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에서도 안에서도
Eckhart Tolle 톨레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단순하면서도 매우 심오한 진리 하나를 깨닫게 된다. 거기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달과 별, 빛나는 은하의 띠, 때로는 혜성과 2백3십만 광년 떨어진 이웃 안드로메다 은하도 희미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좀 더 단순화한다면 무엇이 보이는가?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물체들이다. 그렇다면 우주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물체들과 공간이다.
맑은 밤하늘의 우주 공간을 올려다보면서 경이감으로 할 말을 잃지 않는다면 당신은 실제로는 보고 있지 않은 것이고, 그곳에 있는 전체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물체만을 보고 그 이름을 찾고 있을 것이다.
우주 공간을 올려다보면서 두려운 느낌을 받고 그 불가사의한 신비 앞에서 깊은 경외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설명과 분류표를 붙이려는 욕망을 잠시 멈추고 그곳에 떠 있는 물체들만이 아니라 우주 공간 자체의 무한한 깊이를 알아차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가 존재하는 공간의 광대무변함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당신의 내면도 고요해졌을 것이다.
그 경외감은 그곳에 수십억 개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를 담고 있는 무한한 깊이로부터 온다.
물론 공간은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맛볼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간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가?
논리적으로 들리는 이 질문에는 이미 근본적인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공간의 본질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로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물체, 즉 형상뿐이다. 그러므로 ‘공간’이라고 부른 것도 오해의 원인이다.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물체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당신 안에는 공간과 유사한 무엇인가가 있고, 그러므로 공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알아차린다? 이것도 완전한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곳에 알아차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공간을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대답은 단순하면서 심오하다.
당신이 공간을 알아차릴 때 당신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않지만, 알아차림 그 자체를, 즉 내면의 의식 공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당신을 통해 우주는 그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눈이 아무것도 볼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공간으로 지각된다.
귀가 아무것도 들을 것이 없을 때, 그 아무것도 없음이 고요로 인식된다.
형상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감각들이 형상의 부재를 만났을 때,
감각적 인식 뒤에서 모든 인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 없는 의식은
더 이상 형상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공간을 명상 속에 응시하거나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이른 새벽의 고요에 귀를 기울일 때,
당신 안에서 무엇인가가 서로를 알아본 것처럼 그것과 공명한다.
그러면 당신은 공간의 무한한 깊이를 자신의 깊이로 감지하고,
형상 없는 소중한 고요가 당신 삶의 내용물을 채우고 있는 그 어떤 사물이나 사건들보다 훨씬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고대 인도의 경전 『우파니샤드』는 똑같은 진리를 이렇게 가리켜 보인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눈이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만이 우주 원리 브라흐마이고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숭배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님을 알라. 귀로는 들을 수 없으나 귀가 듣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만이 우주 원리 브라흐마이며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숭배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님을 알라.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으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만이 우주 원리 브라흐마이며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숭배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님을 알라.
경전은 신은 형상 없는 의식이며 당신 자신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 밖의 것은 모두 형상이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숭배하는 것’이다.
우주의 실체를 구성하는 두 부분, 즉 물체와 공간, ‘어떤 것임’과 ‘어떤 것이 아님’은 당신 자신의 실체를 구성하는 두 부분이다.
분별 있고, 균형 잡히고, 결실 있는 삶은
실체를 구성하는 이 두 차원인 형상과 공간 사이의 춤이다.
많은 사람들은 형상의 측면에, 감각 지각과 생각과 감정에 너무도 동일화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한 숨은 절반은 그들의 삶에 누락되어 있다.
형상과의 동일화 때문에 에고 속에 계속 갇혀 있는 것이다.
당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은 실체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형상의 차원이다.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그것은 ‘이 세상’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다른 쪽 차원은 ‘하늘나라’ 혹은 ‘영원한 생명’으로 불린다.
공간이 모든 사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듯, 또한 고요 없이는 소리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 존재의 중요한 본질인 형상 없는 차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단어가 잘못 사용되어 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그 차원을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순수한 있음’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순수한 있음’은 사물의 존재에 앞선다. 사물의 존재는 형상이고 내용물이고 ‘일어나는 것’이다. 사물과 사건은 생명(삶)의 전면에 있고, ‘순수한 있음’은 이른바 생명(삶)의 배경에 있다.
인류의 집단적인 병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사로잡히고 움직이는 형상의 세계에 최면 당해 삶의 내용물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내용물을 초월한, 형상을 초월한, 생각을 초월한 본질을 잊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시간에 사로잡혀 영원을 잊고 있다. 자신들이 온 곳이고 자신들의 집이며 자신들의 운명인 곳을. 영원은 진정한 당신의 살아있는 실체이다.
몇 해 전, 중국을 여행할 때 나는 길림성 근처 산 정상에 있는 불탑을 참배했다. 탑에 금색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뭐라고 쓰여 있는지 중국인 친구에게 물었다. 그는 그것이 ‘부처 불 佛’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글자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군요. 왜 그런가요?”하고 내가 묻자 그는 설명했다.
“하나는 ‘사람 인’ 변으로 ‘인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오른 쪽 것은 ‘없음’, 즉 부정을 의미하지요. 이 두 가지를 조합하면 ‘붓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나는 경이감을 느끼며 그곳에 서 있었다.
붓다를 나타내는 한자에는 이미 붓다의 모든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이 삶의 비밀이다.
여기 실체를 구성하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어떤 것임’과 ‘어떤 것이 아님’, 형상과 형상의 부정이. 형상의 부정은 자신의 본질은 형상이 아니라는 알아차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