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등잔에 불꽃이 없다면...
"저는 정말로 깨닫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깨닫는다면
남아 있는 세상은 어떻게 달라지게 됩니까?"
왜 그대가 남아 있는 세상에 대해 걱정하는가?
세상은 세상 자체가 알아서 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가 무지로 남아 있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그대는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대가 무지하다면 그때는 세상에서 무엇이 일어나겠는가?
그때 그대는 불행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대가 의식을 갖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대는 불행 그 자체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사방에 불행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된다.
그대가 갖고 있는 희망은 의미가 없다.
지금 그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돕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을 방해하고 있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을 단지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남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을 영원한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
그대가 희망하는 것은,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도처에서 매일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를 죽이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없이는 자기의 가족이, 자기의 아내나 남편이, 아이들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상은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그들은 모든 방면에서 노력하겠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못될 것이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존재의 상태가, 그 기원이 중요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무지 속에 있다면
그대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데 일조를 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이미 지옥이다.
이것이 그대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대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지옥으로 변한다.
만약 그대가 깨닫게 된다면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대의 현존만으로 사람들이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그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이 그대의 관심이 되어서는 안된다.
먼저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대는 나에게 말한다. "나는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대의 원함이 매우 무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대가 그 즉시로 '하지만'을 갖다 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그 원함은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대는 이렇게 질문한다.
"그러면 세상은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는 가?
세상이 그대 손에 달려 있는가?
그대가 세상을 운영하고 있는가?
그대가 세상의 책임자인가?
왜 그대 자신에게 그토록 큰 비중을 두는가?
왜 그토록 자신이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느끼는가?
이 느낌은 에고의 부분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걱정을 함으로써
그대로 하여금 깨달음의 절정에 이르지 못하도록 한다.
그 절정은 그대가 모든 걱정을 떨쳐 버릴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걱정을 끌어 모으는 데는 탁월한 소질을 갖고 있다.
그대는 놀라울 정도다.
그대 자신의 걱정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걱정까지도
그대는 도맡아서 하고 있다.
그대는 계속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대는 더 많은 걱정을 할 수 있을 뿐이며 결국 미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마치 세상의 중심이며
온 세상을 걱정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을 개조하고 낙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대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뿐이다.
그대는 세상을 변형시킬수 없다.
그대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를 수는 있다.
더 많은 혼란과 해악을 끼칠 수는 있다.
그리고 벌써 이 세상은 너무나 혼란스럽다.
그대는 그것을 더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세상을 내버려두라.
제발 부탁이다.
세상은 세상 자체에 맡겨두라.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때 그대는 자기 내면의 침묵을 성취할 수 있다.
내면의 빛과 축복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만 해도 그대는 세상에 대단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단지 무지한 자신을 깨달음의 불꽃으로 바꾸기만 함으로써,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 감으로써
그대는 세상의 한 부분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된 부분은 연쇄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하나의 불꽃은 다른 불꽃을 점화시킬 것이다.
후계자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의 불빛이 거기에 없다면,
그대의 등잔에 불꽃이 없다면 그대는 아무도 도울 수 없다.
맨 먼저는 그대 자신의 불꽃을 살리는 길이 기본이다.
그때 다른 사람도 나누어줄 수 있다.
그대의 양초로 다른 사람의 양초에 불을 붙일 수 있다.
그것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때 그대는 육체로부터 사라질 것이지만
그대의 불꽃은 손에서 손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붓다는 결코 죽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빛은 연쇄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없다.
그들은 어떤 연쇄 반응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누어줄 어떤 빛도 갖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등잔을 점화시킬 어떤 불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대 자신에 대해서만 걱정하라.
제발 이기적으로 되라.
나는 말한다.
그것이 그대가 비이기적으로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대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다.
그대가 더 많이 걱정할수록
그대는 자신의 책임만 더 크게 만들 뿐이다.
그대의 책임이 더 커질수록 그대는 자신을 더 위대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대는 단지 미친 상태일 뿐이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과대망상증에서 빠져 나오라.
단지 그대 자신을 도우라.
그것이 그대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리고 그때 많은 것들이 일어난다.
물론 하나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한번 그대가 빛의 근원이 되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이 그대의 깨달음을 나눠 가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통해 더 풍부한 생명력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는 미리부터 생각하지 말라.
어떤 것도 의식적으로 할 수 없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대 자신이 각성하는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먼저 그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그대에게 더하여질 것이다."
나 역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다.
깨어나라! 주시하라! 이해하라!
존재가 되라...
존재는 그 자체로서 하나다.
인간의 문제는 그의 에고에서 나온다.
그 에고는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이 느낌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거짓이다.
그리고 거짓에 바탕을 둔 모든 것은
고통을 만들어 내며 문제를 낳고 혼란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이 잘못된 분리 의식에
기초를 두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따라서 고통의 문제는 그 뿌리부터 파헤쳐져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의식은 그대가 그대 존재의 중심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에게, 타인은 타인일 뿐이며
그들과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심어 준다.
이런 분별심은 바로 그대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대가 잠을 잘 동안에는 어떤 분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우주 속으로 녹아 든다.
지복감이 잠자는 중에 일어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대는 상쾌함을 느끼고 활기를 되찾는다.
깊은 잠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대는 그대의 에고를 잃어버리고
우주와 하나 되어 깊이 빠져든 것이다.
이 우주와 합일은 그대를 신선하고 생기있게 만들며
아침에 잠을 깨면 그대는 축복을 느낀다.
모든 고통은 사라지며 갈등과 혼란 또한 사라지고
두려움과 죽음 역시 사라진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그대가 분리되어져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죽음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대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죽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누가 고통을 받겠는가?
그래서 탄트라와 요가와 모든 명상체계들은
그대에게 분리란 거짓이며,
분리되어 있지 않음이 진실임을 자각하게끔 일깨워 주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그 사실을 자각할 수 있게 되면
그대는 전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중심은 그대로부터 사라져 본래의 제자리인
우주 속으로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광활한 바다에서 그저 한 조각 파도가 될 것이다.
그대는 분리되지 않았기에 두려움이 없으며 불안 또한 없다.
그대는 죽음과 소멸에서 파생되는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이 에고와 함께 사라진다.
힌두교도들은 삼마디를 의식이 잠든 상태라고 믿어 왔다.
잠속에서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한다.
오직 존재만이 있고 그대는 더 이상 없다.
그러나 그대는 깊은 무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만약 같은 현상이 자각 속에서 일어난다면 그대는 깨닫는다.
붓다도 같은 근원 속으로 들어갔다.
이 동일한 근원은 그대 역시
꿈이 없는 깊은 잠속에서 여행하고 돌아왔다.
붓다는 의식적으로, 각성 속에서 여행을 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여행하는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느지 알았으며 그가 그 근원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완전히 변형되어 있었다.
옛사람은 사라졌다.
새사람이, 새로운 에너지가 탄생했다.
이 새사람은 그 중심이 우주에 있으며, 이 중심의 이동 때문에
그대의 모든 고통과 번뇌와 지옥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사라질 뿐이다.
그것은 해결된 것이 아니고 거기에 본래부터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에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깊은 잠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각성 속에서 경험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야 깨어 있으면서 잠들 수 있겠는가?
그대의 에고가 부재하는 동안에 어떻게 해야 정신을
차릴 수 있겠는가?
에고는 그대 교육의 결과로 나온 것이며 그러한 삶은
에고의 자연스런 산물이다.
그것은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어떤 존재도 에고 없이 진화될 수 없다.
그러나 어디에서 에고가 떨어져 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떨어져 나가야만 하는지,
존재가 그것을 어디에서 초월해야만 하는지 그 시점은
명확하게 다가온다.
에고는 달걀의 껍질과 같다.
그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보호막이다.
씨앗의 껍질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보호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지나칠 경우 위험한 것이 된다.
만약 껍질이 계속해서 씨앗을 보호하기만 하고
싹을 틔우지 않게 하면 그것은 이미 방해물이 된다.
껍질은 내부의 생명이 움터 나오도록 땅속으로 녹아 들어야 한다.
씨앗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어야 거기에서 생명이 탄생되고 열매가 생겨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씨앗 속에서 태어난다.
에고는 그 바깥 부분의 껍질이다.
그것은 아기의 생존을 보호한다.
만약 아기가 어떤 에고도 갖지 않고 태어난다면,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이 없이 태어난다면 그는 생존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고 투쟁하지도 못할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존재할 수 없다.
그는 강력한 중심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거짓이지만, 그러나 필요하다.
하지만 이 도움의 수단이 방해물이 되는 순간이 온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대를 외부로부터 지켜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것은 강해져서 그대의 내적 존재가
에고를 초월하고 움틀 수 있도록 기회를 주지 않는다.
에고는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에고로부터의 초월 또한 필요하다.
만약 누군가가 에고를 가진 채로 죽는다면
그는 씨앗으로 죽는 것이 된다.
그는 진정한 존재를 모르고 죽는 것이며,
가능했던 운명을 꽃피우지 못하고 죽는 것이고,
의식적으로 존재계를 만나지 못한 채 죽는 것이다...오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