 돌아왔다.
자아의 비어 있음을 깨달으면 우리는 空 자체를, 그로부터 모든 것이 태어나는 역동적인 공을 경험하게 된다. 불교 전통에서는 공 속으로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열반'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것은 가슴의 해방이며, 또한 그것은 '태어나지 않은 자', '창조되지 않은 자', '조건지어지지 않은 자'라고 부른다. 이 문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가장 흔한 세 가지 방법은 명상, 깨어난 이와의 만남, 그리고 자신이 투명해질 정도로 깊은 고독 속에 몰입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은 뭔가 얻을 것이 있고,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너무나 명약관화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뭔가를 하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을 찾으려고 인도까지 갈 필요가 없다. 필요한 것은 단지 정말 진지한 의도뿐이다. 어디에 있든지, 진정으로 자유를 원한다면 우주가 거기에 응답할 것이다.
....나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이제 나는 그 믿음을 바꿔야만 한다. 나는 결코 창조되지 않았다. 나는 우주였다.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적 삶의 목표는 우리의 작은 자아의 느낌 너머에 있는 實在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헤엄치고 있는 그 바다가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또 다른 방식으로 깨닫게 된다.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저는 언제나 해방될 수 있을까요?"
스승이 대답했다.
"누가 널 붙잡고 있다고 그러느냐?"
우리는 언제나 실제로 눈앞에 있는 것보다 좀더 특별하고, 더 크고 나은 것을 만들어내려고 애쓴다. 찾아온 모든 깨달음은 거기에 이미 있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일 뿐이었다. 들리는 소문과 가르침들은 모두 맞다. 즉 우리는 빛나는 존재들이며 깨달음은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만 특별한 것이 없다.
.......해야 하거나, 되어야 할 어떤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예사로웠고, 동시에 너무나 명료했다. 지금 이 순간으로 깨어나는 것, 이것이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깨달은 채로 고스란히 은퇴하기 같은 것은 없다. 우리를 변화라는 진실 밖으로 데려다주는 깨달음의 체험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나름의 주기 속에서 숨쉬고, 변한다. 달, 주식 시장, 우리의 가슴, 돌아가는 은하계, 모두가 생명의 리듬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한다. 모든 영적 삶도 얻음과 잃음, 환희와 고통의 엇갈림 속에 존재한다. 우리로서는, 아니, 붓다라고 해도, 이 진리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만이 끝없는, 자유의 세계로 깨어나는 길이다.
뭔가를 이해하려고 하고, 생각해내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 욕망이 사라질 때까지 "내려놓으라, 내려놓으라, 내려놓으라"고 자신에게 일렀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이 엄청난 고난 속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줄 매우 간단한 방법을 가르쳐 드리고 있는 것이다... -- 아잔 수메도
수행을 하다 보면 우리의 의식은 정말 신이나 어떤 원형, 곧 이상적인 가능성과 동일시할 수 있다.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일 수 있지만, 단지 그것이 수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만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원형적 동일화란 붓다나 예수, 또는 완벽하게 순수한 스승과 같은 완전한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세계는 매혹적이다. 자유의 맛을 보면, 그 체험은 우리를 휩쓸어가버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거기에 머물 수 있다고 믿고 땅으로, 시간적 현실로, 인간으로서의 삶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문제가 일어난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역학을 '자만 inflation'이라고 부른다.
단순한 삶을 선택하는 것은 큰 덕목이긴 해도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 욕망을 부인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금욕주의 그 자체는 단순한 삶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음식과 의복과 행동의 단순함은 내적 포기를 배워 바깥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독신주의도 마찬가지로 포기의 한 표현 방식으로서 선택할 수 있다.....이런 의미에서 의도적인 금욕과 독신의 길은 가치 있고 존중할 만하다. 이것이 건전한 순수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는 다음과 같다. 즉 이런 역할을 자임한 사람니 자신의 욕구를 그저 억눌러버리거나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性愛와 인간적 친교와 모든 종류의 감정을 충분히 인정하되, 그것을 풍성한 영적 삶 속으로 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삶은 자아와의 싸움이나 죄와 에고와의 전쟁이 아니라 자비와 자애에 관한 것이 된다.....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와 독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한때 독이라 이름 붙였던 그것이 이제는 수행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천국의 문을 들어가는 사람은 열정이 없거나 그것에 족쇄를 채운 사람이 아니라, 열정에 대한 이해를 키운 사람이다.
- 윌리엄 블레이크
깨달음은 우리가 자신의 경험에다 붙인 꼬리표를 떼어준다.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모든 관념들 - 불순한 존재이든 붓다이든 죄인이든 신의 자식이든 간에 -- 이 지혜로운 가슴 속에서는 해체된다. ...열개의 우주를 다 뒤져봐도 자신보다 더 사랑해줄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자신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이 6척 길이의 몸 안에 모든 가르침이 있다. 그 안에 고통이,
고통의 원인이, 그리고 고통의 종식이 들어 있다. -- 붓다
깨닫기 이전에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수행의 요점은 삶에서 달아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정확히, 그리고 온전히....깨달음의 여정에서 어디를 걷고 있든지 간에 거기에는 몸도 포함되어야만 한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 바로 이 몸을 통해서 살아 있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우리는 이 몸과 마음 속에서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종식을 찾을 수 있다. 깨어남이 이 삶을 해방시켜줄 문이 되게 하려면 몸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진실 속으로 깨어나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다. 肉化한 깨달음이란 자신의 몸 속에서, 이 경이로운 삶 속에서, 오늘을, 있는 그대로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도피하지 않는 지혜'라고 부른다.
여기에 있으면서, 앉아 명상하고, 일하고, 바깥을 걷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먹고 변을 보는 등의 단순한 일상을 사는 것이 사실은 온전히 깨어 있기 위해, 온전히 살아 있고,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임을 깨닫는 것은 도움이 된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몸, 지금 이 방 안에 앉아 있는 이 몸, 어쩌면 아픈 바로 이 몸,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이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온전히 깨어 있고 온전히 살아 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임을 아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뿐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감정 또한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남부럽지 않게 좋은, 완전히 충만한, 에너지 넘치며 영감에 찬 삶을 살기 위해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부는 무엇일까, 하고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그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깨닫는 것과도 같다. -- 페마 쵸드론
肉化한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 존재하게 된다. 티베트인들이 말하는 '이 귀한 인간의 형체'를 존중하면서 살아간다. 티베트의 스승 총 카파는 이렇게 가르쳤다. " 이 인간의 몸은 가장 귀한 보석보다 더 귀하다. 너의 몸을 소중히 다뤄라. 그것은 오직 이번에만 너의 것일 뿐이다. 곧 사라져버릴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찬란한 경험이었다. 내가 처음 체험했던 깨달음의 완벽함과 은총조차도 몸 속에서, 감각 속에서, 매 순간 속에서 사는 이 기쁨에는 비길 수가 없었다. 새로운 방식의 이 삶과 나는 사랑에 빠졌다. 그것이 나를 해방시켰다.
살아 있을 동안 경험 속으로 뛰어들라.....
그대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죽기 이전의 시간에 속한 것이니....
-인도 신비주의 시인 까비르
영적인 헌신이 삶의 희비에 대한 면역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영적 스승조차도 우리와 똑같이 노쇠와 병과 죽음을 맞는다.
헌신적인 수행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이 인간 세계에서 자비와 깨어 있음을 일깨우는 도구, 곧 가슴이 그것을 모두 껴안게 하는
방법이다. 삶의 모든 부분이 수행의 비옥한 텃밭이다.
'연꽃 속의 보석'이란 우주적 자비의 만트라인 '옴 마니 파드메 훔'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상징하는 뜻들 중의 한 가지 설명은, 마음이라는 보석이 가슴이라는 연꽃 속에 머물 때 자비심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행복을 찾겠다는 노력만이 그것을 찾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것은 아무리 좇아다녀도 잡을 수 없는 찬란한 무지개와 같다. 평화와
행복이 어떤 실제적인 사물이나 장소로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언제나 거기에 있고 모든 순간 우리와 함께 한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애쓰다가 우리는 진만 다 뺸다.
꼭 쥔 손의 힘을 빼고 손바닥을 펴는 순간 무한한 공간이 거기에 있다. 그것은 열려 있고, 편안하며, 우리를 오라고 손짓한다.
이 탁 트임, 이 자유,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즐기라. 더 이상 아무 것도 찾지 말라. 이미 그대 집 안의 화덕 앞에 평화롭게 앉아 있는,
위대한 깨달음의 코끼리를 찾겠다고 무성한 밀림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 --겐둔 린포체
맑은 시냇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마실 물을 애타게 찾는 목마른 사내...
세상을 더 낫게 바꾸고 싶은가?
글쎄, 가능할까?
세상 일에 참견하면 일을 그르치고,
그것을 대상으로 대하면 손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도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나니,
바꿔놓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제 갈 길을 가게 하고
그 돌아가는 중심에 멈문다.
모든 구성원들이 '최고'의 길을 찾았다고 믿고 있는 어떤 힌두교 단체에서도, 결국 그곳을 떠났던 한 수행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힌두교도가 되느라 너무나 애쓴 나머지 우리 자신이 되기를 잊어버렸다."
그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하게 될 가장 힘든 전쟁을 시작해서 그 싸움을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을 뜻한다. -- 시인 커밍즈
모든 것이 꿈처럼 일었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변해가고, 소유할 수 없음을 안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므로 그는 세상 속을 품위 있게 지나다니고,
행복한 것이다.
영적 깨달음의 황홀경 이후에 수행의 빨래방에서 계속되는 하루하루의 완성이 기다리고 있다. 깨달음의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 중에 이 기간 동안에 우리를 지탱시켜주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포용성이다.
아기들조차 자신의 요구와 두려움을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연인, 부모, 동료, 동물들과 주변의 나무들도 존중을 받으면 활짝 피어난다.....
공동체의 인간 관계가 이상적이고 영적이고 우애 있고 깨달음에 충만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조차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고통없이 타인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인 짓이다. 하지만 친밀한 우정을 기피한다면 그 또한 고통스러울 것이다. 지혜로운 영적 공동체에서는 각자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서로를 돕는 쪽을 택한다. 때로 우리는 사랑과 관용의 축복을 가져오는 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룹에 갈등과 말썽을 불러 오는 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다른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선물이 된다. 우리는 삶의 각본 속에서 주기적으로 바꿔가면서 양쪽의 역할을 다 맡게 된다. 완전한 평화를 구하기 위하여 영적 공동체를 찾는다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인내와 끈기와 자비를 성숙시키고 다른 이들과 함께 깨어 있기를 배우는 장소로서 공동체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깨어남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 된다.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된다.
내가 지냈던 두번째 공동체에서는 십여 명의 수녀밖에 없었다.
나는 그 중 두 명을 빼고 다 좋아했다. 한 수녀는 게을렀고, 다른 한 수녀는 자기 도취적이었다. 첫해가 지나고 나서 하루는 부엌에서 친구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나쁜 사람이 아니야. 널 불편하게 하는 게 뭐니?"
내가 대답했다. "한 명은 너무 게으르고, 한 명은 늘 자기만 생각해."
그러자 그녀가 대꾸했다. "그래? 그렇다면 네가 좀더 게을러지고, 좀더 네 생각만 할 필요가 있다는거야!"
우리는 서로를 너무 성급하게 심판한다. 상대방의 가슴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거의 모르면서 말이다. 진정으로 은총과 신성 속으로 깨어나려면 우리는 훌륭한 스승에게 바치는 것과 동일한 존경심을 모든 이들에게 바쳐야만 한다. 주변의 화나고, 불편하고, 성급하고, 힘들게 하고 성가신 붓다들이 우리에게 꾸준함과 평정과 자비를 가르쳐준다. 우리는 서로가 상대방의 방아에 찧일 곡식이다.
그대의 삶의 행위들이 왕의 보물처럼 찬란히 빛나게 하라. - 붓다
가슴의 교훈은 이처럼 작은 일 속에서 완성된다. 우리의 의도로부터 삶이 성숙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슴을 엶으로써 우리의 길은 온전해진다.
....삶의 이 모든 일이 작게 보이지만 삶은 수많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다. 이 작은 것들을 무시하면 삶은 아름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견뎌내기 힘든 것이 될 것이다.
- 인도의 스승 메헤르 바바
영적으로 성숙해 가면 수행은 야망과 이상주의와 자기변신의 욕구로 부터 멀어져 온다.
그것은 바람이 바뀌는 것과도 같다.
이제 풍향계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여전히 같은 축에 중심을 잡고 있으면서) 지금의 순간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영적 목표를 좇아 발버둥치지 않는다.
우리가 있는 이 세계와 다른 어떤세계를 부여잡으려고 하진 않는다. 우리는 집에 와 있다. 집에 있으면서 우리는 바닥을 쓸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맞는다. 삶의 영원한 진실을 깨달았으면, 하던일을 계속하는 것밖에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깨닫기 이전에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일본의 다이난 가카기리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수행의 요점은 삶에서 달아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정확히 그리고 온전히.’라고.
거꾸로 가기
삶은 고되다. 삶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모든 주말을 다 바쳐야 한다. 그래서 결국 무엇을 얻는가? 멋진 보상, 바로 죽음······.
나는 삶의 순환이 거꾸로 됐다고 생각한다.
먼저 죽은 다음 거기서 빠져나온다.
그리고 양로원에서 20년을 산다.
너무 젊어지면 쫓겨나 금시계를 차고 일하러 간다.
연금생활을 즐길 만한 수명이 남을 때까지 40년을 일한다.
대학에 간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파티를 쫓아다닌다.
아이가 되어 논다. 아무 책임도 없다.
작은 사내아이나 계집아이가 된다. 자궁 속으로 돌아간다.
마지막 남은 9개월을 행복하게 떠다닌다.
누군가의 반짝이는 눈빛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
ㅡ 잭 콘필드의《깨달음 이후 빨래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