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은 꼭 거울 같은 것
진리를 구할 것은 없다,
그저 의견을 갖지 않는 게 좋다.
의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 기독교, 힌두교, 회교, 자이나교 -
의견을 품어서는 안 된다,
경전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경전에 통달하면 지식인이 될지는 모르지만
결코 현명한 자는 되지 못한다.
많은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일지는 몰라도
그런 것들은 모두 생명력을 잃은
차용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의견은 진리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의견은 마음에서 온 것이다,
진리는 마음에서 오지 않는다,
진리란 마음이 사라졌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판단은 이미 알고 있는 것, 즉 기지다,
그리고 진리는 미지다,
기지가 멈출 때 미지가 찾아온다,
주위에 어떤 기지의 대상도 없을 때
알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
인간은 사고와 더불어 행동해서는 결코 다다르지 못한다,
바로 그것이 오직 하나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사고, 판단, 기독교도로 있는 것,
힌두교도로 있는 것, 바가바드 기타, 성경, 코란,
인간은 지식을 갖고 갈 수는 없다.
지식은 마음에 속하는 것으로
의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보라,
나는 의식은 꼭 거울 같은 것이라고 그대들에게 말했다,
앞에 온 것이 무엇이든 거울은 아무런 편견도 품지 않고
그 상을 내보인다,
거울은 ‘이 여자는 아름답다,
나는 이 사람을 비추고 싶다‘
’저 여자는 싫다,
저 사람 상은 받아들이지 말자,
저 사람은 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거울은 판단하지 않는다,
거울은 오로지 상을 받아들여 반사할 뿐이다,
그것이 거울의 본성이다.
한편에서는 사진의 감광판이라고도 하는데
이것 역시 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것은 딱 한번밖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다음은 그 형상에 집착한다,
카메라의 뒤에 숨겨져 있는 감광판도
상을 받아들이지만 단 한번 뿐이다.
마음은 꼭 감광판을 닮았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그 영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죽은 영상을 나른다,
그러면 늘 죽은 영상을 운반하게 되는 것이다.
거울은 상을 받아들이고 다시 텅 비게 된다,
다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거울은 늘 신선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결코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울에는 어떤 판단도 없다,
마음에 있는 것은 판단, 판단, 판단뿐이다,
그리고 이 판단의 두터운 벽 때문에
인간은 결코 진리에 다다르지 못한다.
진리는 있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재다,
그것은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사색할 수는 없다,
논리를 세우면 세울수록 그만큼 놓치게 된다.
승찬은 말한다.
진리를 구할 것은 없다,
그저 의견을 갖지 않는 게 좋다,
이런 저런 상태에 머물지 말라,
그러한 삶을 조심스럽게 삼가라,
이것과 저것, 시비의 흔적이 있으면
마음은 혼란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어렵다,
지식을 버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평범한 지식보다 더 깊은 곳에는
선악의 양심이 있다,
인간은 ‘알았어, 난 이제 기독교도도 힌두교도도 아니야.‘하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도덕이 되면, 선악의 판단이 되면 어떨까?
그대는 도덕이 기독교나 힌두교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도덕은 인도주의자다,
무신론자조차 도덕가다,
무신론자는 어떤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선악에 바탕을 두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구도자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심오한 문제의 하나다,
참된 구도자는 모든 개념
- 선과 악 -을 떨쳐 버려야 만 한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
작은 배로 몇 사람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가 미친 듯이 거칠어지기 시작해
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혀 버릴 위기에 놓였다,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배에는 널리 알려진 성자와
못된 짓으로 이름을 떨친 죄인이 타고 있었다,
그 죄인도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신이시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러자 성자가 그 죄인에게 다가와 말했다.
“너무 큰 소리를 내지 말게,
만약 신께서 자네 말을 듣고 자네가 이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아시게 되면 우리들 모두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우리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걸세,
너무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해 주게.“
인간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성자가
진정한 성자일 수 있을까?
만약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성자가 참된 성자일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위대한 도덕가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선에 얽매이고 여전히 다른 사람에 대한
비난을 품고 있다.
종교인은 비난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받아들인다,
종교인은 지극히 겸허하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난 성인이다, 너는 죄인이다‘하고
말할 수 있을까?
종교인은 선과 악의 모든 틀을 털어 버린다.
승찬은 말한다.
이런 저런 상태에 머물지 말라,
그러한 삶을 조심스럽게 삼가라,
이것과 저것, 시비의 흔적이 있으면
마음은 혼란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생각해 보라,
그대들도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너무 선한 사람으로만 있으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악은 그대로 남아서 그것을 억압하게 될 것이다,
겉은 그런대로 연마가 되겠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혼란을 겪고 있다,
겉은 성자가 되어도 숨겨진 내면은 죄인이 된다.
그리고 같은 일이 죄인에게도 일어난다,
겉은 죄인이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그 역시 성자처럼 되고 싶어한다,
그도 ‘이것은 좋지 않다, 이것은 그만 두자.‘고 생각하고 있다.
그 역시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려고 한다,
양쪽 모두 분열하고 있다,
그 차이는 분열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차이는 단순하게 무엇이 표면에 있고
무엇이 숨겨져 있느냐는 것뿐이다.
성자는 죄에 대해서 계속 꿈을 꾼다,
성자는 자신이 억압한 모든 나쁜 일을
꿈속에서 끊임없이 본다,
기묘한 현상이지만 성자의 꿈속을 들여다 보면
그는 늘 죄인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죄인의 꿈을 들여다 보면
그는 항상 성자처럼 보이게 된다.
- 오쇼 라즈니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