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에 빠진다는 것은
초월적 상태에 묶이는 것이며,
목격자의 자리에 묶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목격자의 상태에 들어서는 것이
아주 좋은 기분일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사물에 대한
목격자라는 것은
진실이기는 해도,
여기에는 우리가 붙잡히기 쉬운
허황된 측면 또한 존재한다.
에고는 어디에든 진을 칠 수 있다.
에고는 변신술에 능하다.
우월감이 통하지 않으면
에고는 허무감을
동원할 수도 있다.
허무감이 통하지 않으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목격자'로서
진을 칠 수도 있다.
에고는 끊임없이
연료를 주입받고 있다.
여러분이 에고의
이 주입구를 찾아낸다면,
우리 존재의 한 측면에서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잠시 사라지겠지만
이내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나' 곧 에고는 자신을
목격자로서 내세울 수 있다.
처음에는 이것이
엄청난 해방으로
느껴질 수가 있다.
특히 삶에서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갑자기 목격자가 된
이 사람들은,
삶에서 자신이
주로 맡던 역할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단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목격자의 자리는
하나의 고착 상태가 될 수 있고,
그것이 고착되면
어떤 삭막한 느낌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목격자는
목격되는 것과는 따로 떨어진
어떤 것으로서 자신을 보게 된다.
이것은 물론
진실하고도
철저한 깨달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반쪽만을 깨달은 것이며,
단지 절반만이 깨어난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가
즐겨 인용했던 옛말이 있다.
"우주는 환영이다,
오직 브라만만이 실재한다.
우주는 브라만이다."
이 말은 "우주는 환영이다"라는 구절은
한낱 철학적인 진술이 아니다.
깨어남이라는 경험의 일부는,
이 우주가 환영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깨달아 알게 되는 하나의 지식이다.
우리는 자신과 별개로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 따위는 없음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 첫번 째 진술은
깨달음과 함께 찾아오는
통찰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오직 브라만만이 실재한다"라는
진술은 영원한 목격자에 대한 인식을 가리킨다.
우주를 목격하는 자야말로
모든 실재가 있는 곳이다.
목격자는 목격되는 대상보다
훨씬 더 생생히 경험된다.
목격되는 대상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하나의 꿈이나
무슨 영화나 소설처럼 우리에게 비쳐진다.
여기에는
엄청난 해방감이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는 있는 모든 것의 목격자이다'라는
생각에 빠져들 수 있는
강력한 경향성도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우주는 브라만이다"라는
진실이 없이는
진정한 일원성,
하나임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우주는 브라만이다"라는 진술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일체성,
하나임의 깨달음을
얻는다.
"우주는 브라만이다"라는 진술은
저 바깥에 있는
목격자의 자리를 무너뜨린다.
목격자의 자리는
총체성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별안간 우리는 바깥쪽에서 목격하고 있지 않다.
그 대신 목격은 모든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안쪽에서, 바깥쪽에서,
주변에서, 위쪽,
아래쪽 등등 어디서든 말이다.
모든 것이 모든 곳에서,
안쪽과 바깥쪽에서
동시에 목격된다.
왜냐하면
목격되는 객체가
곧 목격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가 동일하다.
이것이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격자의 위치에
묶여버릴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초월적인 공,
텅 빈 상태에
갇혀버릴 수 있다.
'초월 상태에 빠지지 말라'
초월은 실재하며
대단히 아름다운 것이다.
다만 거기에 빠지진 말라.
사실 우리가 빠져들 만한 곳은
아무데도 없고,
자신을 고정시켜둘 만한 곳도 없다.
우리가 부여잡고 지켜야 할
대단한 관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깨어나고
진정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모든 움켜짐에서,
그리고 모든 관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 상태는 말 그대로
형언불가능하다.
그러한 존재 상태를
개념으로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노자가 말했듯이,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이 말은
'말 할 수 있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진리는 소유하지 못한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독점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지도 못한다.
중요한 것은
진리란
어느 누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똑같이
나눠 가지는 선물이다.
그래서 이 여행길의 도중에
우리가 묶여있게 될 수 있는
우월감이나 허무감,
또는 목격자의 관점 같은 것은
모두가 이른바
'깨달음'이라는
무소불위의 기운에 편승하여
에고가 미혹되어가는
여러 함정들의 보기들이다.
우리가 진실하다면
자신이 고착 상태에 빠질 때마다
그것을 하나씩 알아차리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 해 전에 ,
목격자의 관점에 있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처음엔 목격자의 경험은
멋지고 놀랍고 심오하고
또한 새롭기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직관을 통하여
어떤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것은 일체성,
하나임이 아니다.
이것은 통일성이 아니다."
그 기간 동안에 이 목격자는,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그 '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인식되었다.
나 자신이라 상상했던
그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목격자는
목격되는 것과는 별개다'라는 망상이
계속 남아 있었다.
남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나의 여정에서 다음 단계는
이 목격자의 관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만약 목격되는 것이
목격자와 다르다면,
그것은 이미 분리를
내포하는 것'임을 깨달을 때,
그 관점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분리를
자신이 알아차리게끔 허용하면
저 외부의 목격자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거듭 말하지만,
'진실 아닌 것'을
바로 보는 것이
이 붕괴에 있어서
가장 큰 요소라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내게
이야기해준 덕분에
내 안에서 고착상태를
알아차리게 되었다는 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자기 스스로 발견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 탐구해 나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혼자인 까닭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줄 수 없다.
완전한 깨달음은
자신을 책임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
자신을 깊이 직시함으로써,
우리는 막다른 골목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무언가 다른 것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에고의 관점에
고착되기를 멈출 때,
즉 에고가
'깨달은 에고'로
자신을 되살리기를 멈출 때,
에고가 실재의 본성을 보고는
엉뚱한 결론을
지어내기를 멈출 때,
그때는 전혀 다른
어떤 인식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탐구와 명상, 그리고
깊이 살펴보기를 통하여
이러한 망상이 죽기 시작하면
우리의 영적인 삶에는
전혀 새로운 영역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고의 환영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는 영역이다.
그 영역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가지는
섬세미묘한 측면들이
끝없이 열리는 곳이며,
또한 그 측면들에 대한
더욱 깊숙한 기억이 회복되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 모두가
향해가는 곳이자,
또한 영적 진화 그 자체에
이미 깃들어 있는 본성이다.
<아디야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