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무생사 / 서암스님
참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이론이나 철학 등 인간 지식을 정리해서 다시는 방황하지 않는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의심을 하나로 귀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는 물론 한 순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이론에 대한 정리를 위해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내 인생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좀 둔한 사람은 부모, 조부모로부터 소급해 인류역사 최초까지 생각해 본 뒤에야 '아, 내가 모르고 있구나'하는 결론을 얻는 데, 생각을 철저히 하는 사람은 대번에 그것을 깨닫고 '모른다'에서 출발합니다.
실로 만물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나가나 내 인생 전체의 문제, 이 생사의 문제 그것
하나가 딱 걸려서 놓을래야 놓을 수도 없고 놓아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화두입니다.
그런데 이론 체계도 서지 않고 모든 의심이 귀착된 그런 경지도 아닌 상태에서도 참선을 할 수 있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체를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체 무슨 지식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스스로가 도인이 되어
반드시 이 생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 한 가지를 무조건 믿고 시인하는 것으로 이 꽉 막힌 생사 문제에 맞닥뜨리는 것입니다.
많이 알되 더 이상 나아 갈 수 없는 백척간두에서 이론적으로 꽉 막히는 것이나 무조건 막히는 것이나, 막히는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화두란 결국 이렇게 꽉 막히는 것입니다.
'이 뭐꼬?'
꼬집으면 아픈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하고 웃고 울 줄 아는 그 물건이 어떻게 있느냐?
아무리 찾아봐야 찾을 수 없습니다.
이 몸을 해부해도 찾을 수 없고 현미경으로 들여다 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없느냐하면 없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없다면 문제 해결이 쉬운데,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온갖 것이 다 있으니
참으로 묘한 것이지요.
가령 자살을 할 만큼 괴로운 심정이더라도 그 괴로움의 뿌리를 찾아 아무리 깊이 파고들어 보아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아무 것도 없는 것에 속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면 여러분의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옛날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을 찾아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괴로워 못살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 괴로움을 없애줄테니 어디 그 괴로운 마음 한번 내놓아 보아라."
혜가스님은 그 괴로운 마음을 안팎으로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없거든요.
"아무리 찾아 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미 그 괴로운 마음을 다 풀어 주었노라."
아무리 찾아도 없는 마음 때문에 왜 괴로워하느냐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고통을 당할 때도 정신없이 밖으로만 헤매기 때문에 그 고통이 그치지 않고 무한히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괴로운 자리를 응시해서 돌이켜 보면
실로 괴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은 바로 무명, 밝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명이란 쉽게 말해서 착각이죠.
'본무생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고 죽는 것이 본래 없는 그 도리만 알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데 바깥 그림자에 집착하여 이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생이란 부처를 세우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요,
산다는 것 또한 죽음을 세우기에 생긴 말입니다.
결국 착하고 악하고 하는 모든 시비가 전부 상대적인 것이요, 관념 속에 물거품처럼 일어난 것 입니다.
세계가 이런 허상임을 알 때 우리는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리를 몰라 희로애락 온갖 것에 걸려 쩔쩔매고, 생로병사에 걸려 방황하는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한 생각 바로보고 살면 이것이 부처의 세계인 극락이요,
정토요, 환희와 삼매의 세계입니다.
한 생각이 미혹할 때에, 때론 좋거나 때론 나쁜,
여러 양상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가 났을 때를 한번 봅시다.
가슴에는 불이 펄펄 나고 앞뒤가 깜깜한 것이 이성을 잃어
자신이 죽는 것도 마다않고 끝까지 싸워 칼부림까지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탐진치 삼독입니다.
이처럼 독약과 같은 탐냄, 성냄, 어리석음도 생각을 돌이켜
살피면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일이든 집중해서 근본을 돌이켜 비추어 회광반조(廻光返照)하면 본래 공(空)한 이치를 깨닫게 됩니다.
해탈한 마음을 얻으면 삼독에 빠지지 않고, 성내는 마음을
일으킨다 해도 자기 속엔 조금도 성냄의 때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밖의 세계에 끄달리지 않는 자기의 주체,
그것을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은 여유롭다'라 합니다.
항상 그 근본인 공(空)한 곳에 한가히 있다는 뜻입니다.
복잡한 속에서도 한가한 마음을 지킴으로 해서 지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에서 온갖 고통이 생기니,
불교는 자기를 잃고 헤매는 꿈을 깨라고 합니다.
자기를 발견하는 것,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명랑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자아 발견에 대해 말하는 것이 흔치 않고 또 있다 하더라도 정도가 미약합니다.
특히 서양 사상의 대부분은 어떤 위대한 존재를 밖에 두고
거기에 매달리게 되니 거기서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똑바로 볼 때만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되고 '너다 나다' 하는 고정관념이 떨어져 구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산에 대덕화보살이라는 분이 열심히 수행을 하셨는데,
그 분이 임종하시기 전에 아들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늘 간다. 내가 올 때는 혼몽천지(昏夢天地)로 인생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왔지만, 가는 것은 분명하고 쾌활해서 이곳 보다 몇 백배 나은 곳으로 가니 너희들이 슬퍼할 이유가 없다.
너희들이 슬퍼하면 내가 애착이 생기니 울지 말고 대신 내가 죽거든 내가 다니던 절의 스님을 모셔다가 화장을 해다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절의 스님이 화장을 했는데 그 보살님이 살아
생전에 수행을 잘하셔서 사리 세 개가 나왔더랍니다.
육체란 평생 입혀주고 먹여주고 닦아주고 종노릇 해 봐야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정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참선을 하루 한 시간씩이라도 제대로 하면 우선 살아가는데
큰 힘이 생길 것이고, 제대로 하면 누가 화나게 해도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그런 여유를 가지고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착오가 있을 수 없죠.
흔히 불교가 쇠(衰)한다든가 성(盛)한다는 말을 하는데,
자기가 열심히 하지 않고 껍데기만 보니 그렇지,
진리에 성쇠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바로 이곳이 부처님 국토가 되는 것이지, 진리가 어디 따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겠어요?
이렇게 간단명료한 것이 불교의 철학입니다.
때문에 진실하게 정진을 하면 참으로 위대한 힘이 생깁니다.
한 끼 밥을 안 먹어도 참선을 하면 배가 부르고 뭘 많이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푸근한 마음이 듭니다.
모든 삿된 생각이 없을 때 참으로 마음속에 법열이 생기고
환희심이 생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