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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공자 속의 붓다, 붓다 속의 공자

작성자山木|작성시간23.10.27|조회수49 목록 댓글 1

박민영 지음, 2005, 도서출판 들녘

공자 속의 붓다, 붓다 속의 공자

박민영 지음, 2005, 도서출판 들녘

< 큰 깨달음, 작은 말 >

여기 손바닥의 신사파 잎을 보라

붓다는 제자들과 상쾌한 바람을 맞느며 숲을 거닐다가 문득 땅에 떨어진 신사파 잎사귀를 서너 개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이렇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지금 내 손바닥에 있는 신사파 잎사귀와 이 숲에

있는 신사파 잎사귀 중에 어느 쪽이 많겠느냐?"

"대덕(大德)이시여, 세존(世尊)의 손에 있는 잎은 적사오며,

이 숲에 있는 잎은 많사옵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설한 것은 적고,

내가 설하지 않은 부분은 많으니라."

- 『상응부경전』56:31 신서

어느날 공자는 매우 큰 실의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그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제자는 거의 없었다.

실의에 빠진 공자는 며칠동안 제자들에게 아무런 가르침도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 자공(子貢)이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선생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천하가 말을 하더냐? 사철이 운행하고 만물이 생장할 뿐 천하가 말을 하더냐?(天下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下言哉?)"

- 『논어』「양화(陽貨)」19

< 깨달은 자의 고독 >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때 세존은 홀로 앉아 조용히 관(觀)하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존경할 것이 없고 공경할 것이 없는 생활은 괴롭다.

내가 존경하고 스승으로 섬길만한 사물이나 바라문은 없는 것일까?"

- 『상응부경전』6:2 공경. 『잡아함경』44;11 존중.

『별역잡아함경』5:18

"이제 내가 깨달은 것은 매우 미묘해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내가 설명한다 해도 사람들이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 홀로 피곤하고 고달프리라."

- 『상응부경전』6:1 권청. 『중일아함경』19:1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莫我知也夫!)"

"어찌 선생님을 알지 못하기야 하겠습니까?(何爲其莫知子也?)"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으며,

아래로 배워 위에 이르렀다. 나를 아는 자는 저 하늘뿐이구나!

(不怒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 『논어』「헌문」37​

< 깨달은 자의 사회적 책임 >

나는 옥을 파는 사람이다

악마는 깨달은 후에 동요하는 붓다 마음의 틈새를 헤집고 들어가 이렇게 속삭였다.

"불사(不死)·안온(安穩)에 이르는 길을 네가 진정 깨달았다면

너 혼자 멀리 떠나거라. 어이해 남에게 설하려는가."

"피안(彼岸)에 이르고자 바란 나머지 불사에 이르는 길을 묻는 이 있기에, 나는 즐거이 그들을 위해 완전한 열반을 설하노라."

- 『상응부경전』4:24 칠년. 『잡아함경』39:12 마녀

"다른 사람에게 법을 설함은 그대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그대는 굳이 그것을 하여 탐심과 노여움에 매이지 마라."

"다른 사람의 이익과 연민을 위해 깨달은 자는 남을 가르치노라. 여래는 탐심도 욕심도 이미 해탈했노라."

- 『상응부경전』4:14 상응 12사자.

『잡아함경』39:17 자웅. 39:21 사자

제자들이 보기에 스승은 사회 참여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듯하기도 했다. 공자의 그러한 태도에는 다분히 의도적인 데가 있었으나 제자들이 그것을 알 리 없다.

그래서 하루는 제자 자공이 의뭉스럽게도 스승에게 비유를 써가며 이렇게 물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는데 궤 속에 감추어 간직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상인을 만나 팔아야 하겠습니까?

(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살 사람을 기다리는 자다.

(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 『논어』「자한(子罕)」12

< 공자와 붓다는 리얼리스트 Ⅰ >

오직 지금 존재하는 것을 관찰하라

붓다가 해탈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은 바차고타는 그것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바차고타는 붓다에게 이렇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제자들이 해탈했을 때 그들은 어디에 가서 태어나게 됩니까?"

"바차고타여, 어디에 가서 태어난다는 그런 것과는 다르오."

"그러면 세존이시여,

그들은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바차고타여, 어디에 가서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않거나 하는 그런 것과는 다르오, 바차고타여, 그러면 내가 묻겠으니 생각나는 대로 대답해보시오. 만약 그대 앞에서 불이 타고 있다면 그대는 불이

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소?"

"세존이시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차고타여, 그러면 그 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소?"

"그것은 탈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소. 그러면 다 타고 좀 있다가 불이 꺼졌을 때, 그 불은 꺼져서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소?"

"대덕이시여, 그것은 적당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 불은 땔감이

있으므로 탔던 것이요, 땔감이 없어졌으므로 꺼졌을 뿐입니다.

꺼진 불이 어디로 갔느냐는 물음은 잘못된 물음이 아니겠습니까?"

- 『중부경전』72 바차고타화유경. 『잡아함경』34:24 견

붓다가 주목한 것은 내세의 일이 아니라 현세의 일로,

미래의 일도 과거의 일도 아니며 오로지 '지금'의 일이었다.

다음의 게송은 그러한 붓다의 현실주의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지나간 것은 쫓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직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관찰해야 한다."

- 『중부경전』131 일야현자경

"선생님께서는 괴이한 힘과 어지러운 귀신을 말하지 않으셨다.(子不語 怪力亂神)"

- 『논어』「술이」20

< 공자와 붓다는 리얼리스트 Ⅱ >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세존이시여, 저는 홀로 한가한 곳에 앉아 있을 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설하지 않으십니다. 즉, 이 세계는 영원한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 이 세계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영혼과 신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혹은 사람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세존께서는 아무 말씀도 설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문제를 여쭈면 대답을 거부하십니다. 저는 이 점이 불만스럽습니다. 거듭 여쭙거니와, 그래도 대답을 안 해주시면 저는 도를 버리고 환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라가여, 내 일찍이 그대에게 그러한 문제에 대해 가르쳐주겠으니 내게 오라고 한 일이 있더냐?"

"마라가여, 여기 한 사람이 있어 독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때 그의 친구들이 그를 위해 급히 의원을 데려왔다고 하자.

그런데 그는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군인지, 이 화살을 쏜 활이 어떤 활인지, 이 화살의 살대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화살의 깃털은 어떤 것인지, 화살촉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를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어떻겠느냐? 마라가여,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는 그것들을 모두 알기 전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마라가여, 이처럼 어떤 사람이 그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게서 듣기 전에는 청정한 행을 닦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겠느냐?

그 역시 마침내 청정한 행을 닦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될 것이다.

마라가여, 세계는 영원한 것이라든가, 무상한 것이라든가 하는

견해에 따라 청정한 행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견해가 존재하더라도 이곳에는 여전히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존재할 것이다. 나는 단지 현생에 그것들을 극복하는 길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 『중부경전』63 마라가경. 『중아함경』221 전유경

"감히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敢問死)"

"삶도 아직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

- 『논어』「선진(先進)」11

​< 온고지신(溫故知新) >

옛​ 사람이 거닐던 옛 길을 발견하다

"옛 것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 것, 그것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溫故而知新,可以師矣)"

- 『논어』「위정(爲政)」11

"비구들이여, 과거의 정각자들이 걸어간 옛 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스러운 여덟가지 길, 즉 팔정도(八正道)다."

- 『상응부경전』12:65 성읍. 『잡아함경』12:5 성읍

< 종교 관념의 혁신 >

씻어야 할 것은 마음이지 몸이 아니다

"이 강, 저 강에서 어리석은 자는 목욕을 하지만 그 악업은 씻기지 않네. 이 강, 저 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악한 마음을 지닌 자,

또 죄 짓고, 잘못을 저지른 자의 깊은 죄업(罪業)은 강물로는 씻지 못하네. 마음 청정한 자에게는 늘 봄 잔치가 있고 늘 보살이 있네. 마음이 맑은 자, 행(行)이 맑은 자는 수행이 저절로 성취되리니.

바라문이여, 여기 와서 목욕하라. 있는 그대로 사는 자에게 안온을 주리라. 그대도 망어(妄語)하지 말고, 남이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고, 능히 믿음을 가지고 탐내지 않으면 강에 이르러 무엇하랴. 강은 단지 수조(水槽)일 뿐이니."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 한다.(敬鬼神而遠之)"

- 『논어』「옹야(雍也)」20

< 벗의 가치 >

​벗과 함께 있음은 도(道)의 전부를 이룬 것과 같다

"대덕이시여,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우리가 좋은 벗을 곁에 두고 좋은 동지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이미 성스러운 도(道)의 절반을 성취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난다여,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은 옳지 않다."

"아난다여, 우리들이 좋은 친구와 참다운 벗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이 거룩한 도의 절반이 아니라 진실로 그 전부를 이룬 것이다."

- 『상응부경전』45:2 반. 『잡아함경』27:15 선지식

"배우고 때때로 따라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냐?(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논어』「학이」1

< 깨달음과 성찰 Ⅰ >

내게 잘못이 조금만 있어도 사람들이 아니 다행이다

"나는 다행이다.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으니.(丘也幸, 荀有過. 人必知之)"

- 『논어』「술이」30

"문(文)에서는 내가 남만큼 못하겠냐마는 몸소 실천하는 군자의 경지라면 나는 아직 얻지 못했다.

(文, 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未之有得)"

- 『논어』「술이」32

"그동안 나의 언어와 행동에 어떤 잘못은 없었던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것을 보고 들은 사람이 있다면, 벗들이여, 부디 나를 가엾게 여겨 지적해달라."

- 『상응부경전』8:7 자자. 『잡아함경』45:15 자자.

< 깨달음과 성찰 Ⅱ >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

"비구들이여, 죄를 범하고서도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 자는

나쁘다. 또한 죄를 사죄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도 나쁘다. 두 종류의 사람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다. 비구들이여, 반대로 죄를 범하고 죄를 죄로 여기는 자는 옳다. 또 죄를 사죄하는데 사죄를 솔직히 받아들이는 자도 옳다. 두 종류의 사람을 모두 현명한 자라고 부른다."

- 『상응부경전』11:24 죄과. 『잡아함경』40:5 독안

"잘못이 있음에도 고치지 않는 것을 일러 잘못이라 한다.(過而不改, 是謂過矣)"

- 『논어』「위령공」29

"군자의 잘못은 마치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잘못이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보게 되고 잘못을 고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우러르게 된다.(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

- 『논어』「자장(子長)」21

< 관계의 철학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 『상응부경전』12:21

"친구여 이를테면 여기에 갈대 단이 있다고 하자. 그 갈대 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 있다. 그것과 같이 이것이

있음으로 그것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단의 갈대에서 어느 한 단을 치운다면 다른 갈대 단도 또한 넘어질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는 것이며, 그것이 없으면 이것 또한 있지 못하는 것이다."

- 『상응부경전』12:67 노속

"도(道)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명(命)이고, 도가 장차 폐하는 것도 명이다.(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 『논어』「헌문」38

< 악의 실체 >

우리의 몸과 감각이 악마다

"대덕이시여, 흔히 '악마, 악마' 합니다만, 악마란 무엇입니까?"

"라다여, 우리의 몸(色)이 우리를 방해하고 교란시키고 불안하게 하니 그것이 바로 악마다. 그러므로 라다여, 몸을 병이라 관(觀)하고, 가시라 관하고, 고통이라 관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정관(正觀)이니라.

라다여, 우리의 감각(受)은 우리를 방해하고 교란시키며 불안하게 하니 그것이 또한 악마다. 그러므로 라다여, 우리의 감각을 병이라 관하고, 가시라 관하고, 고통이라 관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정관이니라."

- 『상응부경전』23:1 마.

"색(色)에 집착할 때 악마에 붙잡힌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악마로부터 풀려난다."

- 『상응부경전』22:63 취

"번지르르한 말과 번지르르한 외양(色)이 어짊인 경우는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

- 『논어』「학이」3

"군자는 덕을 마음에 두고 소인은 영토를 마음에 둔다.(君子懷德, 小人懷土)"

- 『논어』「이인」11

< 무아(無我)와 탐욕 >

소용돌이는 물의 한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난다여,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우리의 몸(色)은 항상(恒常)이겠느냐. 무상(無常)이겠느냐?"

"대덕이시여, 그것은 무상입니다."

"무릇 몸이 무상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고(苦)이겠느냐,

낙(樂)이겠느냐?"

"대덕이시여, 그것은 고입니다."

"무상이면서, 고이면서, 변화하는 육체를, '이는 내 것(我所)이다', '이는 자아(自我)다', '이는 내 본질(我體)이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

"대덕이시여, 그럴 수는 없나이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나는 이 모든 것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떠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

- 『상응부경전』22:15 무상. 『잡아함경』1:9 무상

"비구들이여, 이 갠지스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아라.

여기에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소용돌이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소용돌이의 본질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용돌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의 한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 『상응부경전』22:95 포말. 『잡아함경』10:10 포말

"선생님께서 인성(人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볼 수 없었다.(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 『논어』「공야장」13

< 인류애로 승화된 자기애 >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은 어디라도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그러기에 자기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 『상응부경전』3:8 말리

"대왕이시여, 진정으로 그러합니다. 누구라도 몸(身)·입(口)·뜻(意)에 의해 악업을 짓는 사람은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몸·입·뜻에 의해 선업을 짓는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상응부경전』3:4 애착. 『잡아함경』46:7 애기

자로는 공자에게 군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경(敬)으로써 자신을 닦는다.(修己以敬)"

"그러할 뿐입니까?(如斯而已乎?)"

"자신을 닦아 사람을 편안케 한다.(修己以安人)"

"그러할 뿐입니까?(如斯而已乎?)"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하게 한다.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은 요임금과 순임금도 오히려 부심했던 것이다.

(脩己以安百姓. 脩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 『논어』「헌문」45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

- 『논어』「위령공」21

< 중용 속의 깨달음 Ⅰ >

꽃의 향기는 어디에서 나는가

붓다의 제자 가운데 케마라는 비구가 있었다. 어느 날 케마는

중병에 걸려 전혀 거동을 못하게 되었다. 그가 코상비의 교외에

있는 고시다의 정사에 누워 있을 때, 다른 비구들이 문병을 왔다. 그 가운데 한 비구가 병마에 시달리는 케마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물었다.

"어떤가, 견딜만한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네."

"붓다께서는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시지 않았는가?"

"아니, 나는 내(我)가 있다고 생각하네."

(…)

장로들까지 가세하게 된 논쟁에서 케마는 몸이 불편한데도 시종일관 차분한 어조로 논하여 그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케마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벗들이여,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육체(色)가 나라는 뜻은

아니네. 또 이 감각(受)이나 의식(識)을 가리킨 것도 아니네.

또는 그것들을 떠나서 따로 '내가 있다'는 뜻도 아니네. 벗들이여, 그것은 이를테면 꽃의 향기와 같은 것이네. 만약 어떤 사람이 꽃송이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을 정당하다고 하겠는가?

줄기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이 말을 정당하다 하겠는가?

또는 꽃술에 향기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역시 향기는 꽃에서 난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으리라. 그것과 마찬가지로 육체나

감각이나 의식이 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네. 또는 그것을 떠나서 따로 나의 본질이 있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네. 그러기에 나는 그것들의 통일체에 '내가 있다'고 말한 것이네."

- 『상응부경전』22:89 차마. 『잡아함경』5:1 차마

"내게 지혜가 있는가? 지혜가 없다. 어떤 미천한 사람이라도 내게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막연하다. 나는 그 양극단을 두드려 주는 것이 고작이다.(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논어』「자한」7

< 중용 속의 깨달음 Ⅱ >

너무 죄거나 느슨하면 거문고 소리가 나더냐

"비구들이여, 출가한 이는 두 극단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 극단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집착하는 것은 비열하고 천하다. 그것은 범부의 소행으로 성스럽지 않고 또 무익하다.

또한 스스로 고행하는 것 역시 괴롭기만 할 뿐 성스럽지 못하며

무익하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과 등각(等覺)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 『율장』대품 1:6 사분율 32

"저는 지금 세존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정진하는 비구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좀처럼 해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소나여, 너는 집에 있을 때 거문고를 매우 잘 탔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냐?"

"대덕이시여, 저는 거문고를 약간 뜯을 줄 압니다."

"그러면 잘 알고 있으리라. 소나여, 거문고 줄을 너무 팽팽하게

죄면 뜯기에 좋더냐?"

"대덕이시여, 너무 죄면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소나여, 느슨하게 하면 어떻더냐?"

"대덕이시여, 그것도 좋지 않습니다."

"소나여, 거문고를 뜯는 데조차 줄이 적절하게 죄어 있지 않으면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지 않느냐. 도(道)의 실천도 역시 마찬가지니라. 각고정진이 지나치면 마음이 격앙되어 고요하지 못하고, 정진이 너무 완만하면 나태에 빠진다.

그러므로 소나여, 너는 중(中)을 취해야 하느니라."

- 『증지부경전』6:55 소나 『잡아함경』9:30 이십억이

공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중용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각각의 제자들에게 알맞은 가르침을 설했다. 제자들 각각의 기질과 품성, 지적

수준, 처한 환경을 섬세하게 고려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어느 날

공자는 제자 공서화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유(由:자로)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님께서 '아버지와 형이 계시지 않느냐' 하시고, 구(求:염유)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님께서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할 것이다' 하시니,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감히 묻고자 합니다.(由也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求也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亦也或, 敢問)"

"구는 물러서는 까닭에 나아가게 한 것이고,

유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까닭에 물러나게 한 것이다.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 『논어』「선진」21

< 중용 속의 깨달음 Ⅲ >

절대적인 긍정도, 절대적인 부정도 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이겠소?"

"나는 마음에 어울리는 알맞음이야말로 욕애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 생각하오."

- 『상응부경전』3:12 오왕. 『잡아함경』42:5 제왕

"중행(中行)을 얻지 못하고 관여하면 반드시 과격해지거나 완고해진다. 과격한 자는 나아가 취하려 하고, 완고한 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子曰,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 『논어』「자로」21

"군자가 청하를 대함에는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없다. 의(義)에 견줄 따름이다.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此)"

- 『논어』「이인」10

< 중용 속의 깨달음 Ⅳ >

사성제와 팔정도, 그리고 중용

"비구들이여, 내가 깨달은 바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과 증지와 등각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苦)의 소멸에 따르는 도(道)의 성제로,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이다.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그것이다."

- 『율장』대품 1:6 사분율 32

"중용이 덕이 되니 그 얼마나 지극한가?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 『논어』「옹야」27

< 수기의 위력 >

날카로운 칼은 구부릴 수 없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여기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지금 나는 이 칼날을 엿가락처럼 비틀어

보겠습니다.'고 말했다고 하자. 과연 그 같은 일이 가능하겠는가?"

"대덕이시여, 그 같은 일은 불가능합니다."

"왜 그런가?"

"대덕이시여, 그같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을 구부리거나 비틀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다쳐서 아프기만 할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만약 그대들이 자비로운 마음을

수행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몸에 배게 하면 자비심이 밑바탕에 자리 잡으며, 그 자비심에 안주하게 되면, 어느새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예를 들면 귀신이 나타나 그대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자 해도 결국에는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 『상응부경전』20:5 인. 『잡아함경』47:15 칠수검

"삼군(三軍)에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필부(匹夫)에게서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 『논어』「자한」25

< 잡담과 재능 >

재주가 많음은 군자의 미덕이 아니다

탁박을 마치고 돌아온 비구들이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자네들도 속세에 있을 때, 코끼리 기예(技藝)를 익혔을 것이

아닌가? 대체 어떤 기예가 가장 으뜸이겠는가?"

"나는 예전에 집에 있을 때, 코끼리를 길들이는 기술을 익힌 적이 있었네. 코끼리 다루는 기술은 매우 훌륭한 것으로 아무래도

코끼리 다루는 기술이 최상의 기예일걸세."

"나는 집에 있을 때 말타기를 잘 했네. 코끼리를 다루는 것보다

말을 다루는 것이 더 뛰어난 기술을 필요로 하네, 승마야말로 최상의 기예지."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모여 앉아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재미있게 나누고 있는가? 비구들이여, 그 화제가 무엇인가?"

(…)​

"비구들이여, 그런 잡담에 탐닉하는 것이 집을 떠나 출가 사문이 된 그대들에게 어울리는 것이겠는가?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모였을 때 해야 할 일은 단지 두 가지네. 하나는 법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스러운 침묵이네."

- 『소부경전』자설경 3:9

"입이 무거움은 어짊에 가깝다.(訥, 近仁)"

- 『논어』「자로」27

"하루 종일 모여 앉아서도 화제가 의로움에 이르지 않고 잔꾀나 구사하기를 좋아한다면 난감한 일이다.

(群居終日, 言不及義, 好行小慧 難矣哉)"

- 『논어』「위령공」16

"나는 젊어서 미천했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일들에 다능하지만 군자가 그러하겠는가? 다능하지 않다.(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 『논어』「자한」6

< 인생의 소중함과 불방일(不放逸) >

눈 먼 거북이의 궤짝

"비구들이여, 예컨대 여기 한 사람이 궤짝 하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하자. 그런데 그 궤짝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그리고 여기 또 눈먼 거북이 한 마리가 있어, 백 년에 한 번 물 위로 떠올라 머리를 내밀 수 있다고 하자. 그 거북이가 물 위에 떠올라 궤짝 구명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대덕이시여, 그러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 그럴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렇다. 그러나 백 년에 한 번 물 위로 떠오르는

눈 먼 거북이가 궤짝의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 넣는 것보다 더욱

드문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얻는 일이다."

​ (…)

"사람의 몸 받기 어려운데 지금 받았도다. 불법(佛法)을 만나기 어려운데 지금 들었도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어느

생에 다시 제도하겠는가."

- 『상응부경전』56:47 공. 『잡아함경』15:47 구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임무는 막중하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 어짊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또한 막중하지 않느냐? 죽은 다음에야 끝이 나니 또한 멀지 않느냐?(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 『논어』「태백」7

< 불방일은 최상의 도 >

나는 아는 자가 아니라 노력하는 자다

"비구들이여, 예컨대 모든 걷는 동물들의 발자국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의 발자국 속으로 들어간다.

코끼리의 발자국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도(道)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不放逸)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온갖 착한 법 가운데서도 불방일이야말로 최대의 것이고 최상의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기에 방일하지 않는 비구는 반드시 거룩한 팔정도를 지키며 그것들을 실현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온갖 별들이 빛나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달빛의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기에 달빛은 밤하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도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두 불방일을 근본으로 삼는다."

- 『상응부경전』45:140 족적

"알지 못하면서도 지어내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나 나는 그렇지 않다. 많이 들어서 그 가운데 좋은 것을 택하여 따르고, 많이 보아서 그것을 파악하니 이는 아는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 知之次也.)"

- 『논어』「술이」27

공자는 몇 몇 사람들 사이에서 성인 운운하는 말이 들리자

이런 말을 남겼다.

"성인의 경지와 어짊의 단계라면 내가 어떻게 감히 이르렀겠느냐? 다만 그것을 추구함에 싫증을 내지 않고 사람을 가르침에 지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若聖與仁, 則吾豈敢?

抑爲之不厭, 誨人不倦, 則可謂云爾已矣)"

- 『논어』「술이」33

"문(文)에서는 내가 남만큼 못하겠냐마는 몸소 실천하는 군자의 경지라면 나는 아직 얻지 못했다.(文, 莫吾猶人也. 躬行君子,

則吾未之有得)"

- 『논어』「술이」32

< 배우는 자의 의지, 그 중요성 >

나는 길을 가르쳐줄 뿐이다

목가리나와 붓다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세존이시여, 스승의 지도를 받는 당신의 제자들이 모두 무상안온(無上安穩)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까?"

"벗이여, 내 제자 가운데는 거기에 이르는 이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이도 있소이다."

"세존이시여, 엄연히 열반이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또 세존께서 스승으로 계신데, 어떠한 이유로 이르는 사람이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

"벗이여, 여기서 라자가하까지 가는 길을 알고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벗이여, 어떤 사람이 당신을 찾아와 라자가하에 가는 길을 물었다고 합시다. 당신은 아마도 친절하게 가르쳐 줄 것이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무사히 라자가하에 이르고, 또 어떤 사람은

엉뚱한 곳을 헤매기도 할 것이오. 그것은 왜 그렇소?"

"세존이시여, 저는 길을 가르쳐 줄 뿐입니다. 제가 그것을 어찌할 수 있겠습니가?"

"벗이여, 그대의 말이 옳소. 무상안온의 경지는 틀림없이 존재하며,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내가 스승 노릇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제자 가운데는 그 경지에 이르는 이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이도 있소.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하겠소?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일 따름이오."

- 『중부경전』107 산수가목건련경. 『중아함경』144 산수목건련경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고 말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不曰如之 何如之何者, 吾未如之何也己矣)"

- 『논어』「위령공」15

"발분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고,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발로(發露)시켜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을 때 세 귀퉁이로써 반응하지 않으면 되풀이하여 가르치지 않는다.(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 『논어』「술이」8

< 나를 숭배하지 말라 >

법(法)을 보는 것이 나를 보는 것이다

붓다의 제자인 바카리가 병을 얻어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 세존을 뵙고자 하므로 붓다는 지체없이

바카리를 찾았다.

"어떠냐, 바카리야? 견딜만하냐? 좀 차도가 있느냐?"

"대덕이시여, 저는 이제 마지막입니다. 병은 더할 뿐이어서 아무래도 회복될 가망은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 소망으로 세존의 모습을 우러러 뵈고, 두 발에 정례를 드리고 싶었는데

이 몸으로는 도저히 베르바나까지 갈 수가 없었습니다."

"바카리여, 나의 이 늙은 몸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는 것이요, 나를 보는 이는 법을 보는 것이다."

- 『상응부경전』22:87 바카리

"자신을 이겨내고 예를 되찾는 것이 어짊을 도모하는 것이다.

어느 하루 자신을 이겨내고 예를 되찾는다면 천하가 어짊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짊을 도모하는 것이 자기에게서 비롯되지 남에게서 비롯되겠느냐?(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그 세목을 묻고자 합니다.(請問其目)"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 『논어』「안연」1

< 지혜로운 자와 범부의 차이 >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

공자는 재아(宰我)의 말과 행동이 계속 일치하지 않자

이렇게 말했다.

" 처음에 내가 사람을 대함에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믿었으나, 지금은 내가 사람을 대함에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본다.

여(予, 재아의 이름)로 말미암아 이를 고쳤다.(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

- 『논어』「공야장」9

어느날 재아는 공자가 인에 대해 말하자, 자신의 반감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진 자는 비록 우물 속에 어짊이 있다고 일러주어도 그 말을

따르겠군요.(仁者雖告之曰 井有仁焉, 其從之也)"

"어찌 그렇게 하겠느냐? 군자는 가게 할 수는 있지만 빠지게

할 수는 없으며, 속일 수는 있지만 어리석게 할 수는 없다.

(何爲其然也? 君子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

-​ 『논어』「옹야」24

"비구들이여, 여기 바른 가르침을 듣지 못한 범부는 낙수(樂受, 즐거운 감정을 일으키는 것)도 느끼고, 고수(苦受,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것)도 느끼고 또 비고비락수(非苦非樂受)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미 바른 가르침을 받은 성제자들도 역시 낙수도

느끼고, 고수도 느끼고 또 비고비락수도 느낀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가르침을 받은 성제자와 가르침을 받지 않은 범부는 어떤 점이 다르겠느냐?"

"대덕이시여, 우리의 법은 세존을 근본으로 삼고, 세존을 안목(眼目)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것을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비구들이여, 잘 듣고 잘 생각해 보라. 아직 정법을 듣지 못한

범부는 두 가지 수(受)를 느낀다. 그것은 몸으로 느끼는 수와 마음으로 느끼는 수다. 그것은 예컨대, 첫 번째 화살에 맞고,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같다. 그는 아직 정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만약 오욕(五慾)의 낙수(樂受)를 받으면, 그것에 애착하기 때문에 다시 곧 탐욕의 번뇌에 결박되고 만다. 또 만약 고수(苦受)를 받으면, 이에 대해 성내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다시 진에의 번뇌에

결박되고 만다. 이에 반해 정법을 들은 성제자들은 단지 한 가지

수를 느낄 뿐이다. 즉 그는 몸으로는 수를 느끼지만 마음으로는

수는 느끼지 않는다. 이는 예컨대, 첫 번째 화살은 맞더라도, 다시 두 번째 화살에는 맞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정법을 알기 때문에 혹 오욕의 낙수를 받더라도 그는 이제 집착하지 않아 마음이 흔들리거나 의지가 혼란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약

고수를 맛보더라도 그 고수에 대해 진에를 내지 않기 때문에 다시 번뇌로 혼란해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두번째 화살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 『상응부경전』36:6 전. 『잡아함경』17:15 전

< 사람을 대하는 교사의 태도 >

나아감에 함께 하지, 물러남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에는 사람을 가리지않는다.(有敎無類)"

- 『논어』「위령공」38

세상의 때를 씻어내는 일에 인(仁)이 소용되지 않는다면 인은

애초부터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공자가 세간의 오해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난 이유였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나아감과 함께 하는 것이지 그의 물러남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심하다는 것이냐? 사람이 자신을 깨끗이 하여 나아가면 그 깨끗함에 함께 하는 것이지 그의 행적을 감싸주는 것은 아니다.(與其進也, 不與其退也. 唯何甚? 人潔己以進, 與其潔也, 不保其往也)"

- 『논어』「술이」28

붓다는 앙굴리말라가 착한 비구가 되었을 때 이런 게송을 설했다.

"과거에는 방일(放逸)했어도 이제는 방일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달처럼 이 세상을 비출 것이다. 일찍이 자신이 지은 악업을 선업으로 덮는 사람은 마치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달처럼 이 세상을 비출 것이다."

- 『중부경전』86 앙굴라경. 『잡아함경』38:16 적

< 논쟁의 배제 >

코끼리를 만진 장님들의 논쟁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며 양보하지 않는다. 대개 한 부분만을 보는 까닭에 사람들은 논쟁을 그치지 않는다."

- 『소부경전』자설경 6:4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논쟁을 벌여 상대에게 서로 과격한 말을 퍼붓고 언제까지나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것이 틀림없는가?"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대들이

서로 논쟁하고 과격한 말로 상대방을 공격했다고 하자. 이때 그대들은 음으로나 양으로나 몸으로 자비를 행하고, 입으로 자비를 말하고, 뜻으로 자비를 품고 있다고 하겠느냐?"

"세존이시여, 그렇지 못합니다."

"비구들이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대들은 무엇을 구하고자 논쟁을 하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그런 짓은 오랫동안 불이익과

불행을 불러올 뿐이다."

"도를 듣고 진흙탕 싸움에서 말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道聽而途說,德之棄也)"

- 『논어』「양화」14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다.

(攻乎異端, 斯害也已)"

- 『논어』「위정」16

"충고해서 잘 이끌되 안 될 것 같으면 그쳐서 스스로 욕을 당하지 말라.(忠告而善道之,不可則止,毋自辱焉)"

- 『논어』「안연」23

"남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한탄해야 할 것이다.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논어』「학이」16

< 덕치와 법치 >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권력 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백성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 계강자는 어느 날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도(無道)한 자를 죽여 백성들로 하여금 유도(有道)한 데로

나아가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如殺無道以就有道 何如?)"

"정치를 하신다면서 어찌 죽이는 방법을 쓰십니까? 당신이 선하고자 하면 백성들도 따라서 선해집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라서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눞게 됩니다.(子爲政, 焉用殺? 子欲善, 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 『논어』「안연」19

"정치력으로 나라를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도덕적

품격에서 벗어나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게 된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부끄러워할 줄 알고, 또 품격이 있게 될 것이다.(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 『논어』「위정」3

"송사를 듣고 판단하는 것은 나도 남만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송사가 없게 하는 것이다.

(聽訟吾猶人也,必也使無訟乎)"

- 『논어』「안연」13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은 어느날 붓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나는 크샤트리아 출신의 왕이어서 죽여야 될 사람은 죽이고, 재산을 몰수해야 할 사람은 몰수하고, 추방해야 될 사람은 추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재판에 임했을 때, 내 이야기를 방해하는 이가 자주 있습니다. 내가 재판에 임할 때는 내 이야기를 방해한다든지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건만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세존의 제자들은 전혀 다릅니다. 세존께서 몇 백 명의 대중을 상대로 법을 설하실 때, 세존의 제자들은 기침소리 하나 내지 않습니다.

언젠가 저는 세존께서 많은 대중 앞에서 설법을 하시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비구가 기침을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비구가 무릎으로 그 비구를 툭툭 치면서 말했습니다.

'조용히 해. 소리내지 마라. 우리 스승께서 법을 설하고 계시니.'

세존이시여,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칼과 몽둥이를 쓰지 않는데도 대중이 이렇게 정숙하다니!'

세존이시여, 나는 이런 대중을 본 적이 없습니다."

- 『상응부경전』89 법장엄경. 『중아함경』21 법장엄경

< 군주의 수신, 그 위력 >

거대한 바위산이 사방에서 몰려오듯

계강자는 어느 날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백성들이 공경하고 충성하도록 권하는 것은 어떻습니까?(使民敬忠以勸 如之何?)"

"당신이 신중하게 정사에 임하면 백성들이 공경할 것이고, 당신이 효성과 자애를 다하면 백성들이 스스로 충성할 것입니다. 정신이 몸소 백성들에게 착함을 들어 가르쳐도 당신을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때 권하십시오.

(臨之以莊則敬, 孝慈則忠, 擧善而敎, 不能則勸)"

- 『논어』「위정」20

자신을 닦는데 방일하지 말 것을 권하는 붓다에게 파세나디 왕은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왕이라는 직책은 주권을 장악하고 많은 영토를 보호하는 책임과 여러 가지 정사(政事) 때문에 매우 바쁩니다."

"대왕이시여, 이런 경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 당신이

신뢰하는 한 사람이 달려와서 '대왕이시여, 지금 동쪽에서 허공만큼 큰 산이 모든 생물을 깔아뭉개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대왕이시여, 빨리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라고 여쭈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때 서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신이 신임하는 가신들이 달려와서 똑같은 보고를 했다고 합시다. 대왕이시여, 그것은 무서운 사태입니다. 말하자면 인류가 멸망하는 때입니다. 그런 사태에 이르렀을 때 왕께서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존이시여,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살아있는 동안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는 일밖에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이것은 단지 비유만이 아닙니다. 저는 감히 당신에게 말합니다. 늙음(老)이 왕께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죽음(死)도 왕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는 와중에 왕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실로 존경하는 세존이시여, 늙음과 죽음은 커다란 바위산처럼 내 몸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착한 일을 행하고 공덕을 쌓는 일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 『상응부경전』3:25 산의 비유. 『잡아함경』42:3 석산

< 문화와 인성(人性) >

본성은 가까우나 그 길든 바가 멀다

붓다는 서쪽에 있는 '수나'국으로 전도를 떠날 예정인 푼나의 마음가짐을 알아보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푼나여, 서쪽 수나 사람들은 흉악하다고 한다. 만약 그들이 그대를 꾸짖고 욕설을 퍼붓는다면 그때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참으로 현명한

수나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를 손으로는 때리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면 푼나여, 만약 그들이 손으로 그대를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진실로 착한 수나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를 때리기는 해도 아직 매나 몽둥이를 사용하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면 푼나여, 만약 그들이 막대기와 몽둥이로 그대를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때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진실로 현명하고 착한 수나 사람들이구나. 그들은 나를 괴롭히지만 아직 칼을 사용하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푼나여, 만약 그들이 칼로 그대의 생명을 빼앗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세존이시여, 세존의 제자들 가운데는 육신의 병으로 괴로운 나머지 스스로 생명을 끊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 원하지 않고서도 생명을 끊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습니다."

"착하도다, 푼나여. 훌륭하도다, 푼나여. 그대가 바라는대로 지금 떠나거라."

- 『중부경전』145 교부루나경. 『잡아함경』13:8 부루나

"인간의 본성은 가까우나 그 길든 바는 멀다.(性相近也 習相遠也)"

- 『논어』「양화」2

공자는 사람의 본성은 비슷하지만, 그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난다고 보았다. 문제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그 습관, 즉 문화였던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 깨달은 자의 수난 Ⅰ >

법으로 유혹하는 것을 질투하는 자 누구인가

오랫동안 걸은 탓에 지친 붓다는 길가의 나무 아래 앉아 잠시

쉬면서 아난다에게 우물에서 마실 물을 떠오라고 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붓다는 이렇게 물었다.

"우물에서 물을 떠오지 않았느냐?"

"대덕이시여, 지금 그 우물에는 마을 사람들이 집어넣은 풀과

겨 찌꺼기들이 우물 가장자리까지 꽉 차서 물을 뜰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저 사이비 사문에게는 물을 주지 말자'고 하면서 그 같은 짓을 했다고 합니다."

- 『소부경전』자설경 7:9

"산으로 둘러싸인 마가다 국 도시에 위대한 사문이 나타났도다. 먼저 산자야의 무리를 꾀어 들이더니, 다음에는 누구를 꾀어 들이려 하는가?"

"여래는 법으로 유혹하니 법에 들어오는 것을 질투하는 자는 누구인가?"

- 『율장』대품 1:24 5-7. 사분율 33

"내가 유(由:자로의 이름)를 제자로 둔 이후부터는 사람들의 비난을 듣지 않게 되었다.(自吾得由, 惡言不聞於耳)"

- 『사기』「중니제자열전」

공자와 붓다가 이처럼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세간의 비난은 상식과 전통이 되어 버린 관념과 관행에 도전하는 자가 응당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었다. 더불어 세간의 비난은 깨달은 자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 때문에 생겨나기도 한다. 그 깊이는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만큼 보통

사람들에게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키기기 쉬웠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공자와 붓다가 평생 짊어지고 나가야 할 운명의 짐이었다.

< 깨달은 자의 수난 Ⅱ >

손님이 음식 대접을 거부하듯

"군자에게도 궁함이 있습니까?(君子亦有窮乎?)"

"군자는 궁하더라도 참고 견디나 소인은 궁하면 선을 넘어선다.(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 『논어』「위령공」1

한 바라문이 붓다를 찾아와 자신의 동족 바라문을 꾀여 붓다의

교단에 출가시켰다고 "격렬하고 험한 말로 붓다를 참방(讒謗)하고 비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바라문의 욕설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붓다는 화를 내기는커녕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이를 어찌 생각하오. 그대에게도 친척, 친구 등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게 아니오."

"그렇소, 세존이시여. 내 집에도 때때로 친구나 친척이 방문할 때가 있소."

"그럴 때 그대는 그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할 게 아니오."

"물론 나도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오."

"바라문이여, 만약 그들이 음식 대접을 받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겠소?"

"그 손님이 음식 대접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시 내 것이 될 수밖에 더 있겠소?"

"바라문이여,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대가 대답한 그대로요. 그대는 아까부터 계속 나를 헐뜻고 비난하는 데 나는 그 대접을 받지 않겠소. 그러니 그것은 도로 당신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주인과 손님이 같이 먹고 환담하는 것이 대접일 것이오.

그대가 나를 헐뜯는 대로 내가 그대를 헐뜯거나 그대가 나를 비난하는대로 내가 그대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내가 대접을 받은 것이 될 것이오. 그러나 나는 지금 보듯이 그 대접을 받지 않겠소.

그러니 바라문이여, 이 대접은 도로 그대의 것이오."

< 깨달은 자의 수난 Ⅲ >

여래는 폭력에 목숨을 빼앗기지 않는다

데바닷타는 아자타삿투 왕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자여, 옛날에는 사람의 수명이 길었으나 요즘에는 수명이 짧습니다. 당신도 왕자로만 살다가 죽는다면 섭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부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세존을 없애고 붓다가 되렵니다."

(…)

어쨌던 붓다를 해하려는 데바닷타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붓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여래는 폭력으로써 목숨을 빼앗기지 않는다."

- 『율장』소품 7:3

여래가 폭력에 목숨을 쉽게 잃지 않는 것은 불사조 같은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집단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기 때문이요, 권력과 이익을 다투지 않기 때문이요, 자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자신의 마음을 조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폭력에 잘 휘둘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세상을 바꾸는 일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더구나 인을

실현시키는 일은 자신의 일생에 성취되기 힘들다. 죽어서야 끝나는 인의 길인만큼 긴 호흡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나가야 하며, 방일하지 않되 조급하지도 않아야 한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섣부른 행동으로 허망하게 끝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섣부른 행동으로 자신의 명을 끊는다면 그것은 군자의 핵심 덕목인 수신을 바르게 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될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인의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만용의 결과일 뿐이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고, 도가 없으면 숨어라.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 『논어』「태백」13

"공손하면 수모를 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인심을 얻고, 믿음직하면 남들이 신임하고, 민첩하면 이룸이 있고, 은혜로우면 족히 사람을 부릴 수 있다.(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民則有功, 惠則足以使人)"

- 『논어』「양화」6

< 평화로운 마음과 깨달음 >

펄펄 끓는 물에는 얼굴을 비출 수 없다

공자는 평화주의자였다. 공자의 인(仁)은 당대를 지배했던 전쟁과 폭력을 극복하고자 한 사상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신심을 다하여 전쟁의 병을 다스리고자 하셨다.(子之所愼, 齊戰疾)"

- 『논어』「술이」12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전쟁터로 내모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다.(以不敎民戰 是謂棄之)"

- 『논어』「선진」30

평화에 대한 공자의 기록이 주로 당대의 정치상을 반영한다면

붓다의 평화는 정신적인 깨달음에 더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공자와 붓다의 평화주의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공자와 붓다의 평화주의는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상가라바는 붓다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의식이 맑을 때는 이제까지 배운 것뿐 아니라 아직 배우지 않은 것까지 이해할 수 있는데, 의식이 흐릴 때는 이제까지 배운 것까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바라문이여, 여기 물이 담긴 그릇이 잇다고 합시다. 만약 그 물이 빨갛다든지 파랗다든지 하여 흐려져 있으면 사람들은 그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탐욕으로 흐려져 있을 때는 마음이 청명해지지 않기 때문에 어느 것도 있는 그대로 비추지 못합니다.

또, 만약 그 물이 불에 데워져 펄펄 끓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그 물에는 얼굴을 비추어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진에(瞋恚)에 얽매여 있을 때는

결국 아무 것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만약 그 물의 표면에 이끼가 떠 있고, 풀로 뒤덮여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그 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아도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보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어리석음이나 의심으로 가려져 있으면 사물을 여실히 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반대로 그 물이 흐리지 않고, 펄펄 끓지 않고, 이끼와 풀로 뒤덮여 있지 않을 때는 언제라도 그 물에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탐욕으로 흐려져 있지 않을 때, 진에로 들끓지 않을 때, 어리석음으로 덮여 있지 않을 때는 어떤 것도 여실히 올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 『상응부경전』46:55 산가라

< 분노, 그 악순환의 논리 >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흙을 던지다

"남이 나를 욕하고 때려도 패했고 비웃음당했다는 원념(怨念)이 없는 자는 적의가 사라질 것이다."

- 『법구경』

"만약 어떤 사람이 이유도 없이, 나쁜 말을 하고 욕설을 퍼부어

청정무구한 사람을 더럽히려 한다면 그 악은 오히려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예컨대 그것은 자신에게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흙을 집어 던지는 것과 같이 오히려 자신을 더럽히리라."

- 『상응부경전』7:4 비란기가. 『잡아함경』42:10 진매

화를 내는 것은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흙을 던지는 것과 같다.

분노하지 않는 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원한에 대해서는 곧음으로 갚고 덕에 대해서는 덕으로 갚아야 할 것입니다.(以直報怨, 以德報德)"

- 『논어』「헌문」36

공자는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자신의 원한을 살펴본 다음 그것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고, 또한 상대방이 옳고 그른지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한이 의로움이나 어짊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옳지만, 탐욕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그르다는 말이다. 그것을 따져야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 생긴 원한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냉혹한 성찰이 단순한 인내나 용서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객했던 것이다.

공자의 인(仁)은 이성에 따른 성찰의 결과이지,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려나 용서가 아니었다. 이러한 일화는 무조건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의 실천이라는 단순한 생각에 일침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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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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