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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티베트의 즐거운 지혜 /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

작성자山木|작성시간24.09.10|조회수25 목록 댓글 1

두가지 형태의 자각
 
 
- 일어나는 모든 생각의 근본은 순수한 자각이다 -  
                                               펭가르 잠펠 상포
 
 
사실 순수 자각과 조건 지워진 자각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위대한 비밀이란 없다.
 
둘 다 자각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으며,
경험의 매 순간을 인식하고 등록하고
어떤 면에서는 '분류하는' 능력이라고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있다.
 
순수 자각은 깨끗한 크리스탈 공과 같다.
그 자체로는 무색이지만
당신의 얼굴, 다른 사람들, 벽, 가구 같은
모든 것을 비추는 능력이 있다.
 
그 공을 중심으로 돌면
방의 다른 쪽 부분이 보이고,
가구의 크기와 형태와 위치가 바뀔 것이다.
 
만일 그 크리스털 공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나무, 새, 꽃, 심지어 하늘까지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보이는 모든 것은 단지 반영일 뿐이다.
 
그것들은 크리스털 공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식으로도 크리스털 공의 본질을 바꿔 놓지 않는다.
 
이제 크리스털 공을
색깔이 있는 비단천으로 감쌌다고 해 보자.
반대쪽으로 돌아가든 다른 방으로 이동하든
밖으로 가지고 나가든
크리스털 공에 비치는 것들은
비단 천의 색깔로 인해 상당 부분 흐려질 것이다.
 
이것이 조건 지워진 자각에 대한 꽤 정확한 비유이다.
 
무지와 욕망과 혐오에 의해 물든 견해,
혹은 불잡음과 고정된 집착에 의해 흐려진 시각이 그것이다.
 
하지만 물들었다고 해도
그것들은 단지 크리스털 공에 비친 영상일 뿐이다.
 
그 영상들이
그것들을 비추는 크리스털 공의 본질을 바꿔 놓지는 않는다.
 
크리스털 공은 본래가 무색이다.

마찬가지로
순수 자각 그 자체는
항상 투명하고 모든 것을 비출 수 있으며,
심지어 그자신을 제한되고 조건 지워진 것으로 여기는
잘못된 견해조차도 비출 수 있다.
 
태양이 그것을 흐리게 만드는 구름을 비추는 것처럼
순수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런 고통뿐 아니라 스스로 창조한 고통의 슬픈 드라마,
즉 나 대 당신, 나의 것 대 당신의 것,
이 느낌 대 저 느낌, 좋음 대 나쁨, 쾌감 대 불쾌감,
변화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 대 영원불변을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한 희망 등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진리'는
갈망, 목마름, 고정된 집착으로부터의 최종적인 풀려남이다.
 
'소멸'이라는 단어가
현재 상황과는 다른 것 또는 더 좋은 것을 의미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안에 본래 있는 잠재능력을 인정하는 문제이다.
 
두카[(dukkha)고苦]의 소멸
혹은 두카로부터의 해방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순수 자각은 본래 투명하며
어떤 조건에도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 부끄러움, 죄책감, 탐욕, 경쟁심 등은
단지 색깔 있는 베일일 뿐이며,
문화적 배경, 가정환경, 개인적 경험에 의해
물려받고 강화된 관점들에 불과하다.

세번째 고귀한 진리에 따르면,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얼마만큼 내려놓는가에 따라 고통은 줄어든다.
 
욕망, 혐오, 집착을 억누르거나
'다르게 생각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는
이것을 이룰 수 없다.
 
오히려 의식을 내면으로 돌려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과 감정과 기분들을 관찰함으로써
그것들이 본래는 순수 자각의 표현임을 알아차리고,
나아가 그것들에 감사함으로써
두카를 소멸시키거나 두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가능하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질병의 원인이 곧 치료제인 것이다.
 
움켜쥐는 그 마음이
곧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는 마음인 것이다.

모든 것은 참본성의 표현
 
어둠 속에 살고 있다면  불빛을 찾지 않는가? - 붓다
 
 
불성은
승복을 입고 음식을 탁발하러 다니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붓다'는 '잠에서 깨어난 자'로 얼추 번역되는
산스크리트어이다.
붓다의 정식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2,500년 전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젊은 남자이다.
 
하지만 '불성'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의 붓다나 불교 수행자들만 독점하는
특성이 아니다.
만들어지거나 상상으로 지어낸 것도 아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안에 내재된 알맹이이며 본질이다.
행동하고 보고 듣고 무엇이든 경험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잠재능력이 곧 불성이다.
 
불교에서 '불성'이라고 부르는 이 참본성 때문에
우리는 배울 수 있고 성장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누구나 본래부터 붓다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참본성은 상대적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직접 경험해야 하며,
직접적인 경험은 말로 규정짓기가 약간 어렵다. .....중략 ....
 
참본성은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이 표현 불가능한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붓다는 안내 표지판이나 지도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약간의 실마리를 주었다.
 
붓다가 참본성을 설명한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이 가진 세 가지 특성이다.
 
참본성의
첫 번째 특성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무엇이든 알 수 있는
무한한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특성은
고통의 조건으로부터 나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구출하는
무제한의 힘을 가진 무한한 잠재 능력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 특성은
참본성이 측량할 길 없는 사랑과 자비라는 점인데,
이것은 모든 생명체에 대해 느끼는 무한한 유대감,
타인을 향한 열린 마음이다.
 
이 마음이 모든 존재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려는 동기가 된다.

많은 이들이 붓다의 이 설명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며,
배움과 수행을 통해
그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자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붓다는
자신이 발견한 방법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하게 진실한 길이라고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많은 불교 경전들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 이것은 단지 내가 경험한 것이며 내가 깨달은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는 이유 때문에  말을 믿지 말라.
그대들 스스로 그것을 시험해 보라 -
 
붓다는
자신이 안 것과 알아낸 방식에 대해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 것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참본성에 대한 가르침에서
그는 청중들에게 일종의 사고실험을 제시했다.
 
그는 참본성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방식을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찾아보도록 권했다.
 
그는 등불이 켜져 있는,
차양이나 덧문이 내려진 집에 비유하며
이 실험을 소개했다.
 
집은 몸과 마음과 감정이라는
겉으로는 견고해 보이는 조건을 상징한다.
 
등불은 우리의 참본성을 가리킨다.
 
차양과 덧문이 아무리 단단히 내려져 있어도
필연적으로 집 밖으로 작은 빛줄기가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그 빛이 차양이나 덧문 틈새로 비쳐 나옴에 따라
우리는 이따금 직관이라는 이름의 지혜를 경험하곤 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사람과 상황과 사건들에 대한 '본능적인 느낌'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거나
편안함을 준 순간은
덧문 틈새로 사랑과 자비의 빛이 비쳐 나온 순간이다.
 
보답으로
이익이나 무엇인가를 얻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아서 했을 뿐이다.
 
누군가 고통 속에 있을 때
눈물을 흘리도록 어깨를 빌려주거나
길을 건널 때 도와주는 간단한 행위일 수도 있고,
아픈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 옆에 앉아 있는  같은
더 오랜 베풂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생명의 위험조차 생각하지 않고
물에 빠진 낯선 사람을 구하러 강으로 뛰어든 극적인 이야기를
우리 모두 들은 적이 있다.
 
- 1990년대 주식 폭락으로 전 재산을 잃은 투자가 :
"조금도 미치지 않았고, 자신감도 잃지 않았으며, 우울증에도 빠지지 않았으며 조금씩 재투자를 시작해 탄탄한 재정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
 
- 부모나 자녀나 배우자가 심각한 질병과 싸우고 있으면서도 직업과 아내나 자녀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사람들 :
"이 모든 일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습니다.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깊이와 무게를 가늠하는 지혜,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행동할까를 선택하는 능력,
사랑과 자비가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태도가 그것이다.
 
참본성의 세 가지 특성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모든 의심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용기이다.
 
상황을 직접 대면하는 일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
- 사랑, 외로움, 미움, 질투, 기쁨, 욕심, 슬픔 등이
본질적으로는 우리 안의 참본성이 지닌 무한한 잠재 능력의
표현임을 깨닫는 문이 된다.
 
이 원리는
세 번째 고귀한 진리(苦集滅道  )
'긍정적인 예후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느끼는 불편이 무엇이든,
미묘한 것이든 강한 것이든 아니면 그 중간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매우 제한되고 조건 지워지고
가정적인 시각에서
얼마큼 벗어나는 가에 따라
또한 무엇이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와 자신을
얼마큼 동일시하는가에 따라
그 불편함 역시 줄어든다.
 
그렇게 될 때
마침내 참본성 안에서 편히 휴식하는 일이 가능하다.
한 마리 새가 자신의 둥지로 돌아와 편히 쉬는 것처럼.
 
그 순간 고통은 소멸된다.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고, 저항할 것도 없다.
심지어 죽음조차 당신을 괴롭힐 수 없다.

번뇌에서 깨달음을
 
- 고통은 좋은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 산티데바
 
 
'네 번째의 고귀한 진리'인 '도에 이르는 진리'는
고통을 소멸시키려면
마음이 지닌 이분법적인 습관과
그것들을 붙들어 두고 있는 환영들을
깨부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단, 그것들과 싸우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포옹과 탐구를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두카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생겨난 근원을 발견하도록 돕는
길 안내자이다.
 
그것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이용당하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할 수가 있다.

처음에는 생각과 감정과 신체적인 느낌들이
다 함께 너무도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그것들이 흐릿하게만 보일 뿐
하나씩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을성을 가지고 조금만 노력하면
생각과 마음 자세와 믿음들 뒤쪽의
전체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매우 확실하고 논리적이고
현실 속에 단단히 뿌리내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다 옳은 것들이야'
 
그러나 계속 바라보다 보면
몇 군데의 틈새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의 생각은 상상했던 것만큼
그렇게 견고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오래 바라볼수록 더 많은 틈이 보인다.
 
그래서 마침내는
나 자신과 주위 세상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었던
믿음과 의견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약간의 혼란이 찾아오고
방향감각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면
우리 자신의 참본성과 실체의 본질을
훨씬 깊이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 길로 떠나기 전에
먼저 지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곳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여행 도중에 마주치기 쉬운 돌부리들에 대해
깨어 있기 위해서다.
 
특히 뚫고 지나가기 어려운 고정된 믿음들을 조심해야 한다.
 
나의 존재가 고정불변하고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실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고정불변한 
 
- 기억하라영원한 것은 없음을 - 장곤 콩툴
 
 
자동차와 컴퓨터는 고장이 난다.
 
사람들은 떠나가고 직장을 바꾸고 자라고 나이들고
아프고 결국은 죽는다.
 
경험을 뒤돌아보면
우리는 더 이상 갓난아이나 초등학생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고 새 직장으로 옮기는 등
또 다른 변화들을 맞이하여 종종 그 변화들을 환영한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겪는 변화들이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이 아프고 늙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고,
혹은 배우자나 연인관계에 있는 사람에게서
"난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라는 통보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심지어 특정한 변화들을 인식할 때조차도
우리는 은연중에 '고정불변'이라는 생각에 매달린다.
 
'나', '타인' 그리고 그밖의 존재들의 본질은
시간이 흘러도 고정불변한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 따르면
어제의 나였던 '나'와 오늘의 나인 '나'는 같다.
 
어제 본 탁자와 책은 오늘 보는 탁자와 책과 다르지 않다.
 
어제 강연을 한 밍규를 린포체와
오늘 강연을 하고 있는 밍규르 린포체는 같은 사람이다.
 
때로는 감정조차도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어제 나는 사장에게 화가 났다. 나는 오늘도 그에게 화가 난다.
내일도 그에게 화가  것이다.
결코 그를 용서할  없을 것이다.'
 
 
붓다는
이 착각을
겉으로는 튼튼하고 건강해 보이지만
속에는 구멍이 난 썩은 나무를 오르는 데 비유했다.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죽은 나뭇가지에 더욱 매달리게 되고
나뭇가지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다.
 
결국 우리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추락의 고통은 높이 올라갈수록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음과 감정의 차원에서
'당신'과 '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항상 변하고 있다.
 
열 살 때의 '나'와 스무 살 때의 '나'와 서른 살 때의 '나'는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열 살의 '나'는
불안감으로 가득하고 큰 소리에 놀라며
아버지뿐만아니라 아버지 제자들의 눈에 낙오자로 찍힐까 봐
겁을 집어먹은 아이였다.
 
스무 살의 '나'는
티베트 불교 수행에 통달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친 3 안거수행을 막 끝낸 상태였다.
 
수도원을 새로 하나 짓늘 걸 도우면서 수도원에 소속된 학교에 다니고,

인도에 있는 큰 수도원의 일상적 업무를 총괄하면서,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승려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른네 살의 '나'는
공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중략(국제적인 활동 등)......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 역시
마음의 변화와 감정의 변화들을 겪는다.
 
내가 만난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고 실토한다.
 
어느 날 그들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만난다.
모든 것이 좋아 보인다.
상대방은 행복해 보이고 삶에 대한 기대에 차 있으며
그날의 도전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하루나 일주일 뒤 만났더니
그 똑같은 사람이 화가 나고 우울해져 있다.
침대에서 나올 기운조차 없으며
삶에서 어떤 희망도 볼 수 없다.
 
이렇듯 때로 변화들은 너무나 극적이다.
알코올 중독이나 다른 중독으로 그렇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사람 맞나?'
 
덧붙여 수년간 과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사람의 육체는
우리가 전혀 자각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미세 차원에서
끊임없는 변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매 순간 호르몬을 생성하고 몸의 온도를 조절한다.
 
당신이 이 문장을 다 읽기도 전에
이미 당신 몸 안의 몇몇 세포는 소멸되어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다.
그 세포들을 구성하는 분자와 원자와 소립자들도 이동된다.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방 안의 가구뿐아니라
심지어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와 원자와 소립자들도
계속해서 대체되고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다.
 
이 책의 종이들은 누렇게 바래지고 구겨지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 방 안의 벽에 틈이 생길 수도 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탁자의 페인트가 일부 벗겨질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한다면
과연 어디서 고정불변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나의 '나', 많은 '나'
 
-  순간은 비슷하며,
 비슷함 때문에 우리는 착각에 빠진다 - 감포퐈
 
 
고정불변함의 착각으로부터 개별성의 생각이 일어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도 고정불변하게 지속되는 '중심의 주인공'은
나눌 수 없으며 유일무이한 개체라는 믿음이다.
 
심지어 "그 경험이 나를 변화시켰어"라거나
"나는 이 세상이 달리 보여"와 같은 말을 할 때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나'라는 개념을
하나의 단일한 존재, 하나의 고정된 내적 '얼굴'인 것처럼
단언한다.
 
마치 그 얼굴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듯이.

개별성은 그토록 매우 미묘한 착각이라서
그것을 지적해 주기전까지는 알기가 힘들다.
 
최근 한 여성이 내게 비밀을 털어 놓았다.
"나는 참을 수 없는 결혼생활에 갇혀 있어요.
나는 결혼할 무렵에는 남편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그를 증오해요.
하지만 내게는 아이가 셋이나 있고,
나는 아이들에게 기나긴 이혼 투쟁의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아이들이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나는 원해요.
또한 아이들이 나고 자란 집에서 떠나는 것을
나는 원치 않아요.
그러나 나는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 일련의 발언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단어는 무엇인가????    
 
'나'이다.
 
그런데 그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남편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증오하는 사람인가?
'나'는 긴 이혼 투쟁을 피하길 원하는 세 자녀를 둔 엄마인가?
아이들이 아버지와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는 여자인가?
 
거기에 얼마나 많은 '나'가 존재하는가?

한 명? 두 명? 세 명?
 
나올 법한 대답은 당연히 하나의 '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나'는
다른 상황들에서 다른 방법으로 반응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다른 면들을 내보이며,
상황과 조건의 변화들이나 새로운 생각과 경험에 반응해
일련의 새로운 태도와 감정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말로 하나일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회사 동료나 식구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나'가,
책을 잃고 텔레비젼을 보고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 같은
또 다른 상황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나'와
동일한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은 모두 나의 일부분들이다."
 
그런데 만일 '부분들'이 있다면 하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독립된 
 
- '' 하나의 이름 안에 존재하는가- 감포퐈
 
강연을 할 때
이따금 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게임을 해 보도록 권한다.
 
승복의 겉옷 속에 내 몸의 대부분을 숨기고
단지 엄지손가락만 추켜올리며 묻는다.
 
"이것이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인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한다. "아니요"
 
그러면 나는 다섯 손가락을 다 펼쳐 보이며 묻는다
"이건 어떤가요? 이것이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인가요?"
다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한다. "아니요"
 
내가 팔을 완전히 내보이며 똑같은 질문을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아니요"하고 답한다.
 
하지만 승복 겉옷을 벗어 의자에 내려놓고
사람들이 내 얼굴과 팔을 비롯해
나머지 몸을 전부 볼 수 있도록 한 다음
똑 같은 질문을 하면
그 대답은 항상 분명하지만은 않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아, 이제는 밍규르 린포체인 당신의 전부를 볼 수 있군요."
 
하지만 이 '전부'는 여러 다른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엄지손가락, 손, 팔, 머리, 다리, 심장, 폐, 그리고 그 밖의 것들로,

이부분들 역시 더 작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피부, 뼈, 혈관들... 그것들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고,
세포들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들은 소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정한 다른 요소들,
예를 들어 내가 자란 문화, 내가 받은 훈련,
안거 수행에서의 나의 경험들,
지난 12년간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 역시
'밍규르 린포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이라고 여길 수 있다.
 
  .... 중략 .....
 
'밍규를 린포체'는 하나의 독립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겉모습은 다른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다양한 환경에 의해 조건 지워진다.
 
고정불변한 존재, 개별적인 존재라는 관념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존재라는 것은 하나의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이것은 나 자신, 다른 사람, 시간, 장소, 사물,
심지어 생각과 감정들까지도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며
그 자체로서 온전한 개체로 정의내리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독립된 존재'라는 것이 하나의 착각이라는
사실을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의 엄지손가락이 당신인가?
아니면 당신의 팔이? 당신의 머리카락이?
지금 몸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당신인가?
당신이 고통받게 될 질병이 당신인가?
 
당신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혹은 맞은편 테이블에서 앉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그 사람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의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들을 살펴보면
그들 중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며
서로 관계 맺어진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자는
적어도 서너 개의 다리와 앉을 수 있는 밑판과
기댈 수 있는 등받이가 있어야 한다.
 
다리, 밑판, 등받이를 없애면

것은 의자가 아니라 몇 개의 나무 조각이나 금속
또는 각 부분들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 몸의 부분들처럼,
이 물질들은
분자와 원자와 소립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현대물리학자의 시각에서 보면
소립자들을 구성하는 에너지다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든 작은 부분들이
하나의 의자를 구성하는 데 사용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환경과 조건 아래서 함께 모여야만한다.
 
거기에 누군가, 아마도 한 사람 이상이
의자의 제각기 다른 부분들을 만드는데 종사해야 한다
..... 중략 ......
누군가 그것을 구입해야 하고
집이나 사무실로 옮겨야 한다.
 
따라서 의자처럼 간단한 사물조차도
본래부터 존재하는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며
원인과 존건들의 조합을 통해,
불교용어로는 '상호의존성'이라고 불리는
원리로 탄생한 것이다.
 
심지어 생각과 감정과 신체적인 느낌도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며
다양한 원인과 조건들을 통해 일어난다.
 
분노와 좌절감은
아마도 밤에 잠을 못 잤거나 논쟁을 벌였거나
혹은 마감 날짜를 맞춰야 하는 압박감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텅 빈 '나'
 
나는 누구인가?
 
이 의문이 일상의 삶의 거의 매 순간 미묘한 차원에서
자주 우리를 따라 다닌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시도를 해도 실제로 '나'를 발견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의견들은 수없이 변화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나'의 여러 가지 모습을 반영한다.
몸은 끝없는 변화를 겪는다.
 
따라서 우리는 상황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본래의 '나'를 찾기 시작한다.
 
우리는 마치 보호해야 할 '나'라도 있는 것처럼
고통을 피하고 평안과 안정을 추구한다.
 
마음 속에 고통과 불안이 일어나면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려고 노력한다.

즐거운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붙잡아 두려고 한다.
 
이것은 고통과 즐거움, 평안과 불안 등의 감정이
'나'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매우 이상하게도
자신의 반응들을 아무리 깊게 관찰해 보아도
이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가질 수가 없다.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확실한 형태와 색 혹은 다른 어떤 물리적인 차원이 있는가?
영원한 '나' 혹은 경험에 조건 지워지지 않는 '나'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심사숙고한다고 해서
'나'의 경험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심사숙고는 철학적 관점에서는 흥미 있을지 모르지만
매 순간의 경험을 다루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통찰 수행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경험의 중심점인 ''에게 집중해서 매달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일까지 포함한다.

이 참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편안하고 기민한 몸자세를 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선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상 없는 주시를 통해 마음을 편안히 휴식한다.
그런 다음 '나'를 찾는다.
이 '나'는 생각과 감정과 기분 등이 오가는 것을
지켜보는 관찰자이다.
 
먼저 이 과정에는 약간의 분석이 포함될 수 있다.
내 손이 '나'인가? 내 발이 '나'인가?
'나'는 다리를 포갤 때 느껴지는 불편함인가?
아니면 떠오르는 생각이 '나'인가,
혹은 느끼는 감정이 '나'인가?
그것들 전부가 '나'인가?
 
그런 다음 우리는
이 분석의 과정을 '나'를 찾는 쪽으로 전환할 수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 조사를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결론에 도달하려는 유혹이 너무 강하다.
 
이 수행의 핵심은
'나'가 고정불변하고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란
분석이나 철학적 논리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한번 맛보면
새로운 차원과 가능성을 열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있는
직접적인 체험이다.
 
그것이 통찰 명상의 핵심이다.

참본성을 가로막는 것들
 
- 다시 태어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습관들이다  -
                                                    달라이 라마
 
참본성에 대한 가장 자세한 가르침 중 하나인
<보성론 寶性論>
참 본성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우리의 다섯가지 습관을 제시한다.
 
현대 심리학 용어로는 이 습관들을 흔히 '왜곡'이라 일컫는다.
우리 자신, 다른 사람, 주변 세상에 대한 제한된 관점에
우리를 가두는 인지구조인 '스키마'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구분하고
그것들에 반응하는 습관인데,
 
이 습관들이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괜찮거나 잘 적응하거나 정상이라는
정신치료학적인 판단을 넘어서서
자유롭고 투명하고 지혜롭고 경이로운
순수자각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붓다의 계획은
단순히 '괜찮아지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을 향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붓다가 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경험, 즉 슬픔, 수치심, 질투, 절망, 병,
심지어 죽음에조차도
순수한 시각으로 다가설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능력을 깨우는 일이다.
 
참본성을 가로막는 첫 번째의 것은
'소심함' 또는 '움츠러듦'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이것은
자기자신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깊이 뿌리박힌 성향이다.
 
생각과 느낌과 성격과 행동 등에서
단점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과장되게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우리 자신이 무능하고 불충분하고 '나쁜' 존재로 여겨진다.
 
.... "난 내 자신이 싫어요"...라며
자기혐오감에 사로잡힌 어느 여인에 대한 이야기와
늘 불안과 공포감에 지배당하던 느낌과 생각들,
좌절감에 빠지곤 했던 저자의 어린 시절 회고담 (중략) ......
 
자기혐오는 어쩌면 하나의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지만
참본성을 가로막는 첫 번째 장애인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시각이다......
 
이를테면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혹은 흥분한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나 행동에 대한
자책감과 수치심과 분노가 그것이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 역시 '낮은 자존감'에 대해 말했다.
 
무엇인가를 성취할 능력에 대한 끝없는 의심,
무엇이든 자신의 탓으로 돌리거나
자신이 관여하는 일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고
여기는 꽤 부리깊은 습관들이 그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충분히 훌륭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더욱 혹사시키면서
완벽주의자나 일 중독자가 되어간다.
그들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절망, 무력감, 자포자기 등의 고통스런 기분들은
몸의 질병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심리적 장애인 우울증은
슬픔이나 낙담과는 사뭇 다르다.
 
심한 자기비난은 몸에 병이 생길 가능성을 높이며,
이 신체적인 문제는
다시 부정적인 생각과 기분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낳는다.
 
참본성을 가로막는 다섯 가지의 장애 중에서
자기비난은 가장 눈에 띄기 쉽다.
 
열등감과 수치심과 자책감들은 의식의 표면에서 활동한다.

반면에 두 번째의 장애에 해당하는,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알아차리는 일은
약간 더 어렵다.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들에 대한 경멸감'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이 두 번째의 장애는
자기비난의 반대편 극단,
곧 타인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이다.
 
이 관점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보다 덜 중요하고 덜 유능하며 덜 가치있다고
옹색한 눈으로 해석한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겪는 불행에 대해
남을 탓하는 성향이다.
 
'다른 누군가'가 언제나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다른 누군가는
그냥 잘못됐고 나쁘고 고집세고 무지하며
영악스럽다는 것이다.
 
자기비난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공감 부족을 나타내는 반면에
그 스펙트럼의 반대편 끝은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을 볼 능력과 그들이 말하려는 것을
귀 기울여 듣는 능력의 부족을 나타낸다. ... 사례 2 가지 (중략) ...

세 번째의 장애는 여러 가지로 번역될 수 있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보는 것',
'진정한 것이 아닌 것을 진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
더 막연하게는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로 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단어들 모두는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혹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보는 속성들이 실체이며 고정불변하고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에 매달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성향을 우리는 '영원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의 특정한 면들을
원인과 조건들의 일시적인 조합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며 영원한 실체라고 일반화시키는 경향이다.
 
이 관점을 더 간단히 설명하면
'고착화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습이 나의 본래 모습이며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존재 방식이며,
 상황들은 본래 이러하다.'라고 굳어진 믿음이다.
 
네 번째 장애는 그 반대편 관점으로,
'진짜인 것을 진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참본성을 부정하는, 혹은 더 심하게는 전부 거부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순수하고 투명하며 자유로운 본성이라는 생각은
아주 멋지게 들리지만,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은 거의 공상처럼 느껴진다.
신비주의자들이 지어낸 생각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진흙을 영원한 무엇인가로 보는 것이 세 번째 장애라고 한다면
네 번째 장애는 오직 진흙만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관점은 종종 '허무주의'라 불린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안에
자유와 지혜, 힘. 잠재능력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절망감이다.
 
더 일반적인 용어로는 이것을 근본적인 '시각 장애'라 부른다.
황금은커녕 심지어 돌조차도 없기 때문에
진흙을 조금이라도 벗겨내려는 시도조차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참본성을 가로막는 것들'의 마지막 다섯 번째 장애는
다른 네 가지 장애들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는 '아상我相'이라고 번역되어 왔다.
 
오늘날의 언어로는 '나의 신화'라고 풀이할 수 있다.
 
즉 '나'와 '나의 것'이라는 관점에서
필사적으로 안정을 갈구하는 것이다.
 
끝없이 변화하는 경험 속에서도
'나'의 상황, '나'의 의견이
하나의 정지된 기준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견,
우리 자신의 이야기,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신화에 매달린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손잡이를 붙드는 것과
똑같은 필사적인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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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4.09.10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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