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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신성이란 바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삶 그것이다.

작성자山木|작성시간26.06.11|조회수10 목록 댓글 1

에고를 녹이는 최상의 용해제는

바로 이 삶 속에서,

우리 인간 존재의 씨줄 날줄 안에서,

나날의 경험으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일 안에서 발견된다.

바로 이것이 영성과 관련한 주제에서

자주 간과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회피하거나,

정말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을 보지 않으려 하거나

자신의 오해와 망상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수단으로서 자신의 영성을 이용하고 있다.

삶 자체가 종종 가장 휼륭한 교사라는 것을

알야야 한다.

삶은 은혜로 가득하다.

그 은혜는 어떤 때는 황홀한 은혜, 아름다운 은혜,

지복감과 행복과 기쁨의 순간이며,

또 어떤 때는 질병이나, 실직, 사랑의 상실,

혹은 이혼등과 같은 맹렬한 은혜이다.

사람은 가끔,

예컨대 중독에 찌들대로 찌들어 있을 때,

가장 큰 의식의 도약을 맞아

다른 존재방식을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삶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우리를 깨워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 삶이라는 것을 슬슬 회피한다.

삶이 우리를 깨어나도록 돕고 있는데도

우리 대부분은 삶이라 불리는

도움의 손길을 도망 다닌다.

신성이란 바로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삶 그것이다.

신성은

우리 삶의 갖가지 상황을 이용하여

그 자체의 깨어남을 성취하며,

우리를 깨어나게 하려고

자주 어려운 상황을 선택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해 다니며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힘든 세월을 겪어가면서

커다란 의식의 도약을 이루어 낸다.

많은 이들이 이 부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가 겪고 있는 가장 힘든 일들,

가장 고통스럽고 아픈 순간이 바로

맹렬한 은혜의 나타남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음만 굳게 먹는다면,

그 고통은

깨어남을 위해 아주 효력있고 또 중요한 성분이다.

되돌아서서 마주 볼 마음만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내밀고 있는 선물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수가 있다.

때에 따라서는

그 선물이 억지로 품에 안겨지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삶 속의 상황이

질병이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든

이혼,중독 혹은 직장의 문제이든 간에

그 각각의 상황 속에

담겨 건네지는 선물을

일아보기 위해서는

삶 속의 모든 상황을 직면해야만 한다.

나는 드디어 깨달았는데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 자신에게 철저히,

깊이 진실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며,

내가 초래한 결말에 대해 완전히

책임지기 시작하는 것임을 말이다.

또 내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모든 관념을 녹아보내는 것뿐임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자신에 대해 지니고 있던 관념들은,

나를 그 상황 속으로 끌여들였던 모든 것을

그만 놓아보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를 끌여들였던 것들이란

다름 아니라,

여전히 에고의 수준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온갖 방식들이었다.

결국 내가 거기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스스로가 되고자 원하던

'그 사람'을 그만 놓아보내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겪음으로써

예전에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특별한 에고의 용해가 일어났다.

그 용해는

명상 중에 앉아있을 때처럼

자아의 느낌이

어떤 아름다운 존재 상태 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은 경험은 아니었다.

그건 마치 누군가가

나의 살가죽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것만 같았다.

그건 정말이지 비참한 노릇이었다.

결코 우아하거나 부드럽거나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어떤 존재가 내 코앞에서

거울을 들이밀고는

한순간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그야말로 나를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것만

같은 꼴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을 통하여

마침내 나는

스스로 나라고 여겨오던

모든 것을 놓아보낼

용기를 발견했다.

이제는 내 속에서 올라오는

자아의 느낌을

그 무엇이든간에

다 놓아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자아의 느낌이 훌륭한 자아이든

형편없는 자아이든 유익한 자아이든,

쓸모없는 자아이든 간에 말이다.

마침내 나는

그 경험을 허용함으로써 깨어나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서 모든 자아의 느낌이 빠져 나갔다.

그런 경험을 하는 가운데서

나는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눈치챘다.

업력에 기인한

'삶의 조건'이 빠져나갈 때는

해방감이 찾아오는데,

그때 내가 느낀 것이

바로 이 해방감이었다.

나는 내가

나의 몸도 마음도

인격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이 모두가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깨닫지 못했었던 것은

비록 그것이 꿈임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그 꿈을

다루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언제까지나

피해다닐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결국

겪고 다루어내야 한다.

또 모든 것은 결국은

직시해야만 하게끔 되어있다.

무릇 깨달은 바는

체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나의 이 과정은 아무리 힘들다해도

평생에 가장 중요한 과정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나름의 경로를 가지고 있으며,

삶이 그 안에서 거울을 비쳐주고 있다.

조건화된 자아를 짜내버리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신념과 생각과 개념과 자아상을

짜내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가 삶을 직시하려고만 한다면,

삶은 언제나,

지금도,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중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삶이 보여주려 애쓰는 것을

우리가 보려들지 않을 때는,

보아야만 할 그것을

우리가 기꺼이 보려할 때까지

삶은 그 강도를 높여 갈 것이다.

자주 쓰는 말로,

삶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장미빛 여정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깨어남으로 향한 경로에는

멋진 순간들, 심오한 순간들,

그리고 깨달음이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좀 거친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깨닫고 싶노라 외치는 사람 모두가

다투어 선택하는 길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깨어남을 원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깨어나기를 바라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각색된 깨어남을 원한다.

그들이 실제로 바라는 것은

자신의 '꿈꾸는 상태' 속에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하긴 그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이 진화해온 수준이라면 말이다.

깨달음을 향한 진지하고도 실질적인 열망은

꿈꾸는 상태를 좀 더 기분좋게 해보려는

욕구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깨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온 몸을 던지려는 열망이다.

깨달음을 향한 진지한 열망이란,

완전한 깨달음을

가져다 줄 수만 있다면

훌륭한 것이든 끔찍한 것이든

그 무엇이라도 좋다고 하는

간절한 내면의 기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겪어내야 하는지에 대하여

그 어떤 전제조건도 달지 않는 열망이다.

<아디야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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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6.06.11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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