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Now, And Here
Talks given from 28/10/69 to 31/10/69
Original in Hindi
Year published: 1994
Chapter 1
Chapter title: No Bigger Lie Than Death
28 October 1969 pm in Meditation Camp at Dwarka, Gurujat, India
제1장
죽음은 가장 큰 거짓말이다.
We become free from that which we have known.
We also triumph over that which we have known.
Our failure and defeat are only because of our ignorance.
앎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된다.
또한 우리는 앎으로서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의 실패와 패배는
오로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다.
If the shell, the body, and the kernel, the consciousness, separate at this very instant, death is finished.
With the creation of that distance, you come to know that the shell and the kernel are two separate things -- that you will continue to survive in spite of the breaking of the shell, that there is no question of you breaking, of you disappearing.
In that state, even though death will occur, it cannot penetrate inside you -- it will occur outside you.
It means only that which you are not will die.
That which you are will survive.
껍데기에 불과한 몸과 진짜 알맹이인 의식이 분리되면,
바로 그 순간, 죽음이라는 것은 사라진다.
(몸과 의식 사이에) 이런 거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껍질과 알맹이가 분리될 수 있는 것임을 그대는 알게 된다.
껍질이 부서지더라도 그대는 계속 살아남는다는 것과
그대는 부서지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비록 죽음이 일어날지라도 죽음은 그대 안으로 침투할 수 없다. 죽음은 그대의 영역 바깥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오직 그대가 아닌 것만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인 것은 살아남는다.
So, the first thing I say to you is that as long as you keep running away from death you will continue to be defeated by it -- and the day you stand up and encounter death, that very day death will leave you,
but you will remain.
그러므로 내가 말할 첫 번째는 그대가 죽음으로부터 계속 도망가는 동안에는 그대는 죽음에게 계속 패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똑바로 서서 죽음을 만나는 그날, 바로 그날 죽음은 그대를 떠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Hence it is important we enter death voluntarily. If a person sees death once he becomes free from it, he triumphs over death. In fact, it is meaningless to call him victorious because there is nothing to win -- then death becomes false; then death simply doesn't exist.
이런 이유로 우리가 자원하여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죽음을 본다면 그는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죽음에 승리한다. 사실 그가 승리했다고 부르는 것도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승리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음은 거짓이 되고 단순히 존재하지 않게 된다.
One neither has to be free from death nor does one have to triumph over it. One needs to know death. The very knowing it become freedom, the knowing itself becomes the victory. That's why I stated earlier that knowing is power, that knowing is freedom, that knowing is victory. Knowing death causes it to dissolve; then suddenly, for the first time, we become connected with life.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거나 승리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알 필요만 있다. 죽음을 아는 것 자체가 해방이 되고 승리가 된다.
이것이 이전에 내가 아는 것이 힘이고 자유며 승리라고 말한 이유다.
죽음을 아는 것으로 인하여 죽음은 용해되어 사라진다.
그러면 갑자기 생전 처음으로 우리는 생명(삶)과 연결된다.
If you were not to become frightened of the body and continued your journey inside, knowing that the body is a garment too, then you would certainly come across that one who sits inside, that one everyone is desirous of meeting.
만약 그대가 육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그대의 내면으로의 여행을 이어가면, 육체 역시 하나의 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러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이 만나기를 그토록 갈망하는 바로 그(신, 참나)를 분명히 만날 것이다.
How interesting it is that the wall is made of the body and the divine is seated graciously inside. The wall is made of matter and inside is the divine, the consciousness seated in glory. These are contrary things indeed -- the wall of matter and the divinity of life. If you understand rightly, the wall is made of death and the divine is made of life.
육체로 만들어진 벽 내면에 신이 우아하게 앉아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재미있는가! 물체로 만들어진 벽 내면에 신이 존재한다.
의식이 영광스럽게 앉아 있다. 이들은 진짜 서로 반대되는 물건들이다. 물체의 벽과 생명의 신은. 만약 그대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벽은 재질이 죽음이고 신은 재질이 생명이다.
You must have understood my point of view by now: we have to reach a point within, deep inside, where there is no possibility of dying. We have to drop the whole outer circumference, as happens in death. In death the body drops, feelings drop, thoughts drop, friendship drops, enmity drops -- everything drops. The entire external world departs -- only we remain, only the self remains, only the consciousness remains aloof. In meditation too, we have to drop everything and die leaving only the observer, the witness within.
그대는 바로 지금 내 관점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 우리는 내면 깊숙이 공존하는 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죽음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 지점에. 죽음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때 발생하는 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체 모든 외부의 피상적인 겉모양들을 버려야 한다. 죽음에서는 육체가 버려지고, 감정이 버려지고, 생각이 버려지고, 친구관계가 버려지고, 원한이 버려지고, 모든 것이 버려진다. 외면적 세계 전체가 완전히 떠나간다.
오로지 우리만이, 나 자신만이, 의식만이 (피상적인 것들로부터) 냉담하게 외따로 떨어져 남는다. 명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죽어야 한다. 오직 관찰자, 내면적인 목격자만 남기고 말이다.
Following a person's death we make a grave and call it a samadhi. But this samadhi is made by others. If we can make our own samadhi before others make it, then we have created the very phenomenon we are longing for.
Others will have the occasion to make our grave for certain, but we may perhaps lose the opportunity of creating our own samadhi.
If we can create our own samadhi, then, in that state, only the body will die and there will be no question of our consciousness dying. We have never died, nor can we ever die. No one has ever died, nor can anyone ever die. To know this, however, we will have to descend all the steps of death.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무덤을 만들고 그것을 ‘사마디’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사마디는 다른 이들이 만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이들이 만들기 전에 우리 자신의 사마디를 만들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토록 갈망하는 바로 그 현상을 만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우리의 사마디를 분명히 만들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기회를 잃는 것이다. 만약 우리 자신의 무덤을 창조할 수 있다면, 그 상태에서는 오직 육체가 죽을 것이지만 의식의 죽음은 전혀 불가능하다. 우리는 죽은 적이 없고, 영원히 죽을 수도 없다. 아무도 죽은 적이 없고, 영원히 죽을 수조차 없다. 그러나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죽음의 모든 단계들을 따라 내려가야만 한다.(육체가 죽기 이전에 미리 의도적이면서 자발적으로)
Slowly, at one point, the breath comes to rest. Even if it comes to rest just for a moment, then in that moment one can see an infinite distance between the soul and the body -- in that very moment the distance is seen.
천천히, 한 지점에서, 호흡이 휴식한다. 비록 그 휴식이 단 한 순간일지라도, 그 순간 영혼과 육체 사이의 무궁한 거리를 볼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무궁한 거리가 보여 진다.
When the breath pauses for a moment, exactly right in the middle, then in that moment a lightning strikes within one's entire being and it becomes apparent that the body is separate and that you are separate -- then death has happened.
호흡이 멈추는 그 순간, 바로 그 한가운데서, 전 존재와 더불어 벼락이 내려친다. 그리고 나와 육체가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된다. 죽음이 일어난 것이다.(그리고 동시에 죽음이 사라졌다.)
Chapter 2
Chapter title: Seeing Life as a Dream
29 October 1969 am in Meditation Camp at Dwarka, Gujarat, India
제2장
삶을 꿈으로 보다.
For example, you have a headache. At one and the same time you become aware and begin to feel that you have a headache, not that the head is in pain. So one will have to experiment on the little headache and learn to feel that, "The pain is in the head and I am aware of it.“
예컨대, 두통이 있다. 그대는 그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대에게 두통이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머리가 아프다고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작은 두통을 통하여 “머리가 아픈 것이고 나는 그것을 의식한다.”라고 느끼는 법을 배우는 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
He would say, "Ram was walking on the street and some people began swearing at him. We had a belly laugh and said, 'How do you like the swearing, Ram? If you seek honor, you are bound to meet with insult.'" When people asked, "Who are you talking about, which Ram?" he would point to himself.
그는 말하곤 했다. “람이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고는 말했다.
람, 저런 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만약 네가 명예를 추구한다면 너는 모욕과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다네.”
사람들이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 어떤 람에 대해서 말하는 겁니까?” 그는 자신을 가리키곤 했다.
The fundamental purpose of fasting is to experience that, "Hunger is there, but it is far away from me. The body is hungry, 'I' am not.“
Only the body stays hungry and I know it. I simply remain a knower. Then the meaning of fasting becomes very profound; then it does not mean merely remaining hungry. fasting means residing closer and closer. Closer to what?
It means coming closer to the self by creating a distance from the body.
단식의 근본 목적은 다음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배고픔이 저기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육체는 배고프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오로지 몸이 배고픔에 머물러 있고 나는 그것을 안다. 나는 단순히 아는 자로 남아 존재한다. 그러면 단식의 의미는 매우 심오해진다. 단식은 단순히 배고픔만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식은 점점 더 가까이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무엇에 대하여? 단식은 육체로부터의 거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참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됨을 의미한다.
Thus a misery can be invited in order to experience the disassociation of consciousness from the physical plane. Miseries come uninvited anyway. If, during the uninvited misery, one can maintain the awareness that "I am separate from my suffering" then the suffering becomes a sadhana, a spiritual discipline. One will have to continue this sadhana even with happiness which has come on its own.
고통과 비참함과 슬픔은 물질적 차원으로부터 의식을 분별해 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초대되어 질 수 있다.
불행은 초대받지 않아도 어쨌든 온다. 초대받지 않은 불행이 머무는 동안, 만약 “나는 불행과 분리되어 있다.”라는 자각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은 ‘사드하나’ 즉 하나의 영적 수행이 된다.
저절로 찾아온 행복에 대해서도 같은 ‘사드하나’가 유지되어야 한다.
We can never fully identify ourselves with anything we invite upon ourselves. The very knowledge that it is an invited thing creates the distance. The guest who comes to your home does not belong there -- he is a guest. Similarly, when we invite suffering as our guest, it is already something separate from us.
우리가 우리에게 초대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결코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것이 초대되어진 것이라는 바로 그 앎이 거리를 만든다. 그대의 집에 온 손님은 그대의 집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손님이다. 비슷하게, 우리가 손님으로 고통을 초대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와 떨어져 있는 무엇이다.
You will see my body being released now, but I have been seeing for a long time now that the body has dropped and still I exist. The links with the body have all been broken and yet, inside, I still exist.
Now only the body will fall -- there is no way for me to fall down.“
이제 그대는 내 육체가 풀려서 흩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육체는 떨어져 나갔고 그래도 여전히 나는 존재함을 보아 왔다. 육체와의 연결점들이 모두 부서진다고 하여도 여전히 나는 내면적으로 존재한다.
지금 오로지 육체만이 쓰러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쓰러질 방법은 없다.
If a person prepares himself fully, then death becomes a wonderful experience. There is no other phenomenon more valuable than this, because what is revealed at the time of death can never be known otherwise. Then death looks like a friend, for only at the occurrence of death can we experience that we are a living organism -- not before that.
만약 스스로 충분히 준비한다면, 죽음은 엄청나게 멋진 경험이 된다.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현상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알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죽음은 친구처럼 보이고 오직 죽음이 일어날 때만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있는 조직임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아니다.
when, in its full form, death surrounds us from all sides, at that moment the very center of life manifests in all its glory
온갖 형태로 죽음이 우리를 모든 면에서 완전히 에워쌀 때,
바로 그 순간 생명의 핵심이 온갖 영광으로서 드러난다.
Meditation is an experiment in how one attains to a gradual, voluntary death. It is an experiment in how one moves within and then leaves the body. If one meditates throughout his life, he will attain to total meditation at the moment of death.
명상은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점진적이고도 자발적으로 죽음에 접근해 갈 수 있는가 하는 실험이다. 명상은 어떻게 내면으로 이동해 들어가서 육체를 떠날 수 있는가 하는 실험이다.
평생을 통해 명상을 했다면 그는 죽음의 순간에 완전한 명상에 도달할 것이다.
Only one more birth is possible for one who has died in a conscious state. There is no other birth possible for him after that -- because one who has experienced what birth is, what death is and what life is, attains liberation.
의식적 상태에서 죽는 이에게는 오직 한 번의 탄생만이 가능하다. 그 이후의 출생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태어남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은 자유를 성취했기 때문이다.
One who has taken birth in awareness, we have called him avatara, tirthankara, Buddha, Jesus, Krishna. And the thing that distinguishes them from the rest of us is awareness. They are awakened and we are
asleep. Having taken conscious birth, this becomes their final journey on earth.
의식을 잃지 않고 출생한 사람을 화신, 티르탕카라, 붓다, 예수, 크리슈나라고 부른다.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 것은 자각이다.
그들은 깨어 있고 우리는 잠들어 있다. 의식적인 출생은 지구에서의 그들의 마지막 여행이 된다.
Watch that which you have been identifying your self with all along being destroyed totally. Watch it being reduced to ashes for certain, so that you may remember in your next birth who you are.
그대가 줄곧 그대 자신으로 동일시해 온 그것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라. 그것이 확실하게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라,
그래서 다음 번 출생 때 그대가 누구인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There are people who have doubts about God, there are others who have doubts about the soul, but you may never have come across a man who has doubts about death. It is inevitable -- it is sure to come; it is already on its way. It is approaching closer and closer every moment.
We can utilize the moments which are available before death for our awakening. Meditation is a technique to that effect. My effort in these three days will be to help you understand that meditation is the technique for that very awakening.
신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있지만 죽음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은 절대로 없다. 죽음은 불가피하며 반드시 오고, 이미 오고 있는 중이다. 매 순간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는 죽기 전의 시간들을 깨어남을 위하여 활용할 수 있다. 명상은 깨어남을 위한 기술이다. 나의 3일 간의 노력은 그대들로 하여금 명상이 깨어남의 기술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는데 있다.
Meditation has a focus, and if one wants to channel it in a particular direction then it has to be used like a flashlight.
If, however, one wants to turn it towards the divine, then meditation has to be applied like a lamp. Please understand this carefully. The lamp has no focus of its own; it is unfocused. A lamp merely burns and its light spreads all around.
명상은 초점을 가지는데, 특정한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기 원하면 명상을 회중전등(懷中電燈)처럼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신을 보고자 한다면 명상은 등잔불처럼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을 잘 이해하라. 등잔불은 그 자신의 초점이 없다. 등잔불은 특정 대상에 집중하지 않는다. 등잔불은 단지 타오르고 그 빛은 주변 전체로 퍼진다.
It often happens that people who were sinners in past lives become saints in this life. Hence there is quite a deep relationship between sinners and saints. Such a reaction often takes place, and the reason is, what we come to know hurts us and so we swing to the opposite extreme.
지나간 삶에서 죄인이 지금의 삶에서 성자가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성자와 죄인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런 반대작용은 자주 일어나는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상처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그 반대 극단으로 가려고 하고 그래서 늘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When one succeeds in recalling past lives and they begin to appear like dreams, immediately one's present life begins to look like a dream too. Those who have called this world maya have not done so just to propound a doctrine of philosophy. Jati-smaran -- recalling past lives -- is at the base of it. Whosoever has remembered his past lives, for him the whole affair has suddenly turned into a dream, an illusion. Where are his friends of past lives? Where are his relatives, his wife and children, the houses he lived in? Where is that world? Where is everything he took to be so real? Where are those worries that gave him sleepless nights? Where are those pains and sufferings that seemed so insurmountable, that he carried like a dead weight on his back? And what became of the happiness he longed for? What happened to everything he so toiled and suffered for? If you ever remember your past life, and if you lived for seventy years, then whatever you might have seen in those seventy years, would that look like a dream or a reality? Indeed, it would look like a dream which had come and withered away.
누군가 지난 삶들을 기억하는데 성공하면 그것들은 마치 꿈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자마자 지금 현재의 삶도 역시 꿈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 세상을 마야(환영)라고 부른 사람들은 단지 철학적 이론으로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티 스마란’(지난 삶을 불러오기)이 근저에 있다.
지난 삶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꿈으로 환상으로 변한다. 지난 삶의 친구들, 친척, 아내, 자식들, 살던 집은 어디에 있는가? 그 세상은 어디에 있나? 그토록 진짜로 있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어디에 있는가? 밤잠을 설치게 만들던 그 고민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죽을 만큼 어깨를 짓누르며 극복 불가능하게 보였던 고통과 아픔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갈망하던 행복은 어찌 되었나? 애쓰고 노력한 모든 것들은 또 어찌 되었나? 지난 삶을 기억하면 보았던 모든 일들은 왔다가 시들어 사라진 꿈처럼 보일 것이다.
So two experiences occur simultaneously: one, the objective world is an illusion, maya -- only the observer is real; second, what appears is false -- only the seer, only the witness of it is true. Appearances
change every day -- they have always changed -- only the witness, the observer is the same as before, changeless. And remember, as long as appearances seem real, your attention will not focus on the onlooker, on the witness. Only when appearances turn out to be unreal does one become aware of the witness. Hence, I say, remembering past lives is useful, but only after you have gone deeper into meditation. Go deep into meditation so you may attain the ability to see life as a dream. Becoming a mahatma, a holy man, is as much of a dream as becoming a thief -- you can have good dreams and you can have bad dreams. And the interesting thing is that the dream of being a thief is likely to dissolve soon, whereas the dream of being a mahatma takes a little longer to disappear because it seems so very enjoyable. And so the dream of being a mahatma is more dangerous than the dream of being a thief. We want to prolong our enjoyable dreams, while the painful ones dissolve by themselves. That's why it so often happens that a sinner succeeds in attaining to God while a holy man does not.
두 개의 경험이 동시에 일어난다. 객관적 세상은 환영이고 마야라는 것과, 관찰자만이 실재라는 것이다. 나타나 보이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과 오직 보는 자, 목격자만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나타난 것은 매일 항상 변한다. 오직 목격자, 관찰자만이 이전과 동일하고 변치 않는다. 기억하라, 보이는 것들이 진짜로 여겨지는 동안은 그대의 주의는 구경꾼, 목격자에 초점이 안 맞춰진다.
오로지 보이는 것들이 진짜가 아님이 밝혀질 때 목격자를 알아볼 수 있다. 지난 삶을 기억함은 유용하지만, 오직 그대가 깊은 명상에 들어간 이후에야 그렇다.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그대는 삶을 꿈으로 보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마하트마나 성인이 되는 것은 도적이 되는 것과 똑같이 꿈이다. 그대는 좋은 꿈을 꿀 수도 있고 나쁜 꿈을 꿀 수도 있다. 재밌는 것은 도둑이 되는 꿈은 곧 사라지기 쉬운 반면에 마하트마가 되는 꿈은 그것이 매우 즐길만하기 때문에 사라지는데 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마하트마가 되는 꿈은 도둑이 되는 꿈보다 더 위험하다. 우리는 즐거운 꿈은 더 연장되기를 원하지만, 고통스런 꿈은 그 자체 스스로 사라진다. 이것이 죄인이 더 자주 신(神)에 이르고 성인은 그러지 못하는 이유다.
Mountains are alive as well; however, they contain almost no consciousness. They contain ninety-nine percent inertness and one percent consciousness. As life evolves, consciousness keeps on growing and inertness keeps on decreasing. God is one hundred percent consciousness. The difference between God and matter is of percentage. The difference between God and matter is of quantity, not of quality. That's why matter can ultimately become God.
산(山) 역시 살아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의식적이지는 않다. 99%의 비활성과 1%의 의식이다. 생명이 진화하면 의식은 성장하고 비활성은 줄어든다. 신은 100% 의식이다. 신과 물질의 차이점은 퍼센트이다. 질적 차이가 아니라 양적 차이다. 그것이 물질이 결국 신이 될 수 있는 이유다.
It is not at all surprising that in some past life we have all been animals, but even as humans our consciousness can be so low that we
may appear like humans only on the physical level. If we look into our tendencies, it seems that although we are no longer animals we have not yet become human beings either; it seems we are stuck somewhere in between. As soon as an opportunity arises, we don't lose much time in reverting to the animal level once again.
지난 삶에서 우리 모두가 동물이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지만, 인간임에도 의식이 너무 낮아서 육체 수준만 인간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우리의 성향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더 이상 동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인간이 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 붙박여져 있다. 기회가 오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동물로 돌아간다.
If you observe carefully, you will find that in a twenty-four-hour period, only once in a while, at certain moments, are we truly human beings. And we all know this only too well. You must have observed beggars. They always come to beg in the morning. They never come in the evening, because by evening the possibility of someone remaining a human being is virtually nonexistent.
그대가 주의 깊게 관찰하면, 우리는 하루 중 아주 잠깐만 진짜 인간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거지들은 항상 아침에만 구걸을 하지 저녁때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저녁까지 사람으로 남아 있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the office, the marketplace, the riots and protests, the newspapers and the politicians -- all must have created a mess for him. Everything must have aggravated and activated the animal layers inside him. By evening the man is tired; he has turned into a beast.
사무실, 시장, 폭동, 저항가들, 신문, 정치가들 등 모든 것이 그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모든 것이 내면의 동물 층을 악화시키고 활성화시킨다. 저녁때가 되면 그는 피곤하다. 그는 짐승으로 변한다.
You must have understood my point of view by now: we have to reach a point within, deep inside, where there is no possibility of dying. We have to drop the whole outer circumference, as happens in death. In death the body drops, feelings drop, thoughts drop, friendship drops, enmity drops -- everything drops. The entire external world departs -- only we remain, only the self remains, only the consciousness remains aloof. In meditation too, we have to drop everything and die leaving only the observer, the witness within.
그대는 바로 지금 내 관점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 우리는 내면 깊숙이 공존하는 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죽음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 지점에. 죽음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때 발생하는 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체 모든 외부의 피상적인 겉모양들을 버려야 한다. 죽음에서는 육체가 버려지고, 감정이 버려지고, 생각이 버려지고, 친구관계가 버려지고, 원한이 버려지고, 모든 것이 버려진다. 외면적 세계 전체가 완전히 떠나간다.
오로지 우리만이, 나 자신만이, 의식만이 (피상적인 것들로부터) 냉담하게 외따로 떨어져 남는다. 명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죽어야 한다. 오직 관찰자, 내면적인 목격자만 남기고 말이다.
So two experiences occur simultaneously: one, the objective world is an illusion, maya -- only the observer is real; second, what appears is false -- only the seer, only the witness of it is true. Appearances change every day -- they have always changed -- only the witness, the observer is the same as before, changeless. And remember, as long as appearances seem real, your attention will not focus on the onlooker, on the witness. Only when appearances turn out to be unreal does one become aware of the witness.
두 개의 경험이 동시에 일어난다. 객관적 세상은 환영이고 마야라는 것과, 관찰자만이 실재라는 것이다. 나타나 보이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과 오직 보는 자, 목격자만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나타난 것은 매일 항상 변한다. 오직 목격자, 관찰자만이 이전과 동일하고 변치 않는다. 기억하라, 보이는 것들이 진짜로 여겨지는 동안은 그대의 주의는 구경꾼, 목격자에 초점이 안 맞춰진다. 오로지 보이는 것들이 진짜가 아님이 밝혀질 때 목격자를 알아볼 수 있다.
오쇼 라즈니쉬
「and now and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