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Man Is An Island
인간은 고도孤島가 아니다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Our life, as individual persons and
as members of a perplexed and struggling race,
provokes us with the evidence that it must have eaning.
Part of the meaning still escapes us.
Yet our purpose in life is to discover
this meaning, and live according to it.
우리는 개인으로서 그리고 복잡하고 투쟁적인
종족의 일원으로서 삶을 살아가면서
인생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증거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의미를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We can help one another to find out the meaning of life,
no doubt. But in the last analysis the individual person is
responsible for living his own life and for "finding himself."
우리는 분명 서로를 도움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개체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가진다.
You cannot tell me who I am,
and I cannot tell you who you are.
That is something you yourself can only
discover from within.
당신이 진실로 누구인가를 결코 말해 줄 수 없다.
그것은 당신만이 당신 자신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we are instinctively gifted in watching
how others experience themselves.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경험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The greatest of disadvantages is that
we are too prone to welcome everybody else's wrong
solution to the problems of life.
가장 해로운 것은, 삶의 문제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내 놓은 그릇된 해결책을 우리는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That is why an optimistic view of life is not necessarily
always a virtuous thing.
낙천주의적인 인생관이 언제나 반드시 미덕인 것만은
아닌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In a world where every lie has currency,
is not anxiety the more real and the more
human reaction?
모든 거짓말이 통용되는 이 세계에서, 보다 더 사실적이고
보다 더 인간적인 반응은 불안이 아닐까?
Now anxiety is the mark of spiritual insecurity.
It is the fruit of unanswered questions.
불안은 곧 영혼이 불안정하다는 표시이다.
그것은 의문들의 해답을 풀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the first responsibility of a man of faith is to make his
faith really part of his own life, not by rationalizing it
but by living it.
신앙인이 가져야 할 가장 첫째가는 책임은
자신의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함 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써 진실로 그 신앙을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What every man looks for in life is his own salvation and
the salvation of the men he lives with.
By salvation I mean first of all the full discovery of
who he himself really is.
모든 인간이 인생에서 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과
그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원이다. 내가 말하는 구원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가를 완전히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Therefore this discovery of ourselves is
always a losing of ourselves-a death and a resurrection.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
즉 죽음과 부활을 뜻한다.
To see all things coming forth from God in the Lagas
who becomes incarnate and descends into the lowest depths of is own creation and gathers all to Himself in order to
restore it finally to the Father at the end of time.
To find "ourselves" then is to find not only our poor,
limited, perplexed souls, but to find the power of God that raised Christ from the dead and "built us together in Him
unto a habitation of God in the Spirit"
(Ephesians 2:22).
그분은 인간으로 육화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그것을 복원하기 위해 모두를 당신에게로 그리고 마침내는 아버지에게로 모이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우리의 보잘것 없고, 유한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영혼을 발견하는 것일 뿐만아니라,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시어 "우리들을 그분을 중심으로 함께 세우셔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게 하신(에페소서 2 :22)" 하느님의 권능을 발견하는 것이다.
I cannot discover God in myself and myself in Him unless
I have the courage to face myself exactly as I am, with all my limitations, and to accept others as they are,
with all their limitations.
한계 투성이인 나 자신의 진면목을 올바르게 대면할 용기가
없다면, 그리고 한계 투성인 다른 사람들의 진면목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면, 나는 나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과 그 분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My pleasures and comforts are, in a certain sense,
taken from someone else. And when my pleasures and
comforts are inordinate,
they are not only taken from another, but they are stolen.
I must learn to deprive myself of good things in order to
give them to others who have a greater need of them than I.
어떤 의미에서 나의 기쁨과 위안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기쁨과 위안이 지나칠 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온 것일 뿐만아니라,
그들에게서 훔쳐 온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을 나보다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배워야 한다.
We cannot love ourselves unless we love others,
and we cannot Ieve others unless we love ourselves.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없고,
또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That was what the poet John Donne realized during a
serious illness when he heard the death knell tolling for
another.
"The Church is Catholic, universal," he said, "so are all her actions, all that she does belongs to all. • • • Who bends not his ear to any bell which upon any occasion rings?
but who can remove it from that bell which is passing a
piece of himself out of this world?"
시인 존 던이 심하게 앓는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 울리는 조종(弔鐘) 소리를 들었을 때 깨달았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교회는 만인의 것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것의 모든 행동과 그것이 속해 있는 모든 것도 그러한다..... 어느 때에나 울리는 종소리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누가 이 세계에서 자기 자신의 한 조각을 보내고 있는
저 종소리를 멀리 할 수 있겠는가?"
Every other man is a piece of myself,
for I am a part and a member of mankind.
Every Christian is part of my own body)
because we are members of Christ.
나는 인류의 일부이고 일원이기 때문에
모든 다른 이들은 나 자신의 한 조각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나의 몸의 일부이다.
LOVE CAN BE KEPT ONLY BY BEING
GIVEN AWAY
사랑은 줌으로서만 받을 수 있다
To love another is to will what is really good for him.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진실로 유익한 것을 해주고자 결심하는 것이다.
In order to love others with perfect charity
I must be true to them, to myself, and to God.
완벽한 박애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면 나는 그들에게,
나 자신에게, 그리고 하느님에게 진실해야 한다.
Therefore the man who loves himself too much is incapable of loving anyone effectively, including himself.
그러므로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한 어떤 사람도 효과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
SENTENCES ON HOPE
희망에 대하여
When we do not desire the things of this world
for their own sake, we become able to see them as they are.
우리가, 이 지상의 것들을 그 자체로서 갈망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THE WORD OF THE CROSS
십자가의 의미
Only the sufferings of Christ are valuable
in the sight of God,
하느님이 보시기에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고통 뿐이다.
The Cross of Christ says nothing of the power of suffering or of death.
It speaks only of the power of Him
Who overcame both suffering and death
by rising from the grave.
십자가는 죽음에서 부활하심과 고통,
둘 다를 이기신 그분의 전능에 대해서만 말해준다.
For Jesus is not merely someone who once loved
men enough to die for them.
He is a man whose human nature
subsists in God, so that He is a divine person.
His love for us is the infinite love of God,
which is stronger than all evil and cannot
be touched by death.
예수는 단순히 인간을 위해 죽을 만큼 인간을 사랑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분은 인간 이면서 동시에 인간적 본성이
하느님 안에서 생활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신성한 인간<神人>이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죽지 않으셨다고 믿는 사람만이 고통을 하느님에게 봉헌할 수 있다.
The saint is not one who accepts suffering
because he likes it, and confesses this preference before God and men in order
to win a great reward.
And he does this not because
he thinks it is an achievement, but
because the charity of Christ in his heart demands that it be done.
그러나 성인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에 의해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고자 한다.
또 성인은 고통이 완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고통을 당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받아들인다.
When a man suffers, he is most alone.
Therefore, it is in suffering that we are most tested
as persons.
How can we face the awful interior questioning?
What shall we answer when we come to be examined
by pain?
사람은 고통을 겪을 때 가장 홀로이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장 큰 시험을 받는 것은 고통 중에 있을 때이다.
우리는 두려운 내면의 의혹과 얼마나 맞 부닥칠 수 있을까?
고통에 의해 시험 당하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이라 응답할 것인가?
When suffering comes to put the question:
"Who are you?"
we must be able to answer distinctly,
and give our own name.
By that I mean we must express the very depths of what we are, what we have desired to be, what we have become.
고통을 당할 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당산은 누구인가?" 우리는 거기에 분명히 대답하고
우리 자신의 이름을 댈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지금 어떠한 존재인가,
우리는 무엇이 되기를 원했는가,
우리는 무엇이 되었는가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It makes some sense only when it is plunged in the waters
of the sacrament. Only these waters give it power to wash
and purify.
Only baptism sets out clearly who it is that must be formed and perfected by tribulation.
태양 아래서 지금까지 살았던 다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게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고통과 사랑을 재생시켜야 하는 개인적인 소명을 우리에게 부여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은 시련을 통해 형성되고 완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 준다.
We are created to will what God wills,
to know what He knows, to love what
He loves. Sin is the will to do what God does not will, to know what He does not know, to love what He does not love.
우리는 하느님이 뜻하시는 바를 소망하도록,
그분이 알고 있는 것을 알도록,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
죄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수행하고,
그분이 알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
그분이 사랑하지 않는 것을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First of all, divine strength is not usually given us until
we are fully aware of our own weakness and know that
the strength we receive is indeed received:
and that it is a gift.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약함을 완전히 자각하고
우리가 받은 힘이 진실로 받은 것임을,
즉 그것이 선물이라는 것을 알 때 까지는,
신성한 힘은 보통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Sincerity
진실함
We make ourselves real by telling the truth.
우리는 진실을 말함으로써 실재한다.
We cannot know truth unless we ourselves are
conformed to it.
우리 자신이 진실을 따르지 않고서 진실을 알 수 없다.
We must be true inside, true to ourselves,
before we can know a truth that is outside us.
우리는 우리의 외면에 있는 진실을 알기 전에 먼저
내면에 진실하고 우리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What, then, is truth?
Truth, in things, is their reality.
In our minds, it is the conformity of our knowledge
with the things known.
In our words, it is the conformity of our words
to what we think.
In our conduct, it is the conformity of our
acts to what we are supposed to be.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진실은 사믈들에 있어서는 그것들의 실재이다.
우리이 마음 속에서는,
우리의 지식과 알려진 것들과의 일치이다.
우리의 말 속에서는, 그것은 우리가 한 말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의 일치이다.
우리의 행동에서는, 그것은 우리가 한 행위와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과의 일치이다.
The fact that men are constantly talking shows
that they need the truth,
and that they depend on their mutual
witness in order to get the truth formed and
confirmed in their own minds.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진실을 요구하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진실을 형성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이 상호간에 증언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But the fact that men spend so much time talking about
nothing or telling each other the lies that they have heard
from one another or wasting their time in scandal and
detraction and calumny and scurrility and ridicule shows
that our minds are deformed with a kind of contempt for
reality. Instead of conforming ourselves to what is,
we twist everything around, in our words and thoughts,
to fit our own deformity.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대해 얘기하는 데,
또는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거짓말을 또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데, 도는 추문과 험담과 비방과 득점과 조롱을 하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 현실에 대한 일종의 경멸감으로 인해
불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점점 더 진실에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을 잃어가고 있다.
our restless tongues bear constant witness
to the disorganization inside our souls
우리의 쉬지 않는 혀는 우리의 영혼의 내부가
혼란되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다.
Truthfulness, sincerity, and fidelity are close kindred.
Sincerity is fidelity to the truth.
Fidelity is an effective truthfulness in our promises and
resolutions. An inviolate truthfulness makes us faithful to
ourselves and to God and to the reality around us:
and, therefore, it makes us perfectly sincere.
정직함(truthfulness), 진실함(sincerity), 충실함(fidelity)은
가까운 친척들이다. 진실함은 진실에 충실하는 것이다.
충실함은 우리의 약속과 결심들을 정직하게 지키는 것이다.
더렵혀지지 않은 정직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하느님과 우리를 둘어싼 현실에 충실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를 완전히 진실하게 한다.
Sincerity in the fullest sense must be more than
a temperamental disposition to be frank.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실함은
솔직하다는 기질적 성향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Sincerity must be bought at a price: the humility
to recognize our innumerable errors,
and fidelity in tirelessly setting them right.
진실함은 댓가를 치러야만 얻어진다.
즉 우리의 수많은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겸손과,
지치지 않고 그것을 올바르게 고치는 성실성이
바로 그 댓가이다.
The sincere man, therefore,
is one who has the grace to know that he may be
instinctively insincere, and that even his natural
sincerity may become a camouflage for
irresponsibility and moral cowardice:
as if it were enough to recognize the truth,
and do nothing about itl
그러므로 진실한 사람은
자신이 본능적으로 진실되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자연적인 진실함은 무책임과 도덕적 비겁함 - 진실을 잘 알고 있는 체 하지만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 의 눈가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은총을 받은 사람이다.
We would rather buy a bad toothpaste that is well
advertised than a good one that is not advertised at all.
우리는 전혀 광고되지 않은 좋은 치약보다는
광고가 많이 된 나쁜 치약을 산다.
What you think of me depends on
what you think of yourself.
나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당신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
Perhaps you create your idea of me out of material that
you would like to eliminate from your own idea of yourself. Perhaps your idea of me is a reflection of
what other people think of you.
Or perhaps what you think of me is simply
what you think I think of you.
아마도 나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당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투사한 것일 것이다.
또 아마도 당신이 나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은 단순히
내가 당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Sincerity is impossible without humility and
supernatural love.
진실함은 겸손과 초자연적인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But my understanding of them is always clouded by
the reflection of myself which I cannot help seeing in them.
그러나 내가 그들을 이해하려고 한 나 자신의 그림자로 인해 언제나 가리워진다.
False sincerity has much to say,
because it is afraid.
True candor can afford to be silent.
It does not need to face an anticipated attack.
Anything it may have to defend can be
defended with perfect simplicity.
거짓된 진실함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한다. 참된 솔직은 침묵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것은 예측되는 공격과 부딪칠 필요가 없다.
방어해야 할 것이 있으면
그것은 완전한 성실로써 방어할 수 있다.
Fear is perhaps the greatest enemy of candor.
How many men fear to follow their conscience
because they would rather conform to the opinion of
other men than to the truth they know in their hearts!
How can I be sincere if I am constantly changing my mind to conform with the shadow of what I think others expect of me?
두려움은 아마도 솔직의 가장 커다란 적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따르기를
두려워 하고 있는가!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있는 진실을 따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른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한다고 생각하는 것의
그림자에 맞추기 위해 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바꾼다면,
어떻게 내가 진실해 질 수 있겠는가?
They want me to be what I am in their sight:
that is, an extension of themselves.
They do not realize that if I am fully myself,
my life will become the completion and the fulfillment of
their own, but that if I merely live as their shadow,
I will serve only to remind
them of their own unfulfillment.
그들은 내가 그들이 보는 관점에서의 나,
즉 그들 자신의 확장이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내가 완전히 나 자신일 때,
나의 삶은 그들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실현하게 될 것이며,
내가 단지 그들의 그림자로서 산다면 그들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상기 시켜줄 뿐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 결국 진실함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이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을 알고 자기가 아는 대로
그것을 나타내는 사람이기 보다는,
순수한 사랑으로써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ASCETICISM AND SACRIFICE
금욕과 희생
There is only one true asceticism:
that which is guided not by our own spirit
but by the Spirit of God.
진정한 금욕주의는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도 된다.
Grace inspires us with no desire except
to do the will of God,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소망하지 않는다.
Those, then, who put their passions to death not with
the poison of their own ambition but with the clean blade of the will of God will live in the silence of true interior
peace, for their lives are hidden with Christ in God.
그러므로 자신의 욕망이라는 독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라는 순결한 칼날로
자신의 열정을 죽이는 사람들은,
진정한 내적 평화로 침묵 속에 살게 될 것이다.
It gives great glory to God for a person to live in this world using and appreciating the good things of life
without care, without anxiety,
and without inordinate passion.
사람이 현세에서 근심 걱정 없이,
과도한 욕망을 갖지 않고 삶의 좋은 것들을 이용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느님께 커다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Therefore, although it is true that we must deny ourselves
in order to come to a true knowledge of God,
we must also have some knowledge of God and
of our relationship with Him in order to deny ourselves
intelligently.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지혜롭게 이겨내기 위해서,
하느님과, 그리고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
A selfdenial that is truly supernatural must aspire to offer
God what we have renounced ourselves.
The perfection of Christian renunciation is the total offering of ourselves to God in union with the sacrifice of Christ.
참으로 초자연적인 극기는
우리 자신이 포기한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갈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포기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일치하여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The meaning of this sacrifice of ourselves is that we
renounce the dominion of our own acts and of our own
life and of our own death into the hands of God so that
we do all things not for ourselves or according to our
own will and our own desires, but for God,
and according to His will.
이러한 희생의 의미는 곧 우리 자신의 행위와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손에 맡김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또는
우리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따르지 않고,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다.
We must indeed become indifferent to the things
we have renounced: but this indifference should be
the effect of love for God,
in whose honor we renounce them.
우리는 진실로 우리가 포기한 것들에 무관심해져야 한다.
그러나 이 무관심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여야 하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포기 해야 한다.
It is only when we are "indifferent" to them that
we can really begin to love them.
The indifference of which I speak must, therefore,
be an indifference not to things themselves but
to their effects in our own lives.
우리가 그것들에 '무관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참으로 그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무관심은
사물 그 자체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무관심이어야 한다.
Self-denial delivers us from the passions
and from selfishness.
극기는 우리를 욕망과 이기심으로부터 해방시킨다.
No matter what our aims may be, no matter how spiritual, no matter how intent we think we are upon the
glory of God and His Kingdom,
greed and passion enter into our work and turn it into
agitation as soon as our intention ceases to be pure.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든,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왕국에 대해 열심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탐욕과 욕정은 우리의 일 속에 파고 들어와 우리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게 되자마자 그것을 동요로 바꾸어 버린다.
where ancient selfish motives move comfortably like
forgotten sea monsters in waters where they are never seen!
잠재의식 속에서는 오래된 이기적인 욕망들이
절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물 속에서 잊혀진 바다 괴물처럼 편안하게 꿈틀거리고 있는데 말이다!
In order to defend ourselves against agitation,
we must be detached not only from the immediate results of our work-and this detachment is difficult and rare -but
from the whole complex of aims that govern our earthly
lives.
We have to be detached from health and security,
from pleasures and possessions,
from people and places and conditions and things.
We have to be indifferent to life itself, in the Gospel sense,
동요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는 일의 직접적인 결과들로부터 초연해야 할 뿐 아니라 - 이러한 초연은 어렵고 힘들다 - 우리의 지상적 삶을
지배하는 모든 복합적인 목표들로부터도 초연해야 한다.
우리는 건강과 안전으로부터, 쾌락과 소유로부터,
사람과 장소와 조건과 물질로부터 초연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의미에서 삶 그 자체에 무관심해야 한다.
We must, first of all, gain a supernatural perspective,
see all things in the light of faith, and then we will begin
the long, arduous labor of getting rid of all
our irrational fears and desires.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얻어,
모든 것들을 신앙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의 모든 비이성적인 두려움과 욕망들을 제거하는 길고 힘든 일을 시작할 것이다.
Good habits are only developed by repeated acts, and we cannot discipline ourselves to do the same thing over
again with any degree of intelligence unless we go about it systematically.
It is necessary, above all in the begin
ning of our spiritual life, to do certain things at fixed times: fasting on certain days, prayer and meditation at definite hours of the day, regular examinations of conscience, regularity in frequenting
the sacraments, systematic application to our duties of state, particular at
tention to virtues which are most
necessary for us.
좋은 습관은 반복된 행위에 의해서만 개발되며,
체계적으로 하지 않는한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가지고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행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 수 없다.
영성생할을 시작할 때는 무엇보다도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일들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일정한 날에 금식을하고,
일정한 시간에 기도와 명상을 하고,
양심을 규칙적으로 점검하고, 규칙적으로 성사에 참여하고,
우리의 의무를 체계적으로 성실히 행하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들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 등이다.
To desire a spiritual life is, thus, to desire discipline.
Otherwise our desire is an illusion.
It is true that discipline is supposed to bring us, eventually,
to spiritual liberty.
Therefore our asceticism should make us spiritually flexible, not rigid, for rigidity and liberty never agree.
But our discipline must, nevertheless, have a certain element of severity about it. Otherwise it will never set us free from
the passions.
If we are not strict with ourselves,
our own flesh will soon deceive us.
If we do not command ourselves severely to pray and
do penance at certain definite times, and make up our mind to keep our resolutions in spite of notable inconvenience
and difficulty, we will quickly be deluded by our own
excuses and let ourselves be led away by weakness and
caprice.
영성 생활을 소망하는 것은 곧 고행을 소망하는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소망은 환상이다.
진실로 고행은 우리를 영적 자유로 데려간다.
그러므로 금욕은 우리를 영적으로 경직되게 해서는 안되고
유연하게 해야 한다.
경직성과 자유는 결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훈련은
일정한 엄격성을 띠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결코 우리를 욕정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 엄격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육체는 곧 우리를 기만할 것이다.
만약 일정한 시간에 기도하고 참회를 하도록
우리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불편함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결단을 지속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재빨리 변명들로 우리 자신을 속이고
허약함과 변덕에 말려들고 말것이다.
He works and lives in simplicity, with more joy and greater security than other men, because he does not look for any
special fulfillment in this life.
He avoids the futile agitation that surrounds the pursuit of purely temporal ends.
그는 소박하게 일하면서 살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기쁨과 안전을 얻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 지상의 삶에서 어떤 특별한 성취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순전히 세속적인 목적의 추구를 둘러싸고 있는 헛된 동요를 피한다.
It is supreme humility to see that
ordinary life, embraced with perfect
faith, can be more saintly and more
supernatural than a spectacular ascetical career.
완벽한 신뢰를 포용한 일상생활이 화려한 금욕생활보다
더 성스럽고 더 초자연적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최고의 겸손이다.
그러한 겸손은 평범해지는 용기를, 다시 말해서
정신적 교만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Pride always longs to be unusual.
교만은 언제나 평범하지 않기를 갈망한다.
Heaven is even now mirrored in created things.
하늘나라는 지금도 피조물들 안에 비치어 있다.
If we have no peace within ourselves,
we have no peace with what is all around us.
Only the man who is free from attachment finds that
creatures have become his friends.
As long as he is attached to them, they speak
to him only of his own desires.
우리 자신 안에서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평화를 얻지 못한다.
애착을 떨쳐버린 사람만이,
피조물들이 자신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가 그것들에 집착하는 한 그것들은
그에게 그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만 말해줄 뿐이다.
No matter how high an estimate we may have of our own goodness, that estimate is too low unless we realize that all we have comes to us from God.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평가는 너무나 보잘것 없는 것이다.
The only value of our life is that it is a gift of God.
우리의 삶의 유일한 가치는,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점이다.
The Inward Solitude
내적 고독
True love penetrates the secrets and the solitude of the
beloved by allowing him to keep his secrets to himself and
to remain in his own solitude.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비밀을 지켜주고
그 자신의 고독 속에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그의 비밀과 고독을 꿰뚫어 본다.
A person is a person insofar as he has a secret and is a
solitude of his own that cannot be communicated to
anyone else.
If I love a person, I will love that which most makes him
a person: the secrecy, the hiddenness,
the solitude of his own individual being,
which God alone can penetrate and understand.
사랑은 비밀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자기자신의 고독을 가져야만 사랑이다.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를 가장 사람답게 하는 것,
즉 그 자신 개체로서의 비밀, 숨겨진 것, 고독,
하느님만이 꿰뚫어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사랑할 것이다.
If a man does not know the value of his own loneliness,
how can he respect another's solitude?
인간이 자신의 고독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의 고독을 존중할 수 있겠는가.
It is ashamed to have anything that is not due to it.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갖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The true solitary must recognize that he is obliged
to love other men and even all things created by God:
진정으로 고독한 자는 다른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들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The true solitary does not have to run away from others:
진정으로 고독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된다.
We are poor, possessing all things.
Having nothing of our own left to rely on,
we have nothing to lose and nothing to fear.
우리는 가난하며 동시에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소유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두려워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