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히 마 피히: 루미의 담론 [11장]
Fihi ma Fihi: Discourses of Rumi, Discourse 11,
Rumi said :
The saying, “Hearts bear witness to one another,” refers to a hidden reality. If all reality were openly revealed, what need would there be for words? Similarly, when the heart bears witness, what need is there for the testimony of the tongue?
루미는 말했다.
“마음은 서로 증인이 된다”라는 말은 숨은 실체를 나타낸다.
모든 실체가 대놓고 드러난다면 말이 어떤 필요가 있는가?
마찬가지로, 마음이 증인이 될 때, 입의 증언이 왜 필요한가?
The Amir said: “Certainly the heart bears witness. But the heart plays one part by itself, the ear another, the eye another, the tongue another. There is need for each one, so that the whole can be realized.”
아미르가 말했다. “분명히 마음은 증인이 된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의 역할을 하며, 귀와 눈과 혀가 감각의 역할을 한다. 감각은 필요하며 그래야 전체를 인식할 수 있다.”
Rumi said: If the heart is totally absorbed, then all the other senses are obliterated in it, and there is no need for the tongue. Take the case of Laila: She was not a spiritual being, but of flesh, fashioned of water and clay.
Yet passion for her produced such absorption, and so utterly seized and overwhelmed Majnun, that he had no need to see Laila with his eyes, no need to hear her voice. He could not separate himself from the thought of her, causing him to cry:
루미는 말했다.
마음이 완전히 몰입하면, 다른 감각들이 그 안에서 지워지며,
입이 그 안에서 필요하지 않게 된다.
라일라의 경우를 보라:
그녀는 영적 존재가 아니라, 물과 진흙으로 만든 육신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열정에 심하게 몰입한 마즈눈은 완전히 사로잡혀 압도되었기에 라일라를 제 눈으로 볼 필요도, 목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그녀 생각을 멈출 수 없어 울게 되었다:
Your name is upon my tongue.
그대 이름이 내 혀에 있고,
Your image is in my sight.
그대 모습이 내 눈에 있으며,
Your memory in my heart,
그대 기억이 내 마음에 있네.
Where can I send these words I write?
내가 쓰는 이 말들은 어디로 보낼 수 있을까?
The physical has such power that passion can bring us into a state where we are never apart from our beloved. All our senses are absorbed: sight, hearing, smell and the rest. No sense seeks a separate view, all being united. If each sense plays its part in full, all are immersed in one experience and desire nothing else. Seeking for a separate view proves that one sense has not found its true, whole allotment. It is enjoying an incomplete portion and therefore is not immersed, nor fulfilled. Then the other senses begin seeking their own part, and all become divided.
육체에게는 힘이 있기에 열정은 우리가 사랑하는 님과 절대 떨어지지 않는 상태로 이끈다.
우리의 모든 감각인 시각, 청각, 후각 등이 몰입하게 된다.
감각은 개별적 관점이 아닌 합해져 하나가 된다.
각각의 감각이 제 역할을 다하면 모든 감각은 하나의 경험에 몰입되어 다른 것을 갈망하지 않는다.
개별적 관점을 쫓는 것은 한 감각이 진정한 전체 몫을 찾지 못함을 증명한다.
이는 불완전한 몫을 즐기는 것이므로, 몰입하지도 만족하지도 못한다.
그때 다른 감각들이 제 속성을 찾기 시작하고 모든 감각이 분리된다.
From the viewpoint of reality, all the senses see one thing, but from the standpoint of outward form they are each different from the other. When one sense is moved to absorption, all the senses become absorbed in it. When a fly flies upward it moves its wings, its head and its whole body separately; but when it is immersed in honey, then all its parts are alike—none can move at all.
실체의 관점에서 모든 감각은 하나를 보나,
외부의 관점에서는 그들 감각이 서로 다르다.
한 감각이 몰입하게 되면 모든 감각이 거기에 몰입하게 된다.
파리가 위로 날아갈 때, 날개와 머리와 몸통을 각각 움직인다.
하지만 꿀에 잠기면 모든 부분이 똑 같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Absorption is such that whoever enters it is no longer there. They make no more efforts, they cease to act and move. They are immersed in the water. No action is their action; it is the action of the water. But if they flail about in the water with their hands and feet, they are not truly submerged. If they utter a cry, “I am drowning,” this too is not absorption.
몰입이란 누가 거기에 들어가든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애쓰지 않고, 행동하고 움직이기를 그만둔다.
그들은 물에 가라앉아 있다.
그들은 어떤 움직임도 없고, 단지 물의 움직임만 있다.
그러나 그들이 팔과 다리로 물 안에서 허우적거린다면,
진짜 빠지지 않는다. 그들이 울부짖으며 ‘물에 빠졌어요’ 하여도 이 또한 몰입이 아니다.
Take the famous utterance, “I am God.” Some people think this is a great pretension, but “I am God” is in fact a great humility. Those who say, instead, “I am a servant of God” believe that two exist, themselves and God. But those who say, “I am God” have become nothing and have cast themselves to the winds. They say, “I am God” meaning, “I am not, God is all. There is no existence but God. I have lost all separation. I am nothing.” In this the humility is greater.
“나는 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누군가는 엄청난 허세라 생각하나, “나는 신이다”라는 말은 사실 큰 겸손이다.
대신 “나는 신의 종이다”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과 신 둘이 존재한다 믿는다.
허나 “나는 신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무(無)가 되어 그들 자신을 바람에 날려보낸다.
“나는 신이다”는 “나는 없으며 신이 전부다. 신만이 존재한다.
더 이상 분리는 없고 나는 무(無)이다”를 뜻한다.
이것이 더 겸손하다.
This is what ordinary people don’t understand. When they render service in honor of God’s glory, their servanthood is still present. Even though it is for the sake of God, they still see themselves and their own actions as well as God—they are not drowned in the water. That person is drowned when no movement, nor any action belongs to them, all their movements spring from the movement of the water.
평범한 이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이 신의 영광을 기리며 섬길 때, 그들은 여전히 종으로서 존재한다.
비록 그것이 신을 위해서 일지라도, 이들은 자신을 인지하며 신과 자신의 행위를 인지한다.
이들은 물속에 빠진 것이 아니다.
어떤 움직임과 행위조차 없을 때, 그 사람은 빠진 것이다.
그들의 모든 움직임은 물의 움직임에서 나온 것이다.
A lion was chasing a deer, and the deer was fleeing. There were two beings evident: the lion and the deer. But when the lion caught up with the deer, and the deer was overpowered beneath the lion’s clutch, and out of terror became unconscious and senseless, collapsing before the lion in that moment only the lion remained. The deer was effaced and no longer existed.
사자가 사슴을 쫓았고, 사슴이 도망가고 있었다.
사자와 사슴 두 존재가 명백히 존재한다.
사자가 사슴을 따라잡아 사슴이 사자의 발톱에 사로잡혀 두려움으로 의식을 잃고 감각이 사라져 사자 앞에 무너지는 그 순간에는 사자만이 존재한다.
사자는 없어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True absorption is when God creates in saints a fear. This is not the fear of men and women who are scared of lions, leopards and death. Rather, it is the fear of separation. This fear is a gift from God, just as security, pleasure and joy, eating and sleeping—all these are gifts from God.
진정한 몰입은 신께서 성인에게 두려움을 만드는 때이다.
이는 사자나 표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두려움이 아니다.
그 대신 분리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안전과 즐거움, 기쁨, 먹고 자는 것처럼 신의 선물이다: 이 모두가 신의 선물이다.
God shows the saints, while they are fully conscious, forms that only they can see. The inner form of the lion, leopard, and fire become visible so they will know that reality is not of this world, but of the world unseen, projected forth to them. In the same way, they are shown their own Self in magnificent form.
신께서는 성인이 완전한 의식 속에 있을 때 그들만이 볼 수 있는 형상을 보여준다.
사자와 표범, 불의 내면의 형상이 보이며,
그들은 그 현실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것이 투사된 것임을 안다.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장엄한 형태의 진아를 보게 된다.
Likewise, gardens and rivers, maids of Paradise and palaces, all types of food and drink, robes of honor, fleet steeds, cities, castles and every kind of marvel—they know these are not of this world. God shows and reveals these secrets before their eyes. Thus they come to know with certainty that fear of separation comes from God, as do security, comfort and all spiritual displays.
이처럼 정원과 강, 천국과 궁전의 시녀들, 모든 형태의 음식과 음료, 영광의 예복과 빠른 준마, 도시와 성, 온갖 종류의 경이가 이세상의 것이 아님을 그들은 안다.
신은 그들 목전에 이 비밀을 보여주고 드러낸다.
그래서 그들은 안전과 위안 그리고 모든 영적 능력처럼
분리의 두려움도 신에게서 온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Now this fear of separation does not resemble the fears that most men and women know, because it is a result of revelation and experience. God clearly shows the saint that all things belong to God. The philosophers may know this, but they know it by intellectual proof, and proof is not permanent. The pleasure that comes from proof will not last. When the memory of the proof passes, its warmth and thrill pass away as well.
이 분리의 두려움은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두려움과 같지 않는데, 이는 계시와 체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것이 신의 것임을 성인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철학자는 이것을 알 수 있으나 지적 증거로 아는 것이니,
그 증거는 영원하지 않다.
그 증거에서 오는 즐거움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증거의 기억이 사라지면, 그 온기와 떨림 역시 사라진다.
Thus, we know by proof that this house had a builder. We know by proof that this builder had eyes and was not blind, had power and was not powerless, was living and not dead, and existed before the house was built. All these facts we know, but we know them by proof. Such proof is not permanent, and is soon forgotten. Lovers of God, however, being absorbed in God, have come to know the Builder and have seen with the eye of knowingness. They have eaten bread and salt together, and mingled the two.
그러니 우리는 이 집에 건축가가 있음을 증거로 알며,
그 증거로 건축가가 맹인이 아니고 시력이 있으며, 무력화 하지 않고 힘이 있으며,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집이 건축되기 전까지 존재하였음을 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사실은 증거로써 아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영원하지 않아 곧 잊혀진다.
그러나 신을 사랑하는 이는 신에 몰입하여 건축가를 알게 되고, 앎의 눈으로 보게 된다.
이들은 빵과 소금을 함께 먹으며, 그 둘을 섞었다.
The Builder is never absent from their heart and their gaze. Men and women such as this pass away in God. With them, sin is not sin, and crime is not crime, since they are absorbed.
건축자는 이들의 마음과 시야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 안에서 죽는다.
그들에게 죄는 죄가 아니며,
몰입하고 있기에 나쁜 짓은 나쁜 짓이 아니다.
A certain king ordered his slaves, every one, to take in their hand a golden cup to greet a guest. His favorite slave was also commanded to take a cup. When the king showed his face, that special slave, on beholding the king, lost control of himself and was overwhelmed. The cup fell from his hand and was shattered. When the other slaves saw this they said, “Perhaps we should do this as well,” and they cast down their cups deliberately.
“Why did you do that?” the king scolded them.
“He was your favorite, and that was what he did,” they replied.
“Fools!” the king cried out. “He didn’t do that. I did it.”
어떤 왕이 하인들에게 황금 잔을 들고, 손님을 맞이하도록 명했다.
왕이 총애하는 하인도 잔을 들라는 명을 받았다.
왕이 그 특별한 하인의 눈 앞에 나타났을 때,
왕을 보고서는 그는 이성을 잃고 압도되었다.
그의 손에서 잔이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다른 하인이 이를 보고 “아마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지”하고는 그들의 잔을 고의로 던졌다.
왕은 그들을 꾸짖었다.
“왜 그리 하였는가?”
“가장 총애 받는 하인이 한 행동을 따라 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했다.
왕이 말했다. “어리석구나!” “그가 아니라 내가 하였다.”
To outward eyes, all of the slaves were sinful. But that one act was the very acme of obedience. Indeed, it transcended obedience and sin. Of them all, the true lover was that one slave. The others were but followers of the king. Thus, they followed that slave, since he had become the essence of the king, only outwardly wearing the form of slavery. He was filled with the beauty of the king.
겉보기에는 모든 하인이 죄를 지었다.
허나 한 하인의 행위는 복종의 극치였다.
실로 이는 복종과 죄를 초월하였다.
그들 중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한 하인이다.
다른 이들은 단지 왕의 추종자였다.
이에 그들은 그 하인이 왕의 총애를 받기에 겉으로 보이는 섬기는 모습을 따라 했을 뿐이다.
그 하인은 왕의 아름다움에 잠겼다.
God declares, “If it weren’t for you, I would never have created the heavens.” This is the same as “I am God.” It means, “I created the heavens for I love you as Myself.” This is “I am God” in another language and another tongue.
신께서 말하시되,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 천국들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나는 신이다”와 같은 것이다.
“너를 나와 같이 사랑하여 천국을 창조했다”를 뜻한다.
이는 “나는 신이다”의 또 다른 언어이자 또 다른 표현이다.
Though the words of the great saints appear in a hundred different forms, since God is one and the Way is one, how can their words be different? Though their teachings appear to contradict, their meaning is one. Separation exists in their outward form only; in inner purpose they all agree.
성인의 말씀이 백 개의 다른 형태로 표현되더라도
신은 하나이며 도(道)는 하나인데, 그 말씀들이 어찌 다를 수 있는가?
그 가르침이 모순되어 보이더라도, 그 의미는 하나이다.
바깥 세상에만 분리가 존재하고 내면의 목적에는 모두 동의한다.
A prince orders a tent to be stitched. One person twists the rope, another strikes the pegs, another weaves the cloth, another stitches, another rends, another uses a needle. Though to outward appearance they are diverse and different, in inner purpose they are united and performing a single task.
어느 왕자가 천막을 만들 것을 명했다.
한 사람은 밧줄을 꼬고, 한 사람은 말뚝을 박고, 또 다른 사람은 천을 기웠고, 누구는 합치고, 누구는 떼었고, 누구는 바늘을 썼다.
겉보기에 그들은 나누어지고 다르나, 내면의 목적은 같으며 하나의 일을 한다.
So it is with the affairs of this world. When you look at it carefully, all are doing God’s service; reprobate and righteous, sinner and disciple, devil and angel. For example, the king wants to test and try his slaves so the steadfast can be sorted from the weak-hearted, the loyal from the traitor, the faithful from the fake. If he did not have tempters and provokers, how could he test his slaves’ loyalty? So, the tempters and provokers are serving the king, since it is by the king’s will that they act. He sends a wind to show the difference between the stable and the unstable, to separate the gnat from the sparrow-hawk, so the gnat will vanish and the sparrow-hawk remain.
이 세상의 일도 이와 마찬가지다. 유심히 살핀다면, 나쁘거나, 옳거나, 죄인과 제자, 악마와 천사, 모두가 신의 일을 한다.
예를 들어 왕은 하인들을 시험하여 심약한 이와 굳건한 이들, 반역자와 애국자, 간신과 충신을 골라내려고 했다.
유혹하고 선동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왕이 어떻게 하인의 충성을 시험할까?
유혹하고 선동하는 이들도 왕을 섬기며, 그들은 왕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가 바람을 보내니 안정된 자와 불안정한 자의 차이가 나타나고
새매와 각다귀를 나누어 각다귀는 없애고 새매만 남게 하기 위함이다.
A certain king ordered a slave girl to adorn herself and offer herself to his slaves, so their loyalty could be revealed. Though the girl’s action appears sinful outwardly, in reality she is doing the king’s work.
어떤 왕은 한 노비에게 자신을 치장하고 자신의 노비들에게 몸을 바치라고 명령하여 그들의 충성심이 드러나게 하였다. 비록 소녀의 행동이 겉으로는 죄악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왕의 일을 하고 있다.
The great saints have seen for themselves, not by proof and rote, but face to face and unveiled, that all people—good or evil—are obedient servants of God. Nothing exists that does not proclaim God’s praise. Therefore, to the saints, this world itself is the resurrection, since the resurrection means all people serving God and doing no other work but God’s work. These saints perceive this truth even here below, for even were the veil removed they would not increase in their certainty.
위대한 성인은 자신을 증거나 습관으로 보지 않고,
베일을 벗고 대면하여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이를 신의 충실한 종이라고 여긴다.
신을 찬양하지 않는 것은 없다.
따라서 성인에게는 이 세상 자체가 부활인데,
부활은 모든 이가 신을 섬기고, 오직 신의 일만 한다는 뜻이다.
이 성인들은 지상에서도 이 진리를 인식한다.
베일이 벗겨지더라도 그 확실성은 커지지 않기 때문이다.
All may be servants, but some have been raised above others in their closeness to God. To those who are absorbed, all differences are lost. To those who have not yet arrived, many stages appear between one and another.
모두가 하인이더라도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더 높이 신과 가깝게 올라갔다. 몰입한 이들에게는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
아직 도달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서로간에 많은 단계가 나타난다.
Let me cite a parallel. A gardener planted a tree, and the tree bore fruit. Surely, this tree that bore fruit is better than a hundred trees that are barren. It is possible those other trees may never bear at all, since there are many stages of growth where disease might attack.
유사한 예를 들어보자. 정원사가 나무를 심었는데, 열매가 맺었습니다. 확실히 이 열매 맺은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 백 그루의 나무보다 낫지요.
다른 나무들은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는데,
성장의 많은 단계에서 병에 걸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A pilgrim who reaches the Kaaba is better than the pilgrim who is still travelling in the desert. The one in the desert fears they may not pass the many landmarks and reach the Kaaba, while the former has already reached their destination. One certainty is better than a hundred doubts.
카바에 도착하는 순례자는 아직도 사막을 여행하는 순례자보다 더 좋습니다. 사막에 있는 자는 많은 표지물을 통과하지 못할까 또 카바에 도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만, 전자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나의 확실함이 백 가지 의혹보다 낫습니다.
The Amir said: “Those who have not arrived still have hope.”
아르미가 말하기를:
“도착하지 않은 자들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Rumi answered: What is the hopeful person compared to one who has arrived? There is a vast difference between fear and attainment.
Why should I speak of such a difference when it is obvious to all?
What I am speaking about is attainment, since there are many differences between the stations of attainment.
루미가 대답했다.
도착한 사람들과 비교해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가요?
두려움과 성취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에게 그것이 그것이 분명한데, 왜 내가 그런 차이를 말해야 하나요?
나는 성취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취의 경지에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It is possible to indicate the various stages of fear and the stations of fear, but the stations of attainment have no indication. In the world of fear everyone decides what they will devote to honor God. One person gives through physical efforts, another donates their wealth, another sacrifices their life. One worships with fasting, another with prayer, another by ten prostrations, another by a hundred. These stages are very different and can easily be distinguished.
여러 두려움의 단계를 나타내는 것은 가능할 수 있으나
성취의 경지는 가리킬 수 없습니다.
두려움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신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결정합니다.
누구는 육체의 노력을 주고, 다른 이는 재화를 보시하고,
또 다른 이는 생명을 희생합니다.
누군가는 단식으로 예배하고, 다른 이는 열 번의 절로, 다른 이는 백 번의 절로 예배를 한다.
이 상황들은 매우 다르고 또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In the same manner there are stages of travel from Konya to Caesarea that are distinct and well-known: One must pass Qaimaz, Uprukh, Sultan, and so forth. But the stages by sea from Antalya to Alexandria are without landmarks. The ship’s captain knows the signs, but they are not shared with landsmen since landsmen cannot understand.
같은 방식으로 코냐에서 카이사레아로 가는 여행의 과정은 분명하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콰이마즈, 우프루크, 술탄 등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틀리아에서 알랙산드리아까지 바다로 가면 확실한 지표가 없습니다.
배의 선장은 표식들을 알지만, 그러나 육지인과 그것을 공유하지 않지요. 육지인은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The Amir said: “But even speaking about it imparts some benefit. We may not know everything, yet still we learn a little, and can find out and guess the rest.”
아미르가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면 약간의 유익함을 얻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조금은 배우고 나머지는 찾거나 추측을 할 것입니다.”
Rumi replied: Yes indeed, by God! Someone sits wakeful through the dark night, thinking of some way to find the day. Though they do not know how to get there, still, in waiting for daylight, the day approaches.
루미가 대답했다.
예, 참으로 그러합니다. 어떤 이는 어두운 밤 동안 깨어서 앉아있으며, 낮을 찾는 길을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은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새벽을 기다리던 낮이 다가옵니다.
Another person is travelling by caravan upon a dark night in a storming rain. They do not know where they have gone, which way they are passing, or what distance they have covered, but when day comes they see the results of that travelling and go on from there.
다른 사람은 폭풍우 속을 어두운 밤 동안 대상과 함께 여행합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길을 지났는지, 어떤 지역을 넘어갔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날이 밝으면 그들은 여행의 결과를 보고, 그곳에서 계속 나아갑니다.
Whoever labors for the glory of God, though both their eyes are sealed, their labor is not lost. Even an atom’s weight of good is not lost. Though all within is dark and veiled, and they do not see how far they have progressed, still in the end they will know.
누구든지 신의 영광을 위해 노력하면, 두 눈이 가려졌더라도 노력은 헛되지 않습니다.
한 개의 원자의 무게만큼의 선행이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어둠과 베일에 가려져있어, 얼마나 나아갔는지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알게 됩니다.
“This world is the seedplot of the world to come.” Whatever they sow here, they will reap in the next world.
“이 세상은 다가올 세상의 씨앗을 심는 곳이다.”
여기서 무엇을 심든지 다음 세상에서 거둘 것입니다.
Jesus laughed a lot. John wept a lot. John said to Jesus, “You have become exceedingly carefree against all the subtle deceits, that you laugh so much.”
Jesus replied, “You have become exceedingly unmindful of the subtle, mysterious, wonderful graces and loving kindness of God, that you weep so much.” One of God’s saints was present at this incident. He asked God, “Which of these two has the higher station?” God answered, “He who thinks better of Me.” In other words, “I come when you think of Me. Each person has an image and an idea of Me. Whatever picture he forms of Me, there I am. I fill that picture where God dwells. I care nothing for that point of view where God does not exist. Cleanse your thoughts, O human, for they are My abode and dwelling place.”
예수는 많이 웃었습니다. 요한은 많이 울었습니다.
요한이 예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모든 미묘한 속임수에 대해 전혀 걱정이 없으니 그렇게 많이 웃는군요”
예수께서 답하길, “당신은 미묘하고,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와 신의 사랑의 선하심에도 대단히 무관심하니 그렇게 많이 울고 있군요”
신의 성인들 중 한 분이 이 일을 말했습니다.
그가 신에게 묻기를 “이 두 분 중 누가 더 높은 경지인가요?”
신이 답하시기를, “나를 더 좋게 생각하는 이다.”
즉, “네가 나를 생각할 때 나는 온다. 각자에게 나에 대한 인상과 관념이 있다. 어떤 형상으로 그가 나를 그릴지라도 거기에 나는 있다. 나는 그 그림을 신이 거처로 채운다.
나는 신의 거처에 대한 견해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생각을 깨끗이 하라. 오,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나의 거처이고 그리고 살아가는 장소다.”
Now test yourself as to weeping and laughter, fasting and prayer, solitude and company, and the rest. Which of these is more profitable to you? Whichever brings you straighter on the road and gains you the greatest advancement, choose that task. Take counsel from your heart, even though others may disagree. The truth is within you. Compare it with what others say. When they agree, then follow that course.
이제 스스로가 우는지 웃는지, 금식하는지 기도하는지, 혼자인지 무리인지 그리고 그 외의 것도 점검하세요.
이 중에서 어느 쪽이 당신에게 더 이로울까요?
어느 쪽이든 당신에게 더 곧은 길이고, 가장 큰 진보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택하십시오.
남들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과 상의하세요.
진리는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그것과 비교하세요.
그들이 동의할 때는 그 방식을 따르세요.
The physician comes to someone who is sick and questions the inward doctor; for within you there is a doctor, namely your natural temperament, instincts and inclinations. Therefore the external physician questions it: “This food that you ate, how was it? Was it light? Was it heavy? How was your sleep?” From what the inward doctor answers, the external physician makes their prescription.
의사는 병자들에게 와서 내면의 의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내면에는 타고난 기질과 직관과 성향이라 불리는 의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의사가 묻습니다.
“당신이 먹은 이 음식은 어떤가요? 가벼운가요? 무거운가요?
수면은 어떻습니까? 내면의 의사가 하는 답으로부터 외부의 의사는 처방전을 만듭니다.
Therefore the root of the matter is the inward doctor; the patient’s own response. When this inner doctor is feeble and its temperament is corrupt, the sick person sees things incorrectly and gives skewed indications. They say that sugar is bitter, vinegar is sweet.
그러므로 일의 근본은 내면의 의사이며, 환자 자신의 반응입니다.
이 내면의 의사가 허약하고, 그것의 기질이 손상되면, 병자는 사물을 정확하지 못하게 보고 또 왜곡된 징후를 말합니다.
설탕을 쓰다고 하고, 식초가 달다고 말합니다.
Therefore they need the external physician to guide them until their own instinct is restored. After that they consult only their own inward doctor to find the counsel they need.
그러므로 외부의 의사가 그들을 인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직관이 회복될 때가지요.
오직 자기 내면의 의사와 상의한 후에 필요한 조언을 찾습니다.
We have a similar doctor within our spiritual being. When this higher Self is feeble, our inward senses perceive falsely, and whatever we follow is contrary to the truth. So the saints are physicians who guide a person until their instinct is restored to its right balance, and their religion and their heart have gathered strength.
“Show me things as they truly are.”
우리의 영적 존재 안에 유사한 의사가 있습니다.
이 상위의 자아가 허약할 때 내면의 감각들은 잘못 받아들이고,
무엇이건 우리가 따르는 것은 진리와 상반됩니다.
그리하여 성인은 의사이고 그들의 직관이 올바른 균형을 회복할 때까지 인도하며, 그러면 그들의 신앙과 마음이 강해집니다.
“나에게 사물의 참 모습을 보여주세요.”
Humanity is a mighty volume. Within the people of this world all things are written, but veils and darkness do not allow men and women to read the knowledge within themselves. The veils and darknesses are those many preoccupations, worldly desires and thoughts of every kind. Yet, though they are wrapped in darkness and are hidden by so many veils, they can still read something and therefore learn. Consider when these darknesses and veils are removed, what they will learn then, and what varieties of knowledge they will discover within!
인류는 거대한 책입니다. 이 세상 사람의 내면에는 만물이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베일과 어둠이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 내면의 지식을 읽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베일과 어둠은 많은 선입견과 모든 종류의 세속적 욕망과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어둠에 쌓여있고 많은 베일로 가려졌지만, 그래도 일부는 읽을 수 있고 또 그래서 배웁니다.
이러한 어둠과 베일이 제거될 때, 그들이 무엇을 배울지 내면에서 어떤 다양한 지식을 찾을지 생각해 보시오!
After all, all these trades and professions—tai-loring, building, carpentry, goldsmithery, science, astronomy, medicine and the rest of the world’s countless and innumerable callings—all these were discovered from within by some person, they were not revealed through stones and dirt. When they say that a raven taught people to bury the dead, even that was due to the reflection of a human being. Someone’s own inner urge drove them to learn that. After all, the instincts of the bird are but a part of humanity, but a part does not command the whole.
After the Amir left, someone said: “When the Amir comes, the Master utters mighty words. The words never stop, because he is a master of words. Words flow from him without interruption.”
Rumi said: If in winter time the trees do not put forth leaves and fruit, people should not think they are not working. They are continually at work. Winter is the season of gathering; summer is the season of spending. Everyone sees the spending, but they do not see the gathering in. In the same way, a person gives a party and spends all sorts of money on it. Everyone sees this, but no one sees the gathering in and collecting little by
little for the sake of that entertainment. No one sees any of that. Yet the ingathering is the root of the matter, for the spending comes out of that income.
루미가 말하기를:
겨울철에 나무가 잎과 과일을 내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무가 논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들은 계속 일합니다.
겨울은 모으는 계절이고 여름은 쓰는 계절입니다.
누구나 쓰는 것은 봅니다. 그러나 모으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한 사람이 파티를 열고 거기에 온갖 돈을 씁니다.
누구나 이것을 보지만 모으는 것은 보지 못하지요.
그 연회를 열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저축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은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으는 것이 사물의 근본입니다.
쓰는 것은 그 소득에서 나옵니다.
Whoever we are in unison with, we communicate with them every moment, even in silence, in absence and presence alike. Even in battle with others, we are together. We may strike against others with our fists; still, we are speaking to them and are absorbed in one action with them. Therefore we are in unison. Don’t become distracted by the fists—in those fists are spiritual gifts. You don’t believe this? Then open those fists, and see the difference between the sweet joy of unison, and pearls of great price.
Many people speak fine, graceful sayings and lofty wisdom in verse and prose. The inclination of the Amir towards us is not on account of lofty wisdom, graceful sayings and sermonizing. Things of that kind are to be found everywhere, and are by no means in short supply. His loving me and his inclination towards me is not for those things. He sees something else. He sees a light transcending what he finds from others.
It is related that a certain king summoned Majnun before him.
“What has happened to you. What has befallen you?” the king inquired. “You have disgraced yourself, forsaken your hearth and home, become wasted and utterly destroyed. What is Laila? What beauty is hers? I will show you many beautiful and lovely girls. Name your ransom and I will bestow them upon you.”
When they were brought to court, Majnun and the lovely girls were duly introduced. Majnun kept his head cast down, staring in front of him.
“Well now, lift up your head and look!” the king commanded.
“I am afraid,” Majnun replied. “My love for Laila is a drawn sword.
If I raise my head, that blade will strike it off.”
Majnun had become immersed in his love for Laila. Yet, the other girls also had eyes and lips and hair. What then had he found in Laila to come to such a st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