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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최기 니마 린포체(Choeky Nyima Rinpoche)

작성자山木|작성시간24.04.03|조회수38 목록 댓글 1

노력을 멈춘 후에 그대는 알게 된다

모든 것은 꿈이다.

깨어나기 위해 그대가 수행하는

온갖 기법이나 방법들 역시 꿈의 일부분이다.

그대에게 그런 수행법을 권하는 사람 역시

꿈의 일부분이다.

그대는 사람에 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고,

그 사람 역시 그대에 관한 꿈을 꾸는 것이다.

어떤 의사 소통도 가능하지 않다.

그대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꿈 속에 머물고 싶은가?

그대가 그 꿈에 온전히 좌절해 버릴 때,

오직 그때에만 그대는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

- 끼란

톰슨씨의 명상기행 Teaching En Route to Freedom

최기 니마 린포체(Choeky Nyima );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것 역시 상상이다.

그대는 '나'라는 것을 상상한다.

그리고 상상 속의 '나'라는 것이 세상과 다음 세상을 상상한다.

신과 신의 세상을 상상한다. 모든 것은 그저 상상일 뿐이다.

사람 언어, 천국, 고통과 즐거움도 상상이다.

자유와 구속도 상상이다.

수갑도 쇠고랑도 없지만 그대는 자신이 구속되었다고 상상한다.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다.

'나'라는 것이 감옥이다.

'나'라는 것은 거대한 벽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그대가 깨어나지 못하는 꿈일 뿐이다.

우리는 '나'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나'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그 벗어남 역시 하나의 상상이다.

구속이 상상이었듯 자유도 상상이다.

깨어남도 축복도 모두 상상이다.

이것이 지혜다.

얼나마 쉬운 일인가!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습관은 바보들의 사전에 실려 있는 낡은 언어다.

현명한 사람은 사전이 없다.

그는 읽을 필요도, 연구할 필요도 없다.

연구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지혜는 어떤 것에도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정해진 개념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개념화된 개념을 없애버려라. 이것을 이해하라!

개념이 없는 데 낡은 습관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자유다.

핵심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으며,

그 감정들을 어떻게 뿌리뽑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집착과 증오, 무지를 경험한다.

그것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자아로부터 온다.

‘자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라는 생각이 바로 자아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이중적인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중적인 마음을 통해 여러 유형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생겨난다. 왜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이 생겨나는가?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희망이나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다.

희망과 두려움은 고통을 의미한다.

매우 미묘한 차원에서 지켜보면, 생각은 진리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어떤 개념도 초월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개념은 생각이며 모든 생각은 감정이다.

모든 생각은 희망이나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으며

결국 고통을 낳는다.

생각은 희망과 두려움이 과거, 미래와 더불어 현재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가?

왜 이것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가?

우리들 모두가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희망과 두려움의 이중적인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고통이 끝나기를 원한다.

‘붓다’는 보드가야에서 해탈한 석가모니 붓다 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깨달음이 붓다이다.

지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진리의 진정한 조건,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부가적인 사항들, 즉 사물의 외연을 아는 것이다.

이제 나에게 들으라.

이해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자아가 없는 지혜’가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자아가 없는 지혜는 해탈의 창조자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이중적인 마음을 만들어낸다.

‘이중적인 마음’은 감정이며, 이중적인 마음은 희망과 두려움이다. 그러므로 이중적인 마음은 고통이다.

고통은 매우 많은 단계와 차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고통이 매우 거칠고 둔한 수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길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우리는 고통이 매우 미묘하고도 미묘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판단은 진리를 흐리게 한다.

모든 생각도 진리를 흐리게 한다.

우리는 두 가지 위험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허무주의와 영원불멸주의이다.

이 두 가지는 가장 나쁜 관점이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관점이다.

이 둘은 진리를 막아 버린다.

 

 

마두카르 톰슨 :

영원불멸주의라는 것은 창조주로서 영원 불멸하는 신을 믿는다는 뜻입니까?

 

최기 니마 린포체 :

창조주라는 존재는 우리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다.

창조주는 모든 것을 창조했고, 모든 것은 그의 손 안에 있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다.

창조주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

우리가 창조주를 행복하게 하면 그때는 괜찮다.

그러나 창조주가 화가 나면 우리는 끝장이다. 모든 것이 끝난다.

그에 반대되는 관점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즉, 전생이나 다음 생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개념도 없고 가르침도 없고 방향이나 수행도 없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는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행위이다.

만약 그대가 아무 지향하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다.

만약 그대가 수행하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다.

만약 그대가 수행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때는 그것이 수행이 된다.

이것은 무척 알아차리기 힘든 문제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아닌 어떤 일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 역시 행위이다.

어떤 일을 할 생각을 하는 것 역시 행위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든 행위이다.

의심하는 것 역시 행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행위로부터 오고,

행위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온다.

의심은 이중적인 마음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는 것 역시 행위이다.

무슨 일인가 하려고 생각하는 것도 행위이다.

의심은 관념이다.

모든 생각은 관념이다.

선한 생각도 관념이고 나쁜 생각도 관념이다.

나쁜 관념과 비교하면 중립적인 관념은 좀 더 나은 것이다.

중립적인 관념에 비교하면 선한 관념이 더 나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관념도 매우 미묘한 차원에서는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선한 관념이라도 생각이기 대문이다.

가장 선한 관념이라도 해도 그것 역시 생각이다.

단지 관념일 뿐이다.

관념은 이중적인 마음에서 일어난다.

가장 미묘한 관념일지라도 진리를 흐리게 만든다.

붓다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 수준은 매우 낮다. 죽음은 덧없음이다.

늙는다는 것은 덧 없다.

덧없음이란 무엇인가?

덧없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는가?

이것은 아주 포착하기 힘든 미묘한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변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바로 덧없음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덧없음이 시간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시간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혼란스러운 마음에게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진정한 진리를 아는 것이다.

시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혼란 속에 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는 시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시간은 고통에 이르는 길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에게는 감정과 고통이 있다.

진리는 관념을 초월한 것이다.

진리는 어떤 판단도 초월한 것이다.

진정한 진리는 에고가 사라진 지혜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선 지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톰슨씨의 명상기행 <마두카르 톰슨(Madhukar Thompson) >

'The practice of staying present will heal you.

Obsessing about how the future will turn our creates anxiety.

Replaying broken scenarios from the past causes anger or sadness.

Stay here, in the moment.' - S. McNutt

 

현재에 머무는 연습을 하세요.

그 연습은 당신을 치유할 거예요.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사로잡혀 있다면,

불안만 양산될 거예요.

이미 빗나가 버린 과거의 시나리오를

되풀이 해 읊고 있다면

분노나 슬픔만 불러 일으킬 따름입니다.

여기에 머무세요. 지금 이 순간에 머무세요.

- 실베스터 맥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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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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