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빠가 미라레빠에게 준 축시
그대가 만나는 고향집 비참함 속에
무상(無常)을 가르치는 스승 있으리
그대 누이 백부를 비롯한 친척 중에서
가족의 인연 맺게 한 꿈을 보여줄 스승 있으리
고요하고 한적한 암굴 속에서
윤회하는 생명을 영원한 복락으로 바꿔줄 도량 있으리
신령스러운 사원 그대의 몸 속에
천상의 신들이 모여 노니는 방 있으리
건강에 좋은 음식 쓰디쓴 나물국 속에
수호신들을 기쁘게 하는 단 이슬 있으리
고향에서 그대를 기다리는 증오와 분함 속에
곧 귀의케 하는 원력 있으리
인적이 끊어진 곳 분주함 없어
곧 비밀한 힘의 은혜 있으리
그대 수행할 청정한 땅에
성취를 향한 희망찬 즐거움 있으리
신심 깊은 진실한 마음에
근면에서 비롯된 덕 있으리
그대 밀라레빠의 열성과 정진 속에
모든 불교도 신앙의 표석 있으리
그 표석이 되는 밀라레빠에게
원컨데 모든 신들의 수호가 있을지어다
오 아들아, 믿음의 뿌리가 견고하지 않으면
不二의 뿌리도 견고하지 않으리.
치우침 없는 자비를 계발하지 않으면
두 가지 색신을 얻지 못하리.
세 가지 지혜를 수행하지 않으면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으리.
제쭌 구루를 받들지 않으면
두 가지 싯디를 얻지 못하리.
마음의 뿌리를 끊지 못했다면
경솔하게 자각을 버리지 말라.
무드라로 현상을 칠 수 없다면
대락 안으로 물러나서는 아니 되리.
욕망의 생각들이 일어난다면
즐거운 코끼리같이 행동해야 하리.
때때로 번뇌가 일어난다면
마음을 바라보며 집중하여 명상하라.
좋지 않은 일로 마음을 상하면
네 가지 관정을 지속적으로 행하라.
삼독이 너의 안에서 일어나면,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라.
한마음으로 간청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자들의 뜻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생기차제와 원만차제의 합일 속에서 명상하지 않으면,
윤회와 열반이 불가분임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열 두 가지 가르침의 금강송이며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열세 번째 가르침이네.
이런 요가들을 수행하면
제13지(地)에 머무르게 되리.
깨달음의 본질은 현재성
행위는 마음속에서
미리 계획한 어떤 목적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일어난다.
따라서 예측할 수 없고 부단하며 애쓸 것이 없다.
깨달은 요기는 뭐든
보살핌이 필요하면 보살펴 주고,
영양이 필요하면 영양을 주며,
파괴할 필요가 있으면 파괴한다.
이러한 무조건적이고
자비로운 행위는 일반인의 눈에는
종종 괴팍하게 보일 수 있다.
그것은 “본질상 동일하며”,
선과 악의 이원성을 넘어서 있다.
일정한 평가기준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그것은 “환과 같다.”
끝으로 마르빠는 이렇게 노래했다.
깨달음의 본질은 현재성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모두 동시에 일어납니다.
자기해탈(self-liberation),
본연적 대락大樂이니
바람도 두려움도 떠난 것이 결실입니다.
궁극적으로 마하무드라는
시종일관 현재성(nowness)일 뿐이며,
그 안에서는 일체가 완전하다.
여기는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그러므로 바랄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다.
바로 그 자리에서의 자기해탈이며,
그것은 무조건적인 큰 기쁨이다.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깨달은
부처임을 깨닫는다.
요약 삼아 우리는
마하무드라에 관한
잠괸 꽁뛸 로되 따예의
게송을 인용할 수 있다.
마하무드라의 견해에서는
분석이 해당되지 않으니
마음이 만든 지식은 멀리 던져버려라.
마하무드라의 명상에서는
생각에 머무를 수 없으니
의도적인 명상은 내버려라.
마하무드라의 행위에서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평가기준이 없으니
행위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벗어나라.
마하무드라의 결실에서는
새롭게 얻는 성취란 없으니
바람도 두려움도 욕망도
멀리 던져버려라.
모든 까규파 수행자들의
마음 깊이가 이러하다.
마하무드라의 바탕과
결실의 결합에서는,
우리가 한 노력과 체험들을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의 스승과 계보 선조들에게
가슴에서 우러난
감사의 마음으로 의지한다.
이는 단순한 겸허함이 아니라,
수행에서 얻는 심오하고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수행하고, 소화하고, 대대로 전수하여
우리의 현재 스승에까지 이르게 않았다면,
이 길에서의 모든 단계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길을 걷는 우리를
완전히 성숙시키고 자유롭게 해주는
이 계보의 축복과, 스승의 한없는 아량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타고난 천부적 권리,
곧 깨달아 있는 마음을 물려받는다.
그래서 마하무드라에서는
헌신과 깨침(realization)이 같은
깨달음(enlightenment)의 양면인 것이다.
[미라래빠의 스승, 마르빠 41-42]
마르빠가 이 생에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마지막 가르침을
미라래빠에게 주는 시
많은 것을 원하면 마음이 괴로우니
네 마음속에 이런 교훈들을 간직하라.
보이는 많은 것이 참다운 것이 아니고
많은 나무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며
모든 지식이 참다운 지혜가 아니니
그것들을 얻음이 진리를 얻음 아니로다
많은 말에 얻을 것은 거의 없노라.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신성한 재산이니
이 재산을 원하는가? 그러면 그것을 저장하라.
천박한 열정을 제어하는 가르침이 正道이니
안전한 길을 원하는가? 그러면 이 길을 걸어라.
만족하는 마음이 가장 고귀한 왕이니
고귀한 스승을 원하는가? 그러면 이것을 찾으라.
눈물짓는 슬픔에 찬 세상을 떠나서
고독한 동굴을 네 아버지의 집으로
寂靜(적정)을 네 낙원으로 만들라.
사고를 다스리는 사고가
너의 기운 찬 말이고
네 몸이 신들로 가득찬 너의 사원이며
끊임없는 헌신이 너의 최선의 약이게 하라.
너에게 열정 넘치는 너에게
모든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주었나니
너의 믿음과 가르침과 나는 하나이다.
이 완전한 진리의 씨앗이
믿음직한 내 아들에게서
부서지거나 흩어지거나 시드는 일 없이
무성하게 자라서 열매 맺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