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라마 크리슈나 어록-
인간이여, 그대 무지의 대낮에 신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그의 생각과 동기에 의해서 적절한 보상을 받는 다. 모든 사람은 그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신으로부터 공급 받는다. 가난한 사람의 아들이 열심히 공부한 결과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말한다. '이제 나는 행복하다. 나는 원하던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제 충분하다.' 그러나 그에게 신은 이렇게 말한다. '그 상태에서 그대로 머물려 하는가?' 나이가 들어 그가 과거를 돌아볼 때에서야 그는 자신이 인생을 쓸모 없이 써버렸다는 것을 느낀다. 그에게 신은 말했다. '그대여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가?'
인간은 다음 두 가지 취향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첫째 비드야-자유를 추구하는 경향, 둘째 아비드야-세속적인 것, 구속 쪽으로 이끌리는 경향.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마음이 이 세상을 택하게 되면 아비드야의 접시가 무겁게 되어 지상 쪽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만일 마음이 영혼 쪽을 택하게 되면 비드야의 접시가 신 쪽으로 상승한다.
하나를 알아라. 그러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숫자 뒤에 놓인 0은 백 개나 천 개가 되어도 1을 빼버리면 그 0들은 아무 가치도 없게 된다. 수많은 0들은 1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이다. 첫 번째는 신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사람과 이 세상이다.
첫 번째로 신을 자각하라. 그 다음 물질이다. 이와 반대로 시도하지는 말아라. 영적인 자각이 있는 후에 세속적인 삶으로 내려가라. 그러면 너는 결코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으리라.
사회개혁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러면 사회개혁을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써 우린 신을 자각해야 한다. 기억하라. 옛 구도자들은 신을 자각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등지었다. 이것이 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머지 것들은 네가 정말로 필요로 할 때 너에게 공급될 것이다. 첫 번째로 신을 자각하여라. 그 다음 체제에 대해서, 사회개혁에 대해서 이야기하여라.
신속에서 영원한 휴식처를 찾은 후에야 이 세상의 첫 방문자인 너는 두려움 없이 일상적인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 곧 그 무서운 밤이 너를 덮칠 때 너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큰 곡식 창고의 문 앞에는 쥐를 잡기 위하여 식은 밥덩이를 넣은 쥐덫이 놓여있다. 식은 밥덩이에 매혹된 쥐는 창고 속에 더 많고 맛있는 곡물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덫에 걸리고 만다. 네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 즐거움의 그 몇 백 배나 더한 신성의 축복 앞에 서려는 찰나 그 축복 속으로 다가가려는 노력 대신 너는 조그마한 세속적 쾌락에 유혹 당하고 만다. 마야, 즉 환영의 덫에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정말로 위대한 것은 신에 대한 헌신이다. 그들에게 이 헌신의 마음이 있다면 좋다. 그들의 목적이 신의 자각에 있다면 옳다. 그러나 기억하라. 다른 천체의 별이나 해와 달 등의 이 하찮은 일에 열중하는 것은 진정으로 신을 찾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발 밑에 복종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인 명상 수련을 해야 한다.
신에 대한 끊임없는 열망으로 우리 가슴은 울어야 한다. 마음은 오직 신을 향해서 집중되어야 한다. 그는 어떤 경전이나 언어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슴이 그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헌신과 숭배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정신 없이 놀다가도 엄마가 돌아오면 놀던 장난감을 집어 던지고 엄마에게 달려간다. 너도 이와 같다. 오, 인간이여, 이 물질의 세상에서 철없이 놀고 있는 인간이여, 너는 지금 아무 두려움도 없이 부귀 명예 따위의 장난감에 팔려 아주 재미있어 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저 영원한 어머니(神)를 자각하게 되면 이 모든 장난감에서 더 이상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장난감들을 내 던지고 저 영원한 어머니에게로 달려갈 것이다.
바닷속에는 진주가 있다. 그러나 진주를 구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릎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단 한번 자맥질을 해보고 진주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진주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몇 번이고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진주를 얻게 될 것이다. 신을 찾는 일도 이와 같다. 첫 번의 시도가 실패했다고 하여 신을 향한 그 가슴의 불을 끄지 말라. 절망하지 않고 끊임 없이 시도하다 보면 너는 언젠가 신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몸이라고 하는 이 사원을 어둡게 하지 말라. 이 사원 각방마다 지혜의 불이 켜져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영원한 어머니를 보아야 한다.
지바(개별영혼)는 신에게 붙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과 그 가치는 그것들이 모두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지바가 신과 연결되어 있는 동안은 우리가 하는 일이 모두 신을 위한 일이 될 때, 우리는 더욱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신이 없으면 인간은 단 1초도 살 수 없다.
신은 자석과 같다. 그러나 쇠가 진흙에 묻혀있으면 자석의 인력이 미칠 수 없듯이 인간도 마야의 진흙에 묻혀있는 영혼은 신의 인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쇠에 묻은 진흙을 씻겨내면 자석에 이끌리듯이 끊임없는 참회의 눈물과 기도로 영혼에 묻은 마야의 진흙을 씻어내게 되면 너는 머지않아 신의 인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얽매여 있는 영혼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 마야의 밧줄로부터 풀려날 때 그 영혼은 신이다.
평범한 영혼과 뛰어난 영혼은 하나이며 같다. 이 양자 사이의 차이는 오직 겉모양뿐이다. 한쪽이 영원한 데 비하여 다른 한쪽은 제한되어 있다. 한쪽은 독립적인 데 비하여 다른 한쪽은 의존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 지성, 감각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신의 힘 때문이다. 브라흐만의 힘이 그 활동을 정지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 지성, 감각도 따라 멈추어 버린다.
인간의 본질은 저 영원한 축복이다. 그러나 자아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세속적인 것들의 제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마침내 그 자신의 본질마저 망각해버린다.
뱀이 허물을 벗어나듯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된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영혼의 자유를 얻으려고 생각지도 않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고, 어떤 사람은 이미 자유를 쟁취하였다.
예쁜 사람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으며, 성스러운 사람도 있고 나약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속에는 성스러운 존재가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의 육체는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가슴의 순수성에 따라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게 된다.
인간은 결국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그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람의 마지막 순간에 마음 속에서 신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에게 헌신하는 방법을 꾸준히 수련해야 한다. 이런 수련을 평소에 꾸준히 하게 되면 신에 대한 생각이 그 마지막 순간에 가슴속에서 솟을 것이다.
인간의 다음 생의 탄생은 그가 죽기 직전에 무엇을 생각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기도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꾸준히 기도 생활을 하게 되면 세속적인 모든 생활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의 마음은 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찰 것이며, 그의 주변도 이 영적 파장으로 진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적 파장은 죽음의 그 순간조차도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듯이 마야가 신을 가리고 있다. 신을 보고 싶으면 네 눈으로부터 이 마야의 장막을 거두어내라.
브라흐만을 알게 하는 것은 마야다. 마야가 없다면 누가 브라흐만을 알려주겠는가. 신의 구체화 된 마야를 알지 못하고는 신을 알 수 없다.
세속적인 것에 빠져있는 인간은 '황금'과 '여인'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 수천 번의 굴욕감을 가져다 주면 그때 그의 마음은 비로소 신을 향하게 된다.
기름을 넣은 가죽 포대를 본 일이 있는가. 안의 기름을 다 쏟아내도 아직 기름냄새가 난다. 너도 이와 같다. 네 가슴속에는 아직 세속적인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이 세속적인 냄새가 완전히 사라져야 신이 깃들 것이다.
신을 체험하려는 사람, 헌신적인 영적 수련을 향상시키려는 사람은 특히 욕망과 부의 올가미로부터 그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신으로부터 멀어지면 '황금'과 '여인'의 압력이 거기 놓이게 된다.
물이 담긴 항아리의 밑바닥에 조그마한 구멍이라도 나게 되면 물 전체가 그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구도자의 마음 속에 조그마한 세속적인 냄새가 남게 되면 그로 인하여 그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성욕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하라. 이에 성공한다면 생리학적인 변화가 올 것이다. 메드하라는 신경조직(낮은 차원의 에너지를 높은 차원의 에너지로 변환 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기관)이 계발될 것이다. 자아의 높은 차원은 이 메드하 신경이 계발된 이후에 얻어진다.
마음이 감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그 마음은 신에게 향한다. 신을 향해서 집중된다. 구속된 영혼은 이제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신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면 그 영혼은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마음에서 재색에 대한 애착이 뿌리 뽑히게 되면 여기 무엇이 남아 있는가. 오직 브라흐만의 축복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집안에 독사가 살고 있으면 경계를 해야 하듯,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탐욕과 욕망의 유혹을 경계해야만 한다.
'여인'과 '황금'은 이 세상 전체를 죄의 수렁으로 빠지게 한다. 그러나 '여인' 속에서 어머니 신에 대한 속성을 발견하는 순간 '여인'은 사라진다.
자아가 뿌리 뽑히지 않는 한 인간은 구제 받을 수 없다. 자아가 버티고 있는 동안은 영혼의 각성도 해탈도 불가능하다. 여기에 탄생과 죽음의 악순환은 그치지 않는다.
그대의 '나'가 사라져버리고 그대 자신이 신 속에 흡수될 때에 거기 자유가 있게 된다.
진정한 구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신이여, 당신은 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입니다. 나는 당신 손에 쥐어진 한갓 악기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시키는 것이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오직 당신의 명령에 따를 의무만이 있을 뿐입니다."
명예와 인기를 찾는 사람은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모든 것이 신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다. 현명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신이여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가 했다. 이것은 순전히 내 힘으로 해냈다."
여기 두 종류의 자아가 있다. '익은 자아'와 '덜 익은 자아'가 그것이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보는 것, 느끼는 것, 듣는 것, 아니 이 육신조차도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영원하다. 나는 자유로우며 지혜의 원천이다." 이런 생각은 익은 에고로부터 나온다. "이 것은 내 집이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 이 여자는 내 아내다. 이 것은 내 몸이다." 이런 생각은 덜 익은 자아의 발작이다.
<나>라는 말을 잘 관찰하라. 이는 자아의 과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를 뽑아 내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라. "나를 억눌러라. 그리고 신의 종으로 남아라." "나는 신의 종이다. 나는 신을 신봉하는 자이다." 이런 생각에 바탕을 둔 자아는 그렇게 해롭지 않다.
신을 체험한 사람만이 홀로 이 마야의 바다를 건너간다. "신만이 진정한 지배자다. 신과 연결되지 않고는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육체의 차원에서도 오히려 자유롭게 될 것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이야기 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기는 어렵다.
신 앞에서 지성, 지식 등은 아무 쓸모가 없다. 거기 벙어리가 말하고, 눈먼 자가 보고, 귀머거리가 듣는다.
빈 그릇은 소리가 난다. 그러나 물이 차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신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본질에 대한 무익한 논쟁으로 차 있다. 그러나 일단 신을 체험하게 되면 말없이 신의 은총에 젖어있다.
초보자인 경우 구도자는 수행의 티를 낸다. 그러나 신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구도자의 티를 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을 체험하게 되면 그는 가장 평범한 사람이 된다.
조금 알 경우, 인간은 여기 저기 뛰어 다니며 그 아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완전히 알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경전들은 오직 신의 길을 가르쳐줄 뿐이다. 일단 그 방법을 알았다면 책이 더 이상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 다음은 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신과 대화를 해야할 시간이다.
오직 다음의 두 종류의 사람들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첫째, 자기가 배운 모든 지식에 방해받지 않는 사람, 둘째, 이 모든 경전과 과학을 공부한 후에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진실한 구도자는 절실하게 신을 갈망하면 신이 모든 것을 도와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때 잘못된 길을 갔던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가 원하는 것을 신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바램을 틀림없이 이루어 주신다.
지식인들은 쓸데없이 창조의 비밀을 밝히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들은 과일을 따먹기 전에 나무와 잎사귀의 숫자까지 알고 먹으려는 자와 같다. 현명하고 겸손한 자는 창조주와 직접 친구가 되어 모든 축복을 누리고 있다.
오, 그대 성직자여, 신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는가? 우선 먼저 신성의 영감과 위임장을 받아라. 신의 영감인 이 위임장을 받지 못하면 비록 일생을 남을 가르치는 데 소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히 그대 호흡의 낭비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신의 사랑 속으로 깊이 침잠하고자 열망하는 사람, 그것을 위해서 인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속적인 일들과 신을 체험하기 위한 그 명상과 기도를 구별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겨우 책이나 몇 권 읽고는 남을 가르친답시고 동으로 서로 뛰어 다닌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진정으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사람, 신을 깨달은 사람, 오직 그만이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
저 유창한 설교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지만 그는 아직 영적인 힘이 계발되지 않았다. 그는 남이 맡긴 재산을 함부로 쓰는 사람과 같다. 그는 쉽게 다른 사람을 충고한다. 그러나 그 자신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차용해 온 것은 아무리 가르쳐보아야 별 가치가 없다.
요즈음의 종교지도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조그만 영적 체험을 하고는 아주 위대한 스승인 체 하고 있다.
우선 첫째로 그대 가슴의 사원에 신을 모셔라. 첫째 신을 깨달아야 한다. 강연 강론 등은 신을 깨달은 후에 하라. 사람들은 세속적인 것들에 집착하고 있으면서 아주 유창하게 브라흐만에 대해서 말을 한다.
영혼의 잠을 깨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제하려고 할 때는 둘 다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법력의 힘이 없는 사람 밑에서는 결코 혼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사람이 순수하고 완전하게 되면 그의 따스함이 사방에 퍼져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 자연히 그에게 모여든다. 그러므로 굳이 청중들을 붙들고 외쳐댈 필요가 없다.
신을 명상하는 마음이 세속적인 거친 생각으로 부패되어 있다면 이 부서진 도구로 어떻게 진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젖은 성냥을 아무리 그어봐도 쉽사리 불이 붙지 않는다. 그러나 마른 성냥은 살짝만 그어도 이내 불이 붙는다. 진실한 구도자의 가슴은 마른 성냥과 같다. 신의 이름을 가볍게만 불러도 그의 가슴엔 헌신의 불이 붙는다.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의 가슴은, 부에 집착하고 욕망의 물에 젖어 있는 가슴은 젖은 성냥과 같다. 신은 여러 번 사랑의 가르침을 주지만 그 불꽃은 결코 그의 가슴에서 점화되지 않는다.
세속적인 사람도 현자와 같은 지성이 있고 수행자 이상의 고통과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에너지가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에, 결국 이 모든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때묻은 거울은 햇빛을 반사할 수 없다. 그 영혼이 순수하지 못하고 불결한 사람은, 마야에 현혹되어 있는 사람은 결코 신의 영광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이 순수한 사람은 맑은 거울에 햇빛이 반사되듯 신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순수해야 한다.
세속적인 사람의 마음은 불순한 생각과 더러운 물이 섞여 아주 혼탕하다. 그는 그 마음을 다시 순수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를 향한 열정에 불붙기 위해서는 엄격한 규제와 일관성 있는 명상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속에 얽매여 있는 영혼은 언제나 쓰레기 속에서 살고 있는 구더기와 같다. 그들은 그 속에서 아무런 고통도 괴로움도 없이 그렇게 태어났다가 그렇게 죽는다. 이런 영혼은 혼의 강도가 너무 약하다. 쓰레기 위에 앉았다가 사탕과자 위에 앉는 파리와도 같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은 벌과 같다. 벌은 언제나 꿀만 먹을 뿐 그 외의 것은 일체 맛보려고도 않는다.
세속적인 사람은 어떠한 충고를 해 줘도, 어떠한 자극을 줘 봐도 결국 그의 현 상황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을 버려라. 신의 길만을 가라.
죄악에 가득 찬 길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감각을 무절제하게 혹사하는 사람, 명상을 모르는 사람,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제 아무리 높은 지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결코 신에게는 이를 수 없다.(우파니샤드)
신은 그 자신 속에서 하늘, 땅, 공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생명의 에너지로 짜고 있다. 오직 그대 자신의 진실한 영혼만이 그를 알 수 있나니, 부질없는 말장난은 집어치워라. 이것이 불멸의 길이다.(우파니샤드)
겨울 하늘을 보라. 수많은 연들이 날고 있다. 그 수많은 연중에서 몇 개의 연만이 끊어져 자유롭게 날아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명상 수련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세속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속적인 애착을 모두 버린 구도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벽에 가까운 구도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집착에 그대로 머물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구도자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성품에 불완전한 흔적이 남는다.
젊은이의 경우 그 가슴은 신을 향해 구부리기가 쉽다. 그러나 늙은 가슴은 신 쪽으로 구부리려 하면 비켜서 버린다. 젊은 때에는 신에 대한 집중이 쉬우나 늙게 되면 신에게 집중시키게 하기가 어렵다.
젊은이들은 세속적으로 부패하기 전에 신의 길로 들어가야 한다. 일단 세속적인 욕망이 그들의 가슴에 들어가게 되거나 사탄적인 쾌락이 그들을 뒤덮게 되면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이끄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이제 그대는 신을 찾았다. 그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신을 찾는데 소비했다. 신을 찾은 후에 이 세상에 들어가 보라. 이 세상의 즐거움과 평화가 아무리 좋더라도 그 체험에 비길 수 있겠는가?
사트바적인 예배, 라자스적인 예배, 타마스적인 예배 이 셋의 차이는 무엇인가? 자만심이나 겉치레가 없이 그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예배를 올리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사트바적인 예배를 하는 사람이다. 예배를 올릴 때, 집을 단장하고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잔치처럼 예배를 의식화하는 사람, 이 사람이 라자스적인 예배를 올리는 사람이다. 많은 양들을 제물로 바치고 고기와 술을 제단에 바치면서 예배를 올릴 동안 노래와 춤에 도취한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타마스적인 예배를 하는 사람이다.
부싯돌은 수 백년 동안 물 속에 잠겨 있지만 그러나 원래의 화력은 조금도 잃지 않는다. 언제든지 살짝 치기만 하면 불꽃이 튀긴다. 진실한 신앙인의 믿음도 이와 같다. 비록 에 세상의 온갖 불순한 것들에 싸여 있지만 그러나 그는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는 신의 이름을 듣게 되면 이내 뜨거워진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믿음과 헌신이 확고부동한 사람은, 이 모든 갈등과 근심 걱정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또한 그는 많은 사람들을 신에게로 향하게 한다.
감각적인 쾌락과 그 유혹은 언제 사라지는가? 축복의 영원한 바다, 신속에서 모든 행복과 기쁨을 성취했을 때이다. 신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세속적인 기쁨의 값싼 유혹은 더 이상 없다. 신의 축복을 맞본 사람은 세속적인 기쁨 속에서 더 이상의 행복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설탕과 모래가 섞였어도 개미는 모래는 그대로 두고 설탕만 가져간다. 이와 같은 높은 영적 차원에 있는 구도자와 신앙심 깊은 사람은 나쁜 것들 사이에서도 능히 좋은 것을 가려낸다.
구도자는 때때로 슬픔과 좌절, 그리고 불신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든다. 그러나 이는 잠시적인 탈선일 뿐, 그것이 오래가지는 못한다. 구도자는 신의 아들이다. 그의 헌신적인 눈물이야말로 그의 가장 무서운 무기이다.
신의 이름만 들어도 그 감동으로 머리칼을 세우는 사람, 진리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눈물이 글썽이는 사람 이런 사람은 이번 생애가 그의 마지막 윤회가 될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혼자 있을 때조차도 어떤 죄악도 짓지 않는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지만 신이 그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외딴 곳에서 돈 뭉치를 주웠을 때, 갖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는 사람, 그는 진정한 구도자다. 그러나 일반의 눈이 무서워 일종의 전시 효과를 위하여 종교인 되는 사람은 진정한 구도자라 말할 수 없다. 침묵의 종교만이 진정한 종교다. 그러나 그 종교가 자만심과 자랑으로 팽배해지면 그것은 조소와 부끄러움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신을 찾는 사람은 신을 찾는 사람 이외에는 누구와도 교제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신의 신에 대한 체험을 도반들과 함께 나누면서 행복을 느낀다. 법열에 접고 싶다면 첫째, 그대 자신 속에서의 모든 세속적인 욕구를 진정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기도는 삶의 근심 걱정으로 부패하고 부서져버릴 것이다.
물론 돈은 필요하다. 그러나 노력한 만큼의 벌이에 만족하라. 그것이 가장 좋은 자세이다. 자신의 삶과 영혼을 신에게 바친 사람, 신속에서 피난처를 찾는 사람은 돈을 잡으려고 버둥거리지 않는다. 그들의 지출은 수입과 정비례한다. 오른손으로 돈이 들어오면 왼손으로 써버린다. 돈은 결코 정체되지 않는다.
신을 위해서 일하라, 그러면 네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자연히 얻게 될 것이다. 신은 이 세상에 너를 보내기 전에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준비해두셨다.
여인과 황금의 포기는 수도원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도자들은 여자의 사진을 보아서도 안 된다. 유혹 받을 위험이 있는 것은 아예 보지도 듣지도 만나지도 말라. 일반인들은 여자들 속에 살면서도 마음은 거기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신에게로 향해 있어야 한다.
이따금 조용한 곳에 홀로 가서, 오직 너 자신만으로 가서, 불타는 심장으로 기도해야 한다. 적어도 3일은 그렇게 해야 하지만 형편이 안될 경우는 하루만이라도 해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너희들은 영적으로 충만하고 힘있는 삶을 살게 되리라.
이 세상에 살아라. 그러나 세속적으로는 살지 말아라. 구도자는 이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이 그의 영혼 속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오직 먹기 위해서만 사는 것은 값있는 삶이 아니다. 언제나 그 마음을 신을 향하게 해야 한다. 한 손으로는 일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신의 발을 잡아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될 때가 오거든 그때는 그대의 두 손과 가슴으로 신의 발을 잡아라.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차원에 사는가? 그는 진흙탕 속의 연꽃과 같다. 늪 속에 사는 고기와 같다. 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의해서 전혀 오염되지 않는다. 진흙 물은 연꽃을 적실 수 없고, 갯벌은 고기의 싱싱한 비늘을 더럽힐 수 없다.
재가 수행자든 출가 수행자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 마음은 언제나 신을 향하게 하고 집착심이 없이 그대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라. 등에 종기가 난 사람은 무엇을 하거나 신경이 온통 등에 가있다. 신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아야 한다.
실재가 아닌 것들로부터 실재를 가려내는 능력과 세속적인 것들에 냉정함과 그리고 신을 향한 마음이 열렬하다면 그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안전하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을 향하라. 너 자신을 전부 그에게 맡겨라. 거기 근심과 걱정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때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그의 의지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을 체험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재가자가 있었다. 자나카가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누구나가 갑자기 자나카의 높이까지 상승할 수는 없다. 자나카는 여러 해 동안 이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떠나서 홀로 기도와 명상수련을 했다. 잠시 동안이라도 모든 인간 관계로부터 떠나 홀로 기도와 명상을 한다면 재가 수행자를 위해 아주 좋은 일이다. 신은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오염되지 않고 세속에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나카는 처음부터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했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자나카와 같은 고행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처음에는 신에 대한 헌신부터 수련하라는 것이다. 때때로 조용한 곳에서 홀로 살아야 한다. 즈나나와 박티를 얻은 후에 이 세상으로 돌아가라.
자나카에게는 전혀 집착심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비데아(육체가 없는)라는 별명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는 지반묵타(육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야에서 벗어난 존재)의 사람을 살았다. 이 육체로부터 그러한 생각을 완전하게 떠나가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자나카는 이러한 점에서 아주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는 쌍칼을 쉽게 사용했다. 한 손엔 지혜의 칼과 다른 한 손에는 카르마의 칼을.
집착심 없이 이 세상에 살고자 한다면 우선 조용하고 외딴 곳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여야 한다. 1년이나 6개월, 또는 한달, 아니 최소한 12일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소유한 것들은 언젠가는 모두 내게서 떠나게 될 것이다.
신만이, 오직 신만이 진정한 나 자신이다. 어떻게 하면 신을 깨달을 수 있는가? 이것만이 그대의 유일한 관심사여야 한다. 첫째, 우주적 자아의 진정한 지혜로써 너 자신을 강화하라. 그런 다음 이 세속적인 것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라. 그러면 그 어떤 것도 너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침반은 언제나 북쪽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길을 잃지 않는다. 그 가슴이 언제까지나 신을 향해 있는 사람은 이 속세의 바다에서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신을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세속적인 속박에 구속당하지 않는다. 신의 발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두려움도 없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욕망과 번뇌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그를 매어둘 곳은 아무것도 없다.
오, 인간이여, 이 속세의 올가미에 걸려든 자여, 너는 축복의 바다에서 헤엄치고자 한다. 그러나 가족들의 귀찮은 간섭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여가가 있을 때마다 그 가슴을 다하여 신을 불러라. 신에게 기도하고 너의 슬픔을 말하라. 때가 되면 너는 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축복의 바다에서 헤엄치게 될 것이다.
유혹의 장소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거든, 저 영원한 어머니를 생각하라. 어머니는 너를 보호해줄 것이다. 네 가슴 깊이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악마들로부터 너를 보호해줄 것이다.
이 세상과 신,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이 세상에 살아라. 그러나 언제나 신을 기억하라. 결코 신의 길을 등지지 말라. 세속적인 하면서도 신을 굳게 잡아라. 그러면 그대는 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어떤 환경에 놓이든지 자신의 마음이 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 세속적인 잡무에 둘러싸여 있을 때도 그 가슴만은 신을 향해야 한다. 손으로는 세속적인 모든 임무를 수행하고 가슴으로는 신을 찬미하는 것을 잊지 말라.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라. 삶 자체가 기도이게 하라.
나의 가족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의 것이다. 나는 신의 하인이다. 신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이런 생각이 확고해질 때, 여기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서 모든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마음은 늘 신에게 향해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구도자다. '고행의 길'을 떠나기 전에 안락한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대는 영적인 성장을 게을리 하지 말라.
두뇌가 명석하고 가슴이 깊으며, 이 양자가 잘 균형을 이룬 사람은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이다. 그는 그에게 부여받은 임무가 어떤 것이든 아주 훌륭하게 그 임무를 해낸다. 그는 신을 향한 확고한 믿음과 사랑에 충만해 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가 세속적인 일에 몰두할 때는 철저한 사업가가 된다. 지식인들 모임에서는 박사들 못지 않게 그의 의견을 피력한다. 가족들에게는 자애롭고 겸손하다. 친구들에게는 늘 편안함을 준다. 그의 아내에게는 사랑의 신과 같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완전한 사람이다.
인간의 마음은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데, 그 대부분이 소모된다. 그리고 그 손길은 포기의 삶을 택함으로써 보상받는다.
구도자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누구인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등 내일을 전혀 생각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구도자다. 이런 사람의 마음가짐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두려움 없이 나무 꼭대기에서라도 뛰어내리겠다. 이 삶과 육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구도자는 집착이 없으며 감각을 잘 제어한다. 그러나 여자와 돈을 철저히 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도자의 철저한 포기를 알아차릴 때, 사람들은 용기를 갖게 된다. 진정한 구도자의 상징은 무엇인가? 욕망과 황금은 철저히 거부해야 한다. 꿈속에서조차 그것들의 오염이 있다면 그의 모든 영적 수행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수행자의 복장을 입은 사람은 진정한 수행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어떤 외부 조건으로 하여 수행자가 된 사람은 마지못한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고행주의는 일시적이다.
가슴과 영혼으로 신을 받드는 자가 진정한 수행자다. 여자와 황금을 포기한 사람이 진정한 수행자다. 그는 언제나 신을 생각한다. 그는 이 모든 것들 속에 신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를 섬긴다. 이것이 진정한 구도자의 특성이다.
신의 은총은 영혼과 형상, 모두에게 내려진다. 내적인 감정이나 외적인 상징에 고루 내려진다.
진리의 완전성을 체험한 사람은 모든 계급과 차별을 버린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생명의 상호 연결과 조화를 깨닫는다. 그러나 진리의 완전성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월 의식과 열등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헌신자는 우선 구체적인 신의 형상에 그 생각을 고정시킴으로써 집중력을 키워야 한다. 이 일이 성공한 다음에는 그 마음을 무형에 고정시켜야 한다. 그의 마음을 신의 형상에 집중시켜서 수련하다보면 무형의 영적 공간에로의 집중이 보다 쉬워질 것이다.
신의 동상을 왜 단순히 진흙, 나무, 돌로만 생각하는가? 이런 동상들 속에까지 우리 의식의 근원인 어머니, 저 영원한 존재가 현현하고 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신을 깨달은 사람은 알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 모든 동상들이 신의 영적인 힘의 현전임을 알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 모든 동상들은 나무나 돌이 아니라 영혼의 구체화인 것이다.
숭배자가 동상들을 보고 신의 다양한 형상이라고 확신하게 되면 그는 상의 숭배를 통해 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상들을 단지 나무나 돌로 여긴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이 모든 상의 숭배가 신을 깨닫기 위한 그 기초 단계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상의 숭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각기 다른 상을 숭배하는 것은 오직 신을 깨닫기 위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신만을, 오직 신만을 사랑하라. 이것이 너의 첫 번째 의무이다.
우유는 소에게서 나오지만 귀나 다리를 쥐어짜도 우유는 나오지 않는다. 우유는 오직 젖을 짜야만 나온다. 신은 우주에 충만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곳에서 신을 보기는 어렵다. 신은 숭배자들의 영적 에너지가 몰려있는 사원에 보다 더 쉽게 나타난다. 규칙적으로 기도와 명상을 하는 영적 공간에 더 자주 나타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명상하며 염원하는 곳에서 신은 그 자신을 나타내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들의 헌신과 영적인 사색을 통해서 하나의 응결된 형태로써 신은 그 자신을 현현시킨다. 그러므로 그런 장소에서 우리는 보다 쉽게 신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영적인 자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수많은 수행자들과 헌신자들, 그리고 자각의 경지를 맛본 사람들이 신의 비전을 갖기 위해서 이런 성소를 찾았던 것이며, 세속적인 욕망을 다 버리고 오직 사무치는 가슴으로 신에게 기도했던 것이다. 사실 신은 이 모든 것에 편재해 있지만 그러나 특별한 이런 장소에서 신은 그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땅의 어느 곳을 파든지 결국은 물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우물이나 호수를 발견하게 되면 언제든지 필요할 때에 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원이나 성지를 방문하게 되면 적어도 그곳에 머무는 동안은 거룩한 생각을 해야 한다. 조용한 구석에 앉아 이런 분위기 속으로 그대 전부가 용해되어 버릴 때까지 명상에 잠겨있어야 한다. 이런 장소를 떠난 후에도 얼마 동안은 이런 분위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신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거기에서도 역시 깨닫지 못한다. 그 가슴속에서 이미 신을 체험한 사람은 성지에서도 강렬한 긴장을 느낄 것이다. 그런 헌신의 마음이 없다면 성지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성지에 간다. 그러나 대개는 그곳에서 장사치가 된다.
성자나 현자들과의 만남은 영적 성장의 기본적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