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婆那王唯自見身住本宮中,作是思惟:
나바나왕은 오직 자신만이
이 궁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생각하였다.
‘向者是誰?誰聽其說?所見何物?是誰能見?
佛及國城衆寶山林,如是等物今何所在?
爲夢所作?爲幻所成?爲復猶如乾闥婆城?
爲翳所見?爲焰所惑?爲如夢中石女生子?
爲如煙焰旋火輪耶?’
‘앞에 보이던 것은 누구며, 누가 그 설법을 들었으며,
본 것은 어떤 물건[物]이며, 누가 능히 보는가?
부처님과 나라의 성과 많은 보배산림 이와 같은 물건 등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꿈속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환(幻)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마치 건달바성(乾闥婆城:신기루)과 같은 것인가,
눈병[翳:瞖]으로 본 것인가, 불꽃[炎]에 미혹된 것인가,
꿈속에서 석녀(石女)가 자식을 낳은 것과 같은 것인가,
연기와 불꽃의 불 수레바퀴가 도는 것과 같은 것인가?’
復更思惟:
‘一切諸法性皆如是,唯是自心分別境界,
凡夫迷惑不能解了,無有能見亦無所見,
無有能說亦無所說,見佛聞法皆是分別,
如向所見不能見佛,不起分別是則能見。’
그리고 다시 생각하였다.
‘일체 모든 법의 성품은 모두 이와 같아
오직 자기 마음으로 분별한 경계인데
범부는 미혹하여 능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능히 보지도 못하고, 또한 보는 것도 없고,
능히 말하지도 못하고, 또한 말하는 것도 없다.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는 것도 모두 분별이니,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능히 부처님을 볼 수도 없다.
분별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것이 능히 보는 것이다.’
時楞伽王尋卽開悟,
離諸雜染證唯自心,住無分別:
往昔所種善根力故,於一切法得如實見,
不隨他悟。能以自智善巧觀察,
永離一切臆度邪解,住大修行爲修行師,
現種種身善達方便,巧知諸地上增進相,
常樂遠離心、意、意識,斷三相續見,
離外道執著,內自覺悟,入如來藏趣於佛地。
그때 능가왕은 이윽고 곧 지혜를 얻어 온갖 번뇌를 떠나
오직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 분별함이 없는 경지에 머물렀으니
지난날 심은 선근의 힘 때문이었다.
모든 법에서 실다운 소견을 얻어 다른 이를 따라 깨닫지 않고
자기의 지혜로써 바르게 관찰하여 일체 억측으로 헤아리는
삿된 견해를 영원히 떠났다.
큰 수행에 머물렀으며 수행의 스승이 되어 갖가지 몸을 나타냈고 방편을 잘 통달하였다.
또한 모든 경지에서 증진(增進)하는 모양을 영민하게 알았으며,
항상 즐거이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意識)을 멀리 떠나
세 가지 상속견(相續見)을 끊고 외도의 집착을 떠났으며
안으로 깨달아 여래장에 들어 불지(佛地)에 나아갔다.
측천무후제(則天武后製)
自惟菲薄言謝珪璋,顧四辯而多慚,
瞻一乘而罔測,難違緇俗之請,
强申翰墨之文;詞拙理乖,彌增愧恧,
伏以此經微妙,最爲希有,所冀破重昏之暗,
傳燈之句不窮,演流注之功,涌泉之義無盡。
나의 생각[自惟]은 아주 엷고 얕은데
말하는 것[言謝]도 잘 꾸미기만 하여서,
사변(四辯:부처와 보살이 설법할 때 발휘하는 지혜와 말솜씨를 말한다.)을 살펴보니 부끄러울 뿐이고 일승(一乘)을 엿보아도 불법을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승려와 속인[緇俗]의 요청을 물리치기 어려워 억지로 먹을 갈고 붓을 들어 글을 지었으나, 문장은 보잘 것 없고 글의 논리도 들쑥날쑥하여 점점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삼가 생각하건데, 이 경문의 은미하고 신묘한 이치는
세상에서 가장 드문 것이니, 세속의 혼탁한 어둠을 물리쳐서
등불과 같은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끊이지 않으며,
불법을 전하는 공덕이 끊임없이 펼쳐져서 샘처럼 솟아나는
불법의 진리가 마르지 않기를 바라노라.
신역대승입능가경서(新譯大乘入楞伽經序)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