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한암,용성,만공,전강스님
열반에 든 은사로부터 보임(補任)이란
곧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뼛속 깊이 깨달은 경봉은
날마다 선심초심(禪心初心)이란 선가의 금언을 절감했다.
보임이란 결코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낸 오도의 경지를 진귀한 보석처럼
혼자서만 은밀하게 닦고 빛내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다.
감로수가 솟는 우물도 고이면
썩거나 메마르고 마는 것처럼
깨달은 진리도 샘이 되어 어디론가 흘러가야 했다.
꽃이 되어 어디론가 향기를 퍼뜨려야 했다.
흘러 넘치는 샘이 되고
향기를 퍼뜨리는 꽃이 되어야
진정한 보임인 것이었다.
그래서 경봉은 일상의 삶으로 돌아갔고,
한편으로는 제방에서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 종종 자신의 경지를
편지에 적어 띄워 보냈다.
경봉의 일상이란
수선(修禪) 정진 속에서도
자연과의 교감을 술회하는 선시를 짓거나,
화엄살림법회나 법화살림법회에서 설법을 하거나,
만일염불회에서 염불하거나,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재를 지내는 일
등등이었다.
불가의 모든 방편들이 경봉에 이르러서는 하나로 회통한바
마치 크고 작은 강물이 깊은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았는데
이것이 바로 경봉의 독특한 가풍이 되었다.
그러니 극락암에는 선승이나 염불승, 학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류의 발걸음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경봉을 만나 자신들이 공부한 바를
점점해 보고는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통도사 산문 안에서 시회(詩會)를 가장 많이 연 곳은
자장암 바로 아래로 흐르는 자장동천의 반석이었다.
자장동천은 통도사 팔경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명소였다.
그곳에서 수시로 승속을 불문하고 시회가 열리곤 했다.
통도사에도 시를 잘 짓는
보우(普雨), 몽초(夢草), 경하(鏡河; 경봉의
사제) 등등의 수행자가 있었으나
이미 탈속의 경지에서 노니는 경봉이
매번 초대를 받아 나가곤 했다.
실제로 경봉의 일기인 <삼소굴 일지>
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없이 나오곤 하는 것이다.
<4월22일 일요일 맑음
오전 10시 자장동천에서
서청계(書廳契)에 참석했는데
몇 사람 시우(詩友)들과 읊조리다.
지난해 이 날이 올해도 이 날이라
옛 절 옆에 시회를 베풀었네
꽃은 피어 뭇 산의 온 성지를 장엄했고
구름 걷히니 만 리 하늘이 한 빛이로다
푸른 시냇물은 현현한 가운데 오묘하고
우짖는 새소리 격식 밖의 선일세
꿈 가운데 분망하게 취했다 깨는 이들이
동풍 봄술에 속연을 잠시 잊네.
去年今日又今年
錦軸詩開古寺邊
花發群山千聖地
雲收萬里一光天
碧溪盡是玄中妙
啼鳥無非格外禪
夢裡紛忙醒醉客
東風春酒却忘緣
옛 절이라 함은 자장암을 일컫고,
구름 걷히니 만리 하늘이 한 빛이로다
(雲收萬里一光天)라는 구절은
번뇌 망상의 구름이 사라지고 나면
바야흐로 눈부신 하늘이
통쾌하게 열린다는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는바
시회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봉의 시를 우러러 읊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선시 구절과 같이
푸른 시냇물처럼 현현 오묘하고
우짖는 새 소리처럼 격식 밖의 노래였던 것이다.
화엄살림법회는 1년 만에
<법화경>을 가지고 설법하는 법화살림법회로
바꾸어 무랑수각에서 계속 이어갔다.
만일염불회는 끊이지 않고 하되
장소를 백련암으로 옮겨갔다.
설법은 갈수록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경봉의 설법을 듣고 산길을 내려서다
엉엉 우는 수좌도 있었다.
그 수좌는 화두에 갇혀
진퇴양난에 빠져 있다가 경봉을 만나고 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감격에 겨워
통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수좌가 들었던 법문은 이런 내용이었다.
그날도 경봉은 늘 그러하듯
입정의 묵묵함을 선시 한 수로
분위기를 바꾸면서 서두를 꺼냈다.
‘누구든지 활발하게 산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낙엽도 활기를 띠고
하늘에 가득한 바람과 비를 타고 훨훨 나는구나
(落葉方能生活氣 滿天風雨碧空飛).
낙엽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사람도 밝고
개도 밟아 아무 가치 없는 것이지만
바람과 비에 활기롭게 나는구나.
낙엽도 벽공(碧空)을 풀풀 나는데,
만물 중에 가장 슬기로운 사람이 좀 실패를 당했다 해서
근심에 담겨 있대서야 되겠는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끊어진 곳에서
다시 사는(絶後更生) 패배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절후갱생. 죽어 있는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사중득활(死中得活)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말이었다.
이 부분에 이르러서 이번 철에도 깨닫지 못하면
목숨을 끊어버려야 되겠다고
자포자기하고 있던 그 수좌는
뜨거운 가마솥에 화상을 당한 듯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이다.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해서
경봉스님이 법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실제로 경봉은 수좌를 편안하게 응시하면서
말머리를 꺼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수좌는 숨을 죽이며 경봉의 다음 얘기를 들었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지만 소옥에게는 일이 없다
다만 낭군에게 들어오라 알리는 소리일 뿐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朗認得聲
이 시에 얽힌 고사는 참으로 재미있다.
양귀비가 밤으로 자주 그의 몸종
소옥이를 부른다.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실은 그의 정부(情夫) 안록산을
부르는 암호로써 소옥아 소옥아 하고 부르는 것이다.
이 게송을 소염시(小艶詩)라고 하는데,
오조 법연 스님이 객(客)과
이 시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원오 극근 선사가 도(道)를 알았다.
부처님이 설법하시려고
사자좌상에 앉아 있는데 외도가 와서 물었다.
“있는 것도 묻지 않고
없는 것도 묻지 않습니다.”
유무(有無)를 떠나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묵묵히 있다가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그러자 외도가 절을 하였다.
“참으로 법문 잘 들었습니다.”
아난존자가 옆에 있다가
외도가 떠나 간 뒤 부처님께 물었다.
“외도가 무엇을 알고 갔습니까?”
“천리마는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잘 달린다.”
모두들 ‘자기 찾는 이 일’이 급한 것인데
이렇게 바쁜 것은 바쁘지 않다 하고,
바쁘지 않은 일을 바쁘다고 야단들이다.
그래서 여기 극락암 소변소 이름을
휴급소(休急所)라고 하였는데,
아무리 바쁘더라도 소변부터 보아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지 별 수 있는가.
그리고 변소를 화장실이라고 하는데
나는 해우소(解憂所)라고 부른다.
먹을 때는 좋지만 가스가 꽉 차 있으면
배설시켜 버려야 된다는 말이다.
그래야 속이 편하고 좋다.
배에도 하찮은 가스가 꽉 차 있으면 불편한데,
마음 가운데 못된 생각,
귀찮은 생각, 어두운 생각을
확 비워 버린다면 얼마나 좋은가.
대소변 보는 일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지 모르나 절대 그렇지 않다.
여기에 인생의 심각하게 큰일과
근본문제와 생사 문제가 달려 있다.
이 대소변 보는 데 아주 큰 진리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자고 나서 세수를 하고 화장도 하지만
마음 가운데 때가 있고 없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에 한 번씩만 내 마음 가운데
하찮은 생각이 있나 없나를 살펴볼 일이다.’
경봉은 대중들이 지루할 만하면
반드시 자신이 직접 창을 하거나
소리꾼이 와 있으면 소리를 시켰다.
마침 경봉의 설법을 들으러
구미에서 온 소리하는 여자 소리꾼을 불러
경봉 자신이 지은 무생곡(無生曲)이란
가사를 건네주며 부르도록 했다.
모시치마 저고리에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른 여자 소리꾼이 일어나
조금도 망설임 없이 합죽선을
두 손으로 모아 쥐고 무생곡을 불렀다.
동천에 걸린 달아 우주 만상 빛이 되어
영축산 높은 봉에 너의 얼굴 나타났네
만고에 불멸의 정신은 너도 또한 가진 듯.
대중들이 재청을 하자,
경봉은 또 다시 여자 소리꾼에게
자신의 문답시(問答詩) <태평가>를 주어 부르게 했다.
소리꾼은 판소리 사설로 문답시를 풀어나갔다.
쯧쯧 무정한 나의 주인공아
이제사 만나다니 어찌 이리 늦었노
하하 우습다 내가 그대 집속에 있었건만
그대 눈이 밝지 못해 이같이 늦었을 뿐이네
소리꾼은 <문답시>로 분위기를
다잡아 놓고는 단가를 부르듯 나머지
태평가를 멋들어지게 불러 젖혔다.
영리한 주인공 주인공아
그대 말이 그러하고 그러하도다
오늘 날씨도 따뜻하고 바람도 화창하여
산은 층층하고 물은 잔잔하며
산꽃은 웃고 들새는 노래 부르니
손을 마주 잡고 태평가나 불러보세
분위기가 자못 흥겨워지자
경봉은 이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구수한
옛 이야기로 법문을 이어갔다.
‘예전에 비단장수가 비단을 팔러 다녔다.
산을 넘다가 몸이 고단해서
양지 바른 곳에서 비단 짐을 베고 낮잠을 잤다.
한참 자고 일어나 보니 베고 자던 비단을
잠든 사이에 누가 훔쳐갔다.
그 비단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처지에
그것을 누가 훔쳐갔으니
살 길이 막연해서 고을 원님께 소지를 정했다.
소지란 지금으로 치자면
진정서를 낸다는 말과 비슷하다.
원이 비단장수에게 자세히 말하라고 했다.
“예, 소인이 비단을 팔러 다니다가 비단 짐을 베고 잠 든 사이에
어느 놈이 비단 짐을 몰래 가져갔습니다.”
“그럼, 누가 본 사람이 없느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이 봐도 봤겠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망두석이나 봤으면 봤을까.”
“망두석이 있더냐?”
“예.”
“그럼. 사령들은 듣거라.
그 망두석이 범인을 봤을 테니 속히 망두석을
잡아오너라.” 원의 명령이므로
어쩔 수 없이 망두석을 잡으러 가지만
아전들은
“망두석이 보기는 무얼 봤다고...
사또가 참 시원치 않군.”
하고 조소를 했다.
마침내 아전들이 망두석을 묶어다
동헌 뜰에 엎어 놓았다.
원이 망두석을 보고 심문을 시작했다.
“망두석 듣거라. 비단장수가 비단을 베고 자다가
비단을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네가 범인을 보았을 테니 본대로 바로 말하렷다.”
하지만 망두석이 어디 말할 수가 있겠나.
원이 노발대발했다.
“저놈을 장판 위에 올려놓고 매우 쳐라!”
사령들이 곤장으로 망두석을 토닥토닥 치니
이 희한한 광경을 지켜보고
서 있던 구경꾼들이 어찌나 우습던지 폭소를 터뜨렸다.
아전들도 웃고 모두들 웃으며 속으로
저 세근없는 사또가 하고 있는 꼴을 좀 보라는 듯
모두 수군거리자 사또가 또 노발대발했다.
“저기 웃는 놈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어라.
사또가 정사를 다스리는데 무엄하게 조소하고
저렇게 소란을 피우니 저런 놈들은
좀 때려야 하니까 우선 가두어 놓아라.”
사또가 명령을 내려 잡아 가두게 하자,
도망친 사람도 있고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붙들린 사람이 삼십여 명이나 되었다.
사또가 아전을 시켜 은근히
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너희들이 사또께서
치민(治民) 치정(治政)하는 데
조소하고 소란을 피웠으니
그 죄로 비단 한 필씩만 가져오너라.
그러면 놓아줄 것이다.”
모두들 나갈 생각으로 가족 되는 사람들에게
비단 한 필씩을 가져오게 해서 모두 나갔다.
그렇게 거둬들인 비단을 쌓아놓고
비단장수에게 네 비단이
여기 있는가 찾아보라고 하니,
이것도 제 것이 올시다,
저것도 제 것이 올시다 하며 여러 필을 찾았다.
사또가 나졸들에게 지시했다.
“이 비단을 어디서 샀는가.
그 산 곳과 사람을 비단 가져온 사람에게 알아 오너라.”
여러 필을 골라가지고 산 곳을 캐 보니
아무 동네 아무개에게 산 것이
드러나서 그 사람을 잡아들여 엎어놓고
몇 차례 때리니까 전부 얘기했다.
“제가 어느 곳을 지나다 보니까
비단을 베고 자기에 욕심이 생겨
가져갔습니다.”
이리해서 다른 사람의 비단은
다 임자에게 돌려주고 비단장수의 비단은
전부 찾아주었다. 망두석을 곤장칠 적에
모두 웃었지만 진범인 도둑이
거기서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어떤 것이 불법의 적실한 뜻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니라.”
자기 자성(自性) 자리를 묻는데
왜 얼토당토않은 잣나무를 말하는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이니라.”
변소에서 똥 닦는 막대기란 말이다.
부처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삼 서 근이니라.”
이 모두 내 마음 찾는 데는
얼토당토않은 십만 팔천 리 밖의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들어
의심하고 참구하여
구경(究竟)에 나아가
무아의 경지에 이르면
앞에 말한 망두석을 잡아다가 때리는데
도둑놈이 잡히듯이 무위진인(無位眞人),
위(位) 없는 참된 사람이 나타난다.
얼토당토않은 것이지만
그것을 자꾸 참구하면 자기의 본성을 볼 수 있다.
망두석을 치는데 도둑놈이 나오고,
마른 똥막대기, 또는 삼 서 근 등을
참구하여 구경에 가면 위가 없는 참된 사람이 나온다.
이 몸을 자기라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봐야
이것은 부모의 물건이지 내 물건은 못 된다.
참된 자기는 눈앞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역력히 외로이 밝은 그 자리가 참된 자기이니
그것을 알 수 있을 때까지 공안(公案)을 참구하여야 한다.
요사이 처음 발심하여 출가한 이들에게
말하여 주기를 ‘바보가 되거라,
사람 노릇하자면 일이 많다.
바보가 되는데 참사람이 나온다’ 하고 말한다.
참선하는 이들이 마삼근(麻三斤)이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나 무(無)자나 간시궐(乾屎?) 등
천칠백 공안 중에 하나를 들고 자꾸 참구하여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이르면
본래 이 자리가 고요한 것이지만
편안함이 그 어디에도 비할 수 없는 아늑함이 생긴다.
몸과 마음이 지극히 편안해진다.
그러다가 더 나아가면
내 마음이 본래 맑은 지극히 맑은 그 경지에 이른다.
거기서 밝은데 이르러 통하게 된다.
어두운 것이 없어지면 밝아진다.
이 도리는, 오고 가고 죽고 사는 것이
본래 공(空)하고 알고 모르고가 없는 것이나
말을 하자니 이런 말을 하게 된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 하면
자기도 물에 들어가야 하는 격이다.
옛 성현이 말하기를
범부는 유(有)에 머물고, 소승은 무(無)에 머물고,
보살은 유무에 머물지 않나니
이 또한 자기 마음으로 망상을 내는 것이다.
색(色)이 색이 아니니 저 색에 물들지 않으며,
색이 비색(非色)이 아니므로 비색에도 물들지 않는다.
또한 견(見)을 보지 않으며,
불견(不見)함도 보지 않으니
이 이름이 견법(見法)이며,
안다는 지(知)를 알지 못하며
또한 알지 못하는 것까지도 알지 못하니
이 이름이 지법(知法)이다.
이러한 견해를 짓는 이것을 이름하여
망상이라 하였다.
수행하는 이는 이것을 재삼 살펴 볼 일이다.
달빛은 구름에 어려 희고
솔바람은 이슬에 젖어 향긋하네
좋다, 이 참 소식이여
머리를 돌이켜 자세히 보아라.
月色和雲白
松聲帶露香
好箇眞消息
回頭仔細看
경봉은 이처럼 극락암의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빠트리지 않고 설법을 하면서도
망자를 위해 화장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다비법문을 해주었다.
경봉은 망자의 영가가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위로해주고
지극한 염불로 극락왕생을 빌었다.
‘금일 입적한 영가여,
인간의 생사가 괴롭던가 즐겁던가.
생이란 뜬 구름이 흘러오는 것 같고,
사(死)라 함은 밝은 달을 따라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벌건 화로불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고
큰 바닷물 밑에서 찬 바람을 일으킨다면
산하대지와 꽃과 풀들이 이 모두 보살좌이니
이제 가고 오고 하는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 알았는가.
어제 밤비에 꽃이 졌는데 새는 춘정을 못 이겨 우짖네.
가고 옴이 본래 공적한데 흰 달만이 홀로 비치누나.’
일찍 여읜 어머니를 위해 대중들의 재나
다비법문을 기꺼이 주관했던 것은 아닐까.
어머니를 여의고 소년 경봉은
뿌리를 잃은 상실감으로 슬퍼하다가
또 다른 뿌리를 찾아 통도사 안양암으로 출가했던 것이다.
경봉이 도인이 됐다는 얘기는
전국의 여러 산중으로 퍼져나갔다.
일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도인이 깨달은 경지였다.
아무리 맛있는 사과라도
스스로 한 입 깨물어 보기 전에는
일상의 언어로 그 맛을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부족하고 불가능한 이치였다.
그러니 도인들 끼리 나누는 얘기는
일상의 언어를 빌리되
그 언어의 한계를 초월해 버리고 마는 것이어서
저잣거리에 사는 사람이 듣기에는
아리송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선가에서는 선문답이라고 불렀다.
경봉은 주로 선시를 짓거나
도인들과 선문답을 나눔으로써
깨달음의 선열을 다스렸다.
그런데 선시는 극락암 대중들과
차를 마시는 찻자리나
자장동천에서 펼치는 시회에 나가
자주 읊조릴 수 있었으나 선문답은
대부분의 도인들이 산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으므로
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도인은 주로 경허선사에게
인가를 받은 선승들이었는데
제산, 한암, 혜월, 수월, 만공 등이었다.
그만큼 경허의 선풍은 전국에 산재한
어느 선방이든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경봉이 아직 출가하기도
전인 1899년 23세 때 한암은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선사에게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후 1905년에 통도사 내원선원의 조실로 와 있다가
경봉의 은사 성해화상의 사제(師弟)인
석담(石潭)스님에게 법을 받았으므로
사촌 사형제의 관계가 되었다.
속가의 나이로는 한암이 경봉보다 16세 위였지만
법맥에 있어서는 법형제인 것이었다.
이런 친근함이 있어서인지
경봉과 한암은 유독 서간으로
선열을 나누는 교유가 깊었다.
서로 만나 선문답을 나눌 수도 있었겠지만
경봉은 영축산에서, 한암은 오대산에서 두문불출하였으므로
불가피하게 편지가 오고간 것이었다.
경봉은 자신의 오도송을 가장 먼저 한암에게 보냈는데,
한암은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내왔다.
<보내온 글과 게송 네 글귀를 읽어 보니
글이 모두 진지하고 구절구절 활기가 넘칩니다.
대장부 활달한 남아가 후오백세(後五百歲) 뒤에
출현할 줄을 어찌 기약인들 하였으리요.
우러러 찬탄하여 마지않으며 뛸 듯한 기쁨을
무어라 형언할 수 없구려.
이렇게 깨달은 사람의 분상(分上)에는 비유하자면
커다란 불덩어리와 같아서 무엇이든지 닿기만 하면
타버리니 어찌 한가로운 말과 방편으로
지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깨달은 뒤의 조심은
깨닫기 전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깨달을 분(分)이라도 있지만
깨달은 뒤에 만일 수행을 정밀히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 여전히 생사에 유랑하여
영영 헤어 나올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흔히 고인(古人)네들이 깨달은 뒤에 자취를 감추고 이름을 숨겨서 물러나 성태(聖胎)를 오래오래 기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어쩌다 사람을 대하면 지혜의 칼을 휘둘러서 마군을 항복받으며 어쩌다 사람이 오면 벽을 보고
돌아앉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삼십 년 사십 년 내지 평생토록 영영 산에서 나오지 않기도 하였으니 예전에 상상(上上)의 큰 기틀을 지닌 분들도 그렇게 하였거늘 하물며 말엽(末葉)의 우리들이겠습니까.
대혜화상이 말하기를
간혹 근기가 날카로운 무리들이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일을 판단하여 마치고는
문득 쉽다는 생각을 해서
닦아 다스리지 않다가
오랜 세월이 지남에 영영 마군에게
포섭된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뒷날 중생들을 위하여
고구정녕하게 지도하여
삿된 그물에 걸리지 않게 하신 말씀을
일일이 들어서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방편을
형도 모르는 바가 아니겠지만 이미 물어왔고
또한 나도 희유한 일을 대함에 즐거운 마음이
자연 샘물 솟듯이 용솟음쳐
부득이 간담을 털어놓고
간략하게나마 예전 조사들의
오후수행문(悟後修行門)을
한두 가지 들어서 말하오니
행여나 익히 들어서 아는 것이라고
소홀히 하지 마시고
다시 자세히 살피고 거듭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스님이 귀종(歸宗)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네가 곧 부처이다.”
이에 그 스님이 몰록 깨닫고는 물었다.
“어떻게 보호하여 가지리오리까.”
귀종화상이 대답했다.
“한 티끌이라도 눈에 있으면
헛것이 어지러이 떨어지느라.”
이 법문에 예(?:티끌)자 하나를 자세히 알면
오후(悟後) 생애가 자연히 만족할 것입니다.
또 석공(石鞏)화상이 마조께 참예하여
법을 얻은 뒤 삭발하고 시봉할 때
하루는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문득 하던 일을 잊고
망연히 앉아 있는데 마조가 물은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
“소를 먹이고 있습니다.”
“소 먹이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한 번이라도 소가 풀밭에 들어가면 고삐를 끌어당깁니다.”
“네가 소를 잘 먹일 줄 아는구나.”
여기에서는 파예(把?; 끌어당김) 두 글자를 자세히 알면
오후 생애를 남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세하게 안 뒤에는 ‘안다는 것’ 또한
‘없는 것’이 올시다.
여기에서는 물을 마심에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알 수
있지만 남에게는 알려줄 수 없듯이
실로 이른바 스스로 즐거울지언정
그대에게는 어떤 것이라고 손에 쥐어 줄 수 없는 것이며
푸른 바다가 마르는 것은 볼 수 있지만
마침내 그대에게 통하여 주지 못한다는 말이 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한암에게
“깨달은 뒤에 어떻게 보임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다면
암(岩)은 곧 아프게 한바탕 때릴 것이니
위의 옛 성인들의 말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허허. 이 일을 두어두고 이렇게 마칩니다.
세상에서 쓰는 투의 인사는 하지 않겠습니다.
무진년 3월 초이렛날
한암 답장 올림
만약 일생의 일을 원만하고
구족하게 하고자 한다면
옛 조사의 방편어구로서
스승과 벗을 삼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보조국사께서도 일생토록
<육조단경>으로 스승을 삼고
<대혜어록>으로 벗을 삼았습니다.
조사의 언구 중에도 제일 요긴한 책은
대혜의 <서장>과 보조의 <절요>와
<간화결의>가 이 활구법문인데
항상 책상 위에 놓아두고 때때로 점검해서
자기에게 돌린즉 일생의 일이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제(弟: 한암이 선배였으나
겸양으로 낮춰 말한 것인바
당시 도를 구하는
도반들 사이에는 일상적인 표현이었음)
또한 여기서 힘을 얻은 것이 있습니다.
또한 <서장>과 <결의>와 <절요> 끝부분에
활구를 들어 일깨움을 의지했는데
이것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이 말이 비록 번거로운 것 같지만
그러나 일찍이 방랑을 해 봐야
나그네의 심정을 안다고 했으니
제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만약 한때 깨달음에 만족하여
뒤에 닦음을 거두어 치우면
영가(永嘉)스님께서 말한 활달한 채
공연히 인과를 무시하고
어지러이 방탕하여 재앙을
초래한다는 것이 이것이오니
간절히 세상 천식배들처럼 인과를 무시하여
죄와 복을 배척하는 이가 되지 마소서.
만약 활구를 들어 살피지 않고
문자만 볼 것 같으면 의리에 걸려서
도무지 힘을 얻지 못하며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서
증상만인(增上慢人; 잘난 체하는 사람)을 면치 못하리니
간절히 모름지기 뜻에 두소서.>
한암은 서간을 통해서
경봉과 선문답을 나누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나이를 내세우지 않았다.
한암은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상대가 도인이라고 판단되면
예를 다 갖추어 말했다.
서간의 글도 마찬가지였다.
훈계하고 당부하는 말조차도
마치 후배가 선배에게 아뢰는 것처럼
지극한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알렸다.
<혜한(惠翰; 편지)이 오자
마침 스님께 가는 인편이 있는데
그 사람이 서서 재촉하기에 대력 사연만 적고
세속에서 하는 인사의 말은 줄입니다.
편지의 말씀대로 흉금(胸襟),
두 글자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말씀은 하시는 것이 당연하고 정답습니다.
그러나 증거가 있기 때문에 괜찮으니
그대로 쓰십시오.
고시(古詩)에 쇄락하고 확 트인 흉금이
명월 청풍 같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암두(巖頭)와 설봉(雪峰) 두 큰스님이
별산(鼈山)에 갔다가
눈에 길이 막혔을 적의 이야기입니다.
설봉은 매일 좌선을 하고 암두는 계속 잠만 잤는데,
하루는 설봉이 말했습니다.
“사형이여, 일어나시오.”
그러자 암두가 일어나 물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금생에 편하게 지내지 마십시오.
문수(文邃)와 함께 행각하면서
도처에서 그에게 누를 끼치고
오늘 사형과 함께 여기에 와 보니 또 잠만 자는군요.”
이에 암두가 할을 했다.
“잠이나 자시오.”
설봉도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는 실로 편안치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견해를 낱낱이 말하라.
옳은 곳은 그대와 함께 증명해
주고, 옳지 못한 곳은 그대와 함께 다듬어 주리라.”
“제가 처음 염관(鹽官)에게 갔다가
염관이 색과 공의 이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들어갈 곳을 깨달았소이다.”
하니 암두가 말했다.
“이로부터 30년 뒤에 행여라도
잘못 이야기하지 말라.”
“또 동산(洞山)의 오도게의
‘바야흐로 여여(如如)에 계합하리라’라는
구절로 인해서 들어갈 곳을 깨달았소이다.”
하니 암두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알아서는 자기 구제도 철저하지 못하리라.”
설봉이 계속 말했다.
“나중에 덕산(德山)에게 한 방망이 맞고
활연히 통 밑이 빠지는 것 같았소이다.”
암두가 다시 할을 했다.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문으로 좇아 들어오는 것은
집안의 보배가 아니니라(從門入者 不是家珍).”
“앞으로 어찌해야 옳습니까.”
“앞으로 큰 교법을 퍼뜨리고자 한다면
일일이 자기의 가슴에서 흘러나와야
나와 더불어 하늘과 땅을 덮으리라.”
설봉이 암두의 이 맡 끝에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연들이 증명이 되는 것이오니
이 흉금이 능히 넓기로 천지를 포용하며
세밀하게는 가는 티끌 속에 들어가서
가히 생각할 수 없는
큰 해탈경계를 구비한 것이오니 양지하소서.
말이 길어져서 이만 줄이오니
다만 형께서 내내 만안(萬晏)하시기 빕니다.
음 9월 초2일
한암 답장 올림
추신: 오라고 하신 말씀은 말할 수 없이 기쁘오나
가을까지는 이곳에 있기로 작정하였으니 그리 아십시오.>
몇 년 후. 1931년 가을에 55세의 한암이 찾아오니
40세의 경봉은 극락암 위에 있는 비로암으로
극진하게 한암을 맞아들였다.
비로암은 극락암과
솔숲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조용하기가 적막강산이었고 대숲에서
솟는 샘물의 맛이
차를 달이는 찻물로서 최고인 곳이었다.
두 도인은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차를 마시며
선문답으로 회포를 풀었다.
밤하늘에 박힌 초승달은 한암의 눈썹처럼 가늘었다.
경봉과 한암은 남전참묘(南泉斬猫)라는 공안을 놓고
솔숲을 할퀴며 지나가는 바람처럼 선문답을 벌였다.
남전참묘-.
이것이 선가의 공안이 된 유래는 이러했다.
어느 날 남전이 동당과 서당의
승방 승려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
시비하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남전이 고양이를 잡아 쳐들고 말했다.
“일러라. 맞히면 베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남전은 고양이를 베어 두 동강이를 내버렸다.
뒤에 남전이 이 사실을 조주에게 말하니
조주는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남전이 말했다.
“그때 만일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렸을 것을!”
이 이야기가 바로 그 유명한 남전참묘의 내용으로서 <벽암록>에는 63칙,
<무문관>에는 14칙으로 실려 있는 것이었다.
경봉은 훗날 제자들에게 남전이 말한
“그때 만일 그대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렸을 것을!”이란 말보다
조주가 짚신을 머리에 이고 나간 것이
훨씬 더 무서운 뜻이 숨겨져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아무튼 그날 밤 한암과는
밀고 당기는 선문답을 밤새 이어갔다.
경봉은 그날의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고 싶어하듯
<삼소굴 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묻기를
“조주스님이 신발을 머리에 이고
문 밖으로 나간 뜻이 무엇입니까.”
한암스님이 대답하기를
“부처와 조사가 손을 꽂고 돌아간 곳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입니까.”
한암스님이 묵묵히 있기에
“생각해서 분별하면 귀신굴에 들어가니 빨리 이르시오.”
한암스님이 돌아보며
“보지 못했는가.”
“아모쪼록 뒷 자취를 거두시오.”
하자 답이 없었다.
내가 또 묻기를,
“만약에 형님이 그 당시 남전이
고양이를 칼로 베일 때 있었으면
무어라고 답을 하였겠습니까.”
“남전이 본래 고양이를 벤 사실이 없었다.”
“누가 그런 말을 전합디까.”
“본래 고양이를 벤 사실이 없으니 전한 말이 없노라.”
“이제 들었습니까.”
“이제 들은 것도 없노라.”
“이제 들음이 없다고 하는 이는 누굽니까.”
“말이 많음은 법을 희론함이니라.”
“형이 오히려 법을 희론함에 걸려 있습니다.”
하자 대답이 없었다.
한암스님이 묻기를,
“조주스님이 신을 이고 나간 의지(義旨)가 무엇인가.”
“가로 누우니 발이 하늘을 가리킨다.”
하자 한암이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한암이 묻기를,
“요즈음 어떻게 공부를 지어가고 있는가.”
“한 티끌이 눈에 들어가니 헛것이 어지러이 떨어집니다.”
“한 티끌이 눈에 들어가니 헛것이 어지러이 떨어지는 의지가 무엇인가.”
“형께선 내일 아침에 맛있는 차를 마십시오.”
하자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비로소 긴 선문답을 끝내고 호롱불을 껐다.
귀뚜라미 소리는 잦아들어 밖은 적막강산이 됐고,
캄캄한 하늘에 보름달의 발자국 같은 초승달마저도 희미해져 있었다.
여기서 ‘맛있는 차’란 조주의 끽다거(喫茶去)란 화두가 아닐까.
누군가가 조주에게 불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차 한 잔 마시라’고 했던 데서 유래한 끽다거인 것이다.
경봉이 한암을 신(信)한 것은
앞서 얘기한 대로 문중의식이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선과 염불, 그리고
한학의 조예가 바탕이 된 불학(佛學)이
한데 어울린 원융한 가풍 때문이었다.
선과 교가 저울추처럼 균형을 이루며
염불이란 신심이 반석 같은 그들이었다.
훗날 한 수좌가 한암을
추모하며 회상하는 다음과 같은 얘기도
그러한 가풍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노장님은 항상 오뚝하게 앉아만 계셨다.
뒤에도 말하지만 앉아서
화두하는 것만을 오직 일로 삼았다.
그런데 손에는 언제나 염주를 쥐고 계셨다.
그렇다고 염불하는 것을 보진 못했다.
남에게 하라고 권하지도 않으셨다.
염불을 해도 말리지 않으셨다.
하루는 내가 ‘스님, 스님은 염주를 무엇 때문에 돌립니까?
염주 돌리며 화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스님은 아무 말씀 않으시고 염주를 번쩍 들어 보이셨다.
우리 스님이 염주 돌리는 것을 보고
그때 수좌들이 뒤에서 수군대기를 글 잘하던 분이라
글 생각나는 것을 막느라고 염주 돌린다고 했고,
화두가 안되니까 염주를 돌린다고도 했고,
조실이 주력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스님은 좌선할 때를 빼놓고는
언제나 그 반들반들한 염주를 돌리고 계셨는데 그 뜻을 누가 알까.”
글 잘하고 참선할 때도 염주를 쥐고 있던 한암.
그는 선객들이 고지식하게 금기시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죽은 이의 재도 스스럼없이 지냈다.
그러고 보면 경봉의 가풍과 너무도 흡사한 것이다.
다시 그 수좌의 회상을 들어보자면 이렇다.
“우리 스님은 불공 의식을 친히 하셨다.
물론 시식도 하셨다.
어산조의 범패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식문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그 당시 의식문을 외우는 것을 수좌들이 이해 못한 채
‘이거 시주밥 얻어먹으려는 거 아닌가’ 하니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예 그런 소리 말아라.
옛날의 스님은 지금 사람보다 다 낫다.
의식을 행하는 데는 덮어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어.’
스님은 고풍은 모두 존중하였다.
행건 치는 것만 하더라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행건을 치면 잘 때만 푸셨다.
혹 누가 행건을 매면 각기가
생기니 푸는 것이 좋다고 하면
‘이것도 선왕지법(先王之法)이다’ 하셨다.
옛 고풍을 좀체 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 예불도 조석으로 각단 예불을 다했다.
수좌들은 모두가 큰방에서 죽비로 3배할 뿐이었지만...
공양도 아침에는 죽, 낮에는 밥 두 때 뿐이다.
드린 대로 잡수시고 차다 덥다, 질다 되다,
짜다 싱겁다, 도무지 말씀이 없었다.
그 생활 일체가 참으로 검박하셨다.
시주가 올린 물건은 안 써야 한다는 신조인 듯했다.
명주나 비단은 결코 몸에 안 붙이셨다.
공양은 사뭇 적게 잡수셨고
오후에는 변에 가셨는데 반드시 병수를 쓰셨다.
예불 때는 곡 참석하셨고 혹 변소에 가셨다고 하여
대중끼리 먼저 하지 못했다.
한번은 먼저 했는데 스님이 오셔서 다시 했다.
대중이 다 모여 예불하는 규칙을
지키게 하려고 하신 것으로 보인다.
늘 말씀하시기를
대혜스님은 대중이 1700명이었는데,
조실이 되어서도 스님은
두 가지만은 늘 안 빠졌다는 것이다.
두 가지라 함은 조석 예불과 대중 운력이다.
스님도 그러셨다.
그 당시 운력이란 채소 가꾸기,
감자 심고 거두기, 꿀밤 손질, 채소 다듬기 등이다.
콩나물 다듬을 때는 꼭 나오셔서
대가리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가렸다.
내버리는 것은 너무하다 하리만치 질색이었다.
우리 스님의 24시간은 어떠하였던가.
밤에 잠시 누움 밖에는
언제나 큰방에서 대중과 함께 하셨다.
새벽 3시에서 밤 9시까지 항상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참선만 하고 계셨다.
허리를 구부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의 운정(雲頂)스님, 단암(檀庵)스님,
설봉(雪峰)스님, 동산(東山)스님 모두가 그랬다.
고단하면 밖을 거닐라고 했다.
종일 눕지 못하고 발도 못뻗고
벽에 기대지도 못했다.
따로 있을 지대방도 없었다.
그러므로 여간한 수좌가 아니면
한암스님 회상에서 지내기 어렵다고 겁을 먹고 오지 않았다.
‘군자는 꿋꿋하여 쉬지 않는다(君子健健不息)’는
스님의 신조 그대로였다.
3시에 기상하여 참선 예불 공양을
대중과 함께 하셨고 조실방이 있어도 가시지 않았다.
언제나 큰방에 앉아 계시니 대중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풍은 노조(魯祖)스님을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남전스님 제자인 노조스님은
납자가 찾아오면 벽을 보고 돌아앉았다.
한길 말하는 것이 한 자 가느니만 못하다
(說得一丈不如行得一尺)는 뜻이다.
묵묵히 생각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스님도 항상 노조스님을 칭찬하셨는데
내가 보기에 스님은 그 가풍을 숭상한 것이 분명하다.
조실스님으로 대중과 함께
이렇게 행한 분이 또 어디 있을까!”
수좌라도 불공의식을 익혀서
마지 올리고 내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한암.
참선은 비록 스스로 지어가는 것이지만
불조의 어록은 혼자 뜯어 볼 정도의 글힘이 있어야 한다고
방선시간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한암.
교를 버리고 선에 든다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이 아닌
선에 먼저 들고 난 후 교를 살려보라는 뜻으로
‘선을 통해서 이치를 통하고 나면 경 보기가 어렵지 않느니라.
경을 먼저 보려고 서두르지 말고 선에만 힘을 써라.
뜻을 얻으면 글은 저절로 알게 된다.’고 가르쳤던 한암.
1896년 강원도 화천 땅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중원(重遠),
한암(漢岩)은 그의 호인 것이다.
9살 때 서당 훈장에게 <사략>을 배우다가
어린 그는 의문을 하나 품게 된다.
‘태고에 천황씨(天皇氏)가 있었다.’
첫 대목을 읽던 어린 그는 훈장을 하여 물었다.
“태고에 천황씨가 있었다 하는데
그러면 천황씨 이전엔 누가 있었습니까?”
“천황씨 이전에는 반고씨(盤古氏)가 있었다.”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당돌한 그의 물음에 훈장을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어린 그는 그것을 알기 위해 이후 10여 년 동안
유학의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을 널리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유학 속에서 답을 얻지 못하고
22세 때 금강산을 가게 된다.
총명한 그는 장엄한 금강산의 무정설법에 감흥을 받아 장안사 행름노사
밑으로 입산 출가한다. 그의 출가 의지는 세 가지였다.
첫째 는 자기 마음의 진성(眞性)을 찾아보자,
둘째 부모의 은혜를 갚자,
셋째 극락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한암은 장안사에서 행자를 거쳐 사미승이 되고 난 후
신계사로 가 보운강회(普雲講會)에 들어 정진하게 된다.
어느 날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읽어내려 가다
다음의 대목에서 마음과 몸이 송연하여
마치 대한(大限; 죽음의 시각)이 박두하는 극한의식을 느꼈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자성 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소신연비의 고행을 하고
팔만장경을 모조리 독송하더라도
이는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일과 같아
수고로움을 더할 뿐이다.’
이후 한암은 운수의 길에 올라 남쪽으로 흘러가다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선사를 만나게 된다.
한암이 법문을 청하자 경허가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들어 말하였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형상 있는 것이
형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면
곧 본래 여래를 볼지라.’
한암은 이 구절에서 두 눈이 씻기고
우주 전체가 환히 들여다보였다.
이른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나
자기 아님이 없었다.
9살 때 서당에서 품었던 회의도
구름 걷히듯 사라졌다.
이때가 한암의 나이 24세,
입산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한암은 오도송을 읊조렸다.
다리 밑에 하늘이 있고 머리 위에 땅이 있네
본래 안팎이나 중간은 없는 것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봄이여
북산은 말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네.
脚下靑天頭上巒
本無內外亦中間
跛者能行盲者見
北山無語對南山
또 어느 날 한암은 대중과 함께 차를 마시며
경허선사에게 소참법문을 듣고 있었다.
경허선사가 법문을 하다가 <선요>의 한 구절인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를
예로 들며 물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이에 한암이 대답했다.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瓦墻)이 앞에 있네.”
이튿날 경허선사는 법사에 올라
대중에게 한암의 경계를 인가했다.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
이후 한암은 통도사 내원선원에서 조실로 5,6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1920년 평안도 맹산 우두암으로 들어가서 홀로 보임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에 앉아 불을 지피다
홀연히 계오(契悟)의 경지를 체험하고는 두 수의 시를 읊조렸다.
부엌에서 불붙이다 별안간 눈 밝으니
이걸 좇아 옛길이 인연을 따라 분명하네
날 보고 서래의(西來意)를 묻는 이가 있다면
바위 밑 우물 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看火廚中眼忽明
從玆古路隨緣淸
若人問我西來意
岩下泉鳴不濕聲
마을 개 짖는 소리에 손님인가 의심하고
산새의 울음소리는 나를 조롱하는 듯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하루아침에 세상 바람에 쓸어버렸네.
村방 亂吠常疑客
山鳥別鳴似嘲人
萬古光明心上月
一朝消盡世間風
당시 한암과 법의 경지에 있어서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선사는 그 또한
경허선사의 제자 만공이었다.
한암이 금강산 지장암에 있고,
만공이 예산 정혜사에 있을 때였다.
먼저 마하연 선방에 와 있던 만공이
지장암으로 한암을 찾아가 말했다.
“한암이 금강산에 이르니 설상가상이 되었소.
지장암 도량에 업경대가 있으니 스님의 업이 얼마나 되오?”
그러자 한암이 조용하게 말했다.
“이 질문을 하기 전에 마땅히 30방망이를 맞아야 옳습니다.”
“맞은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한암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지금 한창 잣서리할 때가 좋으니 속히 올라오시오.”
“암두가 잣서리할 때 참예하지 못함은 원망스럽지만
덕산의 잣서리할 시절은 원하지 않소.”
“암두와 덕산의 명함은 이미 알았거니와
그들의 성은 무엇이오?”
만공은 대답하지 않겠다는 투로 말했다.
“도둑이 지나간 후 3천리가 넘었거늘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성은 물어서 무엇하랴.”
한암도 만공이 지닌 법의 경지를 비유하여 말했다.
“금선대 속에 있는 보화관(寶花冠)이
금옥으로도 비하기 어렵겠소.”
금선대란 만공이 주석하는 곳이니
보화관이란 만공을 비유하여 일컬음이었다.
한암의 경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제대 교수로 있던
일본 조동종의 명승 사또오(佐藤)가
한국 불교계를 전부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에게 와서 선문답을 하고자 했다.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義)입니까?”
그러자 조용히 앉아 있던 한암이 방에 놓여 있던
자신의 안경집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사또오는 한암의 답을 자르며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 일대장경과 조사어록을 보아 오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감명을 받았습니까?”
한암은 이미 사또오의 도력이
깊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말했다.
“적멸보궁에 참배나 다녀오시오.”
사또오는 잠시 주춤거렸다가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는 젊어서부터 입산하여
지금까지 수도하여 왔습니다.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가 같습니까, 아니면 다릅니까?”
한암은 점잖게 잘라 말했다.
“모르겠구려.” “활구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어 감사합니다.”
사또오의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암은 사또오를 주저앉히고 말았다.
“활구라고 말하여 버렸으니 벌서 사구(死句)가 되고 말았군.”
사또오는 3일 동안 상원사에서 머물다 갔는데,
훗날 어느 강연장에서 ‘한암스님은
일본 천지에서도 볼 수 없는 인물임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둘도 없는 존재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후 한암은 50세가 되어 서울 봉은사 조실이 되어 갔지만
곧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는
오대산으로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이후 27년 동안 오대산을 단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6.25전쟁 중 76세에 열반에 들었는데,
생시에 깨달음의 선열을 함께 나누었던 경봉은
추도문을 지어 기꺼이 오대산으로 달려갔다.
경봉의 추도문은 이러했다.
‘오호라 봄이 오니
풀이 스스로 푸르고 77은 원래 49로다.
선사(先師)여, 선사(先師)여-. 왔나이까, 갔나이까.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도다.
오대산에 나뭇잎은 나부껴 떨고 있고,
동구에 맑은 물도 목 메인 소리로서 잔잔히 흘러간다.
오늘 모이신 교도 여러분이여, 눈물을 머금고 추도하시니
선사의 58년간을 수행하심과 교화하신
그 도가 높고 그 공이 큰 줄 이제 알겠도다.
밝은 해가 동천에 올라 와서
세계를 두루 비춤도 만물을 위함이요,
서산으로 넘어가서 광명을 감춤도 만물을 위하는 진리로다.
선사의 몸이 세상에 나타남도 중생을 위함이요,
열반에 드심도 최후로 중생에게 무상의 법을 가르치시고
대각의 길을 인도하신 암시로다.
아. 이 열반의 참된 소식은
천지도 말이 없고 귀신도 모르나니라.
저 탁자에 벌여 놓은 흰밥과 둥근 떡은
앙산(仰山)과 운문종사(雲門宗師)의 가풍이요,
차를 달이고 향을 태움은 옛 길을 통했으니
몇 사람이나 이 소식을 알았던고. 악
눈빛을 거두는 곳에 오대산이 서늘해
꽃과 새들도 슬피 울고 달에까지 향연(香煙)이 어리는 듯
격식 밖의 현담(玄談)을 누가 아는가
만산(萬山)엔 의구히 물이 흐르네.
眼光收處五臺山
花鳥念悲月送香
格外玄談誰得去
萬山依舊水流長’
물론 경봉은 한암 한 사람하고만 선문답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당대의 도인들이 이 산 저 산에서
자신의 경지를 보임하며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체 남을 평하지 않는 한암의 인물평은 이러했다.
‘제산스님은 장하다.
만공스님은 호걸이고 법이 높은 훌륭한 분이다.
용성스님은 경, 율, 론 3장에는 당대에 박통제일이다.
혜월스님은 혜(慧)가 밝기로 비수 같다.
수월스님의 자비와 인욕은 당할 이가 없다.’
한암은 만공을 일컬어
‘호걸이며 법이 높은 훌륭한 스님’이라고 평했다.
스승 경허를 찾아 산수 갑산까지 가서
매장된 시신을 수습하여 다비했던
효성스런 상좌 만공.
일제강점기에 취처(娶妻)를 강요했던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에게
‘마땅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호통을 쳤던 만공.
경봉은 만공에게도
오도송과 보임의 길을 묻는 편지를 보냈으나
만공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기다려도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어느 날 경봉은 서울 선학원으로
만공을 찾아가 따져 물었다.
그러나 만공의 대답은 묻는 경봉이
오히려 무안할 정도로 진지했다.
“막중한 일을 어찌 서신으로 전할 수 있겠는가.”
선가에서 ‘막중한 일’이란
일대사(一大事)라고 부르기도 하는,
화두를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는 일을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도 만공은 돌려서 말했다.
“경봉수좌가 깨달은 경지를
잘 각찰(覺察; 깨달아 살핌)하시오.”
그때 경봉은 만공의 팔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팔목의 급소를 아프게 눌렀다.
만공은 아야! 하고 소리를 냈지만
잠시 후 미소를 지었다.
이후에도
경봉은 40세가 넘어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과 주지 소임을 맡아
사무를 처리하느라
서울을 가끔 가곤 했는데,
상경하면 반드시 선학원에 들러
선승들과 선문답을 나누었다.
당시 선학원에는 용성, 만공, 전강, 혜암, 청담 등이
자주 들러 얼굴을 내비쳤던 바,
그들이 나눈 선문답은 아직도 선승들
사이에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선승들의 문답은 다분히 도발적이고 갑자기 한 방망이 날리거나
할(喝; 고함을 침)을 하는 식이었다. 어느 날 용성이 만공에게 물었다.
“어묵동정을 여의고 한 번 일러 보시오.”
어묵동정이란 말 그대로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을 떠나 일러 보라니
애당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만공은 들은 체 만 체했다.
그러자 용성은 다시 물어 기다렸다.
“양구(良久; 한참 동안)하란 말입니까.”
조금 더 기다릴까, 하는 뜻으로
용성은 양구라는 말을 사용했다.
“아니오.” 며칠 후, 젊은 전강수좌가 선학원에 들러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만공에게 말했다.
“두 큰스님께서는 서로 멱살을 쥐고 흙탕물에 들어간 격입니다.”
“그러면 전강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전강의 대답은 질문하기 이전으로 돌려놓았다.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란 말입니까.”
“옳다(善哉), 옳다(善哉)!”
불법의 삶이란 이렇게 한번 방망이를
업고 들어가서 뒤집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조금 전의 나가 아닌
새롭게 거듭 태어나는 것이 선적(禪的)인 삶인 것이었다.
이 같은 선문답을 듣게 된, 선학원 큰방의 말석에 앉아 있던
덕숭산에서 온 혜암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어묵동정을 해결 짓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말하지도 말고 잠자코 있지도 말며 움직이지도 말고
가만히 있지도 말라 하였으니,
사실은 몸이란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가만히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있지 않은 소식을 알고자 할진대
태중(胎中)에 들어가기 전 소식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태중에 들어가기 전 소식이란 무엇인가?
나 보고 이 도리를 이르라 할 것 같으면
이와 같이 말하리라. 파기상종(破器相從)-.
깨어진 그릇을 어찌 맞출 수 있을 것인가.’
경봉이 통도사 주지 소임을 볼 때
강원 학인들이 금강산 마하연으로
수학여행을 간 일이 있었다.
당시 마하연 선방에는 만공이 조실로 있었다.
경봉은 만공과 구면이고 하여 안부를 묻고 싶었다.
그래서 학인 대표를 불러 부탁했다.
“마하연 선방에 만공스님이 계시니라.
가거든 이걸 전해주게나.”
“주지스님, 무엇입니까.”
“내가 만공스님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라네.”
경봉은 법당 마당가에 있는 잡풀을 하나 꺾어 들어 보였다.
그러나 학인 대표는 만공스님에게 보내는 것이
고작 잡풀 하나라는 것을
알고는 실망하여 되물었다.
“정말 이것을 보내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만공스님을 뵙거든
이 풀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게.”
이틀 후, 학인들이 금강산 마하연에 도착하자
만공은 이미 기별을 받은 터라 삭발을 하고
풀 먹인 가사를 꺼내 입고 있었다.
바위 덩어리 같은 만공의 머리는
예리한 삭도의 흔적으로 실핏줄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만공은 자신의 머리를 두 손바닥으로 서너 번 문지르면서 말했다.
“경봉수좌는 잘 있는가.” “예.”
만공은 경봉이 법거량을 해올 것으로
미리 알고 있었는지 다시 물었다.
“경봉수좌가 내게 무슨 말을 전해달라고 하던가.”
학인 대표가 나서 말했다.
“이 풀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만공은 삭발하느라
떠다놓은 대야의 물에 풀잎을 적셨다.
그런 후 학인에게 풀잎을 건네주었다.
만공의 대답은 그뿐이었다.
학인들이 통도사로 돌아와
만공의 반응을 경봉에게 전하자,
경봉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것이 답이냐고 물어 보기는 했는가.”
“미처 물어 보지 못했습니다.
대야 물에 풀잎을 적신 것이 답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소경 당나귀 같은 놈에게
심부름 시킨 내가 잘못이구나.”
경봉은 학인 대표를 한 차례 쥐어박고는 더 묻지 않았다.
이후에도 경봉은 만공을 몇 차례 더 만나 선문답을 나누었다.
1941년 경봉이 쟁쟁한 선승들을 물리치고
조선불교중앙선회(朝鮮佛敎中央禪會) 2차 정기총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고 나서 만공을 선학원으로 찾아가 만났는데,
그날도 예외 없이 두 사람의 선문답은 불꽃을 튀었다.
과연 만공은 조선의 7천 승려 중에 뜻이 굳기로 하나뿐이라고 존경받던
한암의 표현대로 호걸이요 법이 높은 고승임이 분명했다.
선문답의 감흥을 못 잊어
경봉은 만공과 헤어지고 나서 이런 편지를 썼던 것이다.
<어젯밤 장안에서 기적 한 소리를 남기고 떠났는데,
이미 물금에 도착하여 보니 날은 새고 달은 서산에 기울고
동해의 바다의 찬란한 아침 태양은 푸른 하늘을 빛내고 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천리를 달려와 영축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번에 보니 칼을 잡고 상대하는 것이
그야말로 백전노장의 전술 활용이었습니다.
능소능대(能小能大)하게 적심(賊心)으로 칼을 휘둘러
일반 백성들의 발가락이 거의 저 적장의 작은 칼에 상하게 되었으니,
찬양과 칭송을 금치 못하옵니다.
비록 마음속에 독을 감추고는 있지만
지혜와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으니
몇 번이나 사람들을 위해 이와 같이 베풀었습니까.
온갖 만물은 맹렬한 불속에 던져 넣으면
그 모양과 성질이 전부 타버립니다.
그러나 금(金)만은 불 속에서 더욱 정교해 질 뿐입니다.
만고의 푸른 못에 비친 허공의 달을
어찌 몇 번 건져보고서야 겨우 알겠습니까.
밝은 대낮에 사람을 속이지 마십시오. 악!>
만공은 스승 경허 못지않게 많은 선화를 남기고 있는데,
만공선사와 혜암스님, 그리고 진성(眞性) 사미승이
조각배를 타고 간월암으로 가고 있었다.
간월도는 밀물이 들면 섬이 되고
썰물 때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조그만 섬으로
그곳 전체가 바로 간월암 도량이었다.
흔들리는 조각배 위에서 만공이 물었다.
“진성아! 배가 가느냐, 물이 가느냐.”
사미승 진성은 대답을 못했다. 혜암이 대신해서 말했다.
“배도 가지 않고, 물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가느냐.”
혜암은 갑자기 손수건을 장삼 속에서 꺼내 흔들어 보였다.
그런 혜암을 보고 있던 만공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격려했다.
“자네 살림살이가 언제 그렇게 되었나.”
“이렇게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나 혜암이 늘 만공의 질문에 답을 잘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한 마디도 못하고 땀을 흘리며 쩔쩔매었다.
수덕사 선방에서 만공이 부처님을 보고 혼잣말을 했다.
“부처님 젖이 저렇게 크시니 수좌들이 굶지는 않겠구나!”
옆에 있던 혜암이 물었다.
“무슨 복으로 젖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만공은 혜암의 간절함을 알고는 말했다.
“자네는 웬 복을 그렇게 지었는가.”
혜암은 아직도 성불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살피고는 말했다.
“복을 짓지 않고 젖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부처님을 건드리기만 하고 젖을 먹지는 못하는군!”
만공의 이 같은 일갈은 부처님을 건드리지만 말고
젖을 빠는 흉내라도 내야 성불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수좌라면 화두를 건드리지만 말고
실제 온몸으로 들라는 말인 것이었다.
서산대사로 더 유명한 청허스님의 선화를 가지고도 문답이 있었다.
조주스님은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물음에
‘뜰 앞에 잣나무(庭前柏樹子)’라고 말하여 조주스님의
대답이 바로 화두가 됐는데,
청허는 이 화두를 두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용궁장경(龍宮藏經)에도 없는 격외선(格外禪)이다.
고기가 가니 물이 흐리고 새가 나니 털이 떨어진다(魚行水濁 鳥飛毛落).”
통도사 내원사 선방 조실인 혜월에게 혜암이 청허스님의 말이 맞는지 묻자,
스님은 조금도 의심 없이 말했다.
“그것은 꼭 맞는 말이지!”
“어째서 맞는 말입니까.”
“그야 고기가 가니 물이 흐리고 새가 나니
털이 떨어지는 것은 본분의 도리가 아닌가.”
혜암은 그래도 석연치 않아 <선가귀감>을 들고
청허스님이 얘기한 부분을 읽었다.
그제야 혜월은 아차! 하고 말했다.
“내가 잘못 살폈구나. ‘뜰 앞의 잣나무’ 화두에
‘고기가 가니 물이 흐리고
새가 나니 털이 떨어진다’는 것이 맞지 않는구나.
그래, 혜암 수좌 말이 맞다.”
얼마 뒤 혜암은 정혜사로 돌아와 만공에게 물었다.
그러자 만공은 고개를 저었다.
“청허스님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는데, 그것이 정말인가.”
“<선가귀감>에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선가귀감>에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맞지 않은 말이다.
어디 그 책을 가져와 보아라.”
마침 그때 누더기를 입은 한 수좌가 걸망에서 <선가귀감>을 꺼내 만공에게 보였다.
그러나 만공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보아라. 글의 내용을 겉으로만 보지 마라.
글 속의 안 까닭을 살펴야 하느니라.”
만공은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혜암은 헷갈렸다.
자신의 생각으로서는 혜월스님의 말도 맞고,
만공스님의 말도 맞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다시 혜암은 용성에게 묻기로 작심하고
서울 대각사로 가서 물었다. 그러자 용성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맞지 않는 말이지. 청허스님의 말씀은 허물 구(句)를 말씀하셨느니라.
그러므로 공부란 샅샅이 살펴가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청허라도
이미 한 말은 허물이 되어 버렸으니 너 자신이
체험하여 답을 얻으라는 말이었다.
선(禪)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자기가 정진하여 얻지 않으면
천하의 고승이 한 말이라도
그것은 참선 수행자 자신에게는 허물일 뿐이었다.
만공이 경봉이 보낸 오도송에 대한 평을 보내오지 않은 반면,
용성은 즉각 편지를 보내 경봉을 격려했다.
경봉은 일찍이 용성의 참회상좌(懺悔上座)가 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경봉이 참회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용성은
‘병도 차도가 있고 약도 필요 없으면 여전히 예전 사람이라
다시 누구에게 참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달마스님도
<마음이 일어날 때 문득 죄가 생기고 죄가 사라지고
마음이 공하면 두 가지가 함께 없어진다.
이것을 진정한 참회라 한다>고 했으니’라고 격려하며
증거를 해주었던 것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용성.
그는 경봉의 오동송이 담긴 편지를 받자마자
누구보다도 반갑게 ‘주신 편지를 서둘러 뜯어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소.
오랫동안 공무의 분주한 가운데서도
무가(無價)의 보장(寶藏)을 발견하였으니
만약 여러 생에 반야의 지혜종자를 심지 않았으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습니까’ 하고 긴 편지를 썼다.
그러면서도 용성은 노파심이 들어
같은 편지 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주었다.
‘목우자(牧牛子; 보조국사)가 이르시되
‘마음이 마음에 머물고 경계가 경계에 머물러서
어느 때에는 마음과 경계가 서로 대하여도
마음이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경계가 마음에 임하지 않으면
자연히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저 도에 걸림이 없으리라> 하니
스님의 습기를 헤아려서
<직심직설> 가운데
열 가지의 공부 짓는 방법 중
어느 것이든지 선택하여 하십시오.’
이후 용성은 경봉에게 무슨 일이든
스스럼없이 자문을 구해 왔고,
경봉은 용성이 <화엄경>을
조선 최초로 한글 번역하면서 총 경비 2만원이 없어
낙심하고 있을 때 아낌없이 후원하기도 했다.
그만큼 경봉은 용성이 하는 역경사업에 동조하였고,
함양의 화과원과 북간도에 농장을 만들어
선농병행(禪農竝行)을 주창하는
용성의 뜻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선농병행이야말로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자급자족하였던 중국의 백장선사 문중이 살아남았듯
조선불교가 재력을 앞세운 일본불교에 흡수되지 않고
해동의 선맥을 이어갈 길인 것이었다.
이 무렵 경봉은 뜻 깊은 도우(道友)를 하나 만났다.
경봉보다 6년 어리지만 6년 일찍 오도한 전강(田岡)이었다.
경봉이 오도한 지 2년이 됐을 때 전강이 해인사에서 경봉을 찾아왔다.
극락암 입구의 다랑이 논에서는 벼들이
노랗게 익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초추의 영축산은 때 이르게 단풍이 불붙기 시작하여 붉고 노랬다.
전강은 경봉을 보자마자 지팡이로 땅에
큰 동그라미(一圓相)를 그렸다.
“들어가도 때리고 들어가지 않아도 때리리라(入也打 不入也打).”
경봉은 얼른 부채를 펴 동그라미를 지우는 시늉을 했다.
경봉의 법력이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전강은
그날 밤 경봉에게 의형제를 맺자고 제의했다.
물론 세속의 나이를 참고해서
형은 경봉이고 동생은 전강이었다.
경봉은 승낙했다.
<삼소굴 일지>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929년 9월 6일 맑음.
해인사 정대우(鄭大愚; 전강 영신) 선사가 찾아와 담화하고
법결의형제(法結義兄弟)를 청하기에 승낙하다.>
다음날 전강은 한암을 만나러 오대산으로 가고
경봉은 그에게 이별의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구름 가에 발우 놓고 이 암자 지내는데
우연히 그대 만나 현담을 털어 놓았네
밤은 깊어 삼경이라 인적이 없는데
가을 물은 하늘에 닿고 달은 못에 가득하네.
掛鉢雲邊臥此庵
偶逢仁君盡玄談
三更夜深無人處
秋水運天月滿潭
이후에도 전강은 경봉과 평생 도우가 되어 법으로써 어깨를 겨룬다.
해방 이후에는
한반도의 동(東)에 경봉,
서(西)에 전강이라는 말이
선방 수좌들 사이에 돌았던 것이다.
전강이 전남 곡성에서 태어난 해는 1898년.
7살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자라다
동생이 죽고 계모마저 가출해버리자,
어린 전강은 유기공방으로 들어가
풀무질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기가 든 짐을 지게에 지고
장사를 나갔다가 한 탁발승을 만나 불가와 인연을 맺는다.
그 탁발승을 따라 간 곳이 바로 옥과 관음사였다.
그러나 탁발승은 대처승으로서
어린 전강에게 허드렛일만 시켰다.
전강은 삿갓 쓰고 육환장 짚고
바람처럼 떠도는 멋진 스님이 되고 싶어
다시 해인사로 갔다. 그의 나이 16살 때의 일이었다.
어린 전강은 인공(印空)스님을 은사로,
응해(應海)스님을 계사로 사미승이 되었다.
이후 전강은 직지사 천불선원으로 가
제산스님 회상에서 8년 동안 용맹정진을 했다.
궁둥이는 헐어 썩었고, 상기가 지나쳐 머리에서는 피가 솟았다.
득력(得力)이 생긴 스님은 보덕사와 태안사로 가 안거를 하다
태안사 밑의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무자 화두를 타파하고 나서는
오도의 경계를 혜봉,혜월, 용성, 한암 등에게 점검받으러 만행했다.
23세 때 전강은 먼저 마곡사에 주석하고 있는 혜봉을 찾아가 물었다.
“조주무자의지(趙州無子意旨)는 천하의 선지식이 반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 무자의지(無子意旨)를 반만 일러 주십시오.”
조주의 무자 화두는 어떤 경계인지
반만 일러주라는 말에 혜봉은 짧게
대답했다.
“무(無)!”
그러나 전강은 혜봉의 경계를 무섭게 파고들어갔다.
“그것이 어찌 반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전강 수좌가 한번 일러보소.
어떻게 일렀으면 반이 되겠는고.”
“무(無).”
이번에는 혜봉이 물었다.
“거년(去年)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다.
거년엔 송곳 세울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도 없다.
이 말에 고인이 점검하기를
여래선 밖에 안 된다 하였으니 어떤 것이 조사선인고.”
“마름풀이 날카로워서 저와 같지 않습니다(菱角尖尖不似他).”
24세 때는 부산의 선암사를 찾아가
혜월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혜월은 절을 받자마자 물었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공적을 이르게.”
“볼래야 볼 수 없고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습니다.”
“공적영지의 등지(等持)를 일러라.”
“해는 서산에 지고 달은 동녘에 듭니다(日落西山月出東).”
혜월은 만면에 미소를 띠더니 전강의 두 손을 잡아끌었다.
“아따야! 우리 조선에 참 큰 도인 났다.
누가 공적영지등지를 이를 사람이 있겠느냐.”
전강은 다시 서울 대각사로 가서 용성을 친견했다.
용성 역시 전강의 비범함을 간파하고 질문을 던졌다.
“어떤 것이 제일구(如是第一句)인가.”
전강은 아주 큰소리로 되물었다.
“예.”
“어떤 것이 제일구냐.”
전강은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그러나 용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그러자 용성은 전강의 법명을 불렀다.
“영신(永信)아!”
“예.”
“그것이 제일구이니라.”
“하하하.”
이번에도 용성은 박장대소하는 전강을 타박을 했다.
“자네가 전신(轉身)을 못했네.”
“그렇다면 전신구(轉身句)를 물어주십시오.”
“어떤 것이 전신구인가.”
“저녁놀은 따오기와 더불어 날고
가을 물은 하늘과 함께 일색입니다
(落霞與孤鶩 齊飛 秋水共長天一色).”
며칠 후, 용성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선언했다.
“허! 내가 영신에게 속았구나!”
대중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만공은 이 말을 전해 듣고 용성의 깊이를
헤아렸다.
“속은 줄 아니 과연 용성스님일세.”
다시 전강은 금강산 지장암에 머물고 있는 한암을 찾아갔다.
걸망을 벗자마자 숨을 돌이킬 틈도 주지 않고 한암이 말했다.
“육조스님께서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고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물이라 해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자네는 어떻게 하였으면 인가를 받겠는고.”
전강은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
그 길로 만공을 찾아 남행을 했다.
그러니까 전강이 만공을 처음 만난 것은 25세 때였다.
첫 만남부터 만공은 전강의 기를 꺾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전강은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보였는데 만공은 혀를 찼다.
“허! 저렇게 주제넘은 사람이 견성했다고 하는가.
네 습기(習氣)냐. 체면 없이 무슨 짓인가.”
다음 날부터 만공은 마주칠 때마다 전강을 조롱했다.
“저 사람, 저런 사람이
견성을 했다 하니 말세 불법이 이럴 수가 있는가.”
전강은 분심이 솟았다.
운동대를 붙잡고 이를 악물었다.
화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를 들었다.
판치생모 역시 무자와 같이
조주스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떤 수행자가 조주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앞이빨의 곰팡이(板齒生毛)’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 화두였다.
‘에라, 한바탕 해봐야겠다. 그까짓 놈의 몸은 하다가 죽으면 그뿐이지!’
몇 달 후, 마침내 전강은
만공의 이 한 마디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은 계명서(鷄鳴聲)을 보시고 오도했다는데,
저 하늘 가득한 별 중에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전강은 대답을 하지 않고 대신 엎드려서
허우적허우적 땅을 헤집는 시늉을 하니
만공이 얼굴의 주름살을 펴며 흡족해 했다.
“옳다(善哉), 옳다(善哉)!”
그러면서 전강에게 전등의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이 날은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佛祖未曾傳
我亦無所得
此日秋色暮
猿嘯在後峰
16세에 출가하여 비로소
25세 때 만공에게 법을 받은 것이었다.
이후 전강이 제자들에게 즐겨 내리는 화두는
판치생모(板齒生毛)가 되었다.
9년 면벽 수행한 달마대사처럼
앞이빨에 곰팡이가 필 정도로
묵언하고 용맹정진하라는 경책으로
판치생모 화두를 내렸던 것이다.
[나를 찾는 불공]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