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하나 속의 우주
틱낫한 스님
마음과 대상은 하나다
얼마 전 오후, 나는 암자로 돌아와서 모든 문과 창문들을 닫았다.
바람이 많이 불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엔 창문이 열려 있어 나는 시원한
푸른 숲을 볼 수 있다. 태양은 빛나고 새들은 아름답게 지저귀고 있다.
뚜이는 이미 학교에 갔다. 나뭇가지가 산허리를 가로질러 뻗쳐 자라는 것을 보기 위해 잠시 글 쓰는 것을 멈추어야겠다.
그것들의 존재는 바로 나의 존재이다.
몰입하기 위해 우리의 감각의 문을 반드시 닫아야 할 필요는 없다.
명상가의 시작은 보고 듣지 않는 것이 유익한 것을 아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몰입은 이러한 감각의 창들을 열어두고도 가능하다.
자신의 호흡이나 다른 대상에 쉽게 집중하기 위해서 말이다.
몸 속에서만 존재하는 대상들을 감지해 보라.
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볼 수도 없는데도
우리는 우리 몸 안의 느낌들을 무시할 수 없다.
치통이 있거나 다리에 쥐가 났을 때 우리는 아픔을 느낀다.
모든 기관이 건강하다면 건강한 느낌이 들 것이다.
불교에서는 감각의 세 가지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 만족, 불만족, 그리고 중립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중립은 우리가 느낀다면 만족과 유사한 감정이다.
몸 안의 감각은 우리가 그것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하나의 계속적인 흐름이다. 실제로 우리의 ‘모든 감각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어떻게 해서 감각을 막는다 하더라도 마음과 의식은 계속해서 일을 할 것이고, 우리는 심상과 개념을 얻고, 기억으로부터의 생각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은 생각과 느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하여 마음이 스스로를 靜觀하는 순수한 상태로 돌이켜 “진실한 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꽤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를 잘못
안내하고 있다. 마음은 생각과 느낌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데
어떻게 마음이 그 스스로를 떠나 멀어질 수 있겠는가? 내 앞의 나무를 볼 때 마음이 내 밖으로 나가 숲으로 들어간 것도, 또 나무를 마음 안으로 들인 것도 아니다. 마음은 나무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들은 별개의 대상이 아니다.
내 마음과 나무는 하나이다. 숲은 하나의 놀랄만한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숲
수천의 나무의 몸 나의 몸.
잎들은 흔들리고
귀는 개울의 부름을 듣는다.
눈은 마음의 하늘을 바라보고
미소는 모든 잎을 피어나게 한다.
여기 한 숲이 있는 까닭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숲을 따라
푸른 옷을 입고 있다.
삼매에 든 현자는, 자신이 경계를 두어야 하는 “바깥 세상”도,
꿰뚫어 보아야 할 “내면의 세상”도 의식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눈을 감고서도 세상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
세상은 안에도 밖에도 있지 않다.
세상은 모든 숙고의 대상 - 호흡, 콧등, 화두, 그 외 무엇이든
티끌만큼 작은 것도, 산처럼 큰 것도 - 속에서 살아있고 이를 완전하게 한다.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은 궁극적인 실재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사실, 대상은 광대한 실재의 전체를 포함한다.
작다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크다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명상하기를 청한다. 긴장을 풀 수 있는 자세로 앉아 편안해지면
당신의 호흡에 주의하여 호흡이 아주 부드럽고 가볍도록 해 보라.
얼마 후에, 당신의 주의를 몸 안의 느낌들로 옮겨 보라.
당신이 만약 아픔이나 불편함, 혹은 어떤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곳으로 주의를 돌려 그 느낌을 당신의 깨어있는 의식 모두와 향유하여 보라.
잠시 후에는, 각 기관의 역할들을 알아차려 보라. - 심장, 폐, 간, 콩팥, 소화기관 등등. 보통 이런 기관은 그 역할을 어려움 없이 수행하며 아프지 않다면 당신의 주의를 끌지 않는다. 시골을 가로질러 신선한 물로 대지를 적시는
강과 같은 피의 흐름을 느껴 보라.
이런 피의 흐름이 당신 몸의 모든 세포에 영양을 공급하고
세포로 이루어진 기관에도 그러하다는 것을 안다.
영양을 주고(소화기관), 정화작용을 하고(간, 폐), 피를 뿜어낸다(심장).
모든 신체의 기관들은, 신경계와 분비계를 포함해서, 존재하기 위해 서로를 의지한다. 폐는 피에 없어서는 안되고, 그래서 폐는 피의 일부이다.
피는 폐에 필요하고 그래서 피는 폐의 일부이다.
같은 이야기로 폐는 심장의 일부이고, 간은 폐의 일부이며, 기타 등등,
그리고 우리는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이 다른 모든 기관의 존재를 포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모든 것의 상즉相卽” 혹은
“연기적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원인과 결과를 더 이상 일차적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원인과 결과는 2차원의 것이 아닌 망으로, 다차원적 공간 안에서 셀 수 없는 무수한 망으로 짜여진 조직으로 파악해야 한다. 기관만이 그 안에 다른 기관의 존재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세포들도 그 자신의 존재에 다른 세포들을 포함한다. 하나는 모든 것 속에 있고 모든 것은 각각의 속에 있다. 이것을 [화엄경華嚴經]에서는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다.” 라는 말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면, “하나”나 “많은”과 같은 생각의 함정으로부터, 우리를 오랫동안 얽매어 왔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내가 "각각의 세포들은 그 자신의 존재에 다른 세포들을 포함한다"라고 말한 것을 오해하거나 하나의 세포가 모든 기관에 적합하게 변화하는 능력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세포가 다른 모든 것의 존재를 포함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것들이 다른 것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베트남의 한 선승은 “만약 이 티끌이 없다면 우주 전체가 있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티끌을 볼 때, 깨어있는 사람(awakened person)은 우주를 본다. 명상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비록 손에 쥐고있는 사과만큼 명백하게 이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관찰과 숙고를 통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화엄경]에는 상즉相卽의 원리를 명상하지 않은 사람을 무섭도록 혼란시키는 문구들이 있다. “모든 티끌 속에서 나는 무수한 부처의 세계를, 그 세계 속의 셀 수 없는 부처의 빛, 그 고귀하게 빛나는 오라를 본다.”
“하나의 세계는 모든 세계 안에 있고, 모든 세계는 하나의 세계 안에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수메라 산맥이 머리카락 끝에 매달릴 수 있다.”
현상적인 세계에서, 사물은 뚜렷한 공간을 차지하는 분리된 독립체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이것”은 “저것”의 바깥 면이다. 상즉相卽의 원리를 깊이
꿰뚫어보면, 이런 분리의 감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대상은 모든 다른 것들로 구성되고 또 그것들을 포함한다.
상즉相卽에 대해 명상하는 빛에서 보면, “하나/여럿”의 개념은 무너지고,
또한 “대/소”, “안/밖”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무너진다.
이미 이것을 깨달은 시인 Nguyen Cong Tru는 이렇게 주장했다 :
이 세계와 이 세계의 너머,
부처는 비교할 수 없다네!
작다고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크다고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나의 심장
이제 우리가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임을 우리 몸에서 깨닫게 되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 우리 안의 전 우주의 현존에 대해 명상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심장이 고동치기를 멈춘다면 우리 삶의 흐름도 멈출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심장을 매우 귀하게 여긴다. 우리는 아직 생존에 또한 필수적인 것들, 우리 몸밖의 것들을 살펴보지 않았다. 우리가 태양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빛을 보라. 태양이 비추기를 멈춘다면, 우리 삶의 흐름 또한 멈출 것이다. 그래서 태양은 우리의 두 번째 심장, 우리 몸밖의 우리의 심장이다.
이 거대한 “심장”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생존에 필요한 온기를 불어
넣어 준다. 식물은 태양 덕에 살아간다. 그 잎은 태양 에너지를 흡수하고,
공기중의 이산화탄소로 나무나 꽃, 플랑크톤에 필요한 양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식물 덕에 우리와 다른 동물들이 살아갈 수 있다. 우리 모두 - 사람, 동물 그리고 식물 - 는 태양을 직․간접적으로 소비한다. 우리는 우리 몸밖의 거대한 심장인 태양의 모든 영향들을 설명할 수는 없다. 사실, 우리 몸은 피부의 범위 아래 있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신체는 훨씬 거대하며 훨씬 더 무한하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 삶은 끝나버릴 것이다. 우주의 모든 현상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해양 바닥의 조약돌에서부터 수백광년 떨어진 은하수의 움직임까지.
시인 Walt Whitman은 “나는 하나의 잔디잎이 별의 운행과 다름없다고 믿는다.”라고 했다. 이 말은 철학이 아니다. 이것은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는 “나는 거대하다, 나는 많은 것을 포함한다.”고 했다.
연기성緣起性과 상입相入
내가 방금 제안한 명상은 “끝없이 섞여 짜여진 연기적緣起的 존재”라고 부를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상즉相卽하는 것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상은 우리가 “단일성/다양함” 혹은 “하나/모두” 와 같은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명상은 ‘나’라는 개념을 해소시켜준다. 단일성과
다양성이라고 하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티끌이나, 한 떨기 꽃 아니면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생각은
단일, 하나, 숙고와 같은 개념으로부터 간격을 두고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는 하나와 많음 사이의, 하나와 하나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을 본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기차가 철로를 필요로 하듯 이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티끌, 꽃 그리고 인간존재의 상즉을 깨달았다면, 단일성은 다양함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일성과 다양함은 서로 자유롭게 상입한다. 단일함이 곧 다양성이다.
이것이 화엄경의 연기적 존재와 상입의 원리이다.
연기적 존재란 “이것이 저것”, 그리고 “저것이 이것” 임을 의미한다.
상입은 “이것이 저것 안에 있다” 그리고 “저것이 이것 안에 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연기적 존재나 상입을 깊이 명상한다면, 우리는 “하나/많음”과
같은 개념들이 단지 우리가 실재를 담기 위해 사용했던 정신적 그릇,
물을 담기 위해 양동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이 그릇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리는 철로를 벗어나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기차와 같다. 우리가 지축을 따라 회전하고 태양주위를 도는 둥근 행성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아, 위와 아래라는 개념이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물의 상즉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하나/많음”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인드라의 보석 박힌 그물의 심상은 [화엄경華嚴經]에서 만물의 상호작용과 교차의 무한한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용하곤 한다. 그 그물은 수도 없는 갖가지 찬란한 보석들로 짜여있고, 그 각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면들이 있다. 각 보석들은 그 자체에 그물 안의 다른 모든 보석 빛을 반사하고 그것의 상은 다른 각 보석에 반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각각의 보석은 다른 모든 보석을 포함한다.
또한 기하학의 예도 들어볼 수 있다. 그 한 가운데 “C"라는 중심을 가진 원을 상상해 보라. 그 원은 C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모든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원은 모든 점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그곳에 있다. 단 하나의 점이라도 없다면, 그 원은 곧바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것은 카드로 만든 집과 같다.
단 한 장의 카드라고 제거한다면 그 나머지는 무너져버린다. 각각의 카드는 다른 모든 것에 의존하고 있고, 한 장의 카드만 없어도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의 점 하나의 현존은 다른 모든 점의 현존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가 모두,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원의 모든 점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카드로 만든 집의 모든 카드는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전체의 존재에 있어 각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다른 모든 부분의 현존에도 그러하다.
이것이 상즉이다.
섞여 짜인 관계의 묘, 곧 연기적 존재와 상입의 특성을 마음에 그린다면
그 표면의 수많은 점들과 부피를 이루는 모든 점들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점들이 있고, 그 중 단 하나라도 없다면 구는 존재할 수 없다.
이제 각 점이 다른 모든 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상상해보자.
먼저 점 A를 다른 모든 점과 연결한다. 그리고 점 B를 다른 모든 점과,
점 A를 포함해, 연결한다. 그렇게 계속한다면 모든 점은 연결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든 점들이 얽힌 극도로 밀집된 그물을 보게될 것이다.
"보살菩薩은 만물의 상즉을 보고, 일법一法 안에서 만법萬法을 보며,
만법 안에서 일법을 본다. 하나 안의 여럿과 여럿 안의 하나를 보며,
광대함 안의 하나와 하나 안의 광대함을 본다.
만법의 탄생과 존재는 변화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비실재적이고
깨달음에 다다를 수 없다.
" 앞서 이야기했듯이, 현대의 물리학에는 연기적 존재와 상입의 개념과 아주 유사한 “구두끈 이론"이란 개념이 있다. ”구두끈 이론"은 물질의 기본 요소라는 개념을 폐기한다. 우주는 다른 모든 현상들의 정합(整合:coordination)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상즉하는 현상들의 망이다. 우주는 그 어느 것도 근원적 독립체가 아닌 상즉하는 사건들의 역동적인 조직이다. 우리가 분자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분자 그 자체사이의 상관관계일 뿐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비록 각각의 현상들이 그 탄생과 존재에 있어 다른 모든 현상에 의존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디서 그 모두가, 모든 현상을 포함하는 완전한 본체로 실현된다는 말인가?” 그에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삼매三昧에 눈을 뜨다
명상은 모방이 아니라 창조이다. 그저 자신의 스승을 흉내내는 명상가는
멀리까지 갈 수 없다. 요리나 다른 무엇에도 마찬가지이다. 훌륭한 요리사는 창조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당신은 서로 다른 많은 문을 통해 모든 현상들의 상즉相卽의 명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 당신 안의 신장을 관찰하며 :
피, 심장, 장, 폐, 간, 신장 ; 아니면 수천가지의 다른 방법들, 생각과 감정,
심상, 시, 꿈 혹은 강, 별, 잎 등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훌륭한 수행자는 일상 생활 속에서 명상한다. 하나의 기회, 사건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며 발생하는 본성을 관찰하는 것으로 말이다.
하루 종일 수행하는 것은 완벽한 몰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눈을 감든 뜨든,
명상의 본질은 삼매 이상이 아니다. 당신은 안을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하고 밖을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다.
사고는 더 이상 산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듯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둘 모두는 앎의 대상이다. 무엇도 안이나 밖으로 구분할 수 없다.
훌륭한 몰입은 당신이 충만하게 현존하고 살아있는 실재와의 깊은 대화로
가득 차 있을 때 얻어진다. 이때 주체와 객체사이의 구분이 사라지고 당신은 쉽게 살아있는 실재를 간파하는데, 또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는 불교에서 “잘못된 앎”이라고 부르는 앎을 분별하는 모든 도구를 옆으로 제쳐두었기 때문이다.
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항상 동행한다.
우리의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는 동안 우리는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우리는 삶이 걱정, 두려움, 희망과 실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고 아이들에 대해 걱정하며 그들이 고군분투할 것에 대해 근심스럽게 생각한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아이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이 우리자신의 혈육이기 때문이다.
명상도 마찬가지이다. 만물의 상즉을 명상할 때, 우리는 쉽게 실재를 통찰할 수 있으며, 모든 존재의 두려움, 고뇌, 희망과 절망 등을 볼 수 있다.
잎사귀의 초록색 애벌레를 보면서, 우리는 애벌레의 중요성을 이해한다.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시선으로서가 아닌, 만물의 상즉에 기초한 통찰력에서 말이다. 모든 존재의 생명의 고귀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함부로 애벌레를
죽일 수 없다. 만일 언젠가 애벌레를 죽여야 할 날이 온다면, 우리는 마치
스스로를 죽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일부분이
애벌레와 함께 죽는 것이다.
고대에,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이 먹기 위해 사냥을 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사냥했다. 단지 재미로 죽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재미로 사냥을 한다. 만물의 상즉은 정신적, 실재적 삶으로부터 벗어난 철학적인 장난이 아니다. 모든 현상의 상즉에 불을 밝히는 것은, 모든 존재의 삶이 하나라는 것을 보는 것이며, 명상가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을 회복하게 된다.
당신이 이런 사랑을 느끼게 될 때 당신은 당신의 명상이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안다. 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항상 동행한다. 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하나이다. 얕은 이해는 얕은 자비심을 동반한다. 위대한 이해는 위대한 자비심을 동반한다.
비탄
공영 TV의 야생동물 프로그램에서, 육식동물이 먹이로 다른 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호랑이는 사슴을 사냥하고 뱀은 개구리를 삼킨다.
이런 프로그램에는 긴장감이 가득하다. 우리는 사슴이 호랑이의 발톱에서
벗어나고 개구리가 뱀의 송곳니로부터 탈출하기를 희망한다. 호랑이가 사슴을 찢어 죽이고 개구리가 뱀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은 조작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제 삶이다.
우리는 개구리와 사슴이 잘 지내기를 바라지만, 사자와 뱀 역시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닭, 돼지, 새우,
물고기 그리고 소등을 먹는다. 그리고 심지어 호랑이와 뱀처럼 사슴과
개구리도 먹는다. 그렇지만 지켜보기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희생자의
편에서 그것이 탈출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상가로서, 우리는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어느 쪽도 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둘 모두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호랑이가 먹이를 찢는 광경을 즐길 수도 있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것의 고통을 느끼면서, 희생양의 편을 취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장면이 우리 앞에서 벌어진다면 우리는 사슴이나 개구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이것을 우리 자신의 고뇌를 피하기 위해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호랑이나 뱀이 먹이를 빼앗긴 고통 또한 느껴야 하고 그것들에게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모든 존재는 살아가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우리가 삶을 더 깊이 통찰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삶의 기적과 비탄, 끔찍한 사건들을 볼 것이다. 거미의 삶을 본 적이 있는가? 전쟁을 겪은 적이 있는가? 고문이나 투옥, 살인을 경험해 본적이 있는가? 망망대해에서 해적에게 겁탈 당한 젊은 여자를 본 적이 있는가?
화해는 자비심에서 비롯된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운동경기에 열광한다. 축구 보기를 좋아한다면 당신은
아마 특정 팀을 응원하고 그들과 동일시 할 것이다. 실망과 의기양양함을
거듭하며 경기를 지켜본다. 아마 공을 원하는 방향으로 보내기 위해 시늉을 해댈지도 모르겠다. 만약 당신이 어느 편도 아니라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전쟁에서 편을 고르라면, 대게 위협받는 쪽을 택한다. 평화 운동은 이런 감정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화가 나면, 소리치지만, 이 모든 것에 두 자녀의 싸움을 지켜보는 어머니와 같은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다만 자녀의 화해를 모색할 뿐이다. 화해에 대한 진정한 노력은 이러한 만물의 연기적
존재와 상입의 명상에서 생겨나는 오직 자비심에서만 비롯된다.
삶에서, 우리는 동물과 식물에까지 사랑을 베푸는 누군가를 만날 만큼 운이 좋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또한 자신은 비록 안전한 삶을 산다할지라도, 기아, 병, 그리고 압제가 지구상의 수백만의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 당하는 이들을 돕고자 애쓰는 사람들도 알 수도 있다. 그들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심지어 그 자신의 삶이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최소한 어떤 점에서, 이런 사람들은 생명의 상즉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개발도상국의 생존이 결코 물질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앞선 국가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가난과 압제는 전쟁을 야기한다.
현 시대에, 각 전쟁은 모든 국가와 연관되어 있다. 각 나라의 운명은 다른
모든 나라의 운명과 연관이 있다.
부족한 자비심
과학기술이 성공에 결정적인 문명국가에 있어, 자비심의 여유는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 대해 깊이 명상할 때, 심지어는 개미와 애벌레까지도
동일시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농부가 된다면, 아마도 실패할 것이다.
해충을 죽이기 위해 농약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동물을 죽이는 것에 대해 어떠한 동정심을 느낀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국방부 공무원이 된다면, 우리는 국민들이 의식 있는 이의제기자가 되기를 장려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주지사가 된다면, 州 안에 핵발전소 짓는 것을 반대할 수도, 그래서 기관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이러한 감정을 공유한다. 우리는 사회와 함께 쉽게 아픔을 느끼고, 그래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반대의사를
표현한다.
런던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David Bohm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사회가 바뀌기를 원한다면, 약간의 표면적이고 개인적인 변화, 혹은
경제 체제의 변화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의식의 완전한 변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가 실현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나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러한 의식 변화는, 우리가 보아왔듯이,
실재의 상즉을 깨달음으로 얻어질 수 있고, 우리 각자는 특별한 방법으로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은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생각체계의 결과가 아니라, 실재가 다양한 관계속에 있다는 직접적인 경험의
열매이다. 이러한 열매는 실재를 파편화 시키는 습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존재란 실제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데서 얻어진다.
생사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
상즉에 대한 명상수행을 계속한다면 당신은 내면의 변화를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시야는 넓어질 것이고, 자신이 자비심을 가지고 모든 생물을 바라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색하고 미움을 가진 사람들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던 생각은 녹슬기 시작해, 마침내 당신 스스로 각각의 그리고 모든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삶과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파동역학을 발견한 Erwin Schrödinger에 대해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삶과 죽음, 그 자체를 숙고해 본 후, 단일하고도 다양성을 가진 우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예를 들어 당신은 스스로 바닥에, 어머니 지구에 큰 대자로 뻗어, 납작하게
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과 지구가 하나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채로 말이다. 당신은 지구가 민감한 만큼이나 견고한 존재이고, 사실 몇 천배나 더 견고하며 민감하다. 앞으로 당신이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이 확실한 만큼,
지구는 분명히 새로운 분투와 고통으로 당신을 탄생시킬 것이다.
단지 앞으로의 “어느 날”이 아니다 : 지금, 오늘, 매일 지구는 당신을 탄생시키고, 매일 천에 천을 곱한 것만큼 매일 수천 번 이상 당신을 매장한다.
단지 한 번이 아닌 수천, 수만 번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단 한가지,
지금만이 영구히 그리고 언제나 존재한다 ; 현재는 끝이 없는 유일한 것이다.
Schrödinger와 같은 관점이 우리 매일의 삶에 잘 뿌리내렸다면,
우리는 삶과 죽음 앞에 부동의 존재가 될 것이다.
머리카락 끝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시간에 대한 슈뢰딩거(Schrödinger)의 관찰은 상즉에 대한 우리의 명상을 진일보할 수 있게 한다. 안과 밖, 하나와 다수에 대한 개념은 우리가 만물의 연기성과 상입을 바라보면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우리가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이 모든 현상의 발생에 필요하다고 믿는 이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불교 학파인 현상現象의 명상학파瞑想學派(dharmalaksana)의 초기에는 공간은 탄생과 죽음의 영역 밖의 절대적인 존재로 보아왔다. 중관학파中觀學派(본체本體의 명상瞑想, 혹은 순수자연학파)가 발달되기 시작했을 때, 실재에 대한 잘못된 개념으로 간주되었는데 그 실재는 존재를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기적 존재와 상입의 원리에 입각해 [화엄경華嚴經]은 안/밖, 대/소, 하나/다수의 개념을 실재로 인정하지 않았고, 또한 공간을 절대적인 실재의 개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시간에 있어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개념적 구별 역시 사라졌다. 화엄경은 모든 가능할 수 있는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현재와 과거는 미래에, 현재와 미래는 과거에 담길 수 있다고 말하고, 결국 모든 영겁은 한 순간의 찰라, 가능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 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요약하자면,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상즉을 벗어날 수 없고,
한 순간은 세 시제를 포함한다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현재와 미래 속의 과거
현재와 과거 속의 미래
한 순간 속의 과거, 현재, 미래. 한 순간 속의 여럿의 영원
길지도, 짧지도 않은 - 그것은 자유.
나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한 순간 안에 모든 영겁을 놓음으로.
[화엄경]은 계속하기를, “티끌은 그 안에 ‘무한한’ 공간을 담고있을 뿐 아니라, ‘끝없는’ 시간 또한 가지고 있다 ; 하나의 찰나에서 우리는 ‘무한한’ 시간과 ‘끝없는’ 공간을 찾는다.” 라고 한다.
머리끝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그리고 그만큼 무수한 부처의 세계
상대성이론과 함께 상즉相卽의 세계로 들어가기
[화엄경]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고, 존재를 위해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식에 의해 구분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2000년이나 후에 나타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의 구분될 수 없는 관계에 대해 확증하고 있다. 시간은 4차원 시공연속체의 네 번째 요소로 생각된다. 이 이론은 공간은 진화하는 우주 안에서 절대적이고 변경될 수 없는
틀을 가진다는 가설을 반박한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시간의 개념 역시 동시에 논파되었다. 상대성 이론은 공간이란 단순히 주어진 틀 안에서 그들간의 관계적 순서일 뿐이고, 시간은 주어진 기준틀 안에서 사건의 연대적 나열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시간은 단지 국지적일 뿐이지 전면적이지 않다.
이것은 왜 “지금”이라는 개념이 우주 다른 곳도 아닌 단지 “여기”에 해당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같은 이야기로, “여기”는 이 순간,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에만 해당한다. 이는 시간과 공간이 함께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이론은 우리가 “무한한” 공간과 “끝없는” 시간, 마치 유한과 무한, 안과 밖, 전과 후의 개념과 같은, 에 기초한 우리의 생각을 깨뜨려버리는데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발견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우주의 가장 바깥쪽 가장자리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한다면, 아직 관계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여전히 사물의 독립성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공간이라는 개념의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주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영원하고 완전한 시간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은 과학과 철학 모두의 진보에 공헌했다. 다만 아인슈타인이 실재의 세계 속으로 더 먼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이런 최상의 우주선을 타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을 건너는 뗏목
모든 새로운 과학의 발견은 실재에 대한 몇몇의 오래된 개념의 타파를 가져왔다. 상대성 이론의 한가지 장점은 4차원 시공계의 정교함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고전적인 이해를 전복시켰다는 것이다. 이론에 의하면, 모든 것은
4차원적 구조를 가졌고 구부러진 4차원의 시공속에 있다. 기하학의 3차원적 곧은 선 모형의 우주에서 벗어나, 아인슈타인은 4차원 시공계에서 구부러진 선으로 이루어진 우주를 상상했다. 1917년 그는 공간이 4차원 이상의 공간에서 3차원적 단면으로 보여지는 이 모형을, 시간축과 함께 제안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구에서 상상해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 대신 우리는 매순간 초원주가 분리된 구임을 볼 것이고,
이것은 마치 영화의 떨어져있는 장면 프레임을 연속적으로 보는 것과 같다.
아인슈타인의 우주는 제한적이고 동시에 무한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
혹은 공간에 속한 분리된 곧은 선이 아닌 곡선으로 구부러진 시공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렌지 위에 개미 한 마리는 늘 곧장 앞을 향해 나갈 수 있지만, 결코 끝에 다다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개미는 구부러진 길을 걷고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미는 오렌지 위에 머물러 있다 ; 그것이 그 한계이다. 아인슈타인의 모형은 곧은 선을 확장하여 무한과 유한을 조화시켰다.
아직도 끝없는 시간과 무한한 공간이 인식의 한 형태일 뿐이라면, 구부러진
4차원적 시공계는, 비록 실재에 가까울지라도, 여전히 인식의 하나에 불과하다. 만약 공간이 “사물”의 현존 없이 이해될 수 없다면, 4차원적 시공계는
정신적으로 창조한 “사물”과 “운동” 개념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 굽은 시공계는 3차원적 공간, 끝없는 시간 그리고 곧게 뻗은 선을 대체하는 단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강을 건너온 후에는 뗏목을 버리듯이 마찬가지로 버려야 할 것이다.
버릴 줄 알아야 발견할 수 있다
실재는 우리가 그것을 봄으로써 변형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개념의 보따리를 들고 거기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현대 물리학자들을 이를 알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오랫동안 과학의 기본을 구성해왔던 개념들 - 원인과 결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등 과 같은 것들을 선뜻 포기해 버렸다. 그러나 개념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관념으로 무장하지 않은 채
실재를 통찰하는 것은 빈손으로 전장에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이다.
과학자의 갑옷은 자신의 지식과 생각체계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그것을
뒷전으로 버리는 일이다. 그 “갑옷”을 포기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과학자가 발견의 위대한 재능을 가진 사람임을 믿는다.
종교적인 구도자들은 늘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모든 개념을 놓아버려야 함을 잊지 않아 왔다. 자타의 개념으로부터, 출생과 죽음, 영속과 비영속, 존재와 비존재에 이르기까지. 실재가 인식을 초월한 것이라면, 실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도구는 모든 개념을 제거한 순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