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편에 이어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관세음: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이 경문은 초월의 경지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움직임이며 과정이다.
강물같은 흐름이다.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이 초월의 경지는 끝없이 전개되어 나간다.
이런 까닭에 힌두교인들은 그것을
'일천 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천(千)이라는 숫자는 무한(無限)을 의미한다.
이 숫자는 무한함의 상징이다. 꽃잎 위에 꽃잎이 피고,
또 꽃잎이 피고, 그렇게 끝도없이 피어난다.
이 여행에는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
이것은 영원한 순례의 길이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관세음: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는 저 너머 피안의 세계에서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는 거룩한 분이며 보디사트바(菩薩)라고 불려진다.
다시 여기서 산스크리트어(語)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룩한 분(holy lord)'이라는 번역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이스와라(iswara)'이다.
'이스와라'는 자신의 풍요함에 의해
절대적인 풍요의 경지에 이른 자,
풍요함이 그의 본성 자체가 된 자를 뜻한다.
아무도 그의 풍요로움을 빼앗거나 훔쳐갈 수 없다.
이 풍요로움은 상실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가진 모든 재산은 상실되고 훔쳐질 수 있다.
어느 날엔가 죽음이 찾아와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의 고유한 본질인
내면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면
죽음조차 그것을 앗아가지 못한다.
죽음은 이 다이아몬드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훔쳐내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때 그는 '이스와라'가 된다.
거룩한 분이 된다.
이때 그는 바가반(bhagavan)이 된다.
'바가반'이란 단어는 '축복받은 자'를 의미한다.
이때 그는 축복받은 자가 된다.
이제 그의 축복은 영원히 그의 것이다.
이 축복은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 축복은 자발적이다.
어떤 것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을 앗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축복은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본질 자체가 축복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보디사트바(菩薩:bodhisattva)로 불려진다.
이 말은 매우 아름다운 불교 용어이다.
보디사트바는 이미 붓다가 되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이 세상에 머무는 자를 뜻한다.
보디사트바는 기본적으로 이미 붓다가 된 자를 말한다.
그는 언제라도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다.
니르바나(涅槃)의 세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그에게는 해결할 문제가 남아있지 않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물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에 머문다.
그는 육체와 마음이라는 형상 안에 자신을 보존한다.
그는 사다리 전체의 차원을 유지한다.
그는 이미 저 너머의 세계에 이른 자이면서도
사다리 전체의 차원을 보존하고 있다.
순전히 남을 도우려는 자비심으로.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붓다가 궁극적인 니르바나(涅槃)의 문 앞에 도달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천사들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춤추며 노래하고 있었다. 한 인간이 붓다가 되는 것은
수백만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르바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그 날은 당연히 커다란 축제의 날이었다.
고대의 모든 붓다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며,
그를 환영하는 꽃이 뿌려지고 음악이 연주되었다.
그리고 사방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보기 드문 축하의 날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고대의 붓다들이 모두 합장을 하고 인사를 건네며
"왜 밖에 서 계시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오."하고 청했다.
그러나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 뒤에 오는 사람들 모두가 들어가기 전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밖에 남겠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사라져 버리고 말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저 사람들을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을 헤매며
비틀거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나 또한 수 많은 생동안 그런 식으로 헤맸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문을 닫으십시오.
저들 모두가 도착하면 문을 두드릴 것이니
그때 가서 나를 영접하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이것이 보디사트바의 경지이다.
언제라도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육체와 마음 안에 남아 있는 자,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세상 안에 남아 있는 자가 보디사트바이다.
순전히 남을 돕기 위하여.
붓다는 말한다.
"그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상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거기엔 뭔가 빠져 있다.
자비가 빠져있는 것이다."
거기에 자비 또한 있게 되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다.
붓다는 명상을 순수한 황금이라고 말한다.
황금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러나 거기에 자비가 보태지면 황금은 향기를 지니게 된다.
이때 더 높은 완성, 전혀 새로운 종류의 완성이 이루어진다.
향기를 지닌 황금이 탄생하는 것이다.
명상이라는 황금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값지다.
하지만 거기에 자비가 보태지면 명상은 향기를 갖게 된다.
자비는 붓다를 보디사트바의 경계선에 머물게 한다.
며칠 또는 몇 년동안은 그 경계선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한다.
서서히 모든 것이 저절로 사라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육체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그대는 서서히 육체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간혹 노력을 통해 육체로 돌아올
수는 있다. 노력에 의해 육체를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대는 더 이상 육체 안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
더 이상 마음 속에 거주하지 않을 때에도 가끔씩은 마음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예전처럼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더 이상 마음의 흐름 안에 있지 않다.
그대가 마음을 사용하지 않을 때 마음은
그냥 그 자리에 누워있다. 그것은 하나의 기계장치이다.
사용하지 않는 기계는 녹슬기 시작한다.
일곱 번째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얼마동안
아래의 여섯 단계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는 다시 돌아와 그것들을 이용한다.
그러나 서서히 그 단계들이 부서지고 죽어가기 시작한다.
보디사트바는 오직 단 한번의 생동안
이 세상에 머믈 수 있다. 기껏해야 한번의 생이다.
그 다음에는 사라져야 한다.
이 세상에 머물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장비들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완성의 경지에 이른 모든 이들은 몸과 마음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노력해왔다.
몸과 마음 속에 사는 사람들,
몸과 마음의 언어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은 최대한으로 노력해왔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관세음: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그 지점에서 내려다보면......
예를 들어, 나는 "그대 안의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저 너머의 차원에서 본 하나의 시각이다.
나는 그대를 잠재적인 붓다로 본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내가 그대를 텅빈 껍데기로 본다는 것이다.
그대가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텅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남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공허한 관념이다.
내면 깊은 곳의 의식(consciousness)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름다운 육체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멋있고 강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것 또한 공허한 관념이다.
에고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유식하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무의미한 생각이다.
그를 구성하는 메카니즘(mechanism)이
보유한 기억들에 의해 그는 속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 모두가 공허하다.
초월의 차원에서 볼 때,
나는 한편으로는 그대를 싹트고 있는 붓다로 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허한 껍질로 본다.
붓다는 인간이 다섯 개의 요소,
즉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텅빈 다섯 개의 '스칸다(skandha)'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에고(ego)'라고 불리는 부산물이 생성된다.
이것은 계속해서 째깍거리는 시계와 같다.
분명히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시계를 뜯고 모든 부품을 분해해서
이 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 보라.
어디에 그 소리가 있는가?
아무데서도 찾지 못할 것이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부산물이다.
그 소리는 부품들의 결합에 불과했다.
각 부품이 함께 작동하면서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의 '나'라고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다섯 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하면서
'나'라고 불리는 째깍 소리를 내고있는 것이다.
이 '나'는 텅비어있다.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거기서 어떤 실체를 찾으려고 한다면
그대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 붓다의 가장 심오한 직관(直觀)과 통찰력 중의 하나가 있다.-
삶은 공허하다.
우리가 삶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삶은 또한 충만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충만함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대는 이 공허함으로부터 충만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충만함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보면
이 충만함마저 공허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대의 충만함이 공허해 보인다.
왕이 거지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고 무지해 보인다.
짧은 이야기 한 토막:
어떤 성자가 제자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말했다.
"네가 종교적인 삶에 관해 이해한 바를 적어 보아라.
그리고 왜 그런 사상을 갖게 되었는지도 적어보아라."
제자가 물러가서 쓰기 시작했다.
1년 후 제자가 돌아와 스승에게 말했다.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지만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어쨌든 제가 그동안 애쓴 핵심 부분은
여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스승이 장문의 글을 읽어보고 제자에게 말했다.
"참으로 논리적이고 분명하구나.
하지만 너무 긴듯 하니 좀더 줄여 보도록 해라."
그래서 제자는 5년 동안 열심히 애쓴 끝에
백 장으로 줄여서 다시 가지고 왔다.
스승이 미소를 지으면서 제자를 맞았다.
그가 제자의 글을 읽어보고는 말했다.
"이젠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구나.
너의 사상에는 명료함과 힘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긴듯 하니 다시 압축해 가지고 오너라."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제자는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물러갔다.
1년 후 다시 돌아온
그가 스승에게 엎드려 절하고는
다섯 장의 기록을 내밀었다.
"이것이 제 신앙의 핵심이며 제 삶의 중심입니다.
여기까지 이른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스승이 세밀하게 그것을 읽어보고 말했다.
"이 간결함과 아름다움이 참으로 놀랍구나!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가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다듬어 보거라."
스승이 임종을 맞을 무렵,
제자가 다시 돌아와 엎드려 절하고는 한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 종이는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았다.
이 종이를 보고 스승이 제자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해주며 말했다.
"이제......이젠 너도 깨우쳤구나."
초월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은 공허하다.
그러나 그대의 시각, 그대의 신경증적인 시각에서 보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공허하다.
그대의 눈으로 보면 붓다는 공허해 보인다.
그저 순수한 공(空)일 뿐이다.
붓다가 공허해 보이는 것은
그대의 관념, 집착, 소유욕 때문이다.
실상을 보면 붓다는 가득 차 있다.
공허한 것은 그대이다.
붓다의 시각은 절대적인 경지에 가 있다.
그러나 그대의 시각은 상대적인 관점에 머문다.
이 경전은 말한다.
거룩한 분이며 보시사트바인 관세음(관세음: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수냐타(shunyata), 공(空)이 불교의 핵심이다.
반야심경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이 공(空)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것이다.
반야심경의 이 경문들에 대해 명상하라.
논리와 추론이 아니라 사랑과 몰입을 통해 명상하라.
논리와 추론을 갖고 임하면 그대는
이 경문들의 영혼을 죽이고 말 것이다.
나누고 분석하지 말라. 다만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그대의 마음을 개입시키지 말라. 마음은 장애가 될 뿐이다.
마음을 끌어들이지 않고 이 경전을 볼 수 있다면
분명한 시야가 열릴 것이다.
오늘은 이만.
(www.zen.co.kr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