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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頓悟無生般若頌 돈오무상반야송 荷澤神會 大師 하택신회 대사

작성자山木|작성시간24.05.15|조회수15 목록 댓글 1

頓悟無生般若頌

돈오무상반야송

荷澤神會 大師

하택신회 대사

 

 

無念是實相(무념시실상) 眞空知見是無生(진공지견시무생)

般若照眞達俗(반야조진달속) 眞空理事皆如(진공리사개여)

此爲宗本也(차위종본야)

 

無念(무념)이 實相(실상)이요, 眞空(진공)이며, 般若(반야)이다.

반야이기 때문에 거기에 知見(지견)이 있다.

지견은 실상의 無生(무생)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眞(진)을 비추고 俗(속)을 체달한다.

진도 속도 理(이)도 事(사)도 진공 가운데서 바야흐로

그 如如(여여)한 성품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선에서 근본[宗]으로 삼는 바이다.

 

夫眞如無念(부진여무념) 非念相(想)(비념상) 能知(능지)

實相無生(실상무생) 豈生心能見(기생심능견)

無念念者念總持(무념념자념총지)

無生生者則生實相(무생생자즉생실상)

 

眞如(진여)는 무념이기 때문에 念想(염상)

즉 분별심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실상은 무념이기 때문에 분별을 일으켜 그것을 볼 수는 없다.

무념의 念(념)이란 무분별을 분별하는 것이다.

무생의 생이란 실상 바로 그것이다.

실상은 情態的(정태적)인 것이 아니어서

無生(무생)하면서 생생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無住而住(무주이주) 常住涅槃(상주열반) 無行而行(무행이행) 能超彼岸(능초피안) 如如不動(여여부동) 動用無窮(동용무궁) 念念無求(념념무구) 求常無念(구상무념) 菩提無得(보리무득)

 

머무름이 없이 머물기 때문에 언제나 열반에 머문다.

감이 없이 가기 때문에 此岸(차안)을 뛰어넘어

彼岸(피안)으로 가는 것이다.

如如(여여)하면서 움직이지 않는다[不動(부동)]고 하면

응결된 상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가운데서 무궁한 기능[動用(동용)]이 나온다.

그러한 까닭에 생각 생각이 계속 이어지고,

게다가 거기에서 바라는 바가 없다.

그러면 情(정)이 없는 목석과 같은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항상 希求(희구)한다.

번뇌의 중생들을 위하여 자신이 언제나 병들고 걱정하는 것이다.

미타의 本願(본원)도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구함 없이 구함[無求而求(무구이구)]과

행함 없이 행함[無行而行(무행이행)],

생각 없는 생각[無念而念(무념이념)]과

분별 없는 분별[無分別而分別(무분별이분별)]

이를 보리(菩提)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無得(무득)의 得(득)인 것이다.

佛法身也(불법신야) 般若無知(반야무지) 知一切法(지일체법)

 

부처는 법신이다. 법신은 반야를 인격화한 것이다.

반야는 법신의 논리성이다.

반야는 알음알이 없음[無知(무지)]를 그 본체로 하고 있다.

그러기에 일체법을 잘 알 수가 있다.

분별심의 知(지)로는 한정을 면치 못한다.

 

卽定是慧(즉정시혜) 卽慧無生(즉혜무생) 無生實相(무생실상) 眞空無行(진공무행)

 

선정에 입각한 지혜요, 지혜에 입각한 선정이다.

지혜는 분별을 초월하였고 알음알이 없음[無知(무지)]이기 때문에 또한 無生(무생)이다.

그 무생에서 실상을 본다.

실상은 진공이다. 거기에 행동적 작위성이란 것은 없다.

無知(무지)·無生(무생)·無行(무행)의 세 구절로

선의 논리와 형이상학의 철학과 논리를 총괄한다.

 

能周法界(능주법계) 六度自玆圓滿(육도자자원만)

道品於是無虧(도품어시무휴)

 

법계에 두루한다고 하는 것은 법계가 곧 절대무라는 뜻이다.

이 無(무)에서 六度萬行(육도만행)이 나온다.

분별계교심에서의 행위는 아무리 선할지라도

圓滿無虧(원만무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한정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我法二空(아법이공) 有無雙泯(유무쌍민) 不到不至(불도불지) 不去不來(불거불래)

我法(아법)은 달리 人法(인법)이라고 한다.

주관과 객관, 能(능)과 境(경), 二元(이원)의 대립이다.

유무도 그것이다.

절대무의 입장에서라면 분별심으로 얽히고 설킨 세계는

그것만으로는 참된 실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지도 가지도, 가지도 오지도 않으면 안 된다.

 

體悟三明(체오삼명) 心通八解(심통팔해) 功成不力(공성불력) 富有七珍(부유칠진) 入不二門(입불이문) 權一乘理(권일승리)

 

絶對無(절대무)의 입장이 분명하게 되면 分別(분별)지의 기능도 또한 그 능력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행위 방면에서도 자유의 分(분)이 얻어진다.

종교적 또는 철학적으로는 不二(불이)의 법문에 들어가

일승의 현묘한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湛然常寂(담연상적) 應用無方(응용무방) 用而無功(용이무공) 空而常鑑(공이상감)

用(의 誤字인 듯)而不有(용이불유) 卽是眞空(즉시진공)

空而不無(공이불무) 便成妙有(편성묘유)

 

絶對無(절대무)는 언제나 相(상)이 들어갈 수 없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게송에서도 그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대립 모순의 문자를 함께 놓고 있다.

긍정이 곧 부정이고 부정이 곧 긍정인 이치를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寂然不動(적연부동)한 데다가 應用自在(응용자재)하다.

그러므로 그 기능에는 아무런 공용이 없다.

知(지)는 空(공) 가운데서 나와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를 비추고

귀족이 오면 귀족이 나타난다.

그것은 有(유)가 아니다. 이것이 眞空(진공)이다.

空(공)하지만 없음도 아니다.

이것이 묘한 있음(妙有(묘유))이다.

眞空妙有(진공묘유), 그것은 絶對無(절대무)와 같은 꼴이다.

 

(妙有(묘유))則摩訶般若(즉마하반야)

眞空卽淸淨涅槃(진공즉청정열반)

 

묘유를 마하반야라 하고, 진공을 청정열반이라고 한다.

같은 것을 나누어 말하는 것일 뿐이다.

반야를 열반의 작용이라고 본다면 열반은 반야의 본체인 것이다.

본문의 則(즉) 자 앞에 묘유, 두 자가 빠졌기에 첨가하였음을 부언한다.

 

般若通秘微之光(반야통비미지광)

實相達眞如之境(실상달진여지경) 般若無照(반야무조)

能照涅槃(능조열반) 涅槃無生(열반무생) 能生般若(능생반야)

涅槃般若(열반반야) 我(名의 誤字인듯)異體同(아이체동)

義立名(수의입명) 法無定相(법무정상)

 

반야에 의해 비밀스럽고 희미한[秘微(비미)] 빛을 투철하여

실상을 보면 진여의 경지에 도달한다.

반야는 무분별이요 무지이기 때문에 無照(무조)이다

그러나 그 無照(무조) 때문에 능히 열반을 비춰 낸다.

열반은 무생이기 때문에 능히 반야를 생한다.

열반과 반야가 이름 위에서는 나뉘어지지만

그 본체는 동일한 사물이다.

法(법), 즉 하나의 진실, 그 자체에는 한정된 모습이 없지만

그 작용면에서 보아 여러 가지 이름을 달리하는 것이다.

 

涅槃能生般若(열반능생반야) 具佛法身(구불법신)

般若圓照涅槃(반야원조열반) 故號如來知見(고호여래지견)

 

열반은 또한 능히 반야를 본다.

그리고 그 속에 부처님과 교법과 수행승의 삼보를 갖추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야 쪽에서 보면 열반을 원만히 비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경 능히 봄[能見(능견)]도 능히 비춤[能照(능조)]도 하나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하나인 곳에서 보아 여래의 지견이라 한다.

앎[知]는 봄[見]이요, 봄[見]은 앎[知]이다

 

知卽知常空寂(지즉지상공적) 見卽直見無生(견즉직견무생)

知見分明(지견분명) 不一不異(불일불이)

 

知(지)는 무엇을 아는 것인가. 항상 공적한 것을 아는 일이다.

見(견)은 무엇을 보는가.

바로 태어남이 없음[無生(무생)] 그 자체를 보는 것이다.

지와 견, 어느 것이나 분명히 깨달아 보면

지와 견은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動寂俱妙(동적구묘) 理事皆如(이사개여) 理靜處(이정처)

事能通達(사능통달) 事理通無(사리통무)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

분별하여 知見(지견)하는 것과 분별하여 知見(지견)되는 것이

서로 부정하고 서로 긍정할 때, 그 묘용을 발한다.

그리하여 理(이)와 事(사)는 如如(여여)하게 각기 그 분수를 지키며 더욱이 無(무)에 고루 통하는 것이다.

즉, 理如(이여)는 그 깨끗한 곳으로부터 나아가 事(사)의 다양성 가운데 도달한다.

事(사)는 이와 같이하여 理(이)와 상통하고 無(무)의 妙(묘)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치[理]는 하나요 일[事]는 여럿이다.

 

六根無染(육근무염) 定慧之功(정혜지공) 相念不生(상념불생) 眞如性淨(진여성정) 覺滅心空(각멸심공) 一念相應(일념상응) 頓超凡聖(돈초범성)

 

눈·귀·코·혀·몸·뜻인 六根(육근)의 無染(무염)을 얻는 것은

定慧(정혜)의 공덕[功(공)]이다

想念分別心(상념분별심)의 生起(생기)가 있더라도

眞如性淨(진여성정)의 이치마저 어두워지지 않으면

분별 속의 무분별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분별의 경계가 멸하면

마음이 空(공)한 것이다.

마음이 空(공)한 바로 거기에 한 생각이 서로 마주쳐 어울리는

경험이 있다.

그때 홀연히 범부와 성인의 경지 그 영역으로부터 벗어난다.

 

無不能無(무불능무) 有不能有(유불능유) 行住坐臥(행주좌와) 心不動搖(심불동요) 一切時中(일체시중) 空無所得(공무소득)

 

이것은 무분별의 분별이라고 해야 할 경지이기 때문에

有無(유무) 따위의 分別觀(분별관)으로 이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有(유)라고 해도 有(유)라 할 수 없고 無(무)라고 해도

無(무)라 할 수가 없다.

오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체의 시간 속에서

마음이 分別計巧(분별계교)로 동요하는 일이 없다.

空(공)하여 얻을 바 없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이르는 말이다.

 

三世諸佛(삼세제불) 敎旨如如(교지여여) 菩薩大悲(보살대비) 轉相傳受(전상전수) 至於達摩(지어달마) 屆此爲初(계차위초) 遞代相傳(체대상전) 於今不絶(어금불절)

 

과거, 미래, 현재의 삼세 부처님들의 가르침은 어느 것이나

이 如如(여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보살들은 그 큰 悲願(비원)으로 인해

이 가르침을 轉轉(전전)히 서로서로 전해 받아 마침내 달마에 이르렀다.

달마는 이 땅 중국에 와서 禪(선)의 초대 조사[初祖(초조)]가 되었다.

그리고 대대로 서로 전하여

오늘날에 미치기까지 여여한 가르침은 그대로 끊이지 않은 것이다.

 

所傳秘敎(소전비교) 意在得人(의재득인) 如王繫(의 誤字인 듯)珠(여왕계주) 終不妄與(종불망여)

 

부처와 조사가 전해온 바 은밀한 가르침은 요컨대 그 사람을 얻는데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면 범천왕의 정수리에 있는 구슬처럼 함부로 아무렇게나

남에게 줄 리는 없다.

반드시 거기에 걸맞는 자격이 없고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福德智慧(복덕지혜) 二種莊嚴(이종장엄) 解行相應(해행상응) 方能建立(방능건립)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장엄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이론과 실천이 상응하는데 의해

비로소 부처에서 조사로 전한 바 가르침을 건립할 수 있는 것이다.

 

衣爲法言(의위법언) 法是衣宗(법시의종) 衣法相傳(의법상전) 更無別付(갱무별부) 非衣不弘於法(비의불홍어법)

非法不受於衣(비법불수어의)

衣是法信之衣(의시법신지의) 法是無生之法(법시무생지법)

 

옷을 전했다고 하는 것은 법을 전했다고 하는 일종의 보증서이다.

옷의 의미는 법에 있다.

옷과 법을 전한 외에 어떠한 것도 전한 것이란 없다.

옷이라고 하는 증표[信]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있어 전하였다고 함이 되고,

그래서 법이 전파되는 것이다.

법이 없는 곳에 옷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옷은 분명히 법의 소재를 표시하는 신호이다.

그리고 그 법이라고 하는 것은 無生(무생)의 법이다.

즉 如如(여여)이다.

有無生滅(유무생멸)의 분별심을 용납하지 않는 데의 것이다.

無念(무념)의 當體(당체), 知見(지견)의 用處(용처),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닌 곳,

반야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반야이며,

斷(단)적인 것, 이것이 無生法(무생법)이다.

모든 상대적 대립을 떠난 것이다.

 

無生卽無虛妄法(무생즉무허망법) 是空寂之身(시공적지신) 知空寂而了法身(지공적이요법신) 而眞解脫(이진해탈)

 

무생은 진실계 그 자체이기 때문에 허망한 법이 아니다.

즉 그것은 空寂의 몸이요, 무분별의 마음이다.

몸과 마음은 동일한 것이니, 공적의 몸이 곧 무분별의 마음이다.

空寂은 단순히 空이 아니다.

분별심 위에서 말하는 空寂湛然은 아니다.

이 도리를 깊이 알아야 한다.

絶對無는 分別計巧의 영역에 갇히지 않는다.

이를 인격적으로 혹은 행위적으로 보아 法身이라 한다.

작용이 그로부터 무궁무진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완전히 깨달을 때 참된 해탈이 있다고 한다.

 

法身,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荷澤大師顯宗記

 

無念爲宗無作爲本。眞空爲體妙有爲用。

夫眞如無念非想念而能知實相。

無生豈色心而能見。無念念者卽念眞如。

無生生者卽生實相。無住而住常住涅槃。

無行而行卽超彼岸。如如不動動用無窮。念念無求求本無念。

菩提無得淨五眼而了三身。

般若無知運六通而弘四智。是知卽定無定。卽慧無慧。

卽行無行。性等虛空體同法界。六度自玆圓滿。

道品於是無虧。是知我法體空有無雙泯。

心本無作道常無念。無念無思無求無得。

不彼不此不去不來。體悟三明心通八解。

功成十力富有七珍。入不二門獲一乘理。

妙中之妙卽妙法身。天中之天乃金剛慧。

湛然常寂應用無方。用而常空空而常用。

用而不有卽是眞空。空而不無便成妙有。妙有卽摩訶般若。

眞空卽淸淨涅槃。般若是涅槃之因。

涅槃是般若之果。般若無見能見涅槃。

涅槃無生能生般若。涅槃般若名異體同。

隨義立名故云法無定相。涅槃能生般若卽名眞佛法身。

般若能建涅槃。故號如來知見。知卽知心空寂。

見卽見性無生。知見分明不一不異。

故能動寂常妙理事皆如如。卽處處能通達。

卽理事無 。六根不染卽定慧之功。

六識不生卽如如之力。心如境謝境滅心空。

心境雙亡體用不異。眞如性淨慧鑒無窮。

如水分千月能見聞覺知。見聞覺知而常空寂。空卽無相。

寂卽無生。不被善惡所拘。不被靜亂所攝。

不厭生死不樂涅槃。無不能無有不能有。

行住坐臥心不動搖。一切時中獲無所得。

三世諸佛敎旨如斯。卽菩薩慈悲遞相傳受。自世尊滅後。

西天二十八祖共傳無住之心。同說如來知見。

至於達磨。屆此爲初遞代相承於今不絶。

所傳秘敎要藉得人。如王 珠終不妄與。

福德智慧二種莊嚴。行解相應方能建立。

衣爲法信。法是衣宗。唯指衣法相傳更無別法。

內傳心印印契本心。外傳袈裟將表宗旨。

非衣不傳於法。非法不受於衣。衣是法信之衣。

法是無生之法。無生卽無虛妄乃是空寂之心。

知空寂而了法身。了法身而眞解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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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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