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짐이 아니다.
우리가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짐이 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탄생과 성장, 노쇠와 사망을 겪는
하나의 지속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태어나고, 우리는 물질을 갈구하고,
우리는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는 소유를 위해 싸우고
우리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것에 안달한다.
이것이 분노와 증오와 시기를 낳는다.
이리하여 탄생으로부터 죽음까지
우리는 한 짐의 고통을 지고 다닌다.
고통의 원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욕망과,
그로해서 생기는, 갈구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이다.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거기에 만족이 있다.
당신에게 찾아오는 것을 즐기라.
쾌락을 구하지 말라.
그리고 죽음을 인생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라.
그러면 당신은 더 이상 고통의 짐을지지 않을 것이며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평화를 이룩하는 한가지 방법 : 먼저 당신의 욕망에 한계를 두라.
그리고 그 한계를 차츰 좁히라.
그것이 자동적으로 고통을 줄여 줄 것이다.
욕망이 없어졌을 때 고통의 짐은
당신의 어깨로부터 영원히 내려올 내려올 것이다.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변형일 뿐이다.
만물은
다섯가지 원소 즉 흙, 물, 불, 공기, 에텔의 조합에 의해
창조된다.
각각의 원소는
사물속에서 운동, 확장, 성장, 노쇠를 야기시키는 생명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장하거나 노쇠하거나 어느 한 쪽에 속해 있다.
이 변형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먼지를 예로 들면 그것은 하나의 덩어리로 변하고
그 덩어리는 단단해져 돌이 된다.
이것이 성장이라는 이름의 변형이다.
다시 돌은 구르고 깨어져서 깨어진 조각끼리 또 부딪히고
마침내 약해지고 부스러져서 가루가 된다.
이것이 노쇠라 불리는 변형이다.
이변형의 순환은 계속 반복된다.
한 원소속의 생명력이 다른 원소와 섞여질 때
하나의 형상이 생겨난다.
또한 그 생명력도 변화한다.
예를 들면 씨앗이 가진 생명력이란 생명을 보존하는 힘이다.
그러나 흙과 물과 온기와 공기 속에 섞이게 되면
씨앗은 싹이 터 자라나기 시작한다.
씨앗의 생명력은 식물의 성장력으로 바뀌는 것이다.
동물에 있어서는 생명력은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먹고 활동하여 움직이는 등의 모든 기능은
눈으로 볼 수 있으므로 우리 동물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씨앗이나 돌의 경우에는 그리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동물의 육체적 기능이 멈추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죽었다고 말한다.
동물이 활동하지 않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우리는 그 형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원소들의 생명력은
아직도 활동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실은 그 동물 속의 생명력이 변형되고 있으며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시체는 썩어 흙의 원소로 변형되며
이 흙의 원소의 에너지는 계속 남아서 활동한다.
마찬가지로 물, 불, 공기, 에텔 원소의 생명력도 계속 변화해 간다.
4
영혼은 무수히 많다.
여기에 빼든 더하든
영혼은 똑같이 무수하다.
영혼은 순수한 의식이지만
온갖 속성들의 딱지로 덮여 있다.
존재에 깃든 영혼, 혹은 진아는 그 육신의 수효로 셀 수가 없다.
육신은 하나의 형체라서 수를 셀 수가 있다.
그러나 영혼은 형태가 없으며 그 존재로 해서 육신을 움직이게 하는 지고의 에너지이다.
도공이 항아리를 만든다.
항아리의 형태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 안에 공기가 들어 있다.
항아리의 수는 줄 수도 늘수도 있지만 그것이 공기에 어떤 변화도 미치지 못한다.
같은 이치로 영혼은 존재의 수가 늘든 줄든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영혼, 혹은 진아는 순수의식이며 사라지지 않으며 스스로 빛을 발한다.
그러나 우리의 무지로 인해, 영혼이란 태어나서 세상에서 고통받다가 죽은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속성들은 육신과 마음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항아리속의 공기는 그릇에 담겨졌던 것의 냄새를 풍긴다.
우리는 "이 항아리 속의 공기는 백단향 냄새가 난다"
혹은 "이 항아리의 공기는 냄새가 고약하다"라고 말한다.
항아리는 비어 있고 공기는 원래 냄새가 없지만 항아리속의 공기는 냄새를 풍긴다.
진아는 이 공기와 같아서 각 사람의 선하고 악한 성질의 냄새를 띄게 된다.
진아 그 자체는 선함도 악함도 없다.
5
육신은 영혼의 사원이다.
그리고 영혼은 신의 사원이다.
육신은 마음과 감각기관, 그리고 눈에 보이는 육적인 형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육적인 형체 속에서 영혼은 마치 왕과 같이 그 존재 만으로 마음과 감각과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영혼은 육신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육신은 영혼이 깃드는 사원이다.
영혼은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신의 에너지가 내재해 있다.
영혼 속에는 항상 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은 신의 사원이라 말한다.
10
마음 속의 세계가
외형 세계의 근원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은 우리 자신의 욕망의 그림자이다.
마음이 작용할 때 세상이 나타난다.
마음이 멈추면 세상도 사라진다.
무의식 상태에 있으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별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깨어 있거나 상관없이 항상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
집이나 자동차와 같은 물질적인 세계이다.
마음은 대상마다 모양과 색깔을 부여하고 자신의 욕심에 맞도록 그것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물질적인 세계 위에다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신도들에게는 교회나 사원 혹은 모스크는 아주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침략자들에게는 그와 같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주저없이 무너뜨리고 불태운다.
같은 여자가 그녀의 오빠와 연인에게는 각기 다르게 인식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욕심은 각각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이치로 해서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보고 경험하는 온 세상이란 다름아닌 우리의 욕망의 투영인 것이다.
우리의 욕망이 바뀌면 대상도 또한 변화한다.
예를 들어보자. 무척 미남이라고 생각하는 한 친구가 당신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테이블 위에 있는 당신의 시계를 훔쳤고 그 때문에 그와 당신이 싸웠다.
이제 당신의 욕망은 바뀌었다.
친구는 적이 되었고 그의 모습도 당신의 눈에는 미남에서 추한 꼴로 변하고 만다.
우리의 마음이 욕망으로 어지럽혀져 있는 한 우리는 감각을 통해 보여지는 세계야말로 실재인 것으로 생각한다.
마음이 순화되어 순수의식이 나타나게 되면 그림자의 세계는 사라지고 유일한 실재(實在)만이 남을 것이다.
12
다른 사람의 꿈은
들여다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세계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꿈은 욕망과 상상과 과거의 기억에 의해 나타난다.
각자의 세계는 욕망과 집착과 에고에 의해 생겨난다.
당신이 남의 꿈 속에 등장할 수는 있으나 그 꿈 속을 볼 수는 없는 것처럼 당신이 다른 이의 세계 속에 일부가 될 수는 있지만 그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의 꿈 속에 당신이 주인공이 된 하나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가 있다.
꿈꾸는 사람은 당신을 여러 곳으로 데려갈 수가 있다.
등산, 낚시, 혹은 사고의 현장으로, 꿈꾸는 사람은 꿈 속에서 기쁨과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당신이 사람을 고용하여 당신의 집을 짓는다고 해보자.
만일 그 집이 불타면 당신은 고통과 슬픔과 상실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고용한 사람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집은 당신의 세계속에만 '당신의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집은 다만 많은 집들중에 하나일 뿐이다.
우리의 세계란 자신의 욕망과 집착, 그리고 항상 대상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에고의 감각이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이 관계가 집착과 혐오, 기쁨과 고통, 절망과 희망 등과 뒤엉켜 있다.
인연과 사회와 소유물, 이런 것들이 우리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이다.
우리는 이것들에 애착을 가지고 있고 강한 연대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꿈과 같은 마음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같이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이루고 있고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아무도 다른 사람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는 없다.
14
욕망을 줄이는 것이
마음의 자유를 얻는 길이다.
욕망이 집착의 원인이다.
우리가 세상에 머무는 한 모든 욕망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것은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고 자며, 먹을 거리를 사기 위해 일하여 돈을 버는 것도 육신을 살리기 위해 이런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은 불어난다.
한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면 열가지 욕망이 찾아온다.
동시에 집착과 욕심, 분노. 공포, 그리고 시기 또한 자라난다.
이런 것들이 마음에 베일을 드리워 놓게 되고 마음은 이 세상에서 평화와 행복을 찾지 못한다.
인생은 짐이 되고 모든 것이 불행해 보인다.
욕망이 줄어들면 이 베일은 벗겨지기 시작하고 마음은 자유를 찾을 것이다.
15
자신을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나는 마음이다 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으면 그로부터 모든 고통이 비롯된다.
마음이란 기쁨을 찾지 못하면 고통 속에 빠진다.
쾌락은 욕망을 낳는다. 그러나 욕망은 충족되지 않으며 결국 고통만이 남는다.
고통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분노로 발전하고 이로 해서 분리(신과 인간의 분리. 인간이 신과 별개의 존재라는 미망을 벗고 신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요가이다) 즉 미망이 생겨난다.
마음은 욕망과 사념, 관념, 상상과 기억드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욕구나 사념에서나 바라고 생각하는 그 '나'란 바로 마음이다.
"나는 ~하고 싶다", "나는 ~라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이 마음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시각이 한정되어 있어 실재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진리는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되고 마음은 모든 고통의 원인인 미망 속에서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16
폭력과 에고 의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지켜야할 개아가 존재하는 한
폭력은 존재한다.
에고의 의식은 모든 인식, 행위, 느낌, 관념, 대상 등에 대해 "나의", 혹은 "내것" 이라는 의식을 유발한다.
이 '나'라는 느낌을 에고의식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대상과 관계를 맺는 주체로서 에고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이 에고의식 없이는 우리가 세상의 생활에 적응할 수가 없다.
그것을 통해서 "나는 춥다", "나는 덥다", "나는 행복하다"는 등을 느낄 수 있다.
마음으로 다가오거나 마음속에서 생긴 것은 모두 에고의 낙인을 받는다.
"내가 이걸 했다", "내가 그걸 알지" 등등.
이 에고가 우리를 분리시키며 개체성을 만들어 낸다.
"나는 외부의 대상들과 별개이다, 저것들은 내 것이거나 혹은 내 것이 아닌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에고의식의 작용이다.
우리가 남들과는 별개의 존재이므로 우리는 항상 행위와, 생각과 말로써 자신의 개체성을 지키려고 한다.
우리는 은행을 지키는 경비원과 같다.
그들은 돈을 약탈하려는 자들을 언제든지 쏘아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 개체성을 지키려는 행위야말로 그 자체가 폭력의 행사이다.
17
마음이 감각의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불행이 시작된다.
우리는 열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다섯가지는 인식의 감각기관 (듣는 귀, 느끼는 피부, 보는 눈, 맛보는 혀, 냄새맡는 코), 그리고 다섯가지 행위의 감각기관 (말하는 입, 쥐는 손, 걷는 다리, 생산하는 생식기, 배출하는 배설기)이다.
인식을 위한 감각이 행위를 위한 감각의 주인이다.
대상을 만나면 인식의 감각이 거기에 이끌린다.
이 유혹이 대상에 대한 욕망을 일으키고 운동기관은 그것을 가지려고 힘을 쓴다.
욕망은 소유와 경쟁과 비교를 유발한다.
욕망이 방해를 받으면 분노가 생기고 대상을 취하지 못했을 때 고통이 생긴다.
그래서 마음속에 미혹이 생기고 그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 때 인생은 불행해진다.
이런 사람은 어둠속에서 살며 인생의 사명인 존재의 의미를 찾고 해탈의 길을 찾는 일을 잊어버린다.
그는 끝없는 세상의 바다 위에서 욕망의 파도를 타고 조수처럼 밀려다니는 꿈과 함께 떠다닌다.
그는 모든 것을 손에 쥔 왕의 꿈을 꾸고 다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거지가 된 꿈을 꾸기도 할 것이다.
실제의 세계에서는 바다는 그대로 있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파도와 조수는 쾌락과 고통, 환상과 미망을 만들어낸다.
마음이 순수해지지 않는 한 감각은 외부세계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지킬 수 없다.
20
행복은 내적, 외적 상태가
서로 조화로울 때 찾아온다.
마음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외적, 내적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면의 마음은 늘 불만족해 있고 욕심을 부린다.
한편 외부로는 늘 당장에 만족할 수 있는 것만을 찾고 있다.
그 결과는 불만, 분노, 두려움과 시기이다.
단번에 모든 욕망을 없애고 만족을 찾는 일을 멈춘다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욕망을 제어하며, 만조글 구하기 이전에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일에 자기 만족을 우선으로 두면 우리는 이기적인 인간이 된다.
우리는 판단력을 잃고 비애와 우울과 고통 속에 빠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을 줄이면서 동시에 만족하려는 생각도 줄여나가야 한다.
이리하여 마음의 외부와 내부 상태간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마음은 불만, 분노,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24
당신이 세상을 좇아가면 갈수록
세상은 당신에게서 멀어져 간다.
세상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상은 당신을 따라온다.
세상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욕망이 없으면 더 이상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욕망을 채워갈수록 우리는 세상을 더 크게 벌려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이 결혼을 원한다.
그 다음엔 자식을 원하고 그들을 위해 집과 자동차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불만족은 그대로 있다.
당신이 낱낱의 욕망을 쫓아가 그것들을 모두 충족시킨다고 할지라도 세상은 아직도 저만치 서있고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모든 욕망을 없애면 당신의 세계는 작아진다.
그러나 명성과 같은 세속적인 만족이 당신의 마음을 유혹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이 욕망을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욕망은 더욱 더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욕망의 만족을 향한 길 위에는 온갖 분노와 공포를 야기시키는 불만과 집착가 탐욕이 기다리고 있다.
욕망을 없애려고 하면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 당신은 평화를 얻을 것이다.
29
인간의 참다운 본성은
진리와 사랑이다.
마음과 가슴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인간이 아무리 폭력적일지라도 그 깊은 어딘가에는 평화에의 바램이 있다.
불행을 당하고 화나거나 두려워지면 그들은 무엇이 그 원인인지를 알게 되고 이때 그들의 참다운 본성 --평화의 추구-- 이 나타난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기능은 마음에 있으며 감정을 표현하는 기능은 에고 의식의 자리인 가슴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평화를 찾고자 노력하면 그것은 마음을 통해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판단, 글고 올바른 이해로 나타난다.
또한 가슴을 통해서는 이기심과 에고와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30
남을 평화롭게 해주고자 하는 마음은
자신의 내면을 평화로 채워준다.
에고의식이 자신을 세상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맨 첫번째의 동일시는 "나(의 존재)"이다.
다음으로 오는 동일시는 "나는 이것(혹은 저것)이다","이것은 내것(혹시 네것)이다" 하는 것이다.
"내 것" 혹은 "네 것"을 가리면 모든 것이 분리되고 만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은 집착, 탐욕, 폭력을 기른다.
이것이 인간의 고통을 야기한다.
그것은 가족과 친구에게 그리고 마침내는 인류 전체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이 고통스러운 경험은 한 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속에 잠재적인 인상을 남기고 그것은 환생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념과 욕구와 성향으로 나타나 생에 있어서의 모든 행위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집착, 탐욕, 폭력 등의 성향이 사랑, 연민, 비폭력과 같은 선한 성향으로 개선되면 이 경험은 똑같은 식으로 작용을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은 긍정적인 방향이 된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며 그의 가족과 친구와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온다.
이 긍정적인 경험은 또한 마음 속에 평화의 잠재적 인상을 남기며 그것은 다음의 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평화롭게 해주는 행위는 실제로 행위자에게 더욱 많은 평화를 가져다 준다.
가난한 사람을 먹이고 늙은이와 병들고 집없는 이들을 돌보며 친절한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과 같은 이기심 없는 봉사는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다.
인도의 성녀 테레사는 이기심없는 봉사의 산 증인이다.
그녀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평화를 주고 있지만 남들을 평화롭게 해주고 싶은 그녀의 욕구는 바로 그녀 자신의 평화의 근원이다.
그녀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 평화를 느낄 수 있다.
31
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자는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신은 천국의 어딘가에 앉아 계시지 않다.
신은 우리안에, 그의 창조물 안에 계신다. 우리는 신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신이 형상을 가졌다면 우리는 신이 무한하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당장 자신을 순화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마음을 순화함으로써 편재하고 전지전능한 에너지를 가리고 있던 무지의 베일을 걷힌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산 밑에서 "신께서 원하신다면 나도 저기 도달하게 되겠지" 하고 앉아만 있다면 결코 그는 정상에 오를 수 없다.
신의 기원, 신의 축복은 우리가 신에게 도달하려는 노력을 시작하는 즉시 쏟아질 것이다.
32
그림속의 불은
불처럼 보일뿐
타오르지 않는다.
이론과 실제는 별개의 것이다.
이론적인 지식은 그림속의 불과 같아서 불에 대한 완전한 개념을 주지만 그것은 불의 열기를 느끼게 해주지는 못한다.
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실습만이 유일한 길이다.
런던의 지도를 보고 길과 건물을 파악하고 공장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런던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런던에 가는 것과 런던을 아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34
노력은 하지 않고
운이나 숙명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해변에 앉아
진주가 모래속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영원히 그렇게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다.
카르마(業)란 에고가 행위자로 개입된 모든 정신적, 육체적 행위이다.
이 행위들은 마음속에 삼스카라라 불리는 흔적을 남긴다.
카르마 혹은 삼스카라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삼치트(Samchit) 혹은 집단적인 카르마라고 한다.
이것은 전생의 건설적, 파괴적, 혹은 혼합적인 행위들이 만들어 놓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카르마들의 집합이다.
이것들은 기억으로 전달되어 현생에서 욕망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둘째로 프라브다(Prarabdha)는 과거로부터 오는 업으로서 현생에서 그 결실을 맺게된 것을 말한다.
프라브다 카르마는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성향을 결정한다.
이것을 친숙한 말로 운명이라고 한다.
세번째가 아가미(agami)이다.
현재의 행위에 의해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카르마이다.
이 행위들은 행위의 성격과 강도에 따라 즉시, 혹은 서서히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결과를 맺게 된다.
우리는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자신의 욕망에 대해 알고 있고 어떤 것을 만족시키고 어떤 것은 만족시키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카르마에 대해 알고 있지만 현재의 운명을 결정한 카르마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그게 나의 운명이었군",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어" 하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쓰지는 않고 운명에만 매달리면 이룰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한 사람이 요행으로 해변에서 진주를 한 알 주웠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아무 노력없이 진주를 발견할 수 있다는 법칙이 성립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운명이 언젠가는 자신의 발앞에 진주를 굴려다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해변에 앉아만 있다면 그는 영원히 앉아서 남아 있게 될 것이요, 반대로 자신의 노력을 믿는 사람은 깊이 잠수하는 법을 연습할 것이고 언젠가는 깊은 물 속에서 진주를 건져오는 비결을 터득할 것이다.
38
구도자는
물에 뜬 배처럼
세상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구도자의 마음 속에 있거나
물이 배안에 들어차면
양쪽 다 가라앉고 만다.
배는 물위에 뜬다.
배는 물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배가 물을 담으면 침몰한다.
구도자는 세상에 있다. 그러나 세상, 혹은 욕망은 구도자의 안에 있을 필요가 없다.
세상이 구도자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면 그는 물이 찬 배처럼 가라앉고 말 것이다.
구도자는 아무런 집착없이 세상을 떠다녀야 한다.
41
신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등에 업고 있는 아들을
찾아헤매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은 외계의 어느 곳에 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밖으로 신을 찾는 것은 내면의 신을 찾는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농부가 밭에서 아들을 등에 업은 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고 일이 끝나자 아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는 집으로 가서 아내에게 아들이 집에 왔는지 물어 보았다.
아내는 웃으면서 아이가 등에 있지 않느냐고 알려 주었다.
외부로의 탐구가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신을 우리가 잊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
42
종교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 한
인간은 신의 품안에 안길 수 없다.
종교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고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가르쳐주며 신에 대한 정의를 내려준다.
그러나 종교가 신을 느끼게 해주지는 못한다.
이것은 어떤 종교도 다다를 수 없는 곳 --내면에서의 작업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세상은 종교에 의해 나뉘어져 있다.
모든 종교의 목적은 하나인 신에게 도달하는 것이지만 각각의 종교들은 신에게 저마다 다른 이름과 형상을 부여했고 이렇게 해서 무한한 신을 한정지어 버렸다.
그래서 온갖 신이 만들어지고 각 신의 숭배자들은 다른 신을 배척한다.
우리가 신은 하나밖에 없으며 다만 여러 종교에 의해 각기 다른 이름과 형상으로 숭배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종교의 보편성은 확립될 것이다.
종교적인 사람이란 모든 종교에 숨어있는 보편성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모든 깨달은 존재들은 종교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행위와 가르침속에 보편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43
신을 찾으려는 각자의 길이
모두 종교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수만큼 많은 수의
종교가 존재한다.
종교란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성스러운 힘에 대한 믿음이다.
이 신성한 힘은 이름도 형상도 없다.
그것은 무한하다 --시작도 끝도 없다. 그것은 정신적 관념을 초월해 있으나 인간의 마음은 이 신성한 힘에 이름과 형상과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한다.
'하늘'이라고 말할 때, 우묵한 푸른 돔(dome)의 모습이 마음에 떠오른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신'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각자의 믿음에 따라 다른 형상을 마음속에 떠올린다.
아무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는 없다.
같은 방법과 같은 교리로 같은 형태의 신을 받아들인다 해도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신의 모습은 전부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이기심없는 봉사가 신을 찾는 길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사랑과 자비가 그 길이다.
어떤 이는 세상을 버리고 명상을 해야 하고 어떤 이는 신성한 힘에 복종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신성한 힘의 돌보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신에 대한 각기 다른 생각과 관념과 상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슴속의 신을 찾는 길은 사람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교회나, 사원이나 모스크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다.
그들은 찬송하고 기도드린다.
그러나 그들의 신에 대한 느낌은 모두 다르다.
그 신성한 힘에 대한 각자의 내면으로부터의 느낌은 각자에게 다른 종교가 된다.
이렇게 해서 개인의 수만큼 많은 수의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44
진리와 비폭력은
해탈을 찾아 날아오르려는
구도자의 양 날개이다.
대상의 본성을 이해하면 그것이 곧 진리이다.
육체의 본성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육체의 진리이다.
생각의 본성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마음의 진리이다.
육욕과 두려움과 분노와 탐욕 그리고 집착으로 더럽혀진 마음은 생각과 말과 행위의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으로 남에게 고통을 준다.
진실하지 않으면 비폭력을 지킬 수 없다.
그리고 비폭력적이지 않고는 진실할 수가 없다.
그둘은 새의 양 날개처럼 떨어져 있지만 항상 연결되어 있다.
마음은 항상 육욕과, 욕망과 분노로 오염되어 있다.
그것은 언제나 환상과 미혹을 낳는다.
그 결과로 생기는 세속에 갇히게 된다.
그러다가 그의 마음이 순화되고 인생의 진실을 이해하게 되면 마음은 모든 폭력적인 행위를 멈출 것이다.
그는 세속의 굴레로부터 놓여나고 참된 자아로 돌아가기 위해 떠날 것이다.
사냥꾼이 숲속의 초막에 사는 성자에게 사슴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사슴은 집안에 숨어 있었다.
성자가 "보지 못했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집안에 있고"라고 한다면 사냥꾼은 사슴을 죽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논리상의 진리의 허구성을 대다고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를 밝혀내어야만 한다.
사슴은 생명을 누릴 권리가 있다. 사냥꾼은 사슴의 생명을 뺏을 권리가 없다.
"나는 본 일이 없소"라고 말함으로써 성자는 훌륭히 진실을 지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폭력 -- 실재로 진리에 위배되는 -- 에의 연류로부터 구해냈기 때문이다.
45
육체는 마음이 타고가는 마차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자신의 마차를 잘 돌보아야만 한다.
육체는 두뇌의 메카니즘 속에 마음을 다고 있다.
육체가 죽으면 두뇌의 메카니즘도 죽고 마음의 네가지 작용은 정지한다.
마음은 오감과 감각 기관인 눈, 구, 코 등을 통해서 일한다.
마음은 열마리의 말(감각)이 끄는 마차(육체)를 모는 마차꾼이다.
이 말과 마차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잘 달릴 수가 없고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나그네길을 데려다 줄 마차를 필요로 하는 마음은 그들에게 깨뜻한 먹이를 주고 운동을 시키고 안팎을 깨끗이 하며 행위와 생각과 말을 순수히 하는 등으로 잘 손질하여야 한다.
46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한가지 장난을 못하게 하면
곧 다른 장난을 벌여 놓는다.
운동은 마음의 천성이다.
마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생각하고 갈망하고 느끼고 감각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 마음의 기능이다.
마음은 한가지 일을 금지당했다고 해서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당장 일을 벌인다.
그것은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물건을 움켜쥐고 던지고 찢어버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그것을 못하게 하면 다른 방향으로 기어가서 또 딴 일을 벌여 놓는다.
구도자에게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다.
마음의 부정적인 활동이 점차 제어되면 그것은 저절로 긍정적인 활동을 벌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음은 세속의 대상들로부터 빠져나와 신을 향해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