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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아티샤 수심요결

작성자山木|작성시간24.01.01|조회수43 목록 댓글 1

The Book of Wisdom 지혜의 서
- Discourses on Atisha's Seven Points of Mind Training
아티샤 수심요결


 
강의 : Osho
원문 출처 : http://oshofriendsinternational.com/
 

GRASP THE PRINCIPLE OF TWO WITNESSES.
두 종류 지켜봄에 대한 원리를 파악하라
 
It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sutras,
one of the very fundamentals of inner alchemy.
Let it sink deep in your heart.
It can transform you, it can give you a new birth,
a new vision, a new universe.
It has two meanings; both meanings have to be understood.


이것은 가장 중요한 금언들 중 하나이며,
내면의 연금술 중 가장 핵심적인 것 중 하나이다
이 금언이 그대의 가슴에 깊이 자리하게 하라.
이 금언은 그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아,
새로운 통찰로 새로운 우주에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The first meaning: there are two kinds of witnesses.
One kind is the people that surround you.
You are constantly aware that you are being watched, witnessed.
It creates self-consciousness in you.
Hence the fear when you are on a stage facing a big crowd.
Actors feel it, poets feel it, orators feel it
-- and not only the beginners but even those
who have wasted their whole life in acting.
When they come on the stage a great trembling arises in them, a great fear,
as to whether they will be able to make it or not.


첫 번째 의미 : 

두 종류의 지켜봄[注視]이 있다.


한 종류는

그대 주변사람들의 지켜봄이다.


그대는 사람들이 그대를

지켜보고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다.


이것이 그대 속에

자의식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관중들을 마주하여

무대 위에 서게 되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배우나 시인이나 연설가도

두려움을 느낀다.
초심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평생을 연기자로 살아온 사람도
두려움을 느낀다.


무대에 서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큰 떨림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With so many eyes watching you, you are reduced to an object.
You are no more a subjectivity, you have become a thing.
And you are afraid because they may not appreciate you.
They may not feed your ego, they may not like you,
they may reject you.
Now you are in their hands.
You are reduced to a dependent slave.
Now you have to work in such a way that you will be appreciated.
You have to buttress their egos,
so that in response you can hope they will buttress your ego.


수많은 눈들이 당신을 바라보면,
대상으로 전락한 당신은 녹초가 된다.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관중들이 당신에게

공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들은 그대의 에고를

충족시켜 주지 않을 수도 있고,
그대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대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대의 운명이

그들 손에 달린 것이다.
그대가 힘없는

노예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관중들의

찬사를 받는 방식으로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행동해야만 한다.


그대는 그들의 에고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보답으로

당신의 에고에도
힘이 실리리라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When you are with your friends you are not so afraid.
You know them, they are predictable, you depend on each other.
But when you face the anonymous crowd, more fear arises.
Your whole being starts trembling, your whole ego is at stake --
you can fail.
Who knows? Your success is not guaranteed.


친구들과 있을 때는

그렇게 두렵지 않다.
그들을 알고 그들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명의 군중들과 마주하면

큰 두려움이 생긴다.
그대의 전체 에고의 성패가 달려있는데
실패할 수도 있기에

온 몸과 마음이 떨린다.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누가 떨리지 않겠는가?
 


This is the first kind of witness.
Others are witnessing you, and you are just a beggar.
This is the situation in which millions of people live.
They live for others, hence they only appear to live,
they don't live in reality.
They are always adjusting to others,
because they are happy only if others are happy with them.
They are compromising constantly,
they are selling their souls, for a simple reason
-- so their ego can be strengthened,
so that they can become famous, well known.


이것이 첫 번째 종류의 지켜봄[注視]이다.


다른 사람이

그대를 지켜보고 있음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한낱 거지 신세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처해있는 상황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있기에,
그들은 사는 것처럼 보일 뿐,
그들은 실제로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에 맞추어 살아간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과 함께

만족해주어야만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협한다.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야만 자신의 에고가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유명해져서

명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Have you observed something of immense value,
that whenever a poet, a novelist or a scientist gets a Nobel prize,
immediately after that his creativity declines?
No Nobel laureate has been able to produce anything valuable
compared to the things that he created before he received it.
What happens?
Now you have attained the goal of the ego,
there is no further to go, so there is no more need to adjust to people.
Once a book becomes famous the author dies.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고나면,
그 후로 급격히 창작력이

감소하는 것이 관찰되는데,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아주 가치 있는 관찰이다.

상을 받고 난 후 그 전보다

더 멋진 작품을 쓴 작가는
아무도 없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에고가 목적을 달성했기에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더 이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일단 작품이 유명해지면

작가는 죽어버리는 것이다.


 
That's what happened with Kahlil Gibran's The Prophet.
That's what happened with Rabindranath's Gitanjali.
And that is almost the rule, not the exception.
Once you are famous you stop compromising.
For what? You are already famous.
And when you stop compromising, people start neglecting you,
ignoring you.
Your whole creativity was rooted in the desire of the ego;
now the ego feels at rest, all creativity disappears.


그런 일이 <예언자>의 저자

칼릴 지브란에게도 일어났다.
그리고 <기탄잘리>의 저자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에게도 일어났다.


작품이 유명해지면

작가가 죽어버리는 이런 일은
거의 법칙이 되어 버렸다.
예외가 없는 것이다.


일단 유명해지면

더 이상 타협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이미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타협을 그만두면

대중들은 그대를 외면하고
무시하기 시작한다.


창작력이 유명해지고 싶은

에고의 욕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에고가

쉬고 싶어 하자,
모든 창작력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This is the situation in which ninety-nine point nine percent
of people live.
You know only one kind of witness -- the other.
And the other is always anxiety-creating.


이것이 99.9%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직 한 가지 지켜봄[注視]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은

늘 불안을 유발한다.


 
Jean-Paul Sartre rightly says, "The other is hell."
The other does not allow you to relax.
Why do you feel so relaxed in your bathroom, in your bathtub?
-- because the other is not there.
But relaxing in your bathtub,
if you suddenly become aware
that somebody is looking at you through the keyhole,
suddenly all relaxation disappears.
You are tense again. You are being watched.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옳은 말이다.

타인은 그대가

휴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대는 왜 자기 집

욕실이나 화장실에서는
그토록 편안하다고 느끼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실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있는데
누군가가 열쇠구멍으로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알게 되면
순식간에 그 모든 편안함은 사라져 버린다.
다시 긴장 상태가 된다

타인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To create fear in people, down the ages,
the priests have been telling you
that God is constantly watching you
-- constantly watching you, day in and day out.
You may be asleep; he never sleeps,
he goes on sitting by the bed and watching.
He not only watches you,
he watches your dreams and your thoughts too.
So you are not only going to be punished for your acts,
but for your dreams, for your thoughts,
your desires and your feelings.


오랜 세월 동안 성직자들은
하나님이 늘 그대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왔다.


낮이나 밤이나 그 하나님은

늘 그대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그대가 잠이 들어도
그 하나님은 침대 곁에 앉아서

그대를 지켜보고 있다.


지켜볼 뿐만 아니라,
그대의 꿈과 생각 역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벌을 받게 될 때는
잘못한 그대의 행동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대의 꿈과 생각
그리고 욕망과 느낌에 대해서도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The priests created great fear in people.
Just think of God watching continuously.
No moment, not even a single moment, is allowed
when you can be yourself.
That was a great strategy for reducing people to things.


성직자들은 사람들 속에

큰 두려움을 심어놓았다.
끊임없이 지켜본다는

그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럴 경우 그대는

단 한 순간도 그대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다.


이것은 사람들을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성직자들의 교묘한 술책이다.


 
Why do we hanker for the attention of others?
-- because as we are, we are hollow.
As we are, we are NOT.
As we are, we don't have a center of being.
We are just noise, a crowd,
a house full of servants quarreling with each other
because the master is absent or fast asleep.
We hanker for other people's attention
so that at least we can create a pseudo-center.
If the real is missing, at least we can depend on a pseudo-center.
It will give you an appearance of togetherness,
it will make you a person.
You are not an individual
-- individuality is the fragrance of a really centered being,
one who knows who he is.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를 갈망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사는 것이

우리가 공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고한 존재의 중심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무리의 군중이 내는

소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거나 일찍 잠들었을 때
서로 싸우기만 하는

한 무리의 하인들로 가득 찬
집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기를 갈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적어도

가짜 중심은 지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진짜를 잃은 상태에서

적어도 가짜 중심에라도

의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짜 중심도 겉보기에는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그대를 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그대는

고유한 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성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
진실로 중심 잡힌 존재의 향기다.


 
But if you are not an individual, then at least you can be a person,
you can attain personality.
And personality has to be begged.
Individuality is your innermost growth.
It is a growth; you need not beg it from anybody else,
and nobody can give it to you.
Individuality is your unfoldment.
But personality can be begged, people can give it to you
-- in fact, only other people can give it to you.


그대는 말할 것이다.
비록 고유한 한 개인은 되지는 못하지만,
개성을 가진 한 사람은 될 수는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개성은 구걸해서 얻는 것이고,
개인성은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자라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자라나오는 것이어서

그 누구로부터도
구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대에게

그것을 줄 수가 없다.
개인성이란 자신을 밝혀 펼치는 것이다.


반면에 개성은

구걸할 수 있기에 사람들이
그대에게 그것을 줄 수가 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오직 타인들만이

개성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
 


If you are alone in the forest you will not have any personality,
remember.
You will have individuality but no personality at all.
If you are alone in the Himalayas, who are you -- a saint or a sinner?
There is nobody to appreciate you or condemn you,
there is nobody to make you famous or notorious,
there is nobody except yourself.
In your total aloneness, who are you?
A sinner or a saint?
A very very famous person, vvip, or just a nobody?


혼자서 숲 속에 떨어져 살면
그대는 아무런 개성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개인성을 가질 수는 있어도

개성은 전혀 가질 수가 없다.


만일 그대가 홀로

히말라야 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때 그대는 누구인가

성자인가 죄인인가?


거기에는 그대에게

찬사를 보낼 사람도 없고
비난할 사람도 없다.

 

거기에는 그대 자신 외에
그대를 유명하게 만들어줄 사람도

악당으로 만들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전적으로

홀로 있음 속에서 그대는 누구인가?
죄인인가성자인가?
아주 유명한 사람인가귀빈인가

아니면 그저 그런 사람인가?


 
You are neither.
You are neither a very very important person nor a nobody,
because for both the other is a must.
The eyes of others are needed to reflect your personality.
You are neither this nor that.
You are, but you are in your reality; you are not created by others.
You are as you are, in your utter nudeness, authenticity.


그대는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아주 중요한 사람도

그저 그런 사람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개성을 나타내려면

타인의 시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곁에 타인이 없다면

그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실존 안에서

그대일 뿐인 것이다.
다른 사람은 그대를

지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일 뿐이다.
(타인의 시각을모두 벗어던진
있는 그대로의 그대가

진짜 그대인 것이다.

 


This is one of the reasons why many people thought
it wise to escape from the society.
It was not really to escape from the society,
it was not really against society,
it was just an effort to renounce the personality.


이것이 왜 많은 사람들이
속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였는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들이 속세로부터 벗어난 것은
세상에 반대하거나

탈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타인들이 지어내어 투사하는)
개성을 포기하려고

노력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
 
In fact Buddha had to leave the palace just to renounce his personality.
He wanted to know himself as he was,
not what others were thinking about him.


사실 붓다가 왕궁을 떠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즉 개성을 포기하기 위에서였던 것이다.

 

붓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자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알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

In dictionaries, "personality"
and "individuality" are synonyms.
They are not synonymous in life.
The personality is false, a pretension,
a facade. Individuality is your truth.


사전에는 개성과 개인성이

동어의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삶에 있어

그 두 단어는 동의어가 아니다.
개성은 가짜다

가식이며 실제와는 다른 허울이다.
개인성이 그대의 진실이다.

 
.............
 
And the day you can enjoy your individuality,
you are free -- free from dependence on others.
If you ask for their attention you have to pay for it in return.
It is a bondage.
The more you ask people to be attentive towards you,
the more you are becoming a thing, a commodity,
which can be sold and purchased.


그대가 자신의 개성을

즐길 수 있게 되는 날,
다른 사람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대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타인의 주목을 받으려면

그대는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구속이다.
사람들의 주목을

그대 쪽으로 끌기 원하면 원할수록,
그대는 점점 더

하나의 상품이 되어갈 것이다.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 되어갈 것이다.


 
This is one kind of witnessing; you want to be witnessed.
It gives you respectability,
and in order to have respectability
you will have to create character and morality.
But all that character and all that morality is just hypocrisy.
You create it with a motivation,
so that others can be attracted towards you.

 

사람들이 지켜보아 주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한 가지 종류의 지켜봄이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대에게 체면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그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대는 그에 알맞은

기질과 도덕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기질과 도덕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대가 동기를

부여한 것이므로 위선인 것이다.


 
If you want respectability you will have to be a conformist,
you will have to be obedient to the society and its demands.
You will have to live according to wrong values,
because the society consists of people who are fast asleep
-- their values cannot be right values.


체면을 유지하려면

그대는 관습에 순순히 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사회와 그 사회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야만 한다.


그대는 그릇된 가치관에 따라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는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들의 가치관은

올바른 가치관일 수가 없다.


 
Yes, but there is one thing: you can become a saint.
That's how thousands of your saints are.
They have sacrificed everything at the altar of respectability.
They have tortured themselves,
they have been suicidal, but they have gained one thing.
They have become saints, people worship them.


하지만 그런 잘못된 가치관을 통해서도
이룰 수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다.
수많은 성인들이

그런 방법을 통해 성인이 된 것이다.
성인들은 체면이라는 제단에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이다.


자기 스스로를 고문하고,
늘 자살하고 싶어 안달함으로써

한 가지를 얻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성인이 된 것이다.

 
...........
 
The second kind of witnessing is totally different,
just the polar opposite.
It is not that you hanker for others' attention;
on the contrary, you start paying attention to yourself.
You become a witness to your own being.
You start watching your thoughts, desires, dreams,
motives, greeds and jealousies.
You create a new kind of awareness within you.
You become a center, a silent center
which goes on watching whatsoever is happening.


두 번째 종류의 지켜봄은
앞서 와는 전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관심에

목을 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돌려
스스로를 지켜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그대의 생각들과 욕망들과 꿈들을
그리고 그대의 동기와

탐욕과 질투를 지켜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대 내면에

새로운 종류의 각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대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고요한 중심이 되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지켜보는 것이다.
 
.......
 
The second kind of witnessing creates a totally different kind of person.
It creates the sage.
The sage is one who knows who he is, not according to others.
The sage is one who lives a life according to his own nature,
not according to others' values.
He has his own vision and the courage to live it.


이 두 번째 종류의 지켜봄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을 만들어 낸다.
이 통찰이 현인(賢人)을 배출해내는 것이다.


현자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누군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을 아는 사람이다.
현인은 다른 사람의 가치관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현인은 그 자신만의 통찰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통찰과 더불어

온 몸으로 살아가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The sage is rebellious.
The saint is obedient, orthodox, conventional, traditional, conformist.
The sage is nonconformist, nontraditional, nonconventional, rebellious.
Rebellion is the very taste of his being.
He is not dependent on others.
He knows what freedom is, and he knows the joys of freedom.
The saint will be followed by a big crowd.
The sage will have only the chosen people who will be able to understand him.


현인은 반항아다.
그 반면에 성인은 체제 순종적이고
전통을 고수하는

관습적인 정통파이자 순응주의자이다.
하지만 현인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그의 존재의 진면목은 반역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다.
 그는 자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자유의 기쁨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성인은 많은 군중들이 따른다.
하지만 현인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그를 따른다.


 
The sage will be misunderstood by the masses,
the saint will be worshipped.
The sage will be condemned by the masses, maybe even murdered.
Jesus is crucified and the pope is worshipped.
Jesus is a sage and the pope is a saint.


현인은 대중들에 의해

오해받기 마련되지만
성인은 존경받는다.
현인은 대중들에 의해

비난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교황은 존경받는다.


그 차이는

예수는 현인이고

교황은 성인이라는 데 있다.


 
The saint has character and the sage has consciousness.
And there is a tremendous difference.
They are as different as the earth and the sky.
Character is imposed for some ulterior motives
-- to gain respectability in this world
and to have more and more heavenly pleasures.
Consciousness has no future, no motivation, it is a joy unto itself.
It is not a means to some end, it is an end unto itself.


성인은 인품을 가지고 있지만

현인은 자각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인품이란

이 세상에서는 존경받고
나아가 저세상에서

천상의 쾌락을 더 많이 얻으려는
어떤 숨겨진 동기에서 내세우는 것이다.


그 반면에 자각은

미래도 없고 동기도 없는,
그 자체로서 즐거운 것이다.


자각이란

어떤 목표에 이르려는

수단이 아니다.
자각 그 자체가 목표인 것이다.


 
To be with a saint is to be with an imitator.
To be with a sage is to be with something true and authentic.
To be with a saint is to be with a teacher, at the most.
To be with a sage is to be with a master.


성인과 함께 한다는 것은

모방자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현인과 함께 한다는 것은
진실되고 진정한 무엇과

같이 지낸다는 것이다.
성인과 함께 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선생과 함께 한다는 것뿐이지만,
 현인과 함께 한다는 것은

스승과 같이 지낸다는 것이다.


 
These are the two witnesses.


이것이 두 가지 지켜봄이다.

 


 
Atisha says:
아티샤는 말한다.
 
GRASP THE PRINCIPLE OF TWO WITNESSES.
두 종류 지켜봄에 대한 원리를 파악하라
 
Avoid the first and plunge into the second.
(
타인의 주목을 받기 원하는

첫 번째를 방식을 피하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

스스로 존재의 목격자가 되는)
두 번째 방식에 몰입하라.

  
There is another meaning to this sutra too.
The other meaning is, first witness the objects of the mind.
This is a higher meaning than the first.
Witness the objects of the mind.
이 금언에도 역시

또 다른 뜻이 담겨있다.
그 다른 뜻은

먼저 마음의 대상들을

지켜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지켜봄의

보다 더 중요한 뜻이다.
마음의 대상들을 지켜보라.


 
Patanjali calls it dhyana, meditation
-- from the same word come zen and CH'AN.
Witness the objects, the contents, of the mind.
Whatsoever passes before you,
watch it, without eval‎uating, judging or condemning.
Don't be for or against, just watch,
and dhyana, meditation, is created.


 
<요가수트라>를 저술한 파탄잘리는
마음의 대상들을 지켜보는 것을

드야나라고 불렀는데,
같은 말을 한국에서는 선(), 

일본에서는 젠,
중국에서는 찬이라고 부른다.


마음의 내용물

즉 대상들을 지켜보라.
그 무엇이

그대의 마음속을 지나가더라도
평가하거나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그저 지켜보도록 하라.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말고

그저 지켜보라.
그러면 드야나

즉 명상이 일어날 것이다.
 


And the second is, witness the witness itself
-- and samadhi is created, satori is created,
the ultimate ecstasy is created.
The first leads to the second.
Start watching your thoughts but don't stop there.
When thoughts have disappeared
then don't think that you have arrived.
One more thing has to be done, one more step.
Now watch the watcher.
Now just witness the witnessing.
Nothing else is left, only you are.
Just suddenly become aware of awareness itself,
and then dhyana is transformed into samadhi.
By watching the mind, the mind disappears.
By watching the witness,
the witness expands and becomes universal.


두 번째는 지켜보는 그 자체를

지켜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삼매가 삿토리가

궁극의 환희가 일 것이다.


첫 번째 지켜봄은

두 번째 지켜봄으로 이끈다.
그대의 생각들을 지켜보라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는 말라.

 

생각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깨달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쳐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이제 지켜보는 자가

누구인지를 지켜보라.


이제는 다만 지켜봄을

지켜보기만 하라.


아무것도 남지 않고

오직 그대만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각성 다만 그 자체만을

돌연 의식하게 되면

디야나는 삼매로 바뀐다.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마음은 사라진다.


지켜보는 자를 지켜봄으로써

지켜봄은 팽창하여
우주적으로 된다.
  
 


The first is a negative step to get rid of the mind.
The second is a positive step to get rooted
in the ultimate consciousness
-- call it God or nirvana or whatever you wish.


첫 번째 단계가

마음을 없애기 위한

부정적 단계라면,


두 번째 단계는

궁극의 자각에 뿌리내리기 위한
긍정의 단계이다.


궁극의 자각그것을 당신이

하나님이라 부르든,
열반이라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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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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