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처(究竟處),
곧 존재의 본질에서는 붓다도 악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포와 희망과, 선과 악에서 자신을 해방시킨 사람은
모든 존재들의 비실재성과 무자성(無自性)을 알게 된다.
이때 생사 윤회의 현상세계는 마하무드라 자체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마음을 어지럽히고 날뛰게 만드는 모든 사념들은
모이거나 흩어지는 일이 없는 진리의 몸(法身)이라 불리는
법계(法界) 속으로 녹아 버린다.
미라래빠는 이를 다시 노래로 읊었다.
위대한 완성자들의 나라에
두번째 붓다라 불리는 성자가 살았나니
그의 명성은 시방에 알려졌도다.
영원한 진리의 당간(幢竿) 위에
보석처럼 빛나는 분이시니
거룩한 스승 마이뜨리빠이시네.
수행자는 임의 발 앞에 절하며 헌신합니다.
마이뜨리빠의 연화좌에
아버지 스승은 피어나셨네.
마하무드라의 지고한 지견으로
천상의 감로수를 마시고
본질의 진리를 깨달아
더할 수 없는 자유에 노니는 분은
지존자 마르빠이시네.
지순하고 죄 없는 분이시니
붓다의 화현이시네.
스승께서는 말씀하셨네.
깨닫기 전에는
현상계의 만물이 속이고 혼란케 한다.
외부의 형상에 끄달려 언제나 구속받게 된다.
깨달은 후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마법사의 그림자 놀이 같아
모든 대상은 유익한 친구가 된다.
남이 없는 법신 안에서 만물은 깨끗하다.
지고한 진리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현현된 적이 없다.
깨닫기 전에는
끊임 없이 동요하는 마음의 의식이 무명에 가려
욕정과 요동과 욕망의 원인이 된다.
깨달은 후에는
동요하는 마음 자체가 광명의 지혜가 되어
모든 선과 공덕의 원천이 된다.
지고한 진리의 세계에는 지혜조차 없나니
하여 진리가 다한 곳(究竟盡處)에 이르게 된다.
육신은 지수화풍 네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깨닫기 전에는 모든 고통과 질병이 거기서 일어 난다.
깨달은 후에는 '하나 속 둘'인 붓다의 몸이 되어
구름 한점 없는 하늘처럼 지순하게 된다.
하여 근본 집착은 뿌리채 뽑히게 된다.
허나 지고한 진리는 몸조차 없다.
사악한 남녀 악마와 유령들이
무수한 고통과 방해를 주지만
실재한다고 착각하지 말라.
실상을 깨닫고 나면
그들은 진리의 수호자로 화하나니
그들의 도움으로 무수한 성취를 이루네.
지고한 진리에는 불타와 마군도 없나니
사람은 이에 이르러 법이 사라진 경계에 들어 가네.
모든 수레들 중에서 이 지고한 가르침은
탄트라의 교의(금강승)에 있나니
탄트라의 지고한 가르침은 말하네.
여러가지 요소들이 에너지 통로에 모일 때
악마의 형상을 보게 된다.
허나 마음이 창조한 환영임을 보지 못하고
실재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고 우둔한 바보라.
지난 날 나는 눈 어두운 집착에 가려
혼돈의 소굴에 방황하며
자애로운 신들과 악마들을
실재하는 존재로 여겼었네.
하지만 지존자의 은총과 축복으로
윤회계와 열반계가
존재함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음도 아님을 깨달았네.
삼라만상은 마하무드라일 뿐.
잔물결 이는 호수에 비친 달처럼
흐리고 불안하던 지난 날의 내 의식은
무명에는 제 성품이 없음을 깨달아
빛나는 수정처럼 맑고 투명해졌네.
명정성은 해처럼 밝으며
광명은 모든 형상 초월하네.
하여 무명과 혼돈은 자취 없이 사라졌네.
무지한 관념의 형상화인 악마들은
자체 성품 비어 있으나 빛나고 있네.
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가!
미라래빠는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과 진리에 대한 정견을
이와 같이 노래하였다.
미라래빠의 십만송 中
마음의 투명에 대해 그대들은 아는가?
마음은 만물을 창조하고 표현하나니
이를 깨닫지 못한 자들은
영원토록 윤회계를 방랑하리라.
깨달은 자에게 만상(萬象)은
법신(法身)으로 드러나나니
더 이상 다른 정견 찾을 필요 그에겐 없네.
그대의 마음 쉬는 법을 알고 있는가?
흘러가게 버려두는 것이 비결이라네.
구태여 하고자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으며
그 마음 평안하게 쉬도록 버려두는 것,
아기가 평화롭게 잠이 들듯이
고요한 바다에 잔물결 일지 않듯이
그리하면 밝고 찬란한 등불과 같이
그대, 밝은 깨달음 속에서 편히 쉬리라.
자만심을 팽개친 시체처럼
마음을 평화롭게 휴식하라.
흔들리지 않는 태산 처럼
굳건함 속에 그대 마음을 두어라.
마음의 본질은 온갖 그릇된 주장에서 벗어나 있기에.
- 미라래빠의 십만송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