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적 생활: 우주 속의 인간』
Man in the universe
우주 속의 인간
The soul of man, a traveler, wanders in this cycle of Brahman, huge, a totality of lives, a totality of states, thinking itself different from the Impeller of the journey.
Accepted by Him, it attains its goal of Immortality.
~ Swetaswatara Upanishad
인간의 영혼은 여행자로, 거대하고 생명의 총체이며
상황의 총체인 브라만의 순환 속에 방황하며,
자신을 여행의 유발자와 구별한다.
브라만이 받아들이면 불멸의 목적에 이른다.
~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The progressive revelation of a great, a transcendent, a luminous Reality with the multitudinous relativities of this world that we see and those other worlds that we do not see as means and material, condition and field, this would seem then to be the meaning of the universe,—since meaning and aim it has and is neither a purposeless illusion nor a fortuitous accident.
우리가 보는 이 세상과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다른 세상의
수많은 상대성을 가진 위대하고, 초월적이며,
빛나는 본질에 대한 점진적인 계시에서
수단과 물질, 조건과 영역이 우주의 의미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이 가진 의미와 목적이 무의미한 환상이나
뜻밖의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For the same reasoning which leads us to conclude that world-existence is not a deceptive trick of Mind, justifies equally the certainty that it is no blindly and helplessly self-existent mass of separate phenomenal existences clinging together and struggling together as best they can in their orbit through eternity, no tremendous self-creation and self-impulsion of an ignorant Force without any secret Intelligence within aware of its starting-point and its goal and guiding its process and its motion.
세계의 존재가 정신의 기만적인 속임수가 아니라고 결론 짓게 하는 동일한 추론이, 맹목적이고 무력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분리된 현상적인 존재들의 덩어리가, 그들의 궤도에서 영원히 서로 달라붙고 서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도 동등하게 정당화한다.
시작점과 목표를 인식하고 그 과정과 움직임을 인도하는 어떤 숨겨진 지성도 없이 무지한 힘의 엄청난 자기 창조와 자기 추진력은 없다.
An existence, wholly self-aware and therefore entirely master of itself, possesses the phenomenal being in which it is involved, realises itself in form, unfolds itself in the individual.
한 존재가 완전히 자신을 인식하고, 따라서 완전히 자신을 지배하며, 자신이 관여한 현상적 존재를 소유하며 형상으로 자신을 깨닫고 개인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That luminous Emergence is the dawn which the Aryan forefathers worshipped. Its fulfilled perfection is that highest step of the world-pervading Vishnu which they beheld as if an eye of vision extended in the purest heavens of the Mind.
그 빛나는 출현이 아리안의 선조들이 숭배했던 새벽이다.
그 완성된 완전함은 비슈누로 충만한 세상의 가장 높은 단계이며, 선조는 마음의 가장 순수한 천국에서 눈이 확장된 것처럼 그것을 보았다.
For it exists already as an all-revealing and all-guiding Truth of things which watches over the world and attracts mortal man, first without the knowledge of his conscious mind, by the general march of Nature, but at last consciously by a progressive awakening and self-enlargement, to his divine ascension.
그것은 세상을 감시하고, 인간을 매혹하는 사물의 진리를 모두 드러내고 모두 인도하며, 이미 존재한다. 처음에는 의식적인 마음의 지식 없이 본성의 일반적인 행렬에 의해서, 그러나 마침내는 점진적인 각성과 자기 확대에 의해서 신적 상승에 이른다.
The ascent to the divine Life is the human journey, the Work of works, the acceptable Sacrifice. This alone is man’s real business in the world and the justification of his existence, without which he would be only an insect crawling among other ephemeral insects on a speck of surface mud and water which has managed to form itself amid the appalling immensities of the physical universe.
신적 생활로의 상승은 인간의 여정이며, 해야 할 일 중의 일,
환영할 희생이다.
이것만이 이 세상에서 인간의 진정한 소명이자 존재의 정당성이며, 이것이 없다면 인간은 물질적 우주의 끔찍한 광대함 속에서
간신히 형성된 지표의 진흙과 물의 거품에 있는 하루살이들 사이를 기어 다니는 벌레일 뿐이다.
This Truth of things that has to emerge out of the phenomenal world’s contradictions is declared to be an infinite Bliss and self-conscious Existence, the same everywhere, in all things, in all times and beyond Time, and aware of itself behind all these phenomena by whose intensest vibrations of activity or by whose largest totality it can never be entirely expressed or in any way limited; for it is self-existent and does not depend for its being upon its manifestations. They represent it, but do not exhaust it; point to it, but do not reveal it. It is revealed only to itself within their forms.
현상계의 모순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이 사물의 진리는 무한한 지복과 자기 인식의 존재로 선언되며, 모든 곳과 모든 것, 모든 시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같으며, 이 모든 현상 이면의 자신을 자각한다.
그것은 행위의 가장 강렬한 진동이나 가장 큰 총체로도 절대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어떻게도 제한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며 자신의 현신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나타내지만 고갈시키지 않고, 가리키지만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형상 안에서 오직 자신에게만 드러낸다.
The conscious existence involved in the form comes, as it evolves, to know itself by intuition, by self-vision, by self-experience. It becomes itself in the world by knowing itself; it knows itself by becoming itself.
형상과 관련된 의식적 존재는 진화하면서 직관과 자기 관찰,
자기 체험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자신을 앎으로써 세상에서 자신이 된다.
자신이 됨으로써 자신을 알게 된다.
Thus possessed of itself inwardly, it imparts also to its forms and modes the conscious delight of Sachchidananda. This becoming of the infinite Bliss-Existence-Consciousness in mind and life and body,—for independent of them it exists eternally,—is the transfiguration intended and the utility of individual existence. Through the individual it manifests in relation even as of itself it exists in identity.
따라서 내적으로 자신을 소유하면서 삭치다난다(존재, 의식, 지복)의 의식적 기쁨을 형상과 형태에 나누어준다. 정신과 생명과 몸에 무한한 지복, 존재, 의식이 생기면서 그것들과 독립적으로 영원히 존재하기에, 이것은 의도한 변형이며 개별 존재의 효용이다.
개인을 통하여 그것은 자신을 관계에서 드러내고 독자성 안에도 존재한다.
The Unknowable knowing itself as Sachchidananda is the one supreme affirmation of Vedanta; it contains all the others or on it they depend. This is the one veritable experience that remains when all appearances have been accounted for negatively by the elimination of their shapes and coverings or positively by the reduction of their names and forms to the constant truth that they contain.
불가지한 것을 아는 삭치다난다(존재, 의식, 지복)은 베단타(우파니샤드의 교리에 기초한 힌두 철학)에서 유일한 최고의 확신이며,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거나 모두 그것에 의존한다.
이것은 모든 외형에서 모양과 껍데기를 없앰으로 부정적으로
설명하거나 이름과 형상에서 그것이 간직한 진리를 축소하면서 긍정적으로 설명할 때 남아 있는 유일한 진실한 경험이다.
For fulfilment of life or for transcendence of life, and whether purity, calm and freedom in the spirit be our aim or puissance, joy and perfection, Sachchidananda is the unknown, omnipresent, indispensable term for which the human consciousness, whether in knowledge and sentiment or in sensation and action, is eternally seeking.
삶의 완성이나 삶의 초월을 위해 영의 순결, 고요함, 자유가 우리의 목표이든, 영향력과 기쁨 완전함과 삭치다난다(존재, 의식, 지복)가 우리의 목표이든, 이들은 인간 의식으로 알 수 없는 무소부재하고 불가결한 용어이며, 지식과 감정으로든 감각과 행동으로든 영원을 추구한다.
The universe and the individual are the two essential appearances into which the Unknowable descends and through which it has to be approached; for other intermediate collectivities are born only of their interaction. This descent of the supreme Reality is in its nature a self-concealing; and in the descent there are successive levels, in the concealing successive veils.
우주와 개인은 미지의 것이 하강하며 그것을 통해 접근해야 하는 두 개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다른 중간 집단은 오직 그들의 상호 작용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고한 본질의 이런 하강은 성질상 자기 은폐이다.
하강에는 연속적인 베일을 감추는 연속된 단계가 있다.
Necessarily, the revelation takes the form of an ascent; and necessarily also the ascent and the revelation are both progressive. For each successive level in the descent of the Divine is to man a stage in an ascension; each veil that hides the unknown God becomes for the God-lover and God-seeker an instrument of His unveiling.
필연적으로 계시는 상승의 형태를 취한다. 필연적으로 상승과 계시는 또한 모두 점진적이다. 신의 하강에서 각각의 연속적인 등급은 인간이 상승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신을 숨기는 각각의 베일은 신을 사랑하는 자와 신을 찾는 이에게 신의 베일을 걷는 도구가 된다.
Out of the rhythmic slumber of material Nature unconscious of the Soul and the Idea that maintain the ordered activities of her energy even in her dumb and mighty material trance, the world struggles into the more quick, varied and disordered rhythm of Life labouring on the verges of self-consciousness.
물질적인 본성의 주기적 수면에서 영혼과 이데아의 무의식이
둔하지만 강력한 물질적인 황홀경 속에서도 에너지의 질서 있는 활동을 유지하며, 세상은 자의식의 경계에서 일하는 보다 빠르고 다양하며 무질서한 생명의 리듬 속으로 나아간다.
Out of Life it struggles upward into Mind in which the unit becomes awake to itself and its world, and in that awakening the universe gains the leverage it required for its supreme work, it gains self-conscious individuality. But Mind takes up the work to continue, not to complete it. It is a labourer of acute but limited intelligence who takes the confused materials offered by Life and, having improved, adapted, varied, classified according to its power, hands them over to the supreme Artist of our divine manhood.
생명에서 나와 마음으로 올라가려고 분투하며, 마음 안에서 단위 자체와 그 세계가 깨어나게 되며, 그 각성에서 우주는 최고 작업에 필요한 수단을 얻고 자신을 인식하는 개별성을 얻는다.
그러나 마음은 완성이 아니라 계속하기 위해 일한다.
마음은 예리하지만 제한된 지성을 가진 노동자로, 생명이 제공하는 혼란한 물질을 취하여 그 힘에 따라 개선하고 조정하고 다양화하고 분류하면서 우리의 인격화한 신이란 최고 예술가에게 그것을 건네준다.
That Artist dwells in Supermind; for Supermind is Superman. Therefore our world has yet to climb beyond Mind to a higher principle, a higher status, a higher dynamism in which universe and individual become aware of and possess that which they both are and therefore stand explained to each other, in harmony with each other, unified.
그 예술가는 초의식에 살며, 초의식은 초인이다. 따라서 우리 세상은 이제부터 마음을 초월하여 더 높은 원리, 더 높은 단계, 더 높은 힘으로 올라가야 하며, 우주와 개인이 있음을 인식하고 그 둘을
소유하므로 서로를 밝혀주고 둘이 조화 속에 합일하게 한다.
The disorders of life and mind cease by discerning the secret of a more perfect order than the physical. Matter below life and mind contains in itself the balance between a perfect poise of tranquillity and the action of an immeasurable energy, but does not possess that which it contains.
생명과 마음의 혼란은 육체적인 것보다 더 완전한 질서의 비밀을 알게 되면 사라진다. 생명과 마음보다 낮은 물질은 그 자체에 고요함의 완전한 평형과 무한한 에너지의 작용 사이의 균형을 포함하지만 그 균형을 소유하지는 않는다.
Its peace wears the dull mask of an obscure inertia, a sleep of unconsciousness or rather of a drugged and imprisoned consciousness. Driven by a force which is its real self but whose sense it cannot yet seize nor share, it has not the awakened joy of its own harmonious energies.
그 평화는 모호한 게으름, 무의식의 잠이나 오히려 약에 취해 갇힌 의식이란 흐릿한 가면을 쓰고 있다. 진아이지만 아직 감각을 잡거나 나눌 수 없는 힘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조화로운 에너지에서 깨어난 기쁨을 갖지 못한다.
Life and mind awaken to the sense of this want in the form of a striving and seeking ignorance and a troubled and baffled desire which are the first steps towards self-knowledge and self-fulfilment.
생명과 마음은 무지와 곤란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을 얻으려고 애쓰고 찾는 형태로 이러한 욕구의 감각을 일깨우는데,
이것은 자아 인식과 자아실현을 향한 첫걸음이다.
But where then is the kingdom of their self-fulfilling? It comes to them by the exceeding of themselves. Beyond life and mind we recover consciously in its divine truth that which the balance of material Nature grossly represented,—a tranquillity which is neither inertia nor a sealed trance of consciousness but the concentration of an absolute force and an absolute self-awareness, and an action of immeasurable energy which is at the same time an out-thrilling of ineffable bliss because its every act is the expression, not of a want and an ignorant straining, but of an absolute peace and self-mastery.
그러면 그들의 자아실현의 왕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자신을 초월해야 온다. 생명과 마음을 넘어 우리는 물질적 본성의 균형이 전부 표현된 신성한 진리 속에서 의식적으로 회복한다. 고요함은 게으름도 의식의 봉인된 황홀경도 아니며, 절대적인 힘과 절대적인 자아 인식의 집중이며, 무한한 에너지의 활동인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의 떨림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고요함의 모든 활동은 결핍과 무지한 압박이 아니라
절대적인 평화와 극기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In that attainment our ignorance realises the light of which it was a darkened or a partial reflection; our desires cease in the plenitude and fulfilment towards which even in their most brute material forms they were an obscure and fallen aspiration.
그런 평화를 얻으면 우리의 무지는 어둠이 되거나 부분적으로 반사된 빛을 깨닫고, 우리의 욕망은 심지어 가장 무거운 물질적 형태 안에서도 충만함과 성취 속에서 사라지고 모호하고 죽은 열망이 된다.
The universe and the individual are necessary to each other in their ascent. Always indeed they exist for each other and profit by each other. Universe is a diffusion of the divine All in infinite Space and Time, the individual its concentration within limits of Space and Time. Universe seeks in infinite extension the divine totality it feels itself to be but cannot entirely realise; for in extension existence drives at a pluralistic sum of itself which can neither be the primal nor the final unit, but only a recurring decimal without end or beginning. Therefore it creates in itself a self-conscious concentration of the All through which it can aspire.
우주와 개인은 상승 과정에서 서로에게 필요하다. 실제로 항상 그들은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서로 이익을 얻는다. 우주는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모든 신성의 확산이며, 개인은 시공간의 한계 안에서 그 집중이다. 우주는 무한한 확장에서 신적 전체성을 찾고, 자신을 느끼지만 완전히 인식할 수는 없다. 확장 속에서 존재는 최초의 단위도 최종 단위도 될 수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소수일 뿐인 자신의 다원적 합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 안에서 자신이 갈망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모든 것의 자기인식의 집합물을 창조한다.
In the conscious individual Prakriti turns back to perceive Purusha, World seeks after Self; God having entirely become Nature, Nature seeks to become progressively God.
인식하는 개인 안에서 프라크리티(본질)는 푸루샤(영)의 인식을 위해 돌아가고, 세상은 진아를 찾고, 신은 온전한 본질이 되고,
본질은 점진적으로 신이 되려고 한다.
On the other hand, it is by means of the universe that the individual is impelled to realise himself. Not only is it his foundation, his means, his field, the stuff of the divine Work; but also, since the concentration of the universal Life which he is takes place within limits and is not like the intensive unity of Brahman free from all conception of bound and term, he must necessarily universalise and impersonalise himself in order to manifest the divine All which is his reality.
다른 한편으로 개인은 우주를 통해서 자신을 깨닫도록 강요 받는다. 그것은 그의 기반이며, 수단, 영역이며, 신성한 작업의 재료일 뿐 아니라 그가 있는 우주적 생명의 집중이 한계 내에서 일어나고, 모든 속박과 기간의 개념에서 벗어난 브라만(궁극적 실재)의 강력한 통일성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실재인 신성한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자신을 보편화하고 비인격화해야 한다.
Yet is he called upon to preserve, even when he most extends himself in universality of consciousness, a mysterious transcendent something of which his sense of personality gives him an obscure and egoistic representation. Otherwise he has missed his goal, the problem set to him has not been solved, the divine work for which he accepted birth has not been done.
의식의 보편성 안에서 가장 확장할 때조차도 개인은 여전히 자신의 개별적 감각이 모호하고, 이기적인 표상을 제공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보존하도록 요청 받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목표를 놓쳤고 그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태어나면서 받아들인 신성한 작업도 마치지 못했다.
The universe comes to the individual as Life,—a dynamism the entire secret of which he has to master and a mass of colliding results, a whirl of potential energies out of which he has to disengage some supreme order and some yet unrealised harmony. This is after all the real sense of man’s progress. It is not merely a restatement in slightly different terms of what physical Nature has already accomplished. Nor can the ideal of human life be simply the animal repeated on a higher scale of mentality. Otherwise, any system or order which assured a tolerable well-being and a moderate mental satisfaction would have stayed our advance.
우주는 개인에게 생명으로 다가온다. 즉 개인이 정복해야 하는
완전한 비밀의 역학이자 충돌한 결과의 집합체이며, 어떤 최고의 질서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조화에서 분리해야 하는 잠재적 에너지의 소용돌이이다. 이것이 결국 인간에게 진보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는 단지 물질적 본성이 이미 성취한 것을 약간 다른 용어로 다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라면 견딜 수 있는 행복과 적절한 정신적 만족을 보장하는 어떤 체계나 질서가 우리의 진보를 막았을 것이다.
The animal is satisfied with a modicum of necessity; the gods are content with their splendours. But man cannot rest permanently until he reaches some highest good.
He is the greatest of living beings because he is the most discontented, because he feels most the pressure of limitations. He alone, perhaps, is capable of being seized by the divine frenzy for a remote ideal.
동물은 약간의 필수품에 만족하고 신들은 자신의 영광에 만족한다. 하지만 인간은 최고의 선에 도달할 때까지 영원히 쉴 수 없다. 인간은 가장 불만족하며 한계의 압박을 가장 많이 느끼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어쩌면 오직 인간만 멀리 떨어진 이상을
향한 신성한 광기에 사로잡힐 수 있다.
To the Life-Spirit, therefore, the individual in whom its potentialities centre is pre-eminently Man, the Purusha. It is the Son of Man who is supremely capable of incarnating God. This Man is the Manu, the thinker, the Manomaya Purusha, mental person or soul in mind of the ancient sages. No mere superior mammal is he, but a conceptive soul basing itself on the animal body in Matter. He is conscious Name or Numen accepting and utilising form as a medium through which Person can deal with substance. The animal life emerging out of Matter is only the inferior term of his existence. The life of thought, feeling, will, conscious impulsion, that which we name in its totality Mind, that which strives to seize upon Matter and its vital energies and subject them to the law of its own progressive transformation, is the middle term in which he takes his effectual station. But there is equally a supreme term which Mind in man searches after so that having found he may affirm it in his mental and bodily existence. This practical affirmation of something essentially superior to his present self is the basis of the divine life in the human be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