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Yoga is Union with the Supreme Self !
孟子曰
盡其心者는 知其性也니 知其性이면 則知天矣니라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였다.
“자신의 신명(神明)을 극진히 할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의 마음에 갖추어진 이치을 알수 있으니,
자신의 마음에 구비된 이치를 알면
천리(天理)를 알수 있는 것이다”
하나됨의 지경이 내버림의 지경과 같은 것이라 하면
모순인 듯이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인 것이 우주적 의식 안에서 분명해진다.
이 지경에서는 마음이 신과 하나됨이,
즉 (대)자아의식이 부동의 지경에도 달한다.
그것이 곧 완전한 하나됨의 지경이다.
이 지경에서는 자아는 또 행동에서는 분리되어 있음을 체험한다. 이것이 곧 내버림의 지경이다.
하나됨과 내버림은
이렇듯이 해서 생명의 한 경지 속에 함께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행동을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
혹은 의무를 위해서 할 뿐이지,
그 결과에 대한 아무런 욕망도 없다.
내가 행동을 하는 것이 사실은 사실이지만,
실지로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브라만이요, 행동도 브라만이요,
행동의 결과도 또한 브라만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라 해도 나 자신밖에 될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자아를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 행동의 결과를 생각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느냐?”
이러한 식의 생각은 카르마 요가(자기를 다스림)와
산야사(내버림)에서 말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한 무집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말이요,
그가 어떤 사람이거나간에 그러한 생각 위에서
무집착의 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다만 자기를 속일 뿐이다.
그런데 몇 세기를 두고 카르마 요가와 산야사는
바로 그런 오해 속에 내려왔다.
……바탈(性, Being)을 체험하는 것이
카르마 요가와 산야사의 전제적 요건이다.
의식의 경지에서 말한다면 산야사와 카르마 요가는 마찬가지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Maharishi Mahesh Yogi,
‘요가의 지경에 올라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깨어 있을 때의 의식에서 초월적 의식 상태에 이른 사람이다.
그는 마음이 거룩한 이와 완전히 하나된 상태다.
이러한 초월적 의식 속의 요가는 고요히 함이 늘어감에 따라
우주적 의식 속에 영구화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Being)이 마음의 성질 속에 스며들어
오시게 된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요가의 지경에 든 후에는 고요히 함이 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고요히 함은 우주적 의식의 요가에서
신의식의 요가로 올라가는 길이다.
우주적 의식에서 고요히 함은
자아가 행동에서 독립하는 체험을 주지만
신의식 속에서는 고요히 함이 하나님의 빛으로 변화해버린다.
그 안에서는 자아와 행동의 이원(二元)이 사라져버린다.
이 영원한 침묵의 신의식은 우주적 의식 속에서 체험했던
고요히 함이 한층 더 나아간 지경이다.
이것은 생명의 하나됨의 산 고요히 함이다.
그것이 우주적 활동의 바닥이 되는 동시에 또 하나님을 완전히
우주적 활동에서 따로 서시게 하는 기반이 된다.
우주적 의식 속에서 체험하는, 그리하여 자아를 행동에서
독립시키는 고요히 함은 무한히 작은 규모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주적 활동의 기반이 되고
하나는 개인 활동의 기반이 된다.
그 둘의 근본적 차이는 여기 있다.
즉, 우주적 의식에서는 고요히 함과 행동이 같은 수준으로
양립 되는데 신의식은 이원적 대립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와 같이 고요히 함에는 세 단계가 있다.
초월적 의식 속에서는 고요히 함 속에 어떤 행동의 흔적도 없다.
우주적 의식 속에는 자아의식이 행동과 병립하고 있다.
신의식 속에서는 그 행동과 고요히 함의 병립이 신의식의 하나됨으로 변화해버린다.
이 신의식의 고요히 함이 가장 높은 정도로 발전된 고요히 함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전능 정도에서의 존재다.
이것은 성스러움(神性, godhead)의 무소부재, 무소불능,
무소부지의 고요히 함이다- ᅳ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
A person is said to have attained yogic perfection when there is no desire for sensual pleasures, or attachment to the fruits of work, and has renounced all personal selfish motives. (6.04)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아무런 욕망도 없으며,
일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모든 이기적인 동기들을 버린 사람
이런 사람을 수행의 완전한 경지에 이룬 사람이라 하느니라.
욕망의 씨를 제해버린 사람
사르바산칼파산야시(sarva-sankalpa-sannyasi)
우리는 좋고 언짢고를 내버리고,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을 내버리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목적을 내던짐에 의하여,
이기적인 나(ego)를 극복함에 의하여,
지극히 높으신 이의 뜻에 온전히 항복함에 의하여
요가에 정진하는 자는 여기 영원에 방불한 지경을 성취할 수 있다.
그는 자기가 터득하고자 하는 그것의 분열되지 않은,
시간 없는 의식에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해방된 영혼은 욕망도 없이, 집착도 없이, 욕망이 나오는 이기적인 의지도 없이 일할 수 있다.
마누(Manu)는 말하기를
모든 욕망은 산칼파(sankalpa결심)에서 나온다고 했고,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서는
“오 욕망아, 나는 네 뿌리를 안다.
너는 산칼파 혹은 생각에서 나왔지. 내 너를 생각지 않으리라.
그럼 너는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다” 했다. —라다크리슈난
(SARVEPALLI RADHAKRISHNAN, 1888-1975)
샹카라는 지혜를 탐구하는 자의 가장 근본적인 자격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못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과,
현세적 내세적 행동의 결과를 누리자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음과, 자제와 정신적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고 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모든 지식의 목적은 선(善), 즉, 삶과 앎에 다 같이 근원이 되는 선의 관념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를 높여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이상적인 철학자란, 인생을 힘껏 다 살고 난 끝에 가서,
그의 목적이 언제나 고요하고, 안으로 향해 잠잠하고 고적하며
떠나 있는 살림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살림 속에서는, 세상이 그를 잊음으로 인해, 그는 세상을 잊고 자기의 하늘을 선에 대한 외로운 명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그것만이 참 살림이다.
“마음이 정결한 이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 혼의 정화는 훈련에 의해서야만 얻어진다.
플로티노스는 “지혜는 안정 속에 있는 심성의 한 상태라” 했다.
—라다크리슈난
齧缺問道乎被衣(설결문도호피의),被衣曰(피의왈):
「若正汝形(약정여형),一汝視(일여시),
天和將至(천화장지);攝汝知(섭여지),一汝度(일여도),
神將來舍(신장래사)。
德將為汝美(덕장위여미),道將為汝居(도장위여거),
汝瞳焉如新出之犢而無求其故
(여동언여신출지독이무구기고)!」
설결(齧缺)이 피의(被衣)에게 도를 묻자 피의가 말했다.
“네가 네 몸을 단정하게 하고 네 시선을 한결같이 하면
자연의 화기(和氣)가 이를 것이며,
너의 지식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기를 한결같이 하면
정신이 와서 머물 것이다.
덕이 너의 아름다움이 될 것이며 도가 너의 거처가 되어서
너는 어리석은 모습이 마치 막 태어난 송아지와 같을 것이니
그 까닭을 찾지 않을 것이네!” —장자(知北遊)
자아는 자아의 주요, 자아는 자아의 목적이니라.
—「법구경」
도의 행해지지 않음을 내 알겠도다.
아는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믿지 못하는구나.
도의 밝아지지 못함을 내 알겠도다.
어진 이는 지나치고 불초한 자는 믿지 못하는구나. —「중용」
“날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지만,
날아오르려 하지 않는 것은 타락이다.”
“마음을 속으로 당기어
그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고는
힘이 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행위(정신적 신체적 영적 활동)에서 나온 것을
알지어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해탈하리라.
연잎이 물에 젖지 않는 것은
젖지 않는 성질을 제 속에 길러내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거기 무슨 칠을 해주어서가 아니다.
무엇을 조금 알면 독단적이 되고,
조금 더 알면 묻게 되고,
또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