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course 4
My camel’s desire is now behind,
My own desire is before.
Our purposes were crossed,
We can agree no more.
Rumi said;
Saiyad Burhan al-Din was once greeted by someone, who said, “I have heard praises of you sung by friends.” Burhan al-Din answered, “Wait until I meet your friends to see whether they know me well enough to praise me.
If they know me only by word of mouth, then they do not truly know me. For words do not endure.
Syllables and sounds do not endure.
This body, these lips and this mouth will not endure.
All these things are mere accidents of the moment.
But if they know me by my works, and they know my essential self, then I know they are able to praise me, and that praise will go where it belongs.”
사이야드 부란 알 딘 무하키크가 말했다.
누군가 말했다: “지인들이 칭송하는 것을 들었소”
부란 알 딘은 대답했다.
“그대의 지인들이 날 칭송할 만큼 날 아는지 그들을 먼저 만나 보아야겠다. 입 소문으로만 안다면 진정으로 날 아는 게 아니다.
말은 오래 못 가는 법.
음절과 소리는 오래 못 가고 이 몸과 입술 이 입도 오래 못 간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순간의 일일 뿐, 하지만 내 작품으로 아는 것이라면 내 진아를 아는 것이다. 그럼 날 칭송할 수 있으며 그 칭송은 내 받아 마땅하다. “
This is like the story they tell of a certain king.
This king entrusted his son to a team of learned scholars.
In due course, they taught him the sciences of astrology, geomancy, and the interpretation of signs, until he became a complete master, despite his utter stupidity and dullness of wit.
이것은 어떤 국왕에 대한 이야기와 같다.
이왕은 아들을 명망 있는 학자들에게 맡겼고,
학자들은 왕자에게 점성학과 풍수지리 현상을 보는 법을 가르쳤다.
왕자는 지혜가 없었지만, 완전히 통달하게 됐다.
One day the king took a ring in his fist and put his son to the test.
“Come, tell me what I am holding in my fist.”
“What you are holding is round, yellow, inscribed and hollow,” the prince answered.
하루는 왕이 손에 반지를 쥐고 아들을 시험했다.
“내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거라.”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둥글며, 노랗고, 안이 빈 것입니다.
“You have given all the signs correctly,” the king said. “Now say what it is.”
“It must be a sieve.” the prince replied.
“What?” cried the king. “You know all the minute details, which would baffle the minds of anyone.
How is it that out of all your powerful learning and knowledge, the small point has escaped you that a sieve will not fit in a fist?”
이 왕자의 대답에 왕은 “모든 형태는 적절히 맞혔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라.”라고 했다.
왕자가 대답했다. “숫돌입니다.”
왕은 소리쳤다. “무엇이라고, 누구라도 놀랄 만큼 세세한 사항까지 알고 있는 그런 네가 큰 학식에 지식을 겸비했지만,
숫돌이 손에 안 들어간다는 사소한 사실은 왜 미처 모르느냐?”
In this same way, the great scholars of the age split hairs on details of all matters.
They know perfectly and completely those sciences that do not concern Soul.
But as for what is truly of importance and touches us more closely than anything else, namely our own Self, this your great scholars do not know.
이처럼, 시대의 위대한 학자들은 모든 것을 세세하게 안다.
자신과 상관없는 그러한 학문들을 완벽하게 알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밀접한 것,
즉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위대한 학자들도 모른다.
They make statements about everything, saying, “This is true and that is not true.
This is right and that is wrong.” Yet, they do not know their own Self, whether it is true or false, pure or impure.
Now being hollow and yellow, inscribed and circular, these features are accidental; cast the ring into the fire and none of them will remain.
It becomes its essential self, purified of all appearances.
So it is with the knowledge of scholars;
what they know has no connection with the essential reality that alone exists when all these “signs” are gone.
They speak wisely, expound at great length, and finally pronounce that what the king has in his hand is a sieve.
They have no knowledge about the root of the matter: life’s purpose.
그들은 무엇이나 이렇게 말한다.
“이건 용인되고, 저건 용인 안 된다.
이건 법에 맞고, 저건 안 맞는다.”
그럼에도 자기 진아가 용인되는 지, 안 되는지,
순수한지 아닌지 모른다.
안이 비고 노랗고, 둥글다는 이 특징들은 비 본질적인 것이다.
반지를 불에 던지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
그건 외형이 정화된 본질적 자아가 된다.
학자들의 지식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지식은, 모든 외형이 사라졌을 때 존재하는 본질적 실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현명하고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결국 왕의 손에 있는 것은 숫돌이라고, 그들은 선언한다.
문제의 뿌리 즉 삶의 목적에 대해서는 모른다.
I am a bird. I am a nightingale. If they say to me, “Make some other kind of sound,”
I cannot. My tongue is what it is. I cannot speak otherwise.
However, those who learn the song of birds are not birds themselves—on the contrary, they are the enemies of birds and their captors.
They sing and whistle so others will take them for birds.
Ask them to produce a different sound and they can do so, because that sound is merely assumed by them. It is not truly their own.
Like the scholars, they are able to sing other songs because they have learned to rob men of their household goods and a different kind of linen filched from every home.
People will suspect this is their song and that it is their true song.
나는 새이다. 나는 나이팅게일 혹은 앵무새이다.
내게 ‘다른 소리를 내라’고 하면 나는 낼 수 없다.
내 혀가 그러하니까. 달리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새의 노래를 배운 사람은 새가 아니다.
오히려 새와 새 포획자의 적이다.
노래하고 지저귀며 남이 자신들을 새로 오인하게 한다.
다른 소리를 내라고 하면 그들은 할 수 있다.
큰 소리는 그저 흉내를 낸 것이기에 자신의 것이 아니다.
학자들처럼 그들은 다른 노래도 부를 수 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가재도구를 빼앗고 다른 천을 훔치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를 그들의 진정한 노래로 착각할 것이다.
Discourse 5
강연 5
The Amir, surprised by an unexpected visit from Rumi, said: “Master, how gracious of you to honor me in this way. I never expected this. It never even entered my mind that I could be worthy of such an honor. By rights I should be standing night and day in the ranks and company of your servants and attendants. I’m not even worthy of that. How gracious this is!”
아미르는 루미의 뜻밖의 방문에 놀라며 말했다:
“자비롭게도 이런 영광을 주시다니 예상치 못했습니다.
이런 영광을 누릴 만 하다고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당신의 하인으로서 시자로서 밤낮으로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럴 자격도 없지만요 정말 자비로우십니다!”
Rumi said: It is all because of your lofty spiritual aspirations.
The higher and greater your rank and the more you become occupied with important, exalted worldly affairs, the more you consider yourself to have fallen short of your spiritual purpose. You are not satisfied with what you have achieved, thinking that you have too many obligations. Since none of these attainments can blind you from that divine attainment, my heart is moved to serving you. And yet for all that, still, I wanted to pay you formal honor as well.
루미가 말했다: 그건 그대의 고귀한 영적인 열망 덕이다.
그대의 지위가 높고 위대해질수록 더 중대하고 높은 지위의 세상일에 빠지게 될수록 그대는 더욱더 영적인 성과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여겼다. 그대는 자신이 성취한 것들에 만족하지 않고 너무 많은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성취들 중 그 무엇도 신성한 성취로부터 그대를 눈멀게 할 수 없으니, 그대에게 봉사하려는 내 마음이 동하였노라. 허나 그래도 형식적인 영광을 네게 주려 한다.
Form too possesses great importance. No,
much more than importance—it is of true substance.
Just as the body will fail if it lacks a heart, so too it fails without a skin.
If you plant a seed with no husk, it cannot grow, but if you bury it in the earth with its shell, then it germinates and becomes a great tree.
So, form is a great and necessary principle, and without it our task fails and our purpose is not attained.
Yes, this principle is reality in the eyes of those who know reality and have become reality!
지나친 소유형식도 매우 중요하다,그 중요성이란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심장 하나가 없으면 몸이 쓰러지듯 피부도 마찬가지다.
껍질 없는 씨를 심으면 그 식물은 자랄 수 없지만 껍질과 함께 땅에 묻는다면 그것은 싹을 틔어 멋진 나무가 된다.
그러니 형식이란 위대하며 필수원리며 그것 없이는 우리의 과제는 실패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이 원리는 실체를 아는 이들의 눈에는 실재이며 현실이 되었다.
A dervish once entered the presence of a king.
The king addressed him, “Oh, ascetic.”
“You are the ascetic,” the dervish answered.
“How can I be an ascetic,” the king demanded, “since the whole world belongs to me?”
“Ah, you see things the opposite of what they are,” replied the dervish.
“This world and the next and all that there is to possess, these all belong to me.
I have seized the whole world.
It is you who have become satisfied with a mouthful and a rag.”
탁발승이 왕 앞에 서게 되었다.
왕이 그에게 말했다 『오,고행자여』
『당신이 고행자이지요』 탁발승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니, 내가 어찌 고행자가 되겠느냐?』 왕이 물었다
『당신은 사물의 모습을 반대로 보고 있군요』 탁발승이 대답했다.
『이 세상과 세상 너머 그 모든 것은 소유하기 위한 것이며
모두 제 것입니다.
저는 온 세상을 소유하고 있지요.
한입 거리와 넝마조각에 만족하게 된 건 바로 당신이지요 』
Wherever you turn, there is the Face of God.
This Face runs and extends infinitely and forever.
True spiritual lovers have sacrificed themselves for the sake of that Face, desiring nothing in return.
The rest of the human race are like cattle.
어디로 돌아서든 신은 그곳에 있다.
그 곳은 무한대로 영원히 뻗어져 있다.
진정한 영적 연인들은 신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며
그 어떤 대가도 원치 않는다.
나머지 인간들은 가축과 같다.
Yet, even though they are cattle, still they deserve favor.
They may live in the stable, yet they are accepted by the Lord of the stable.
If He so desires, He transfers them from this stable into His private pen.
So, in the beginning God brought men and women into existence, and then transferred them from the pen of spiritual existence into the world inanimate.
Then from the pen of the world inanimate into the vegetable world.
Then from vegetable into animal.
From animal to human, human to angel, and so on forever.
He manifested all these forms so that you would know His pens are many, and that each one is loftier than the next.
허나 가축이라 해도 여전히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들은 마구간에 살겠지만, 신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신이 원하면 신은 그들을 신의 개인 축사로 옮겨 주신다.
태초에 신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으나,
그들을 영적인 존재의 축사에서 생기 없는 세상으로 옮겨 버렸다.
그리고 활기 없는 세상의 축사에서 식물계로, 그리고 식물에서
동물로 옮기고, 동물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천사로 끝없이 옮겨졌다. 신은 이 모든 형태로 나타나, 그대들이 그의 농원이 여럿이며 그 각각이 그 다음보다 고귀함을 알게 하셨다.
God revealed this present world so that you could accept the other stages that lie ahead. He did not reveal it so that you would say, “This is all there is.”
The masters of crafts demonstrate their abilities and arts so their apprentices will find faith in them, and will believe in the other arts they have not yet demonstrated.
A king bestows robes of honor and lavishes kindness on his subjects because they look forward to receiving other gifts from him, and hang hopefully upon future purses of gold. He does not grant these things for them to say, “This is all there is. The king will not give out any other blessings,” and so make do with that amount. If the king knows any subjects are going to say that, and take such gifts for granted, he will never bestow any blessings whatsoever upon them.
신은 이 현 세계에 모습을 나타내 그대 앞에 기다리는 다음 단계를 받아들이게 하셨다.
『거기도 이게 다야』 이런 말을 들으려고 나타난 게 아니다
숙련된 스승들은 그들의 능력과 재능을 보여줌으로 초심자들이
믿음을 갖게 하며, 그들이 보이지 않은 다른 재능도 믿도록 한다.
한 왕이 영광스런 관복과 넉넉한 친절을 백성들에게 하사하였으나, 그들은 그에게서 또 다른 선물을 기대하며 앞으로 돈주머니를 받길 고대했다. 그는 이것들을 하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전부이다. 왕은 다른 은총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에서 때운 것이다. 왕이 백성 중 누군가가 그런 선물들을 받고도 그런 말을 할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누구에게도 은총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The ascetic is one who sees the hereafter, while the worldling sees only the stable.
But the chosen ones of God, who have true knowledge, see neither the hereafter nor the stable.
Their eyes are fixed on the first principle, the source of all things.
When the chosen one sows wheat they know that wheat will grow, because they see the end from the beginning.
So it is with barley and rice and all things—seeing the beginning, their eyes are not fixed on the end.
They know the conclusion from the start.
Such men and women are rare.
고행자는 세상 사람이 영속함 만을 구할 때 내세를 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신에게 선택된 자는 진정한 지혜를 가졌기에,
내세도 영속함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은 첫 번째 원리 즉 만물의 근원에 고정되어있다.
선택된 자가 밀을 뿌리면 그들은 밀이 자랄 것을 안다.
그들은 시작에서 끝을 보기 때문이다.
보리와 쌀과 모든 것들의 시작을 보며 - 그들의 눈은 결과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들은 시작에서 결말을 안다. 이런 남자와 여자는 드물다.
It is pain that guides us in every enterprise.
Until there is an ache within, a passion and a yearning for that thing arising within us, we will never strive to attain it.
Without pain it remains beyond our reach, whether it is success in this world or salvation in the next, whether we aim at becoming a merchant or a king, a scientist or an astronomer. It was not until the pains of birth manifested in Mary that she made for the tree.
Those pangs drove her to the tree, and the tree that was withered became fruitful.
모든 계획이 우리를 고통으로 이끈다.
아픔과 열정과 열망이 내면에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절대 그것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고통 없이는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속세에서 성공하든,
다음 생에 구제 된다 하든, 우리가 상인, 왕, 혹은 과학자,
우주인이 된다 한들 말이다.
마리에게 나타난 탄생의 고통이 있기 전까지는
그녀가 나무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고통들이 그녀를 나무로 향하게 이끌었고,
시든 나무가 과실로 가득해졌다.
We are like that story of Mary in the Koran.
Every one of us has a Jesus within, but until the pangs manifest, our Jesus is not born.
If the pangs never come, then our child rejoins its origin by the same secret path through which it came, leaving us empty, without the birth of our true self.
우리도 코란의 메리 이야기와 같다. 우리 모두 내면에 예수가 있으나, 고통이 없으면 예수가 태어나지 않는다.
고통이 전혀 없으면 우리 아이들은 그들이 온 비밀의 길로 되돌아 가, 근원과 결합하여 텅 비게 되어 우리의 진정한 자아의 태어남도 없으리.
Your inward soul is hungry.
Your outward flesh is over fed.
The devil has gorged to sickness.
The king begs even for bread.
The cure is found while Jesus is here on earth!
But once he returns to heaven,
all hope will have f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