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마음 공부

태양은 날마다 새로워라 (헤라클레이토스 강론) 오쇼

작성자山木|작성시간24.10.12|조회수26 목록 댓글 1

The Hiddenarmony

숨은 조화 (헤라클레이토스 강론) (라즈니쉬)

The Sun is New Each Day

태양은 날마다 새로워라

 

Mind goes on and on playing tricks, creating a god, then praying, then being punished, then being sent into hell and heaven -- and the whole thing is just imagination.

 

마음은 계속해서 속임수를 쓰고 있다.

그렇게 해서 신을 만들고 기도를 하며 벌을 받고

지옥이나 천국에 보내진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상상일 뿐이다.

 

There is no g Mind goes on and on playing tricks, creating a god, then praying, then being punished, then being sent into hell and heaven -- and the whole thing is just imagination.od, no hell, no heaven; only you are there and existence, energy, infinite energy.

 

신이나 지옥 또는 천국이라는 것은 없다.

오직 그대와 존재와 무한한 에너지가 있을 뿐이다.

 

If you are with it, it is with you.

This is the state of a Buddha, a Heraclitus: totally with the total.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을 때 그것 또한 그대와 함께 있다.

완전히 전체와 함께있는 것,

바로 이것이 붓다나 헤라클레이토스의 경지이다.

Then there is no problem. Then one is not there, really, to create problems. Then there is bliss -- when you are not, then there is bliss.

 

그때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문제를 만들어 낼 사람도 없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오직 환희만이 있을 뿐이다.

 

Otherwise, if you are fighting against it, moving away from it, doing things on your own, your private intelligence, behaving like an island, then you will be in trouble. Then whatever explanations and rationalizations you create are futile, just imagination.

 

그렇지 않고 그것과 싸우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대 자신 만의 지성에 의거하여 일을 하고

하나의 섬과 같이 행동한다면 곤경에 빠지게 된다.

그때 어떤 설명이나 합리화를 만들어 낸다 해도

그것들은 단지 헛된 상상일 뿐이다.

 

All your churches, temples and mosques stand on man's fertile imagination.

 

교회나 사원 또는 모스크 등은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 위에 서 있다.

 

All your gods and statues and all your prayers, they are creations of your imagination.

 

그대의 신이나 신상(神像) 또는 기도 등은 상상의 산물들이다.

 

And you have created them because you are miserable.

And this won't help.

 

그런 것을 만드는 것은 그대가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Your temples, mosques, churches -- no! Your popes and priests and rabbis -- no! They can't help. They are exploiting your imagination. And it is a good business.

 

그대들의 교회나 사원 또는 모스크,

이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제나 성직자 또는 랍비들 또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대의 상상력을 미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은 휼륭한 사업이 되고 있다.

 

You have to drop imagining. You have to feel that misery comes when you are out of step with nature, and happiness comes when you are not out of step.

 

상상력을 버려야 한다.

그대가 자연(본질)으로부터 벗어 났을 때 불행이 찾아오고

자연과 보조를 맞출 때 행복이 찾아 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Hell is being out of step with the logos.

Heaven is being in step with the logos.

And that is the hidden harmony.

 

지옥이란 로고스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천국이란 로고스와 함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숨은 조화이다.

 

If you can find it, you become blissful.

If you cannot find it, you are miserable -- nobody else is responsible.

 

이것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대는 환희에 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대는 불행해 진다.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You have to find and seek.

 

그대 스스로 추구하고 발견해야 한다.

 

There is no God, but everybody is divine.

 

신은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신성하다.

 

The whole existence is divine, godly, but there is no God.

 

존재 전체가 신성하고 신심이 깊다.

그러나 신은 없다.

 

So don't waste your time and don't look upwards for somebody who is to help you.

 

그러므로 그대를 도와 줄 사람을 갈구하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The help will come, but there is nobody to give it to you -- you have to take it. But this seems to be arduous, difficult, because then you have to change yourself.

 

도움은 오는 것이지 그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다.

그대 스스로 그것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일은 매우 힘이 든다.

그때 그대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To be in step with nature you will need a radical transformation.

To avoid that radical transformation you create every type of explanation.

자연과 발을 맞추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형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꺼린다.

그리고 그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피하기 위해서

그대는 여러 종류의 변형을 만들어 낸다.

 

 

THIS UNIVERSE,

'모든 것에 동일한 이 우주는

 

WHICH IS THE SAME FOR ALL,

어떤 신이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HAS NOT BEEN MADE BY ANY GOD OR MAN,

규칙적인 리듬으로 스스로를 점화하며

 

BUT IT HAS ALWAYS BEEN, IS, AND WILL BE –

규칙적인 리듬으로 꺼져가는

 

AN EVERLIVING FIRE,

영원히 살아 있는 불꽃이었고

 

KINDLING ITSELF BY REGULAR MEASURES

영원히 살아 있는 불꽃이며

 

AND GOING OUT BY REGULAR MEASURES.

영원히 살아 있는 불꽃이리라 '

 

 

Evolution and involution; things coming to a peak, then disappearing in a valley; the waves rising to touch the sky, and then moving back to the depth of the ocean -- in regular measures.

 

모든 것은 봉우리에 올랐다가 다시 골짜기에서 소멸 된다.

파도는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올라가다

다시 바다의 심연으로 돌아온다 .

이것이 규칙적인 리듬으로 이루워지는

진화(進化)와 퇴화(退化)이다.

 

Says Heraclitus: the world is energy, existence is fire.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에너지이며 존재는 불이다”

 

In regular measures it manifests itself and then unmanifests itself.

 

규칙적인 리듬으로 존재는

그 자신을 나타냈다가 다시 자신을 감춘다.

 

Just like day and night: in the day you work, awake, and in the night you rest. So there are periods when existence is in the day, and there are periods when existence moves into night... creation and uncreation, evolution and involution, day and night, summer and winter, life and death.

 

마치 낮과 밤과 같다. 사람들은 낮에 깨어있는 상태에서 일하다가 밤이 되면 휴식을 취한다. 존재에게도 낮이 있고 밤이 있다.

창조와 휴식, 진화와 퇴화, 낮과 밤, 여름과 겨울, 삶과 죽음 등

주기(週期)가 있다.

 

 

This is a creation period. Soon there will be a decreation period.

 

지금은 창조의 시간이지만 곧 모든 것이 사라지는 때가 온다.

 

Hindus call that PRALAYA, when everything disappears.

Hindus have a beautiful theory for it -- Heraclitus would have nodded assent.

 

힌두교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지는 때를 프랄라야(pralaya)라고 부른다.

힌두교는 이에 대한 아름다운 이론을 갖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도 이에 동의했을 것이다.

 

Hindus say that the brahma, the creator, has his own day, a twenty-four hour day, a twenty-four hour circle: a twelve-hour day and a twelve-hour night.

 

힌두교에서는 창조주 브라흐마(Brahma)도 24시간을 1 주기로 하는 하루가 있으며 12시간은 낮이고 12시간은 밤이라고 한다.

 

His twelve-hour day is our creation -- millions and millions of years, aeons and aeons of time.

Then comes the night of brahma, then everything disappears, sleeps, rests -- tired, of course.

To rejuvenate itself, to come back, it goes into nonexistence.

 

브라흐마의 낮 12시간은 우리가 말하는 창조의 시간으로

수억만년 수억만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브라흐마의 밤이 오면 모든 것이 소멸하고

수면과 휴식을 취한다.

물론 모든 것이 피로하기 때문이다.

브라흐마도 다시 젊어지기 위해서 비존재(非存在)가 된다는 것이다.

 

Existence is the day, nonexistence is the night. In a regular measure, for the same time, existence disappears, energy rests. When it has rested, again the day comes, the sun rises; things appear again, everything starts again. It is a circle. Half the circle is of manifestation and half is unmanifestation.

 

존재는 낮이며 비존재는 밤이다. 똑같은 시간 동안 규칙적인

리듬으로 존재는 소멸하고 에너지는 휴식은 취한다.

에너지가 휴식을 취하고 나면 또다시 낮이 오고 해가 뜬다.

그때 모든 것은 다시 모습을 나타내어 다시 시작한다,

하나의 순환운동이다.

그 순환의 반은 발현되고 나머지 반은 발현되지 않는다.

 

 

... Just like a tree grows and grows and grows, and then it dies -- but it does not die completely. It collects itself into seeds, becomes unmanifest, moves into the subtle. Seeds fall down on the ground, the tree disappears, but in the right season the seeds will sprout again and the whole tree will be there again.

 

나무가 자라고 자라다가 죽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완전히 죽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그 자신을 씨앗에 모아 모습을 감추고

오묘의 세계 속으로 옮아 간다.

씨앗은 땅에 떨어지고 나무는 사라지지만 적절한 계절이 오면

이 씨앗은 싹을 틔우고 다시 나무 전체가 거기에 있게 된다.

 

And it happens -- not because there is some controller, a god or a man or somebody -- there is nobody. Energy itself is enough. It needs no control, it needs nobody to be there. Energy has its own intrinsic discipline.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어떤 주재자나 신, 혹은 어떤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도 없다. 에너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조종할 필요도 없고 조종할 사람도 필요 없다.

에너지 자체가 본질적인 규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And this seems to be exactly right, because if you watch you will feel this is how it happens. You feel hungry, you take food; hunger disappears. Where has the hunger gone?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매우 옳은 것 같다. 그대가 만일 이들을

지켜보면 어떻게 그것이 일어나는가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배고픔을 느낄 때 음식을 먹는다. 그때 배고픔이 사라진다. 배고픔은 어디로 갔는가?

 

It has become unmanifest, moved to the seeds, to the subtle. It is not on the periphery; it has gone to the center again.

 

그것은 씨앗, 곧 오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드러나지 않게 된 것이다. 외면에 나와 있지 않고 중심으로 다시 들어간 것이다.

 

Then after a few hours you feel hungry again, the hunger has come back. You take food, hunger disappears. Where does it go?

 

다시 몇 시간이 지난 뒤면 또다시 배고픔을 느낀다.

배고픔이 다시 돌아 온 것이다.

음식을 먹으면 배고픔은 다시 사라진다.

그것이 어디로 가는가?

 

If it disappears completely then it cannot come back.

It comes again and again and again.

It goes again and again and again -- in the same measure.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해서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또다시 사라진다.

똑같은 리듬으로........

 

 

In the day you are awake. Where has the sleep gone?

 

낮이 되면 사람들은 깨어 있다. 잠이 어디로 갔는가?

 

It has moved to the seeds, become subtle; it is there inside you watching for the right time to become manifest; then by the night it again becomes manifest.

 

그것은 씨앗 속으로 들어가 포착하기 어렵게 된다.

다시 그대 내면에 있다가 적당한 시간을 보아 밖으로 발현된다.

그러다 밤이 되면 다시 나타난다.

 

Then where does your day disappear to?

Have you ever observed?

While asleep, where has the whole world of the day gone?

 

그러면 낮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가?

그대는 낮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한 일이 있는가?

잠자고 있는 동안 낮의 세계는 어디로 갔는가?

 

The market, the politics, the identity, everything disappears -- you have gone to the seeds. But in the morning the sun rises and you rise again. From where do you come? From the unmanifest to the manifest again -- it is a centrifugal and centripetal movement.

 

시장, 정치, 주체성 등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대는 씨앗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해가 뜨면 그대는 다시 살아난다.

그대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드러나지 않는 세계에서 드러나는 세계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원심력과 구심력의 운동과 같다.

 

 

The lotus closes and the lotus opens... in a regular measure.

 

연꽃이 오므려졌다가 다시 핀다....규칙적인 리듬으로

 

And this is an energy phenomenon -- no personality in it, it is impersonal. Impersonal it is beautiful; if it is personal then it will become ugly.

 

이것이 에너지 현상이다. 그 안에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기 때문에 에너지 현상을 아름답다.

만일 에너지 현상이 인격적이라면 그것은 추하게 된다.

 

And all religions have become ugly because they make it personal, they create a person in it. That person is just an imaginary phenomenon you have created. That's why thousands of gods exist and everybody has his own notion about God.

 

그리고 모든 종교가 추하게 된 것은 종교들이 에너지 현상을

인격화하고 그 안에 인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인격은 단지 그대가 만들어 낸 상상일 뿐이다.

수많은 신이 존재하고 모든 사람이 제각기 신에 대한

자기 견해를 갖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And when you have a notion about God, others' notions look wrong, then there is conflict, argument. And your notion of God cannot be right, because YOU are not right. A person who is right needs no god.

 

 

그대가 자기 자신의 독특한 신관(神觀)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틀린 것으로 보인다. 그때 갈등과 논쟁이 생긴다 .

그러나 그대의 신에 대한 관념은 옳을 수가 없다.

그대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른 사람은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Look at Buddha, Heraclitus -- they don't need any God. H. G. Wells has written about Buddha that he is the most godless man and yet the most godly. Can you find a man more godly than Buddha? -- and more godless?

 

붓다나 헤라클레이토스를 보라. 그들은 어떠한 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웰즈(H.G. Wells)가 붓다에 대해서 쓰기를.

붓다는 가장 무신론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가장 신을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붓다 보다 더 신을 공경하는 사람을 찾아 낼 수 있는가? 그리고 또 그 보다 더 무신론적인 사람을 찾아 낼 수 있는가?

 

He never talks about God -- because he doesn't project.

He has no fear inside to create a projection; he is fearless.

Then God disappears -- your fear is the cause.

And when God disappears, then this whole existence is for you to enjoy and celebrate.

 

그는 신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신에 대한 관념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는 아무런 공포도 없기 때문에

심상(心象)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에게 공포가 없기 때문에 신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대의 공포는 심상의 원인이다. 그리하여 신이 사라질 때,

그대는 존재 전체를 즐기고 찬양하게 된다.

 

Energy is delight. Blake has said energy is delight.

 

에너지는 기쁨이다. 블레이크(W.Blake 영국시인. 화가)는 에너지를 기쁨이라고 말했다.

 

When there is no God, you are free, totally free.

With a God up there manipulating, you can never be free -- you can only be puppets, and all the threads are in his hand.

All religious people become puppets because for everything someone else is responsible.

 

신이 없을 때 그대는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천상에서 주재하는 신이 있다고 할 때,

그대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단지 꼭두각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꼭두각시를 조정하는 실은 신의 손에 쥐어져 잇다.

그런 식으로 모든 종교적인 사람들이 꼭두각시가 되어 있다.

모든 것에 누군가가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A really religious person is totally free.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완전히 자유롭다.

 

Religiousness is freedom.

And with God, there can be no freedom. How can there be freedom if there is a creator? -- because any moment he can change his mind -- and he seems to be a little crazy; any moment he can change his mind and say, "Okay, disappear!"

 

종교적이라 함은 곧 자유이다.

그러나 신이 있다고 하면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창조주가 있다고 할 때, 어떻게 자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떤 순간에라도 신은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신은 약간 변덕스러운 것 같다.

어느 순간에도 ‘좋아, 없어져라.“ 고 마음을 바꿀 수 있다.

 

Just as it is said in The Bible that he said, "Let there be light," and light was born, any moment he can say, "Let there be no light." Then what? -- light disappears. Then you must simply be puppets. Then it seems that he is playing chess and you are just on the chessboard, so whatsoever he wants to make of you he makes. The whole thing looks ugly.

 

마치 성경에서 “빛이 있으라 하였더니 빛이 탄생하였다”고 한 것처럼 어느 순간에도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빛이여 없어져라.“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빛은 사라진다. 그때 그대는 꼭두각시일 수 밖에 없다.

이는 마치 신은 장기를 두고 있고

그대는 그 장기의 말이 되어 있는 것과 같다.

신이 그대를 무엇으로 만들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만든다.

모든 것이 추하게 보인다.

 

If there is no freedom there cannot be any consciousness,

because consciousness grows with more freedom.

 

자유가 없을 때 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

의식은 더 많은 자유와 함께 성장하기 때문이다.

 

And the total freedom is possible only if there is no person controlling, manipulating, no boss in existence; only then is there freedom. But freedom makes you afraid. You don't want to be free. You want to be slaves -- that's why you create God.

 

완전한 자유는 존재를 주재하는 사람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때에만 자유는 존재한다.

그러나 자유는 그대를 두렵게 한다.

그대는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노예가 되고 싶어한다.

그대가 신을 만들어 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And if there is no God... for example, the communists tried a religion without a god. But man is so afraid, he cannot live without gods; so communism has created its own gods. Lenin has become a god; now they worship him. Now Lenin is no ordinary mortal -- he is a god. You cannot escape because you are afraid.

 

만일 신이 없다면..... 예컨대 공산주의자들은 신이 없는 종교를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 없이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 자신이 신을 만들어 냈다.

레닌(Lenin)이 신이 되고 사람들은 그를 경배하고 있다.

이제 레닌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신인 것이다.

그대는 두려움 때문에 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

 

Only a man who is totally unafraid, fearless, one who has come to terms with existence, one who has understood that to be with existence and to flow with it is to be blissful, can live without God, can live without any person being projected on existence, can live without imagination -- can live with truth. It is hard to live with truth. It is very easy to live with lies. That's why you create lies around you.

 

완전히 두려움이 없게 되고 존재와 함께 있으면서 존재와 같이

흐르는 것이 곧 환희임을 이해하는 자는 신 없이도 살 수 있고,

존재 위에 투사된 어떤 사람 없이도 살 수 있고, 상상 없이도 살 수 있으며, 진리와 함께 살 수 있다. 진리와 함께 사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거짓과 함께 사는 것은 매우 쉽다.

그대가 그대 주위에 거짓을 만드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Ninety-nine percent of the things around you are lies. But you feel cozy with them, in comfort; they are comfortable lies. Truth is uncomfortable because it requires a radical change. And this is the most radical change that can happen to a man -- that he lives without God. And if you can live without God, you become a god, you become godly.

 

그대 주위에 있는 99%가 거짓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 속에서

아늑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거짓의 편안함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불편하다. 진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이다. 신이 없이도 살 수 있을 때,

그대 자신이 곧 신이 되고 신성(神性)을 갖게 된다.

 

If you go on imagining a god, you remain a slave.

With a boss overhead you will be a slave. When the boss is no more there you yourself have become a god.

 

그러나 계속해서 신을 상상하고 있을 때 그대는 노예로 남게 된다.

윗사람이 그대 위에 있고 그대는 하나의 노예가 된다.

윗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 그대는 스스로 신이 된다.

 

I tell you, there is no God -- but everybody is God, everything is godly.

 

나는 말한다.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신이며 모든 것이 신성이다.

 

There is no person controlling, because then the whole existence would be ugly, a slavery, a great concentration camp; it would be a prison. No God: life is a freedom. Then you can choose! If you want to be miserable, be miserable, that's your choice.

If you want to be happy, be happy, that is your choice. If you feel happy with being miserable, it's okay.

 

인간을 주재하고 있는 주재자는 없다. 주재자가 있다고 할 때,

존재 전체는 추한 노예가 되고 커다란 집단 수용소가 되기 때문이다. 신은 없다. 그리고 삶은 자유이다.

그때 그대는 선택할 수 있다. 불행해지고 싶다면 불행해질 수 있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 그것은 그대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그대가 불행한 상태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There are people who feel very, very happy with being miserable, because through their misery they attract compassion. Through their misery they ask for sympathy; through their misery, they are begging for love. But who can love a miserable person? Unless one is a buddha it is impossible to love any miserable person.

 

불행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매우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런 불행한 상태를 통해서 동정을 구하고 사랑을 구한다, 그러나 누가 불행해 하는 비참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붓다가 아닌 이상, 불행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You are on a suicidal path. If you are asking for love through being miserable, you can get a little sympathy, but not love. And that little sympathy will be given to you very grudgingly, because who is ready to give love to a miserable person?

 

그대가 자멸(自滅)의 길 위에 있다 하자. 그대가 불행한 상태에서 사랑을 구한다면 약간의 동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약간의 동정도 마지 못해 주어지는 것이다.

누가 불행한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겠는가?

 

And he himself is in need, he himself is miserable. That's why people talk too much about their miseries. Listen to their talk: ninety-nine percent they talk about miseries, and they magnify their miseries, they make them look as great as possible. It is not possible, because you are so tiny that you cannot carry such big miseries -- but you are asking for sympathy.

 

사람은 자신이 곤궁에 빠져 있을 때. 바로 그 자신이 불행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라 99%가 불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들의 불행을 확대해서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동정을 얻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And man is afraid of freedom. There is a deeprooted fear of freedom because with freedom comes insecurity, with freedom comes the unknown, with freedom you don't know beforehand what is going to happen. With a God and a destiny everything is certain. You can ask the astrologer and you can go to the palmist and they can tell you about your future. With no God there, there is no destiny. And the astrologers are useless.

 

인간은 자유를 두려워한다. 인간에게는 자유를 두려워하는

뿌리 깊은 공포심이 있다. 자유롭게 될 때. 미지의 세계가 닥쳐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게 되며 안전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나 운명에 의지하게 되면 모든 것이 확실해진다.

사람들은 점성술사나 수상학자를 찾아 간다. 그들은 미래를 말해준다. 그러나 신이라는 것은 없고 운명이라는 것도 없으며 점성술사도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Nothing can be said about the future. The future remains an open situation -- nothing fixed, everything flexible and fluid.

With freedom you become a fluidity. With God there bossing you, you are secure; somebody is looking after you and he knows better 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다.

미래는 열려있는 상태이다.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다.

자유롭게 될 때 그대는 유동적이 된다. 그러나 그대를 지배하는

신과 함께 있을 때 그대는 안전하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대를

돌보아 주고 있고 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안 할 것인가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In this sense, Heraclitus' insight is deeper than Jesus'. In this sense,

Heraclitus comes through better than Jesus or Mohammed -- his insight is exactly as deep as Zarathustra, Buddha, Mahavira -- because Jesus goes on speaking and talking in terms of God, creation, father, son. Maybe because of the juvenile attitude of the Jews, maybe because of the people around him, he has to talk in those terms.

 

이런 의미에서 헤라클레이토스의 통찰력은 예수의 것이나

모하메드의 것보다 더 깊다. 그의 통찰력은 짜라투스트라나

붓다 또는 마하비라의 통찰과 같은 깊이에 있다.

예수는 계속해서 신, 창조, 아버지, 아들 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면서 말한다. 유태인이나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차원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But Heraclitus doesn't bother about you, he says exactly what is true. He doesn't bother whether you will be able to understand or not: he simply states the truth. If you want to understand, you have to grow. He will not come down to you, you will have to go to him.

 

그러나 헤하클레이토스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의 수준에 구애

받지 않고 정확하게 진리가 무엇인가를 이야기 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지 진리만을 말할 뿐이었다. 그대가 그의 말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만큼 성장해야 한다. 그는 그대의 수준으로

내려오지는 않는다. 그대들이 그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And this is exactly my attitude also. I will say exactly what I feel. If you want to understand me you have to grow towards me.

 

이는 나의 입장과 아주 똑 같다.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말한다.

나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대들이 나를 향해서 성장해야 한다.

 

I am not going to come down to talk to you on your terms, because that never helps. Because of that, Jesus missed the whole thing and Christianity was born -- which is nothing but a new edition of the Jewish religion, nothing new: Jews modified a little here and there, nothing new -- because Jesus used the whole Jewish terminology. How can you create a new world out of the old?

 

나는 그대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예수는 완전히 실패하게 되고 유태교에 새로운 옷을 입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약간 변형된 유태교일 뿐이다. 예수는 유태교인들이 쓰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옛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He compromised -- because Jesus never thought that there was going to be a new religion. He remained a Jew, he died a Jew; he was never a Christian. And he never imagined that there was going to be something new; he lived in the fold. And he used past, rotten words -- hence the ugly face of Christianity.

 

예수는 유태교와 타협했다.

그 자신도 새로운 종교가 만들어 질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태교인으로서 살다가 유태교인으로 죽었다.

새로운 무엇이 셍기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살았다. 그가 사용하는 말들은 낡고 진부한 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모습은 그렇게 추하게 되었다.

 

Heraclitus is absolutely fresh. That's why the Greek mind couldn't understand him at all -- because he has no roots in the past.

 

헤라클레이토스는 완전히 신선하다

그는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리스 사상이 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When I am dead, where will you put me? In India you will not find any roots for me. I was born a Jaina, but you will not find any roots in Jainism for me; simply, you cannot find any roots. If you say exactly what you have understood, what you have realized, then there are no roots, because truth has no roots in society -- it has roots in existence, but not in society.

 

내가 죽을 때 그대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나는 자이나교도로서 태어났지만 자이나교에서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인도의 어느 곳에서도 나의 뿌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곳에서도 그대들은 나의 뿌리를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이해하고 깨달은 것만을 정확하게 말한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뿌리도 없다.

진리는 어떤 집단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진리의 뿌리는 항상 존재 속에만 있는 것이다.

 

 

THIS UNIVERSE,

WHICH IS THE SAME FOR ALL,

HAS NOT BEEN MADE BY ANY GOD OR MAN,

BUT IT HAS ALWAYS BEEN, IS, AND WILL BE –

AN EVERLIVING FIRE,

KINDLING ITSELF BY REGULAR MEASURES

AND GOING OUT BY REGULAR MEASURES.

 

모든 것에 동일한 이 우주는

어떤 신이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규칙적인 리듬으로 스스로를 점화하며

규칙적인 리듬으로 꺼져가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꽃이었고

영원히 살아 있는 불꽃이며

영원히 살아 있는 불꽃이리라

 

This energy has its own intrinsic system. It is a cosmos, not a chaos -- and without a boss.

 

이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조직체계(system)를 갖고

있다.

이는 카오스(chaos:혼돈)가 아닌 코스모스(cosmos:질서)이다.

이 코스모스에는 주재자가 없다.

 

Energy plus freedom, and yet there is a discipline, and that discipline is the inner harmony, the hidden harmony. No boss and yet there is no chaos; nobody managing, and yet everything is managed so beautifully -- you cannot improve upon it. This is the hidden harmony. If there is a manager and he manages, you can be certain that things will go wrong here and there. It is so beautiful a cosmos because there is no manager in it.

 

그리고 에너지가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거기에는 어떤 규율이 있다.

그 규율은 내적 조화, 즉 숨은 조화이다.

주재자는 없지만 카오스는 아니다.

아무도 조종하는 주체가 없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답게 조종된다.

그대는 그것을 개량할 수 없다. 이것이 숨은 조화이다.

여기에 조종하는 자가 있어 그가 조종을 한다면

모든 것은 여기저기에서 잘못되어 감을

그대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현상이 그처럼 아름다운 코스모스가 되는 것도

그 안에 주재자가 없기 때문이다.

 

This will be difficult to understand. Religious people say, "How can this world become a cosmos if there is nobody who controls? Without a controller everything will fall apart!" But Heraclitus will say, "Exactly, precisely because there is no controller, things cannot fall apart." When you control, you mismanage.

You cannot find greater mismanagers than managers -- they mismanage.

 

이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위 종교적이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주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 우주가 코스모스(질서)가 될 수 있겠는가? 주재자가 없다면 모든 것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바로 주재자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것은 뿔뿔이 흩어 질 수 없다.”그대들은 주재자 이상으로 크게 잘못 조종하고 있는 자를 찾아 낼 수 없을 것이다.

주재자야말로 그릇되게 조종하고 있다.

 

That's what Lao Tzu says.

 

그것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바이다.

 

He says: When there were no rulers everything was beautiful; when there was no law there was no crime, and when there was no wise man there were no fools. Things moved in their cosmic beauty. Then entered the rulers; they said rules are needed. With rules entered misrule, because the opposite is always there. Then came wise men and they said man must be disciplined. And then man became rebellious and everything went wrong. Then laws came, laws and more laws, and man became more and more criminal.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주재자가 없었을 때,

모든 것은 아름다웠다.

법이 없었을 때 죄가 없었다.

현명한 사람이 없었을 때 바보가 없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움직였다.......

그런데 거기에 주재자가 들어왔다.

그들은 어떤 질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질서가 들어오자 무질서도 따라 들어왔다.

대립되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때 현명한 사람이 나타나서 사람들은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반란적이 되고 모든 것은 잘못되어 갔다.

그때 법이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법이 더욱 더 많아짐에 따라서 사람들은 더욱더

죄를 짓게 되었다.

 

This is what Heraclitus says. He says that precisely because there is nobody to control, how can things go out of control? Energy itself has an intrinsic, an inner guide.

 

헤라클레이토스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주재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모든 것이 조종 불능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에너지 자체가 내재하고 있는 안내자이다.

 

And listen to this for your life also. If you are guided by your inner insight, if you can listen to your heart, there will be no need for any discipline. You can move completely in trust, everything will be good. But because you cannot listen to your own heart you have to listen to many manipulators who go on manipulating. They say, "Do this!" and they say so much, "Do this! Don't do this!" that you are confused, you don't know what to do. One religion teaches one thing, another another thing. One morality says this is moral, another morality says this is immoral. You are simply confused. And you cannot find your own heart from where the intrinsic, the natural, the spontaneous guide comes. The more you have been taught, the more confused you have become.

 

그대의 삶을 위해서도 이 말을 귀 기울리라.

그대가 내적 통찰에 의해서 인도되고

가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아무런 규제도 필요 없게 된다.

그대는 신뢰 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가슴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주재자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이것을 하라 그리고 저것은 하지 마라” 이것이 한 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것은 하되 저것은 하지 마라”는 말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그대는 혼란되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된다.

어떤 종교는 이것을 가르치고 다른 종교는 다른 것을 가르친다.

어떤 도덕률에서는 이것이 옳다 하고 또 다른 도덕률에서는

이것이 그르다고 한다.

그대들은 단지 혼란될 뿐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본래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임의적인 안내자가 있는 그대 자신의 가슴을

찾지 못하고 만다.

그대가 더욱더 많은 것을 배울 때,

그대는 더욱더 혼란되기만 할 뿐이다.

 

Heraclitus says everything moves by an inner harmony. Who is controlling these trees? Who teaches them, "Now it is the right time to bring your flowers"? Who says to the clouds, "Now the time is coming near and you have to shower and you have to bring rains"? Nobody. Remember, if there is somebody then things will go wrong, because how can such a vast thing be managed? Even if there were a God, either he would have cracked up... Just think of the immensity of things, the tremendousness of things, the vastness of things! Even God would have already cracked up long ago, gone mad, simply disappeared from the world, or the world would have fallen down.

 

모든 것은 내적인 조화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누가 이 나무들을 조종하고 있는가?

‘이제 꽃피울 때다’하고 누가 가르쳐주는가?

누가 구름에게 “이제 때가 이르렀으니 비를 내려야 한다”하고

말해 주는가?

아무도 없다. 잊지 마라.

주재자가 있을 때 모든 것은 잘못되어 간다.

어떻게 이 많고 많은 것들이 주재될 수 있겠는가?

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무한하게 전개된 세상을 보고는 도망쳤을 것이다.

- 신일 망정 이미 옛날에 도망쳐 버렸거나,

미쳐 버렸거나 이 세상으로부터 사라졌거나,

아니면 이 세상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It can remain a cosmos only because the harmony is not being forced from above, the harmony grows from within.

 

조화(調和)가 위로부터 강요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코스모스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조화는 내면으로부터 성장하는 것이다.

 

There are two types of discipline: one discipline that is forced from without -- somebody says "Do this!" -- and the other discipline that comes from within. You feel what will be natural, you feel where your being is flowing, and you move with your feeling; then an inner discipline comes in. Outer discipline is a deception and that creates confusion and a rift in you. But then the inner and outer are opposed, they become antagonistic.

 

규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누군가가 “이것을 하라”고 명령식으로,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내적인 규율에 따를 때, 그대는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인지를

느끼면서 그 느낌을 따라서 움직인다.

그러나 외적인 규율은 하나의 속임수일 뿐이다.

그것은 그대 내면에 혼란과 분열을 만든다.

그때 내면과 외면은 서로 대립되고 반목하게 된다.

 

Just a few days ago, a man came to me and he said -- as all religious people will agree, he said, "I again and again become a victim of outer things, and again and again I forget the inner."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계속해서 외형적인 것의 희생물이 되면서 내면을 잊고 있습니다.”

이 말에 종교적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So I asked him, "You please give me a concrete example -- what do you mean?"

 

그래서 내가 말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라,

그것이 무슨 말인가? "

 

He said, "For example, my inner knows that I should remain faithful to my wife, but again and again I fall in love with other women."

 

그가 말했다.

“예를 들자면, 나의 내면은 아내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저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So I had to tell him, "You seem to be confused. You don't know which is inner and which is outer. The wife is the outer and you think that is the inner. Do you love your wife?"

 

나는 이렇게 말해 주어야 했다,

“그대는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그대는 무엇이 내면이고(the inner)

무엇이 외면(the outer) 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대에게 있어서 아내가 외면이다

그런데 그대는 아내를 내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대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가?”

 

He said, "Of course not.

If I had been in love with her, why should I fall for others?"

 

그가 말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 여자를 사랑한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겠습니까?”

 

Then the wife is the outer, forced by the society, forced by your own ego, pretensions that you would like to keep of an image in the society, that you are a good husband. This is outer and he is saying this is inner. And when you fall in love with another woman -- which nobody is forcing you to do, rather, on the contrary, everybody is preventing you -- that is inner! But the society has confused you completely, it has made you disoriented. The outer, it says, is the inner -- it has deceived you completely. The inner, it says, is the outer.

 

그때 아내는 사회와 자신의 에고,

또는 사회 안에서 유지시켜야 하는 자신의 이미지,

그리고 자기가 좋은 남편이라고 하는 가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외면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내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대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 강요 받은 행위가 아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반대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내면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사람들을 완전히 혼란 시켜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사회는 외면을 내면이라고, 내면을 외면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완전히 그대를 기만한 것이다.

 

You go on a fast and you think this is the inner voice -- this is your religion, your scriptures, your priests. And then your inner says, "You are hungry, eat!" And you think this is outer, the Devil is tempting you. What foolishness! The priest has tempted you to fast. The Devil is not there! The priests are the only devilish forces in the world.

 

그대들은 단식을 하면서 그것이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대들의 종교가, 그대들의 경전이, 그대들의 성직자들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대들의 내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배고프다, 음식을 먹어라”

그러면 그대는 그것을 악마가 유혹하는 외적인 소리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성직자들이 그대들에게 단식하라고 유혹한다.

바로 그들이 악마이다

성직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악마적인 세력이다.

 

Hunger comes, this is inner. The whole body, every cell of it says, "Eat!" and you say, "This is outer. Somebody is tempting me, some evil forces." Or, "This is desire, this is the body, and the body is the enemy -- and my soul is on a fast." Soul on a fast? The soul never needs any food so how can it go on a fast? You are forcing the poor body. But there is a natural fast also; it happens in animals. No preacher is there, no priest teaching them, but it happens.

 

배고픔이 느껴질 때 바로 그것이 내면의 소리이다.

그런데도 몸 전체의 모든 세포가 음식을 먹으라고 말할 때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이것은 외면의 유혹이다.

어떤 악한 힘이 나를 유혹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유혹하고 있는 이것은 욕망이다.

몸이다. 몸은 적(敵)이다. 나의 영혼은 지금 단식을 하고 있다.

“영혼이 단식하고 있다고? 영혼은 아무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영혼이 단식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단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불쌍한 육체이다.

자연스런 단식도 있긴 있다 이는 동물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단식을 가르치는 성직자들이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If you observe a dog: if he is not feeling well he will not eat -- this is the inner. A dog's fast is inner. What absurdity! And a man's fast is almost always outer. Only a dog can fast inwardly because he is still in contact with nature, you are not.

 

개를 관찰해 보라.

개는 기분이 좋지 않게 느껴질 때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것이 내면의 소리이다.

거의 단식은 내적인 것이다.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개는 아직도 자연(본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단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들은 그렇지 못하다.

 

When the body is ill, no animal can be forced to eat. If you force him to eat he will vomit. This is beautiful. The body doesn't need it; it is ill. The whole energy is needed for the body to cure itself, and that energy will be diverted if you take food, because then the energy will be needed to digest food: it will be a burden. The body is not in a good condition; the whole energy is needed for the body to cure itself, and if food is thrown in the body, that will be a division. Now the whole of the energy will move towards curing; it will be prevented -- first the food has to be digested.

 

 

몸이 아플 때 동물들은 억지로 먹지 않는다.

그들에게 억지로 강요해서 음식을 먹이면 곧 토해낸다.

아름다운 현상이다. 아플 때 몸은 음식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때 에너지 전체는 몸을 치료하는데 쓰인다.

그런데 음식이 들어오면 음식을 소화시키는데 에너지를 써야

하는데 몸 안에 음식이 들어오면 에너지 분열현상이 일어난다.

에너지 전체가 몸을 치료하는 데로 향하지 못한다.

먼저 음식이 소화 되어야 하기 때문에 방해를 받게 된다.

 

If in your illness you simply listen inwards and don't eat, that's beautiful. Sometimes you don't feel hungry, then don't eat. But don't take a vow, "I will fast for a few days," because who knows? -- in the evening you may feel hungry. Move with nature. When nature wants you to fast, fast. When nature wants you to eat, eat.

 

몸이 아플 때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음식을 먹지 마라.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배고프지 않거든 음식을 먹지 마라.

지금 당장 배가 고프지 않는다고 해서 며칠 동안 단식을 하겠다고 맹세하지 마라.

누가 아는가?

저녁이 되면 다시 배가 고파질지. 자연과 함께 움직여라.

내적인 존재가 단식을 원하거든 단식을 하고,

음식을 원하거든 먹어라.

The inner has to be found because the society has completely confused you. What is inner and what is outer: there is a vast confusion. And almost always, whatsoever you think is the outer is likely to be the inner, and whatsoever you think is the inner is bound to be the outer, because priests have done that -- priests are the destructive forces.

 

이제는 내적인 존재를 발견해야 한다.

사회는 무엇이 내면이고 무엇이 외면인지도 모르게

그대를 혼란 시켜 놓았다.

그리고 거의 항상 그대가 외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면이고

그대가 내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외면일 정도가 되었다.

성직자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성직자들이 파멸시키는 힘이 되어 있다.

 

To me, there is only one religion and that religion is to find the inner voice, the inner guide. And the person who helps you to find your inner guide is the master. He helps you -- not to give yourself an outer discipline, he simply helps you to find the inner harmony which gives discipline.

 

나에게는 오직 하나만의 종교가 있다.

그 종교는 곧 내면의 소리와 내면의 안내자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내면의 안내자를 찾도록 도와 주는 사람이

마스터(master,영적 스승)이다.

그는 외적인 규율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대가 규율을 제공하는 내면의 조화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줄 뿐이다.

 

That discipline has a grace because it is not forced. And that discipline has a beauty of its own because it is always fresh. And with that discipline you cannot go astray because you cannot revolt with that discipline. It is you, your very innermost core. And the same is happening on a vaster scale in the whole cosmos.

 

내적인 규율은 우아하다.

그것은 항상 신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적 규율과 함께 있으면 옆길로 빗겨 나갈 수가 없다.

그대가 그 내적인 규율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적인 규율은 곧 그대 자신이며 그대 자신의 가장 내적인 핵이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질서와 조화의 우주 전체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4.10.12
    댓글 이모티콘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