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無門關] - 대행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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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를 움직이게 하는 장본인張本人이 누구인가?
생각나기 이전, <一念不起處> 이름 하여
주인공《 主人空 》에 몰락 자신을 놔버려라!
그리하면 스스로 자기 근본이 드러날 것이다.
이 공부 처음에는 자신의 '주인공主人空'을 믿고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놓아라!.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렇게 말을 하게하고, 듣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또 자기 몸을 운전運轉하여 '움직이게 하는 자'가 있으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므로 자기를 운전運轉하는 그 당체當體,
다시 말해서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것을 거기에다 놓으라는 말이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데<本來 無一物>
도대체 주인공은 무엇이고, 믿는 자는 누구냐?
이렇게 물을 사람도 있겠지마는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의 주장심拄杖心이 잡힐 때까지는 그렇게 해야 한다.
중심中心이 있어야 수레바퀴가 돌아갈 수 있듯이
만약 심봉心棒도 세우지 않고 이것도 저것도 모두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이론일 뿐이요, 공空에 떨어진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자꾸 허망하게 느끼게 되고 좌절하기가 쉽다.
이는 자성을 못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래자기를 무시하게 된다.
모든 것을 주인공空에다 믿고 맡겨 놔버리고 그걸 지켜보아야 한다.
<輕安觀照>
수박은 수박씨가 변하여 뿌리가 되고 싹이 되어 나와서 열매가 열린 것이니
수박이 잘 되기 위하여서는 그 뿌리에다 물과 거름을 잘 주어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뿌리가 있기 때문에 살고 있으니 생활의 모든 것을
자기 뿌리<根本>에다 일임하고 놓아야 한다.
뿌리를 믿고 거기에다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잠재潛在해 있는 실상實相을<본래면목>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믿지 못한다면 도道와는 거리가 멀다.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과 망심妄心을 여의면
스스로 청정한 보리심이 나타난다.
그러면, 삼독심을 여의는 방법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무조건 자신의 주인공을 믿고 놓아야 한다.
일단 알고 나면 믿고 놓을 것도 없는 것이지만
처음에는 무조건 자기의 주인공을 믿고 놓아야 한다.
모든 것이 '거기'에서 나오고, 들이는 것도 거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貪하는 마음이 날 때에는 즉시,
자기 본래면목<주인공>에게 탐하는 마음을
가라 앉혀 달라고 일임任하여 보라!
화나는 마음이나 어리석은 마음이 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해보라!
그냥 그대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자꾸 하다보면
탐.진.치 삼독심을 스스로 여의게 되고 본래 청정한 보리심이 나타난다
각자 자기의 육신을 나라 할 수도 없고, 마음을 나라 할 수도 없고,
생명 을 나라 할 수도 없어서
한 생각 나기 이전《본래면목本來面目》을
이름 하여《주인공主人空》이라 하는 것이니
초발심자들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해나가야 한다.
①. 일체 생활하는 모든 것을 주인공 에 일임任하여 놓는다. 즉 맡긴다.
②. 자기 주인공을 내면 깊숙이 믿으며,
믿음에 있어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③. 마음 나는 일체<用>를 자기 내면에서 관觀한다.
주인공에 몰록 맡겨 놓으면 <放下着> 스스로 의증疑情이 나서
자기의 참 생명수의 맛을 보게 될 것이다.
④. 만약에 내 육신이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새삼스레 '이게 뭘까?' 한다든가,
내가 아는 것을 가지고 또 의증疑을 낸다면,
마치 빈 맷돌이 도는 것처럼 아무소용이 없으니
아는 것은 아는 것대로 자기의 주인공에게 맡겨 놓아라.
⑤. 스스로 정말 모르는 것이 의증났을 때에는
자기 내면 깊이 관하여, 굴리며 의증을풀어야 한다.
결코 남 에게 물어서 풀어서도 아니 되고,
경經을 보고 풀어서도 아니되며, 생각으로 풀어서도 아니 된다.
⑥. 꿈과 생시가 둘이 아니어서 꿈에 보이는 일체의 모습이 갖가지로 나타나는 것은
모두가 자기가 화化해서 나타나는 것이니 설사 꿈속에서
부처님 또는 그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 난다 하여도 결코 거기에 속지 말 것이며,
또한 화가 나거나, 안 되는 일이 있거나,
가정 의 식구들이 속을 썩이더라도 자기 주인공에다 맡겨 놓는다.
⑦. 병病에 끄달리는 식구들이 있어도 맡겨 놓고 낫게 될 것을 절대 믿는다.
본래 참나는 체體가 없기에 공空해서
일체의 병이든 무엇이든지간에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잘되어도 감사하게 맡겨 놓고,
잘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맡겨 놓아야 한다.
⑧. 본래 불성佛性은 부동不動하여 움직임이 없지만,
내 마음의 중심 주인공은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나투기 때문에 내가 명命이 짧으면 칠성七星이 되고,
아플 때에는 의사가 되고, 가난하면 관세음이 되고, 천도가 되려면 지장이 되고,
법의 거울이 되면 판사가 되고, 임신이 안 되었을 때에는 삼신이 된다.
이렇게 찰나찰나 나투며 만법의 분신分身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法身,
마음내면 응신應身이요, 움직이면 화신化身이니,
내가 했다 안했다 내세울 것이 없어야 자유로운 사람이며 부처이다.
그렇게 되어야 윤회輪에 끄달리지 않으며, 시간도 공간도 초월하게 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대로가 생활이며 참선禪이 되는 것이다.
'끊어졌다 안 끊어졌다' '놨다 안 놨다' 이 모든 생각을 놓으면 그것이 곧 참선이다.
'망상을 끊어야지' 하는 것은 벌써 그 망상이 붙어 돌아가는 것이다.
또 '망상을 끊지말아야지' 하는 것도 망상이 붙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상이니 아니니 그 모두를 주인공에 놓아야 한다.
버리지 않으면 가지려 하고, 갖지 않으면 버리려 하는 양변을 다 놔야 한다.
정진<기도나 좌선>중에, 또는 꿈에서 해나 달이 환히 비추었다든지,
백새가 나타났다 든지, 하는 것은 다 자기 성품속에서 나오는 것이며,
앞으로 정진하여 밝아질 수 있는 것을 예고하여 주는 것이니
거기에 걸리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무조건 일체 만법이 공에서 나오고 드는 줄 알고 공空에다 들이고 내며
오직 모든 것을 공에다 놓아라!
그러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을 때에는 말없이 안으로 굴려라!
그래야 자기와 참자기가 상봉 하게 된다.
모든 일체를 다 놓아라! 놓는다는 것조차도 없을 때까지 놔버려라!
말이나 생각하는 것 모두가 환상에 지나지 않으니 주인공에 일임해버리면
모든 과거의 아집, 과거의 인연에 따른 유전성, 업보성 이 모든 것이 몰록~ 쉬게 된다.
쉬게 되면, 앞으로 갖는 것도 없고 짊어질 것도 없다.
그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소리를觀世音 다 들을 수 있고,
또 관해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되니, '나는 눈도 천千眼이요 손도 천千手이니,
원하는 대로 내 몸을 나투어 가서 다독거려 주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첫 번째,
놓아버리는 공부 가 되어야 비로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니,
그런 까닭으로<분별심을>놔버리는 공부를 첫 번째로 시키는 것이다.
아주 놔버린 자는 오히려 사는 도리가 있으나, 붙들 고 있는 자는 죽는 도리밖에 없다.
억겁 전부터 내 모습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고,
여기로 왔다가 저리로 갔다가 하는데 과연 나를 끌고 온 것이 누구인가?..
다름 아닌 주인공 이다. 그러니 '에라~ 주인공!
당신이 다 맡으시오!'하고 다 놔버린다면 자신은 물론 남도 편안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해나가다 보면 주인공 이라고 세울 것도 없이
만법이 저절로 돌아가고 있음 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한 생生을 집착하지 않고, 이 한 생을 다 놔버렸다면 일체를 얻는다.
도道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남아 있고
아직도 내세울 것이 있다면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놓고 지켜보라! 들고 나는 것을 잘 지켜볼 줄 알 때,
비로소 한마음의 천둥 번개 가 침을 알 것이다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인공을 믿고 나가라.
도중 어떠한 장애가 오더라도,
설사 죽게 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주인공은
나를 죽게 인도하지 않을 것' 이라고 철저히 믿고 놓아라.
자기 독존 을 관 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만약 좌선 을 한답시고 모든 것에귀막고,
아랫배에 힘 주고 앉아서 관 한다면
오히려 육신에 집착하게 되는 형국이므로 참다운 수행이 될 수 없다.
참나는 뿌리 없는 기둥과 같아서, 모든 것을 연방 쥐고,
또 놓고 돌아가는 것이 소소영령하고 공 하다.
이것을 알 때라야, 비로소 어디에 관 하는 것도 아니게 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없는 중심'<곳>에 관 해야 된다.
거기<곳>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니,
오직 거기에다 모든 것을 놓고,
일임하면 그것이 바로 참선 이다. 뿌리 없는 뿌리를 관 하다 보면
모든 것이 한 군데서 나고 드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로 뭉치게 된다.
이때서야 비로소 나 를 발견 하게 되는 것이다
구멍 아닌 구멍에서 일체 가 다 나왔으니,
그 구멍 아닌 구멍을 관觀해야 된다.
자기는 본존불, 즉 마음의 시자 라고 믿고 생활해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주인을 찾기 않기에, 하는 일마다 헛일이 되고 만다.
모두 자기 껍데기를 위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달구지를 칠 것이냐? 소를 칠 것이냐?
고양이가 쥐 노리듯, 어린 아이 엄마를 그리듯, 자문자답 하면서
자나 깨나 자기 본래면목 <진여>을 그리워해야 된다.
눈밝은 스승을 만나야 된다. 장님을 따라가다가는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무작정 남을 좇지 말고, 자기 독존獨尊<자성>을 먼저 발견 할 일이다.
우리의 이 마음자리는 본래 청정淸淨하고,
텅 비어 허공처럼 맑은 자리인데 <廓然無聖> 새삼스럽게 '맡긴다',
'일임한다', '대화한다'느니 하는 것은
도대체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내가 본래 절대공<眞空>이기 때문에
절대의 누구하고도 대화할 수가 있고,
맡길 수도 있는 것이지,
만일 절대공<大寂光>이 아니라면 맡긴다 해도
대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놔버리는 과정 없이는 그 귀중한 무가보물無價寶을 얻을 수 없다.
무심은 무심해지고 싶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무심해
지고자 애를 써서 무심이 되었다면 그 무심은 이미 무심이 아니다.
진짜 공부는 자기를 알고 나서부터, 즉 견성을 하고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자기의 주인공을 잡고 나가다가 자기를 찾고 나면 그때부터 만행
이 시작된다.
전체가 문門이기 때문에 문이 없다고 하였다.<無門>그러니 오직
한 문만 찾아야지, 이 문 저 문 기웃거리다가는 찾을 수가 없다.
내가 바로 문이기에 일문一門이다. 나의 빗장을 쥐고 관하면서
만 가지 들이고 내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깊숙한 문인 것이다.
일체 만물이 다 스승 아님이 없고, 문門 아님이 없다.
문門이라고 하니까 문門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면 門을 찾지 못한다.
사방四方이 환히 터졌기에 그렇다.
'꼭 찾아야 되겠다'하는 마음 때문에 공부하기가 어렵다.
그 마음<相>이 오히려 문門을 막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