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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오쇼 라즈니쉬-그대는 육체안에 있지만 육체는그대의 참모습이 아니다(반야심경 -2)

작성자山木|작성시간24.02.19|조회수34 목록 댓글 1

1편에 이어서....

 

 

다음과 같은 프랭크 쉬드(Frank Sheed)의 말을 음미해 보라.


"인간의 영혼은 삶의 목적과 의미를

희구하며 절규하고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여기 전화기가 있다.',

'봐라, 여기 텔레비젼이 있다!'하고 말한다.

 

이것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고있는 어린 아기에게

사탕을 주거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달래는 것과 같다.

 

급격한 발명의 물결이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갔다.

그래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잊게 만들었다."

 

 

 

현대 세계가 그대에게 제공한 모든 것은 사탕이나 장난감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사실, 그대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사랑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었다.

그대는 깨어있는 의식을 희구했으며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봐라, 여기 전화기가 있고 텔레비젼이 있다!

우리는 너를 위해 이렇게 멋진 것들을

많이 가지고 왔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잠시 그것들을

가지고 노는데 정신을 쏟는다.

하지만 곧 그대는 싫증이 나고 따분해져서

다시 새로운 장난감을 찾기 시작한다.

 

 

 

이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첫번째 칸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그대는 육체 안에 있지만 육체가 그대는 아니다.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자각하라.

그대는 육체 안에서 살아간다.

 

육체는 아름다운 거처이다.

지금 나는 육체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라고 부추키는 게 아니다.

유사 이래 소위 유심론자(spiritualist)라는 자들이 그래왔듯이

그대의 육체를 부정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단 한순간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유물론자들은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극단에 서있는 사람들은 육체가 환상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부숴라!

그래야 환상이 깨지고

그대가 실재(實在)가 될 수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입장은 반작용에 불과하다.

유물론 자체가 유심론이라는

반동(反動)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똑같은 사업을 벌이는 동업자이다.

 

육체는 아름답다. 육체는 실재한다.

육체는 삶의 권리가 있으며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육체는 신의 선물이다.

그러니 단 한순간이라도 육체에 반대하지 말라.

또한 "나는 육체일 뿐."이라고도 생각하지 말라.

그대는 육체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이다.

육체를 하나의 도약대로 이용하라.

 

 

 

두번째로 심리-신체의 사원, 스바디스탄 차크라의 세계이다.

 

프로이드 류(流)의 정신분석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스키너와 파블로프보다 다소 높은 단계이다.

프로이드는 심리학의 신비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갔다.

그는 단순히 행동주의 심리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꿈 이상을 넘어가지 못했다.

그는 시종일관 꿈을 분석하는데 그쳤다.

 

꿈은 그대 안에 환상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꿈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이다.

꿈은 의식 세계로 폭로되는 무의식 세계의 메시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꿈에 집착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꿈을 이용하되 꿈과 동일시되지는 말라. 그대는 꿈이 아니다.

 

프로이드파(派)처럼 꿈에 관해 요란을 떨 필요가 없다.

프로이드파(派)는 꿈의 세계에 전념하는 것 처럼 보인다.

꿈에 주목하라. 꿈에 대해 분명한 관점을 갖고

꿈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이해하라.

 

그러면 그대의 꿈을 분석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꿈을 분석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대의 꿈을 분석해낼 수 없다.

그대의 꿈은 그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꿈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어느 누구도 그대와 같은 꿈을 꿀 수 없다.

 

지금까지 그대와 같은 식으로 꿈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대의 꿈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누군가 그대의 꿈을 해석한다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해석일 뿐이다.

오직 그대만이 그대자신의 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실제로는 꿈을 분석할 필요도 없다.

 

꿈을 전체적으로 관찰하라.

분명한 눈으로, 주의깊은 의식으로 보라.

그러면 꿈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을 것이다.

꿈은 아주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3년, 4년, 5년, 7년 동안

정신분석을 받으러 다닐 필요가 없다.

밤마다 꿈을 꾸고 낮에는 그 꿈을 분석하기 위해

정신분석가를 찾아가는 사람은

서서히 꿈의 세계에 포위당한다.

 

 

첫번째 단계가 물라다라 차크라,

즉 육체적 차원에 사로잡혀 있듯이,

두번째 단계는 성욕에 사로잡히고 만다......

두번째의 심리-신체적 단계는 다름아닌 성(性)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단계는 모든 것을

성(性)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프로이드파(派)에게 가보라.

그들은 그대가 무엇을 하건 모든 것을

성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그들에게 성보다 높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흙 속에서 살아갈 뿐, 연꽃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연꽃을 갖고 가보라.

그들은 연꽃을 보는 즉시

그것을 진흙으로 환원시켜버릴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더러운 진흙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더러운 진흙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진흙일 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렇게 그들은 모든 것을 근원으로 환원시키고

그것만이 실재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시(詩)도 성(性)으로 전락한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섹스와 성도착증,

그리고 성적인 강박관념으로 환원된다.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예술가라고?

프로이드파(派)의 눈으로 보면 미켈란젤로의 예술은

성욕의 표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프로이드파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결론으로 치달린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켈란젤로, 괴테,바이런같은 인물이

인류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는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다해도

그 모두가 억압된 성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어쩌면 괴테는 자위행위(自慰行爲)를 하려다가 제지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위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들이 괴테가 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프로이드는 화장실 세계의 거장(巨匠)이다.

그는 화장실에 산다. 화장실이 그의 사원이다.

그의 눈으로 보면 모든 예술이 정신질환의 일종이다.

 

아름다운 시(詩)도 정신병이다.

모든 것이 성도착증(性倒錯症)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프로이드식의 정신분석이 득세한다면

세상에는 칼리다스(Kalidas)도, 셰익스피어도,

미켈란젤로도, 모짜르트도, 바그너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비정상이다.

프로이드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정신병 환자이다.

가장 위대한 사람들조차 가장 낮은 차원으로 전락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붓다도 정신병 환자에 불과하다.

붓다의 모든 말이 억압된 성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접근방식은 인간의 위대성을 추악함으로 전락시켰다.

이것을 경계하라. 붓다는 결코 환자가 아니다.

사실, 진짜 환자는 프로이드 자신이다.

붓다의 침묵, 붓다의 기쁨, 붓다의 지복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최고로 건강한 상태이다.

 

노래하고 춤추지 못하는 사람들,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

기도하지도 못하고 명상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창조적인 일이라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프로이드에게는 이런 사람들만이 정상인이다.

 

직장에 나가고, 집으로 퇴근하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그러다가 창조적인 흔적이라곤

조금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사람들만이 정상인이다.

이런 정상인들은 아주 평범하고 둔하고 시체처럼 보인다.

 

어쩌면 프로이드 자신이 비창조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창조성을 정신질환으로 비난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든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자신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

감정적인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세번째심리학적인 단계이다.

 

아들러(Adler)는

심리학의 세계에 산다.

 

권력에의 의지가 그의 세계이다.

뭔가 있어보이기는 한다.

 

에고 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럴듯한 일면이 있다.

프로이드보다는 다소 열려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프로이드가 모든 것을

성(性)으로 환원시켰듯이

 

아들러는 모든 것을

열등 컴플렉스(inferiority complex)로

돌려버린다.

 

아들러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이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하는 것은 열등감 때문이다.

깨닫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권력 투쟁(trip of power)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틀린 시각이다.

 

우리는 붓다, 그리스도, 크리슈나 같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맡기고 머리를 숙였다.

 

그들의 태도를

권력 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명의 붓다가 피어날 때

그에게는

우월감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

그는 존재계 전체에 엎드려 절한다.

 

그에게는 "나는 너보다 성스럽다."는 생각이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성스럽다.

티끌 한점까지 신성하다.

그는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우월해지기를 열망하지도 않았다.

 

붓다는 결코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왕자로 태어났다.

따라서 열등감의 문제는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위치에 있었다.

열등감을 느낄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사람이었다.

더 이상 얻을 권력도 없었고, 더 이상 달성할 부(富)도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 지상에 태어난 최고 미남자(美男子) 중의 한명이었다.

그리고 최고로 아름다운 미녀를 곁에 두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러는 어떻게 해서든지

열등감을 찾아내려고 애쓸 것이다.

그는 인간이 에고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있다고는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로이드보다 다소 높은 단계이다.

에고는 성(性)보다 높은 차원이다.

많이 높지는 않지만 다소 높은 차원이다.

 

 

 

 

네번째 단계심리 영적인 차원이다.

 

가슴의 센터인 아나하타 차크라가 여기에 속한다.

융(Jung)과 아싸기올리(Assagioli)를 비롯한 사람들이

이 영역까지 뚫고 들어갔다.

그들은 파블로프, 프로이드, 아들러보다

높은 차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더 많은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비합리적인 세계, 무의식의 세계를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성적인 세계에 국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비이성적인 세계까지 받아들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더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비합리적인 세계가 거부되지 않고 수용되었다.

여기가 현대심리학의 종점이다.

 

사다리의 네번째 칸인 것이다.

사다리 전체를 놓고 보면 네번째 칸은 정 중간 단계이다.

아래쪽으로 세 칸이 있고 위쪽으로도 세 칸이 있다.

 

현대 심리학은 아직 완전한 학문이 아니다.

중간 단계에 매달려있을 뿐이다.

따라서 현대 심리학은 아주 불안정하다.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현대심리학은 경험적이라기 보다는

가설체계(假說體系)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다섯번째영적인 단계이다.

 

이슬람교, 기독교, 힌두교 등의

거대한 조직 종교가 이 다섯번째 단계에 고착되어 있다.

그들은 영성(靈性)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모든 조직 종교가 이 차원에 머물러 있다.

 

 

 

여섯번째영성 초월의 단계이다.

 

요가를 비롯한 여타 방편들이 여기에 속한다.

조직 종교와는 거리가 먼 방편들,

교리적이기 보다는

경험적인 방편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이 개발되어 왔다.

 

이 단계에서 그대는

몸과 마음을 갖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

 

그대의 내면에 어떤 조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이 조화의 구름을 타고

일상적인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

요가는 이런 모든 방편을 포괄한다.

이것이 여섯번째 단계이다.

 

 

 

 

일곱번째초월의 단계이다.

 

탄트라, 도가(道家), 선(禪)이 여기에 해당한다.

 

붓다의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일곱번째 차원에 속한다.

반야바라밀다는 초월의 지혜를 의미한다.

 

그대가 모든 단계를 통과하고

순수한 각성 자체가 되었을 때,

순수한 주시자,

순수한 주체성(subjectivity)만이 남았을 때

비로소 이런 지혜가 찾아든다.

 

초월적 차원에 도달하지 않는 한 인간은

장난감과 사탕을 필요로 한다.

거짓된 의미들이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며칠 전 나는 미제 자동차의 광고를 보았다.

멋진 자동차 위에

'믿을만한 물건'이라는 글

귀가 씌여 있었다.

 

지금까지 인간이 이토록

저급한 차원으로 추락한 적이 없었다.

믿을만한 물건! 그대는 자동차를 믿는가?

그렇다, 사람들은 물질을 믿는다.

 

사람들은 집을 믿고,

자동차를 믿고, 은행 통장을 믿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신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캐딜락이나

링컨(Lincoln)이 버티고 있다!

 

진짜 신은 사라졌지만

인간은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영화 배우들이 신으로 군림한다.

 

 

 

역사상 인간의 의식이 이토록

낮은 차원으로 굴러떨어진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설령 그대가 간혹 신을 기억한다해도

그것은 공허한 단어에 불과하다.

그대는 괴롭거나 절망을 느끼는 경우에만 신을 사용한다.

마치 아픈 사람이 아스피린을 찾듯이 말이다.

 

소위 종교라고 불리는 것들이

그대에게 이런 식의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루에 세번씩 신을 복용하라.

그러면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고통을 느낄 때마다 신을 떠올린다.

그러나 신은 아스피린이 아니다.

신은 진통제가 아니다.


습관적으로 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직업적으로 신을 상기한다.

성직자들이 그런 부류이다.

성직자는 직업적으로 신을 떠올린다.

사실, 그는 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저 이것을 생계수단으로 삼고있을 뿐이다.

그는 신을 떠올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렇듯 습관적으로 또는 직업적으로

신을 상기하는 사람들은 있어도

깊은 사랑으로 신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불행에 빠져 있을 때

신의 이름을 부른다.

기쁨과 행복에 충만할 때에는

아무도 신을 떠올리지 않는다.

 

사실은 이런 때가 신을 기억하기에

가장 적당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즐거워할 때, 엄청난 즐거움으로 충만할 때

그대는 비로소 신과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불행할 때 그대는 신과 멀리 떨어져 있다.

불행할 때 그대는 닫혀있다.

 

그러나 행복할 때

그대는 활짝 열려서 사방으로 흘러넘친다.

이때 그대는 신과 손을 맞잡을 수 있다.

 

 

그대는 습관적으로 신을 기억한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담배처럼 일종의 습관이 되었다.

그대는 담배를 피우면서도

별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낀다.

 

아침 저녁으로 신을 기억한다해도

그대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것은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입으로만 신의 이름을 부른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심리 현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떠올리지 않으면

그대는 무엇인가 빠졌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의례적인 절차가 되었다.

 

신을 의례적인 형식으로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라.

신에 관해 전문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명성이 자자한 요기(yogi)가 있었다.

 

그는 왕과 한가지 약속을 했다.

그가 깊은 삼매경(三昧境)에 들어

1년동안 땅 속에 묻혀있을 수 있다면

왕이 그 나라에서 최고 훌륭한 말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왕은 그가 말 이야기만 나오면

사족을 못쓸만큼

지독한 애마가(愛馬家)라는 알고 있었다.

요기는 왕의 제안에 동의하고

1년동안 생매장당해 있기로 했다.

그런데 요기가 묻혀있는 동안 왕국이 망해버렸다.

요기를 파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0여 년이 지난 후,

누군가 문득 요기를 기억해냈다.
"그 요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왕이 즉시 사람들을 보내

요기가 묻혔던 자리를 파보도록 했다.

요기는 여전히 깊은 몰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예전에 약속했던 만트라(mantra)를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가 깨어났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내뱉은 첫 마디는 이 말이었다.

 


"내 말은 어디 있는가?"

 

10여 년을 땅 속에 묻혀 침묵으로 지냈지만

요기의 마음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내 말은 어디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정녕 무아지경에 빠져있었던 것일까?

그가 진정 삼매경에 들어있었던 것인가?

그가 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그는 줄곧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숙련된 전문가에 불과하다.

 

그는 숨을 멈추고 가사(假死) 상태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10년동안 그렇게 깊은 침묵 속에 있었지만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만일 그대가 기술적으로 신을 기억한다면,

직업적으로 신을 생각한다면,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신을 생각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체의 가능성은 가슴을 통해 일어난다.

 

그래서 이 경전을

'가슴의 경전(The Heart Sutra)'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깊은 사랑과 몰입

그리고 진지함을 갖고 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존재 전체를 거기에 쏟아붓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종교는

일종의 의족(義足)과 다를 바 없다.

의족에는 온기(溫氣)도 없고 생명도 없다.

 

의족은 그들이 기우뚱거리며

걷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결코 그들의 일부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날마다 의족을 몸에 부착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대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의족을 만들지 마라.

진짜 다리가 그대 안에서 자라나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대의 삶이

따스함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입가에 맴도는 거짓 미소가 아니라,

행복한 척 하는 허세와 가면이 아니라,

진짜 즐거움이 일어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여러가지 허위의 옷을 착용한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어떤 사람은 자비스러운 얼굴 표정을 만들어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넘치는 인격을 내보인다.

 

이것은 모두 의복에 불과하다.

깊은 곳에서 그들은 변함없이 똑같은 인물이다.

 

이 반야심경은 거대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가장 최초로 떠오르는 질문은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을 계속 밀고 나가야 한다.

 

그대가 최초로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으면

물라다르 차크라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인가? 너는 육체이다!

물으나마나 한 소리이다. 너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 다음에 두번째 단계는

"너는 성욕이다."하고 대답할 것이며,

 

세번째 단계는 "너는 파워 트립(power-trip)이다.

너는 에고이다."하고 말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답이 이어진다.

이것을 잊지 말라.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질문을 계속하라.

그 전에 멈추면 안된다.

만일 "너는 이것이다. 너는 저것이다."하는

대답이 나온다면 특정한 센터(center)가

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여섯 개의 센터를 통과하고

그들이 내놓은 모든 대답이 지워진 다음에는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어도

아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전적인 침묵이 있을 뿐이다.


질문 자체가 그대 안에서 메아리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도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 순간에 그대는 절대적으로 현존(現存)한다.

절대적으로 침묵한다.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저 침묵이 있을 뿐이다.

이때 기적이 일어난다.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불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제까지 얻은 모든 대답이 터무니없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물음을 던지는 일까지 터무니없게 된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 또한 사라진다.

 

질문과 대답은 공존(共存)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과 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전의 한쪽 면이 사라지면 다른 쪽 면도 존재할 수 없다.

먼저 대답이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질문이 사라진다.

 

이렇게 물음과 답이 사라질 때

그대는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다.

이것이 초월의 차원이다. 이제 그대는 안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할 수는 없다.

그대는 분명히 알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이제 그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그대의 존재 깊은 곳으로부터 그것을 안다.

그러나 이것을 언어로 옮기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실존적인 앎이다. 경전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다.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니다.

 

그대 안에서 솟아오른 앎이다.

 

이런 앎이 솟아날 때 그대는 붓다가 된다.

이때 그대는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자신이 애초부터 붓다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언제나 붓다였다.

다만 그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는 외곽을 배회하고 있었을 뿐,

자신의 존재라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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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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