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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바이론 케이티- 생각에 대하여...

작성자山木|작성시간24.02.26|조회수34 목록 댓글 2
'바이론 케이티'는 현재 서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적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자기 자신과 삶에 관한 관점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방법인 '작업(The Work)'을 창안했다.
'작업'은 네 가지 질문과 뒤바꾸기로 이루어진 자기탐구의 방법이다.
 

 

 

몇 가지 기본 원칙들


내가 ‘작업’을 좋아하는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행복을 찾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자기 안에 있는, 변하지 않는, 움직이지 않는, 늘 여기 있는, 늘 기다리는 ‘그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어떤 스승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금껏 기다린 스승은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존재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믿지 마세요”라고 종종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게 진실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진실한 것을 찾기 원합니다. 그렇지만 다음의 몇 가지 원칙들은 ‘작업’을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현실과 다투는 생각을 알아차리기

 

우리는 ‘지금 있는 현실’과 다투는 생각을 믿을 때 고통을 받습니다. 마음이 티 없이 맑을 때는 지금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실제와 다르기를 바라느니, 차라리 고양이를 개처럼 짖게 하려고 애쓰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당신을 올려다보며 울 것입니다. “야옹.” 현실이 실제와 다르기를 바라는 것은 가망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고양이를 개처럼 짖게 하려고 애쓰며 평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가 이러한 생각들을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친절해야 해”, “아이들은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해”, “이웃들은 밤에 떠들지 말아야 해”, “식품점 계산대에 늘어선 줄은 더 빨리 움직여야 해”, “남편(아내)은 내 말에 찬성해야 해”, “나는 더 날씬해야 해(더 예뻐야 해, 더 성공해야 해).” 이런 생각들은 현실이 실제와 다르기를 바라는 방식들입니다. 이 말들이 우울하게 들리나요? 맞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모두 지금 있는 현실과 다투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1986년에 참 현실로 깨어난 뒤, 사람들은 나를 바람과 친구가 된 여자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살던 바스토우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 사막 지대의 작은 읍이었는데, 다들 바람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바람을 견디다 못해 그 곳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내가 바람, 곧 현실과 친구가 된 까닭은 내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저항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실과 맞설 때 나는 시간을 백 퍼센트 잃을 뿐입니다. 바람이 불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지금!

 

처음 ‘작업’을 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과 씨름하지 않으면 무기력해질 것 같아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수동적이 될 거예요. 행동할 의욕까지 잃을 거고요.” 나는 대답 대신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그게 진실인지 정말로 알 수 있나요?” 일자리를 잃었을 때 “일자리를 잃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와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무기력하게 들리나요?

 

‘작업’은 당신이 일어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나야 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일은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생각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묵인하거나 승인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갈등과 혼란 없이 지켜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녀가 병에 걸리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그 일과 마음으로 다툰다고 해서 무슨 도움이 될까요? 그 점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멈추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있는 현실을 사랑합니다. 내가 영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현실과 다투면 나 자신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이 지금 있는 그대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과 다투면 긴장하고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마음이 편안하거나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실에 맞서기를 멈출 때 행동은 단순하게, 물 흐르듯이, 친절하게, 두려움 없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일에 머물기

 

나는 온 우주에서 세 가지 일만을 봅니다 ― 나의 일, 남의 일, 신의 일. (내게는 ‘신’이라는 말이 ‘현실’을 뜻합니다. 현실은 신입니다. 현실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통제, 당신의 통제, 모든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신의 일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는 까닭은 대부분 마음으로 자기의 일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너는 직장을 구해야 해, 네가 행복하기를 바래, 너는 시간에 맞춰 와야 해, 너는 건강해야 해”라고 생각할 때 나는 남의 일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지진, 홍수, 전쟁, 혹은 내가 언제 죽을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나는 신의 일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남의 일이나 신의 일에 간섭하고 있을 때 분리가 일어납니다. 나는 이 사실을 1986년에 깨달았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어머니의 일에 ― 예를 들어 “어머니는 나를 이해해야 해”와 같은 생각으로 ― 간섭할 때 나는 즉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고통이나 외로움을 느꼈을 때는 늘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삶을 살고 있고 나도 마음으로 당신의 삶을 살고 있다면, 여기에 있는 나의 삶은 누가 살까요? 우리는 둘 다 거기에 있습니다. 마음으로 남의 일에 간섭할 때 나는 내 삶을 살고 있지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이 왜 뜻대로 풀리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 최선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일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으로 포장해도 그것은 순전한 오만이며, 그 결과는 긴장과 걱정, 두려움입니다. 나는 내게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는가? 내가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합시다. 남을 위해 남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기 전에….

 

세 가지 일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기의 일에 머무른다면, 삶은 이제껏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혹시 이 다음에 스트레스나 불편한 마음이 느껴지거든, 지금 마음으로 누구의 일에 간섭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세요. 웃음을 터뜨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 질문을 통해서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또 이제껏 진정으로 현존한 적이 없음을, 마음으로 남의 일을 하며 살았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일단 남의 일에 간섭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면, 자기의 아름다운 자아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한동안 이렇게 실천해 보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당신의 삶은 스스로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이해로 만나기

 

우리가 믿지만 않으면 생각은 해롭지 않습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에 대한 집착입니다. 생각에 집착한다는 것은 그 생각을 진실하다고 믿고서 조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집착해 온 생각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생각이 자기라고 말하는 것을 자기라고 믿습니다. 어느 날 나는 숨쉬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숨쉬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놀랍게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는 내가 생각되어지고 있었고, 생각은 개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오늘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이미 늦습니다. 이미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저절로 일어납니다. 구름이 빈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듯, 생각은 허공에서 나와 허공으로 돌아갑니다. 생각들은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가기 위해 옵니다. 진실이라 믿고 집착하지만 않으면, 생각은 조금도 해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어내지만, 그럴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생각을 이해로 만납니다. 그러면 생각이 나를 놓아줍니다.

 

생각은 산들바람이나 나뭇잎,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습니다. 생각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을 통해서 생각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빗방울과 다툴 수 있나요? 빗방울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괴로운 생각을 이해로 만나면, 다음에 그 생각이 나타날 때는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에는 악몽이었던 생각이 이제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다음에 그 생각이 또 나타날 때는 웃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예 그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있는 현실을 사랑하는 힘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깨닫기

 

나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생각들, 잇달아 일어나는 생각들을 ‘이야기’라고 부릅니다. 이야기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해야 한다’라거나 ‘…했으면 좋았을 걸’, 또는 ‘그것은 …때문이다’라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마음속에서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나타납니다 ― 잠에서 깨어 말없이 걸어 나올 때, 웃지 않을 때, 응답전화를 하지 않을 때, 낯선 사람이 미소지을 때, 중요한 편지를 뜯으려 할 때, 가슴에서 뭔지 모를 흥분을 느낄 때, 사장이 당신을 호출할 때, 배우자가 당신에게 어떤 특정한 말투로 얘기할 때.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에게 얘기하는, 검사되거나 조사되지 않은 이론들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이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예전에 내가 동네 식당에 갔을 때였습니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한 여자가 칸막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서로 미소를 지었고, 내가 칸막이로 들어가 문을 닫자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손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목소리가 참 곱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떠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변기의 앉는 자리가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대체 저 여자는 어떻게 받침대에 온통 소변을 묻혔지? 변기 위에 서 있었나?” 그 여자가 실은 남자일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자 화장실에서 가성으로 노래하는, 여자 옷을 즐겨 입는 변태성욕자. 그 여자(그 남자)를 뒤쫓아가서 그가 변기를 얼마나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았는지 알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변기 받침대를 닦으면서 그에게 속으로 온갖 비난들을 퍼부었습니다. 나중에 변기 물을 내리자, 변기통에서 물이 솟구쳐 받침대 위까지 넘쳐흘렀습니다. 나는 웃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때에는 내 이야기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났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탐구’를 발견하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어떻게 멈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은 큰 이야기들로 자랐습니다. 큰 이야기들은 삶에 대한 주요 이론들로 자랐습니다 ― 삶이 얼마나 괴로운지, 세상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결국 나는 너무나 두렵고 우울한 나머지 침실을 떠날 수도 없었습니다.


조사하지 않은 이론으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해석하고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때 당신은 내가 ‘꿈’이라고 부르는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꿈은 괴롭게 바뀔 때가 많고, 때로는 악몽이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그런 이론에 대해 ‘작업’을 함으로써, 그 이론이 진실한지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작업’을 계속 할수록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줄어듭니다. 그런 이야기가 없다면, 당신은 누구일까요? 당신의 세계는 얼마나 많은 부분이 조사하지 않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나요? 알지 못합니다, 조사하기 전에는.

 

 

고통 뒤에 있는 생각을 찾기

 

이제껏 내가 경험한 ‘스트레스를 주는 생각’들은 모두 진실이 아닌 생각에 집착한 까닭에 일어났습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생각 뒤에는 늘 자기에게 진실하지 않은 생각이 있습니다. “바람이 계속 불면 안 된다”나 “남편은 내 말에 찬성해야 한다”와 같은 생각들. 우리는 현실과 다투는 생각을 생각하고, 그 뒤 스트레스를 주는 생각을 갖게 되고, 다음에는 그 느낌에 따라 행동하며, 그래서 더 많은 스트레스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최초 원인인 생각을 이해하는 대신 바깥 세계를 바라보며, 스트레스를 주는 느낌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또 일시적인 위안과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애쓰거나 섹스, 음식, 술, 마약, 돈 등에 기대려 합니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느낌에 쉽게 휩쓸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주는 느낌은 “당신은 지금 꿈속에 빠져 있어요”라고 말하는 친절한 자명종 같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좋습니다. 우울함과 고통, 두려움은 “지금 당신의 생각을 바라보세요. 당신은 지금 자기에게 진실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빠져 있어요”라고 말하는 선물들입니다. 진실하지 않은 이야기에 따라 살면 언제나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자명종을 존중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 바깥을 향함으로써 그런 느낌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보통은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느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느낌이 바로, 당신이 생각에 빠져 있음을 깨우쳐 주는 자명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작업’을 통해 진실하지 않은 생각을 조사할 때마다, 당신은 다시 본래의 참 자기로 돌아오게 됩니다. 자신을 본래의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라고 믿거나 행복이 아닌 다른 이야기에 따라 살면 상처를 받게 됩니다.

 

당신이 불 속에 손을 넣을 경우, 다른 사람이 손을 치우라고 말해 주어야 하나요? 당신이 결정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불에 데자마자 손이 움직입니다. 당신은 손에게 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손이 스스로 움직입니다. 이처럼, 진실이 아닌 생각은 고통을 일으킨다는 것을 이해하면, 그 생각으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그 생각이 있기 전에는 고통이 없었습니다. 그 생각이 고통을 일으킵니다. 그 생각이 진실하지 않음을 깨달으면, 역시 고통이 없습니다. ‘작업’은 이런 식으로 작용합니다. “그 생각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불 속에 있는 손. “그 생각이 없다면, 나는 누구일 것인가?” 불길 밖에 있는. 우리는 생각을 조사하고, 불 속에 있는 손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원래 위치로 돌아갑니다. 누구에게서 지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그 생각이 다시 올라오면, 마음은 저절로 불에서 떠납니다. 우리는 ‘작업’을 통해서 내적인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고통이 스스로 풀리기 시작합니다.

 

 

탐구

 

나는 ‘탐구’를 ‘작업’과 같은 뜻으로 씁니다. ‘탐구’하거나 ‘조사’하는 것은 생각이나 이야기에 네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뒤바꾸는 것입니다(다음 장에서 설명됩니다). 탐구는, 혼돈으로 가득 차 보이는 세상에서, 혼란을 끝내고 내면의 평화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탐구를 통해 우리는 이제껏 찾고자 했던 모든 대답이 늘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탐구는 하나의 기법 이상입니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존재의 참 모습을 되살립니다. 한동안 탐구를 계속 하면, 탐구는 내면에서 스스로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생각들이 나타날 때마다 탐구도 나타납니다. 생각과 균형을 이루는 짝으로서…. 당신은 이 내면의 동반 관계를 통해 명쾌할 수 있으며,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친절하고 열려 있고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귀기울이는 경청자로서, 자기 자신에게 배우는 학생으로서,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선한 친구로서…. 때가 되면 깨달음은 저절로 경험됩니다. 삶의 방식이 됩니다. 기쁨과 평화는 마음 구석구석에, 모든 관계와 경험에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스며듭니다. 그 과정은 아주 미묘해서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아는 것은 오직, 전에는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출처: www.z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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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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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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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포카리 | 작성시간 24.08.05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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