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th: The Greatest Teacher
죽음: 가장 위대한 스승
Judy Life
The Buddha said the greatest of all teachings is
impermanence. Its final expression is death.
Buddhist teacher Judy Lief explains why our awareness
of death is the secret of life. It’s the ultimate twist.
붓다는 모든 가르침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비영속성이라고 말했다. 그 마지막 표현은 죽음이다.
불교 스승인 Judy Lief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각이
삶의 비밀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궁극적인 예상밖의 전환이다.
“Laughing in the Face of Stupidity,” painting by Tashi Mannox from the series “Laughing in the Face of Death: To live and die without regrets.”
Whether we fight it, deny it, or accept it, we all have a relationship with death. Some people have few encounters with death as they are
growing up, and it becomes personal for them only as they age and
funerals begin to outnumber weddings. Others grow up in violent
surroundings where sudden death is common, or see a family member die of a fatal illness. Many of us have never seen a person die, while
people who work in hospitals and hospices see the realities of death
and dying every day. But whether death is something distant for us
or we are in the thick of it, it haunts and challenges us.
우리가 그것과 싸우든, 그것을 부정하든, 그것을 받아들이든 간에,
우리 모두는 죽음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자라면서
죽음과 몇번 만나고, 그들이 나이가 들고 장례식들이 결혼식보다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그것은 그들에게 개인적인 것이 된다.
다른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죽음이 흔한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거나
치명적인 질병으로 가족이 죽는 것을 본다.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을 본적이 없지만, 병원이나 호스피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죽음의 현실과 매일 죽어가는 것을 본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와 멀리 있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것과 매우 가까이 있든지 간에, 그것은 귀신처럼 나타나고 우리에게 도전한다.
Death is a strong message, a demanding teacher.
In response to death’s message,
we could shut down and become more hardened.
Or we could open up, and become more free and loving.
We could try to avoid its message altogether,
but that would take a lot of effort,
because death is a persistent teacher.
죽음은 강력한 메시지이자, 요구가 많은 선생이다.
죽음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는 닫아버리고 더 무감각해질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열고, 보다 자유롭고 보다 사랑이 많아질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그것의 메시지를 피하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
그 이유는 죽음이 끈질긴 선생이기 때문이다.
Teacher death met up with us the minute we were born,
and is by our side every moment of our life.
What death has to teach us is direct and to the point.
It is profound but intimate. Death is a full stop.
It interrupts the delusions and habits of thought
that entrap us in small-mindedness. It is an affront to ego.
죽음 선생은 우리가 태어난 그 순간 우리와 만났고,
우리 삶의 매 순간 우리 옆에 있다.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직접적이고 간단명료하다.
그것은 심오하지만, 내밀하다. 죽음은 마침표이다.
그것은 옹졸함으로 우리를 덫에 가두는 생각의 습관들과 착각들을
중단시킨다. 그것은 에고에 대한 상처이다.
Death is a fact. Our challenge is to figure out how to deal with it,
because it is never a good plan to struggle against or deny reality.
The more we struggle against death,
the more resentment we have and the more we suffer.
We take a painful situation and through our struggles add a whole new layer of pain to it.
죽음은 사실이다. 우리의 도전은, 그것을 다루는 법을 알아내는 것인데,
왜냐하면 현실에 대항해서 분투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결코 좋은 계획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항해서 분투하면 분투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억울함을 갖고 더 많이 고통받는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고,
우리의 분투를 통해서 그것에 완전히 새로운 고통의 층을 더한다.
We cannot avoid death, but we can change how we relate to it.
We can take death as a teacher and see what we can learn from it.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그것과 관계맺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을 선생으로 볼 수 있고,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Laughing in the Face of Pride,” painting by Tashi Mannox from the series “Laughing in the Face of Death: To live and die without regrets.”
Facts are facts: everyone is going to die sooner or later.
No magic trick or spiritual gimmick will make it go away.
Distancing ourselves from death or putting off thinking about
it does not work.
사실들은 사실들이다. 모두가 곧 죽을 것이다.
그 어떤 마법의 속임수나 영적인 술책도 그것을 멀리 보낼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죽음에서 멀리두거나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미루는 것은 효과가 없다.
I have noticed that the more distant we are from death,
the more fear arises. Death becomes alien, other, scary, mysterious.
People who work regularly with the dying, who are closer to death,
seem to have less fear.
내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 많은 두려움이 올라온다.
죽음은 외계인, 다른 존재가 되고, 무서워지고, 불가사의해진다.
규칙적으로 죽음과 작업하고 죽음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더 적은 두려움을 갖는 것 같다.
We each have our own unique relationship with death,
our own particular history and circumstances,
but one way or another we all relate to death.
The question is: how do we relate with this reality
and how does this color our lives?
It is possible to come to terms with the fact of death in a way
that enriches our lives, but to learn from death we must be willing to
take a dispassionate look at our experiences and preconceptions.
우리는 각자가 죽음과의 독특한 관계, 우리만의 특별한 역사 그리고 환경을 갖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죽음과 한 가지 방식 또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의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 현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이것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사실을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죽음으로부터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경험과
선입견에 대한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관점을 취해야 한다.
Reflecting on our own mortality and the reality of death is practiced
in many contemplative traditions.
In the Buddhist tradition, the contemplation of death is said to be the
“supreme contemplation.” It encompasses reflecting not only on
physical mortality, but on impermanence in all its dimensions.
우리 자신의 죽음과 죽음의 현실(mortality)을 반영하는 것은
많은 명상적 전통에서 행해진다.
불교전통에서, 죽음의 명상은 "최상의 명상"으로 말하여진다.
그것은 단지 신체적인 죽음일 뿐 아니라,
모든 차원에서 비영구성(덧없음)을 반영하는 것을 포함한다.
By means of meditation and by developing an ongoing awareness of
death, we can change our relationship with death and thereby change
our relationship with life. We can see that death is not just something
that pops up at the end of life, but is inseparably linked with our life
moment to moment,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We can see that death is not just a final teacher.
It is available to teach us here and now.
명상을 통해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지속적인 자각을 개발함으로,
우리는 죽음과 우리의 관계를 바꿀 수 있고,
그래서 삶과 우리의 관계를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이 삶의 마지막에 튀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 삶의 순간순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이 단지 마지막 스승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다.
When we contemplate in this way, our many schemes for getting
around the reality of death, such as coming up with interpretations
to make it more palatable, are exposed one by one and demolished.
Death is the great interrupter, unreasonable and nonnegotiable.
No amount of cleverness will make it otherwise.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명상할 때, 죽음을 더 마음에 드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해석들을 하는 것과 같이, 죽음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많은 계획들은 하나씩 노출되고 허물어진다.
죽음은 불합리하고 협상불가능한 거대한 방해자이다.
그 어떠한 영리함도 그것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Contemplating death is not an easy practice. It is not merely conceptual. It stirs things up. It evokes emotions of love, sorrow, fear, and longing.
It brings up anger, disappointment, regret, and groundlessness.
How tender it is to reflect on the many losses we have experienced
and will experience in the future.
How poignant it is to reflect on life’s fleeting quality.
죽음을 명상하는 것은 쉬운 수련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개념적이지 않다. 그것은 일들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사랑, 슬픔, 두려움, 갈망의 정서들을 유발시킨다. 그것은 분노, 실망, 후회, 근거없음(groundlessness)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경험해 왔고 미래에 경험할 그 많은 상실들에 대해서 반영하는 것이 얼마나 다정할지. 삶의 잠깐 동안의 질에 대해서 반영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아픈지.
How we think about death matters. It affects how we live
our life and how we relate to one another.
In this practice, we deliberately bring our attention back again and
again to our relationship with death.
We examine what we mean by death and what it brings up for us.
We reflect on our experiences and reactions to it.
이 수련에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주의를 죽음과 우리의 관계로
계속해서 다시 되돌린다. 우리는 죽음이 의미하는 바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을 조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들과 그것에 대한 자동반응들을 반영한다.
It is a bit like going for marriage counseling.
“When did you two first meet? Tell me a little about your history.
Do you spend much time together?
What is it about him or her that has offended you?
How do you see your relationship moving forward?”
You could say that death is your most intimate partner.
It is with you all the time, completely interwoven into your daily
activities. Since that is the case,
wouldn’t it be worthwhile to make a relationship with it?
그것은 결혼 상담을 가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당신들 둘이 언제 처음 만났어요? 당신들의 역사를 조금 나에게 말해줘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나요?
당신을 공격했던 것은 그 또는 그녀에 대한 어떤 점이에요?
당신은 당신의 관계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어떻게 보나요?"
당신은 죽음이 당신의 가장 친밀한 파트너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항상 완전하게 당신의 일상적 활동들과 엮여 있다.
그 이후로, 그것과 관계를 짓는 것이 가치가 있지 않을까?
But our relationship with death is not that simple.
In order to understand it, we need to slow down and systematically
examine our ideas about it, what it brings up for us, and what it means to us. Death stirs up all kinds of thoughts.
And hidden within those clouds of thoughts is a small, unspoken, deep-rooted, yet persistent notion—that we will come through it intact,
as though we could come to our own funeral.
하지만, 죽음과 우리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체계적으로 그것에 대한 우리의 아이디어들,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죽음은 모든 종류의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들의 구름 속에 숨겨진 것은 작고, 말이 없고, 깊이 뿌리내리고, 끊임없는 개념인데,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장례식에 올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온전한 채로 그것을 해낼 것이다.
The more closely you look into all these ideas, the more you see how
inadequate the conceptual mind is in the face of death.
Nonetheless, how we think about death matters.
It affects how we live our life and how we relate to one another.
당신이 이 모든 아이디어들을 보다 가까이서 볼수록, 당신은 그 개념적인 마음이 죽음에 직면해서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더 많이 보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식은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사는지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영향을 준다.
Contemplative practice challenges us to look deeply into our thoughts
and beliefs, our fantasies and presumptions, and our hopes and fears.
It challenges us to separate what we have been told from what we
ourselves think and experience. We have all kinds of thoughts about
what happens when we die and how we and others should relate with death, but through meditation we learn to recognize thoughts as
thoughts. We learn not to mistake these thoughts and ideas about death for direct knowledge or experience. We learn not to believe everything we think or everything we have been told.
명상적 수련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들과 신념들, 우리의 환상들과 추정들, 그리고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을 깊이 들여다 보도록 도전을 준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들었던 것을
분리하도록 도전을 준다. 우리는 우리가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우리와 타인들이 죽음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모든 종류의 생각들을
갖고 있지만, 명상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으로써 생각을 인식하기를 배운다. 우리는 직접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위해서 죽음에 대한 이러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기를 배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또는 우리가 들어왔던 모든 것을 믿지 않도록 배운다.
“Laughing in the Face of Attachment,” painting by Tashi Mannox from the series “Laughing in the Face of Death: To live and die without regrets.”
We are in a dance with death at all levels, and each level influences and is influenced by the others. We are influenced by what we have been
told about death and dying, by our personal history, by our cultural
biases, and by what we have observed. We are also influenced by inner habits of thought and conditioned responses.
Our most subtle views and reactions to impermanence may be quite
hidden, but they touch on our view of life altogether, and on our
personal identity.
우리는 모든 수준에서 죽음과 춤추는 중이고, 모든 수준은 다른 것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들에 의해서 영향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 들어왔던 것, 우리의 개인적 역사, 우리의 문화적 편향, 그리고 우리가 관찰해온 것에 의해서 영향받는다. 우리는 또한 생각의 내적 습관들과 조건화된 반응들에 의해서 영향받는다. 비영속성(impermanence)에 대한 우리의 가장 미묘한 관점들과 자동반응들은 숨겨질 수 있지만, 그것들은 함께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우리의 개인적 정체성에 접촉한다.
If we want to understand our relationship with death,
we need to explore its broader as well as its more subtle dimensions.
If we are willing to take an honest look at how we personally deal with this reality, we can develop a deeper understanding of impermanence
and even befriend it.
만약 우리가 죽음과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보다 미묘한 차원들 뿐 아니라 더 넓은 차원들까지도
탐색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개인적으로 이 현실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정직한 관점을 기꺼이 취한다면, 우리는 비영속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개발하고 심지어는 그것과 친구가 될 수 있다.
One way to begin is by reflecting on your personal history with death. What have you been told about death? What are some of your earliest experiences of it?
시작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죽음과 당신의 개인적 역사에 대한 반영(reflection)을 통해서이다.
당신은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들어봤는가?
그것에 대한 당신의 가장 초기의 경험은 무엇인가?
In my case, when I was about five, I was told my babysitter had died,
and that was it. For me, she just disappeared, and children did not go
to funerals. A bit later, when my aunt died, I was told that she would
go to heaven, a very beautiful place. But I didn’t think people really
believed that, because all I saw were people upset and crying.
When pets died, I was told they “went to sleep.”
It didn’t look like sleep to me.
내경우에, 내가 5살 정도 됐을 때, 나는 나의 유모가 죽었다는 것을 들었고, 그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그녀는 그냥 사라졌고, 아이들은 장례식에는 가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난 후, 나의 아줌마가 죽었을 때, 나는 그녀가 천국,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갈 것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것을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본 전부는 사람들이 속상해하고 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들이 죽었을 때, 나는 그것들이 "잠자러 갔다"고 들었다. 그것은 나에게 잠처럼 보이지 않았다.
As a child, I observed that dead animals did not breathe or move about like live ones. I saw that they shriveled up and began to smell funny, or were squashed beyond recognition. I saw that dogs hit by cars screamed in pain and that animals looked sick before they died. I saw that people became old and frail. I saw that when you killed a bug, you could not make it come back to life, even if you felt sorry.
My friends and I thought it was funny to sing ditties,
like “The worms crawl in, the worms crawl out…”
Death was not that real to us; we made it into a joke.
아이 때에, 나는 죽은 동물들이 숨쉬거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그것들이 쪼글쪼글해지고 웃긴 냄새가 나기 시작하거나, 알아볼 수 없게 으깨지는 것을 봤다. 나는 차에 치인 개들이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고 그 동물들이 죽기 전에 아파보였다는 것을 봤다.
나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고 약해지는 것을 봤다. 나는 당신이 벌레를 죽였을 때, 당신은 그것을 다시 살릴 수 없고, 심지어 당신은 미안함을 느끼기까지 했음을 봤다. 나의 친구들과 나는 "그 벨레들이 기어들어오고, 나가고..."와 같은 짧은 노래들을 부르는 것이 재밌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우리에게 그리 실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농담으로 만들었다.
I observed many such things on an outer level, but on an inner level,
I did not have a clue as to what death was about or what it all meant.
I did not know how to make sense of it, or to link it to other
experiences in my life.
나는 외부 수준에서 많은 그러한 것들을 관찰했지만, 내면 수준에서,
나는 죽음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단서를 갖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는 법 또는 내 삶의 다른 경험들과 그것을 연결짓는 법을 알지 못했다.
Death is the texture out of which we grow our identity,
the stage on which we enact our story.
In our encounter with mortality, it is this inner dimension,
the relationship dimension, that we need to explore.
It becomes obvious that to get to a more uncluttered relationship with
death, we first need to plow through a surprising number of ideas,
presumptions, and speculations, some of which are very deep-rooted.
Through this process, we can become aware of the many concepts that are floating around in us, and try to figure out where they come from
and what effect they have on us.
필사(mortality)와 우리의 만남에서, 우리가 탐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내면의 차원, 관계 차원이다. 보다 어수선한 죽음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놀라운 수의 아이디어, 가정들, 그리고 추측, 일부는 매우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을 애써서 나가야 할 필요가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많은 개념들을 자각하게 되고 그것들이 어디에서 오고 우리에 대해서 어떤 영향을 가지는지를 밝히기 위해서 시도할 수 있다.
When we look into where all this comes from, we encounter a paradox. We usually consider death to be the end, but it begins to seem that
death is in fact the beginning. It is the texture out of which we grow
our identity, the stage on which we enact our story.
우리가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들여다볼 때, 우리는 역설적인 것과 마주한다. 우리는 보통 죽음을 끝에 있는 것으로 고려하지만,
그것은 죽음이 사실 그 시작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성장시키는 질감이며,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구현하는 단계이다.
We can begin our exploration right where we are.
We have already been born, we are alive, and we have not yet died.
Now what? We might connect to our life in terms of a story or
a history. For instance, we were born in such and such a time and
place, we did this and that, and we have a particular label and identity. But that story is always changing and in process;
it is not all that reliable. However, when our story is combined with a
physical body, we seem to have something more solid, a complete
package. We have something to hang onto and defend.
We have something that can be taken away.
우리는 바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탐험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태어났고, 살아있고, 아직 죽지 않았다. 이번엔 어떨까?
우리는 이야기 또는 역사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에 연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러한 시간과 그러한 장소에서 태어났고, 우리는 이것과 저것을 했고, 우리는 특정한 이름표와 정체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항상 변화하고 있고 진행 중이다.
그것은 전부가 신뢰할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물리적인 몸과 조합될 때, 우리는 보다 굳건한 것, 완전한 패키지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달라붙고 방어할 것을 갖는다. 우리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다.
But what do we have to hang onto, really? Our story is not that solid.
It is always being revised and rewritten. Likewise, our body is not one
solid continuous thing. It too is always changing. If you look for the
one body that is you, you cannot find it.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꽉 잡아야 할까? 우리의 이야기는 그리 굳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변경되고 다시 쓰인다. 비슷하게, 우리의 몸은 굳건하고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항상 변화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인 하나의 몸을 찾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The closer you look, the less solid this whole thing seems.
When we investigate our actual experience, here and now, moment by moment, we see how fleeting and dynamic it is. As soon as we notice
a thought, feeling, or sensation, it has already happened. Poof!
It is the same with the act of noticing. Poof! Gone! And the noticer,
the one who is noticing, is nowhere to be found. Poof!
When we contemplate in this way, we begin to suspect that this life is
not all that solid—that we are not all that solid.
당신이 더 가까이 보면 볼수록, 이 전체(whole thing)는 덜 견고해 보인다. 우리가 우리의 실질적인 경험을 지금 여기, 순간순간 조사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순식간이며 역동적인지를 본다. 우리가 하나의 생각, 느낌, 또는 감각을 알아차리자마자,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 획(Poof)!
그것은 알아차림의 행위와 같다. 획! 가버렸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 하는 사람(noticer), 알아차리고 있는 자는 발견될 곳이 어디에도 없다. 획!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명상할 때, 우리는 이 삶이 그리 굳건하지 않음,
우리가 그리 견고하지 않음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This may seem like bad news, but in fact this discovery is of supreme
importance. As we begin to see through our mythical solidity, we also
begin to notice all sorts of little gaps in our conceptual schemes.
We notice little tastes of freedom and ease in which our struggle to be
someone dissolves, and we just are. In such moments, at least briefly,
we are not being propelled by either hope or fear.
We see that continually holding onto life and warding off death as a
future threat is not our only option. There is an alternative to our tight-jawed habit of holding on and defending.
이것은 나쁜 소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이 발견은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신화적 견고함을 통해 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개념적 도식에 있는 모든 종류의 작은 차이들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순간에 최소한으로 잠시, 우리는 희망이나 두려움에 의해서 나아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끝없이 삶에 매달리는 것과 미래의 위협으로써 죽음을 피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옵션이 아님을 본다. 매달림과 방어함에
대한 우리의 습관에 대한 대안이 있다.
After each little insight or pause, there is a regrouping, and we find
ourselves reconstructing our world. Each time we put it back together, we are also putting together the threat that it cannot be maintained.
We do this over and over again. We are repetitively and continuously
fueling the pretense of solidity and the fear of death that comes with it.
모든 작은 통찰이나 멈춤 이후에, 재편성이 있고,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세상을 재구조화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제자리도 함께
둘 때마다, 우리는 또한 그것이 유지될 수 없는 위협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계속 반복해서 한다. 우리는 견고함의 겉치래와 그것과 함께 오는 죽음의 두려움에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연료를 공급하고 있다.
To undo this harmful habit, we need to see it more clearly. We need to recognize that we ourselves are responsible for perpetuating it,
and therefore we have the power to stop.
이 해로운 습관을 원상태로 돌리기 위해서, 우리는 보다 분명하게 그것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영구화하는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멈출 힘을 가진다.
“Laughing in the Face of Jealousy,” painting by Tashi Mannox from the series “Laughing in the Face of Death: To live and die without regrets.”
In looking at the seeds of our relationship to life and death at a subtle
inner level, we uncover how we set ourselves up for a struggle with
death from the beginning—at the very personal level of identity and
self-definition.
미묘한 내면의 수준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계의 씨앗들을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정체성과 자기-정의의 매우 개인적 수준에서 그 시작에서
부터 우리 자신을 어떻게 죽음과 분투에 이르게 하는지를 알아낸다.
The more solidly we construct ourselves, and the more rigidly we
identify with this construct, the more we have to defend and the more we have to fear. Looking at death in terms of such subtle underlying
patterns may seem inconsequential, but it is not.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견고하게 구성하고 우리가 이 구성물에 더 완고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이 방어해야 하고 더 만이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한 미묘한 기저의 패턴들의 관점에서 죽음을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When we drop the battlefield approach—that life and death are enemies—we become open to an entirely new way of viewing things.
Instead of this vs. that, us vs. them, something much more inspiring can take place. Experiences can arise freshly because they are immediately
let go. Because they are dropped as soon as they arise, there is nothing
to hold onto and nothing to lose.
There is no battlefield, no winner and loser, no good guy and bad guy.
우리가 싸움터(삶과 죽음이 적들인) 접근을 떨어뜨릴 때, 우리는 일들을
보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에 열리게 된다.
이것 vs. 저것, 우리들 vs. 그들 대신에, 훨씬 더 영감을 주는 것이 일어날 수 있다. 경험들이 새롭게 떠오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즉각 놓아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떠오르자마자 곧 떨어지기 때문에,
매달리고 상실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싸움터도 없고, 승자나 패자도 없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도 없다.
Simple formless meditation is a very powerful tool for relaxing this
pattern of holding and defending. Working with death through our
awareness of momentary arisings and dissolvings is a profound practice. It shows us that the life–death boundary is an ongoing and quite
ordinary experience, and that this unsettling meeting point colors all
that we do. If we can become more grounded at this level, we can
become more open to what death has to teach us altogether.
간단한 형체없는 명상은 움켜쥠과 방어의 이러한 패턴을 이완시키기 위한 매우 강력한 도구이다. 순간적인 떠오름과 용해됨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통해서 죽음과 작업하기는 심오한 수련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죽음
경계가 지속적이고 아주 일반적인 경험이며, 이 불안하게 만드는 만남의
점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우리가 이 수준에서 보다 그라운디드될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이 우리에게 함께 가르쳐야 하는 것에 더 열릴 수 있다.
Although death is an ongoing reality, there are times when it hits us
particularly hard. It may be when we have a health scare or a near
accident. At such times, we really wake up to the presence of death,
and its teachings come through loud and clear. The heart pounds,
the senses are heightened, and we feel extra alive. There is a stillness,
as though time had stopped.
죽음이 진행 중인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를 때리는, 특히 가혹하게 때리는 때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건강의 겁먹음이나 거의 일어날 뻔한 사고를 경험할 때일 수 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실제로 죽음의 존재에 깨어나고, 그것의 가르침들은 크고 분명하게 나타난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감각들이 고양되고, 우리는 가외적으로 살아있다고 느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함이 있다.
When we become complacent and take things for
granted, death steps in.
Times like this are so simple and straightforward, so immediate.
“This is it,” we think. “It’s actually happening.” In such moments,
the heightening of our awareness of death simultaneously heightens
our feeling of being alive.
이와 같은 시간들은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하고, 너무나 즉각적이다.
"이게 바로 그것이예요." 우리는 생각한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한 때에,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각에 대한 상승은 동시에 우리의 살아있는 느낌을 증가시킨다.
In fact, in the face of death, we feel more fully alive than ever.
We are shocked into thinking more seriously about what to do with
the time that we have. Usually, though, we don’t maintain that
awareness, and the feeling of heightened aliveness fades away.
We revert to the default pattern of avoiding death, and, along with that, our dulled down approach to life.
사실, 죽음에 직면해서, 우리는 이전보다 더 충만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그 시간에 뭘 해야할지에 대해서 보다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환상에 빠트리죠. 보통, 우리는 그 자각을 유지하지 않고, 고양된 살아있음의 느낌은 사라져버린다.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는 디폴트 패턴과 그것과 함께, 우리의 삶에 대한 둔해진 접근으로 되돌아간다.
Maintaining an awareness of death makes life more vivid. In the light of death, petty concerns fall away and our usual preoccupations become meaningless. It is as though clouds of dust that have covered over
something shiny and vivid have been blown away, and we are left with something raw, immediate, and beautiful. We have insight into what
matters and what does not.
죽음의 자각을 유지하는 것은 삶을 보다 생생하게 만든다. 죽음의 관점에서, 사소한 일들은 사라지고 우리의 보통 심취했던 것들은 의미없어진다. 그것은 마치 빛나고 선명한 것을 덮어왔던 먼지 구름들이 날려버려진 것
같고, 우리는 날 것 그대로 즉각적이고 아름다운 것과 함께 남겨진다.
우리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통찰을 갖는다.
Awareness of death—hearing its teaching—cuts through the subtle
clinging at the core of our experience. It cuts through our self-clinging
and our clinging to others. This may sound harsh, but all that clinging
has not really helped us or anyone else. Our clinging to others may
have the appearance of real caring, but it is based on fear and an
attempt to freeze and control life. It is a way of tuning out death and
pulling back from the intensity of life. But if we develop more ease with our own impermanence and struggles with death, we can be more
understanding of others and their struggles. We can connect with one
another with greater genuineness and warmth.
죽음의 자각(그것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우리 경험의 핵심에서 미묘한
집착을 가른다. 그것은 우리의 자기-집착과 타인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가른다. 이것은 가혹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 모든 집착하는 것들은 실제로는 우리나 다른 모두를 돕지 않았었다. 타인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실질적인 돌봄의 나타남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삶을 통제하고 얼리기 위한 시도와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을 드러내서 삶의 강렬함으로부터 물러남의 방법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비영속성과 죽음과의 분투에 대한 더 많은 편안함을 개발한다면, 우리는 타인들과 그들의 분투에 대해서 더 이해적일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더 큰 진실성과 따뜻함과 연결할 수 있다.
Death turns out to be the teacher who releases us from fear.
It’s the teacher that opens our hearts to a more free-flowing love and
appreciation for life and one another.
When we get stuck in self-importance and earnestness, death steps in. When we get caught in self-pity, death steps in. When we become
complacent and take things for granted, death steps in.
죽음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풀어주는 선생임이 밝혀진다.
우리의 가슴을 삶과 서로를 위해 더 자유롭게 흐르는 사랑과 감사에 열어주는 것은 그 스승이다. 우리가 자기-중요성과 진지함에 갇히게 될 때, 죽음이 나선다. 우리가 자기-동정에 사로잡힐 때, 죽음이 나선다. 우리가 자기만족적으로 되고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죽음이 나선다.
Death spurs us forward with a sense of urgency and puts our preoccupations in perspective. Death lightens our clinging and mocks our pretensions. Death wakes us up. It is our most reliable teacher and most constant companion.
죽음은 위기감과 함께 우리를 자극하고 전체적으로 우리가 사로잡힌 생각을 둔다. 죽음은 우리의 집착을 가볍게 하고 우리의 가식을 조롱한다.
죽음은 우리를 깨운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신뢰로운 선생이고 가장 지속적인 동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