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로버트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로버트 A. 존슨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융 연구소에서 수학한 미국의 정신분석가. 국제적으로 저명한 강연자이자 저자.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 <로맨틱 러브에 대한 융심리학적 견해, WE> 가 국내에 번역되었고 <내면작업 inner work>, <충만함 contentment>, <엑스터시 Ecstacy> <변형 transformation> 등의 저서가 있다.
OWNING YOUR OWN SHADOW
Introduction
들어가는 말
It was said that Dr. Jung's favorite story went something like this: The water of life, washing to make itself known on the face of the earth, bubbled up in an artesian well and flowed without effort or limit.
심리학자 칼 융이 제일 좋아했다고 알려진 이야기다.
지구상 어디엔가 장인의 샘이 있고
그 곳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난다.
물길을 내기 위해 특별히 애를 쓰지 않아도 물은 어딘가로 흐른다.
People came to drink of the magic water and were nourished by it, since it was so clean and pure and invigorating.
순수하고 청정한 이 물은 마신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주어서 힘을 얻게 해 준다.
But humankind was not content to leave things in this Edenic state.
Gradually they began to fence the well, charge admission, claim ownership of the property around it, make elaborate laws as to who could come to the well, put locks on the gates.
Soon the well was property of the powerful and the elite.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쫒겨났듯이 사람들은 이런 낙원 같은 상태를 있는 그대로 놔두지 못한다. 곧 샘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에게 입장료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샘 근방의 땅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특정 사람만 샘물을 마실 수 있도록 법을 만든다.
울타리를 치고 문에는 빗장을 채운다. 모두에게 주어진 샘이
힘 있는 엘리트들만의 사유재산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The water was angry and offended; it stopped flowing and began to bubble up in another place.
The people who owned the property around the first well were so engrossed in their power systems and ownership that they did not notice that the water had vanished.
They continued selling the nonexistent water, and few people noticed that the true power was gone.
But some dissatisfied people searched with great courage and found the new artesian well.
Soon that well was under the control of the property owners, and the same fate overlook it.
The spring took itself to yet another place-and this has been going on throughout recored history.
사람들의 이런 행태를 지켜보던 생명의 물은 기분이 언짢아지고
화가 나서 흐르기를 멈춰버린다. 그러고는 다른 자리를 찾아내
그 곳에서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샘 근처에 재산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샘을 둘러싼 힘의 역할관계에만 몰두한 나머지, 샘물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계속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샘물을 돈을 받고 판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나 이 중 극소수는 샘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태에 불만을 품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장인의 샘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새로 찾은 샘도 머지않아 땅 주인들이 통제를 하게 되고
결국 같은 일이 똑같이 반복된다. 물은 또 새로운 자리를 찾아 샘솟는다.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This is a very sad story, and Jung was particulary touched by it. since he saw how a basic truth can be misused and subverted into an egocentric playing.
대단히 슬픈 이야기다. 융은 자아중심적인 사람들이 진리를 어떻게 악용하고 퇴락시켜왔는지 지켜보았기 때문에 특히 이 이야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Science, art, and particulary psychology have suffered from this dark process. But the wonder of the story is that the water is always flowing somewhere and is available to any intelligent person who has the courage to search out the living water in its current form.
과학과 예술분야는 물론, 특히 심리학에서 이런 암울한 과정을
겪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서 참으로 경이로운 대목은 샘물이
항상 어디에선가 솟아 흐른다는 사실이다.
또 생명의 물을 찾으려는 용기 있는 지성인들에게는 저마다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이 물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Water has often been used as a symbol for the deepest spiritual nourishment of humanity.
It is flowing in our time in history, as always, for the well is faithful to its mission; but it flows in some odd places.
It has often ceased to flow in the accustomed sites and turned up in some most surprising locations.
But, thank God, the water its still there.
물은 종종 영적 자양분의 심오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샘은 언제나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에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언제나 그러하듯 쉬지 않고 흐른다.
이따금 익숙한 장소에서 흐르던 것을 멈추고 가장 예기치 않은
곳으로 물길을 돌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물이 마르지 않고
여전히 흐른다는 사실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In this book we will examine some of the odd places in which the water of life is flowing these days.
As always, it is free, and it is fresh, as much the living water as ever before.
이 책에서 나는 이 시대에 생명의 물이 흐르는 낯선 자리를 탐구할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 생명의 물은 무료다.
이 물은 언제나 신선하다.
The main difficulty is that it is to be found where one least expects it.
This is the meaning of the biblical phrase "what good could come out of Nazareth?"
쉽게 납득할 수 없겠지만 중요한 사실을 말하자면 생명의 물은
가장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나사렛에서 어떻게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는
성서구절이 뜻하는 바와 같다.
Nazareth is now holy to us, the birthplace of the Savior:
but in biblical times it was the wrong side of the tracks and the least likely place to find an epiphany of the spirit.
지금 우리들에게 나사렛은 구세주가 탄생한 신성한 땅이다.
그러나 성서시대의 나사렛 지역은 생명의 물을 구하기엔 적합하지 않아 보였고, 신의 공현公現을 맞이할 수 없는 척박한 땅으로 생각되었다.
Many people fail to find their God-given living water because they are not prepared to search in unusal places.
It is likely to turn up in Nazareth again- and be as ignored as before.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신이 부여해준 생명의 물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자리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물은 나사렛 같이 가장 주목받지 못한 땅에서 솟는다.
One such unexpected source is own shadow, that dumping ground for all those charcteristics of our personality that we disown.
As we will see later, these disowned parts are extremely valuable and cannot be disregarded.
As promised of the living water, our shadow costs nothing and is immediately- and embarrassingly- ever present.
To honor and accept one's own shadow is a profound spiritual discipline.
It is whole-making and thus holy and the most important experience of a lifetime.
인간의 영혼에서 이 기대치 않았던 원천 중 하나가 바로 그림자다.
다들 제것이 아닌 양 쓰레기 처리하듯 던져버리는 장소가 자신의 그림자다.
그러나 책을 읽는 과정에서 알게 되겠지만 이렇게 우리가 거부한 그림자는 아주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생명의 물이 언제나 무료이듯,
물의 일환인 그림자에게도 돈을 낼 필요가 없다.
당혹스럽겠지만 그림자는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수용하는 일은
심오한 단계의 영적 수행이다.
이 수행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이므로
그 자체만으로 성스럽다.
이것은 일생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체험이라 말할 수 있다.
1. The Shadow
그림자
The shadow: What is this curious dark element that follows us like a saurian tail and pursues us so relentlessly in our psycholoical world? What role does it occupy in the modern phyche?
그림자: 도마뱀 꼬리처럼 집요하게 우리들의 심리세계를 따라다니는, 이 알 수 없는 어두운 요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현대인의 심리에서 이 어두운 요소의 역할은 무엇일까?
The persona is what we would like to be and how we wish to be seen by the world.
It is our psychological clothing and it meditates between our ture selves and our environment just as our physical clothing presents an image to those we meet.
페르소나는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인 동시에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페르소나는 심리적인 옷이라 말할 수 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이미지를 대변하듯, 페르소나는 진짜 자신과 주어진 환경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
The ego is what we are and know about consciously.
The shadow is that part of us we fail to see or know.
자아는 진짜 본연의 자기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이자
자기가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신이다.
이에 반해 그림자는 우리 자신의 일부이지만
우리가 보려 하지 않거나 이해하는 데 실패한 부분이다.
How the Shadow Originates
그림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림자는 우리 자신의 일부이지만 스스로 거부하거나 억압해온
내면이다. 그것이 자아보다 더 큰 에너지를 집적할 경우
분노로 폭발하거나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We all are born whole and, let us hope, will die whole.
But somewhere early on our way, we eat one of the wonderful fruits of the tree of knowledge, things separate into good and evil, and we begin the shadow-making process; we divide our lives.
우리는 모두 온전하게 태어나며, 대부분 온전하게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과정 초기에 선악과 나무에 달려있는
신비로운 과일 하나를 따먹는 순간부터 그림자가 만들어진다.
이때 부터 삶에서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In the cultural process we sort out our God-given characteristics into those that are acceptable to our society and those that have to be put away.
즉, 문명화 과정을 통해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온전한 특질 중에서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것과 수용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작업이 일어난다.
This is wonderful and necessary, and there would be no civilized behavior without this sorting out of good and evil.
But the refused and unacceptable characteristic do not go away; they only collect in the dark corners of our personality.
When they have been hidden long enough, they take on life of their own-the shadow life.
이것은 불가피하고 실로 놀라운 과정이다.
선악을 구분하는 절차없이 문명화가 이루어진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사회가 거부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특질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구석에 차곡 차곡 쌓여간다.
이런 특질을 오랜 시간 숨겨놓으면 이 어두운 특질이
자체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의 삶이다.
The shadow is that which has not entered adequately into consciousness.
It is the despised quarter of our being.
It often has an energy potential nearly as great as that of our ego.
If it accumulates more energy than our ego, it erupts as an overpowering rage or some indiscretion that slips us; or we
have a despression or an accident that seems to have its own purpose.
The shadow gone autonomous is a terrible monster in our phychic house.
그림자는 우리의 의식으로 적절하게 통합되지 않은 부분이며
우리가 멸시하는 부분이다.
때로는 그림자가 자아와 같은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지닐 수도 있다.
그림자가 자아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집적할 경우에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로 작열하거나,
한동안 우리를 헤매게 하거나, 무분별하게 만든다.
때로는 우울증에 빠지게도 만들고,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이유가 숨어 있을 듯한 사고로 연결되기도 한다.
자생력이 있는 그림자는 심리라는 집에서 무서운 괴물로 둔갑한다.
The civilization process, which is the brightest achivement of humankind, consists of culling out those characteristics that are dangerous to the smooth functioning of our ideals.
인류는 천재적으로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특질은 조화롭게 발휘되지만
위협적으로 비치는 특질은 걸러진다.
Anyone who does not go through this process remains a "primitive" and can have no place in a culivated society.
We all are born whole but somehow the culture demends that we live out only part of our nature and refuse other parts of our inheritance.
이런 과정을 겪지 않은 사람은 소위 말해 "원시적"으로 남아 있게 되는데, 문명화된 사회에 이들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온전하게 태어나지만 우리가 타고난 자연스런 특질중 어떤 부분은 살아 있도록 허용하고 어떤 부분은 계승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문명이다.
We divide the self into an ego and a shadow because our culture insists that we behave in a particular manner.
This is our legacy from having eaten of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in the Garden of Eden.
Culture takes away the simple human in us, but gives us more complex and sophisticated power.
집단문화는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양식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자기self에서 자아ego와 그림자shadow가 분리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런 분리가 유증되어
내려온다.
우리가 단순한 상태의 인간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고 훨씬 복잡하고 세련된 인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문명이다.
One can make a foreful that children should not be subjected to this division too soon or they will be robbed of childhood; they should be allowed to remain in the Garden of Eden until they are strong enough to stand the cultural process without being broken by it.
This strength comes at different ages for different individuals and it requires a keen eye to know when children are ready to adapt to the collective life of a society.
나는 이 분리작업이 어린이들에겐 너무 빨리 진행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너무 이른 나이에 이런 분리가 일어난다면 어떤 시절을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문명화 과정을 견딜 만큼 강해질 때까지 에덴 동산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힘이 어느 시점이면 길러지는가?'라는 의문이 뒤따르게된다. 이에 대해서는 개별차를 인정해야 한다.
나이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어린이가 사회라는 집단의 삶에 적응할 준비가 되었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실제 이 시점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아주 예리한 시각이 필요하다.
It is interesting to travel about the world and see which charcteristics various cultures affix to the ego and which to the shadow.
It becomes clear that culture is an artificially imposed structure, but an absolutely necessary one.
We find that in one country we drive on the right side of the road; in another, the left.
세계 여행을 하면서 나는 각 문화권의 어떤 특질은 자아에 덧붙여지고 어떤 특질은 그림자에 부가되는지 흥미를 가지고 관찰한다.
문화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위적으로 구축된 구조에는 사실은 각 나라의 차이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어떤 나라에서는 오른쪽 좌석에서 운전을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왼쪽에서 한다.
In the West a man many hold hands with a woman on the street but not with another man; in India he may hold hands with a male friend but not with a woman.
In the West one shows respect by wearing shoes in formal or religious places; in the East it a sign of disrespect to wear shoes when one is in a temple or house.
If you go into a temple in India with your shoes on you will be put out and told not to come back until you learn some manners.
In the Middle East one burps at the end of a meal to show pleasure; in the West this would be very bad manners.
서양에서는 남녀가 손잡고 걷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남자들끼리
손을 잡고 걷는 예는 드물다.
반면 인도에서는 남자들끼리는 손을 잡고 걸어도 남녀가 손잡고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구 사회는 공식적인 자리나 종교적인 장소에서 신을 신어 존경을 표하지만 동양에서는 절이나 집 안에서 신을 신고 있으면 무례하게 여긴다.
인도에 있는 절에 신을 신고 들어가면 절에서 쫓겨난다.
예를 갖추기 전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충고도 듣게 될 것이다.
중동에서는 밥을 먹고나서 만족감을 표하기 위해 트림을 하지만
서양에서는 이런 행동이 대단히 버릇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The sorting process is quite arbitray.
Individuality, for instance, is a great virtue in some societies and the greatest sin in others.
In the Middle East it is a virture to be selfless.
Students of a great master of painting or poetry will often sign their work with the name of their master rather than their own.
In our culture, one brings to his or her own name the highest publicity possible.
The clash of these opposing points of view is dangerous as the rapidly expanding communication network of the modern world brings us closer together.
The shadow of one culture is a tinderbox of trouble for another.
위의 예에서 보았듯, 문명화 과정에서 진행되는 이 분리과정은
대단히 임의적이고 개인적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되는 것이 다른 지역에서는 가장 나쁜 죄가된다.
중동에서는 무욕無慾을 덕목으로 여긴다.
그림을 보거나 시를 읽다 보면 위대한 대가의 문하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자기 작품에 자신의 서명 대신 스승의 이름을 적어넣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어떤 문화권에서는 이름 사용을 개인의 권리로 보호한다.
다양한 문화들이 급속히 연결되고 다문화 간의 대화망이 급진적으로 확대되는 현대사회는 이런 상반된 견해들이 충돌할 위험성이
높다.
한 문화의 그림자가 다른 문화에서 문제의 불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It is also astonishing to find that some very good characteristics turn up in the shadow.
Generally, the ordinary, mundane characteristics are the norm. Anything less than this goes into the shadow.
But anything better also goes into the shadow!
Some of the pure gold of our personallity is relegated to the shadow because it can find no place in that great leveling process that is culture.
선한 특질이 그림자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일상의 특질이 준거가 되는데,
대개는 그 기준 이하를 그림자로 취급한다.
그런데 간혹 기준 이상을 그림자로 여길 때도 있다.
우리 심리에서 순수한 금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중한 것이
그림자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가치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문화라는 것이 그렇다.
Curiously, people resist the noble aspects of their shadow more strenuously than they hide the dark sides.
To draw the skeletons out of the closet is relatively easy,
but to own the gold in the shadow is terrifying.
It is more disrupting to find that you have a profound nobility of character than to find out you are a bum.
Of course you are both; but one does not discover these two elements at the same time.
The gold is related to our higher calling, and this can be hard to accept at certain stages of life.
Ignoring the gold can be as damaging as ignoring the dark side of the psyche, and some people may suffer a severe shock or illness before they learn how to let the gold out.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을 감추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림자의 고상한 면을 발견했을 때 이에 저항하느라 더 큰 에너지를 쏟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벽장 속에서 해골을 끄집어 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림자 속에 들어 있는 금을 찾아내서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하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보다, 심오하고 고결한 특질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혼란스러움은 훨씬 더커진다. 물론 우리들은 모두 이 양면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발견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우리 내면의 금은 숭고한 소명과 관련되어 있다.
일생을 살면서 어떤 시기에는 자신의 금을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내면의 내면의 금을 무시하는 것은 내면의 어두움을
무시하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
자기 안에 있는 금을 캐 드러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심한 충격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고통스러워하며 때론 중병을 앓기도 한다.
Indeed, this kind of intense experience may be necessary to show us that an important part of us is lying dormant or unused.
In tribal cultures, shamans or healers often experience an illness that gives them the insight they need to heal themselves and then bring wisdom to their people.
This is often the case for us today.
We are still operating with the archetype of the wounded healer who has learned to cure himself and find the gold in his experience.
하지만 이런 종류의 강하고 두려운 체험은 때때로 필요하다.
이는 우리 내면에 대단히 중요한 어떤 것이 오랜 시간 동면을
하여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원주민 종족의 문화에서 샤먼이나 치유자는 종종 신병이라고 하는 원인 모를 병을 심하게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이 병으로 인해 자신을 치유할 필요를 느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치유의 지혜를 전달하는 통찰을 얻게
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을 먼저 치유하고 그 경험을 통해
금을 발견하는, 상처받는 치유자의 원형이 살아 있다.
Whenever we start and whatever culture we spring from,
we will arrive at adulthood with a clearly defined ego and shadow, a system of right and wrong, a teeter-totter with two siders.
The religious process consists of restoring the wholeness of the personality.
The word religion means to re-relate, to put back together again, to heal the wounds of separation.
It is absolutely necessary to engage in the cultural process to redeem ourselves from our animal state; it is equally necessary to accumplish the spiritual task of putting our fractured, alienated world back together again.
One must break away from the Garden of Eden but one must also restore the heavenly Jerusalem.
어느 장소, 어느 문화권에서 태어나 성장하든 누구나 성인기에
도달할 쯤엔 자아와 그림자, 즉옳고 그름의 체계를 명확하게 확립하며 이 사이에서 시소 게임을 한다.
종교생활은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 전일성woleness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종교란 단어는 다시 연결하고, 원천과 하나되는 상태로 돌아가며,
분리된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을 고양시키는 문명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분열되고 소외된 세계를 다시 하나로
연결하는 영적인 과제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Thus it is clear that we must make a shadow, or there would be no culture; then we must restore the wohleness of the personality that was lost in the cultural ideals, or we will live in a state of dividedness that grows more and more painful throughdut our evolution.
그래서 우리는 그림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문명을 이룩한 다음에는 문화가 표방하는 이상과 덕목 때문에
상실하게 된 전일성을 되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분리된 상태로 살아가게 되며, 진화가 거듭될수록 분리로 인한 고통은 커질 것이다.
Generally, the first half of life is devoted to the cultural process-gaining one's skills, raising a family, disciplining one's self in a hundred different ways; the second half of life is devoted to restoring the wholeness (making holy) of life.
일반적으로 삶의 전반부에는 기술을 익히고 가족을 돌보며
수백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문화적인 과정을
익히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반면 삶의 후반부에는 전일성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One might complain that this is a senseless round trip except that the wholeness at the end is conscious while it was unconscious and childlike at the beginning.
그 출발점은 어린이와 같은 무의식 상태이다.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도 어린이와 같은 상태인데
이때는 의식적이다.
This evolution, though it seems gratuitous, is worth all the pain and suffering that it costs.
The only disaster would be getting lost halfway through the process and not finding our completion.
Unfortunately, many Westerners are caught in just this difficult place.
어떻게 보면 삶이란 그저 무의미한 왕복여행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보상이 없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생이란 진화의 과정은 수많은 상처와 고통을 기꺼이
견뎌낼 가치가 있다.
이 여정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재앙은
도중에 길을 잃어 여정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행이도 삶의 여정 위에서 길을 잃은 채
오도가도 못하고 잡혀 있는 현대인이 너무나 많다.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