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의존
2009년 1월 21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인류는 큰 어려움이 있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이 시기에 당신은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할 것이다. 즉, 환경이 쇠퇴하고, 자원이 고갈하며, 정치적·경제적 불안정이 점점 커지는 세상, 지구의 남은 자원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국가들 사이 경쟁과 충돌과 전쟁의 위험이 커지는 세상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은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는 시기이다. 이 상황이 전개될 때, 정부들은 대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국민들은 드러나는 부패와 실정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며 분노할 것이다.
이제는 서로 관계가 좋지 않은 국가들 사이에 마찰이 커지는 시기가 될 것이고, 빈곤과 박탈감이 커지는 시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식량 생산과 유통에 지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류가 강해지고 통합되어야 할 때이다. 그래서 변화의 큰 물결을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하고, 지구와 인류 문명을 보존하기 위해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 더 강력한 연합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가오는 것의 규모를 실제로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은 극도로 불안해할지도 모르고, 공포감을 느낄지도 모르며, 경제와 국가 문제를 걱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움은 훨씬 더 크며, 그 도전도 훨씬 더 클 것이다.
국가와 지도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흔들릴 것이다. 신과 신의 섭리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흔들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시간의 종말, 특정 종교 집단의 신자들이 강하게 예언한 시간의 큰 종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로 인류가 지구의 자연 유산을 남용한 결과, 탐욕스럽고 부당하게 지구를 착취한 결과를 직면해야 하는 시기이다. 지금은 그 결과를 직면해야 하는 시기, 청구서 만기가 다 된 시기, 인류가 오랜 기간 동안 행동한 결과를 청산해야 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당신의 우선순위와 활동, 관계와 헌신을 재평가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기 의존을 더 키울 때이다. 자기 의존은 당신이 자신의 관념이나 믿음, 가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창조주가 당신 내면에 심어 놓은 깊은 힘, 깊은 지성인 앎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깊은 지성은 신에게서 나온 지성이며, 사회적 조건화나 선택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다.
실제로 당신에게는 두 마음이 있다. 하나는 세상에 조건화된 표면 마음, 세상과 사회적 조건화에 적응한 데서 나온 마음이고, 또 하나는 앎이라는 더 깊은 마음이다.
앎은 당신의 개인 마음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앎은 비교하거나 대조하지 않으며, 추측하지도 음해하지도 않는다. 앎은 흥정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끝없이 대화하지도 않는다. 앎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의존을 말할 때, 우리는 앎의 힘에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의 창조주가 바로 이 힘을 당신에게 주어, 당신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변하는 세상에서 더 큰 삶을 살도록 당신을 준비시키기 때문이다.
당신의 개인 마음과는 달리, 앎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앎은 특정 사람들과 특정 상황에 참여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에 봉사하는 사명을 띠고 이곳에 왔다.
앎은 두려움으로 무력해지지 않는다. 앎은 부정이나 선택적 사고에 지배받지 않는다. 앎은 분명하고, 정직하고, 객관적이며, 온갖 속임수를 꿰뚫어 본다.
당신은 이 큰 지성이 마치 그저 당신 개인을 위한 자원인 것처럼, 자신을 부자로 만드는 데 이 큰 지성을 이용할 수 없다. 당신은 부와 이익을 얻는 데 이 큰 지성을 이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의 이성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이성의 영역과 범위를 초월하여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당신이 99%의 시간을 함께하는 마음, 이 마음과 앎 사이의 차이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이 메시지를 잘못 해석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가정과 믿음, 사고방식, 편견에 의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단지 나약하게 되고, 눈이 멀어, 당신 삶의 변하는 상황에 적응할 수 없게 될 뿐이며, 수평선 너머로 다가오는 변화의 큰 물결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큰 물결에 대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앎과 당신 개인 마음을 식별하는 것은 필수이다. 그렇지만 이 식별은 체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앎에 연결되면, 앎은 단순히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나, 당신 생각만을 주변 상황에 적응하게 하려는 것과는 매우 다른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기 생각을 적응하게 하려고 할 때, 마음은 항상 과거를 참조하므로, 당신은 항상 과거를 참조한다. 역사가 당신을 가르쳐줄 수도 있고, 당신에게 분명 중요한 교훈을 주지만, 그렇게 과거만 참조한다면, 당신은 새로운 방식으로 상황을 볼 수 없게 되고, 당신이 내려야 할 결정이나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당신은 항상 과거 관점에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뒷유리창을 보면서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변하는 상황을 평가할 수 없으며, 사람들을, 또 그들의 능력과 장애를 효과적으로 인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이 특정 패턴에 따라 생각하도록 조건화되어서 마음의 관점으로는 창의적일 수도, 분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의 이성은 앎을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앎은 결코 이성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서 말한다면, 당신의 일부는 신성을 지녔고, 다른 일부는 인간성을 지녔다. 그리고 당신의 일부는 현명하고, 다른 일부는 현명하지 않으며, 일부는 오류를 범할 수 없고, 다른 일부는 오류를 범하기가 매우 쉽다.
그러니 당신 마음의 어느 부분이 다른 부분을 따라야 하는가? 그리고 앎이 당신의 독특한 특성을 통해 움직이는 방식이나 당신이 앎의 신호와 방향을 읽는 법을 깨달을 수 있도록, 당신은 어떻게 앎을 더 잘 알아차리고, 앎을 체험하는 기반을 쌓아야 하는가?
그래서 자기 의존은 그냥 생기는 것도, 우연히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기르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당신 삶의 중심부에서, 이것이 당신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신이 당신에게 앎이 인도하는 힘을 주어 당신이 상황을 분별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당신 관심의 중심이자 교육에서 당신의 주요 초점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학에서 당신은 과거에 축적된 이해와 지혜를 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혜롭게 보고, 알고, 행동하는 법을 배울 수는 없다.
기존 관념들은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에 직면하여 잘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기존 가정은 전혀 맞지 않거나, 아니면 당면한 상황에 대처하는 데 매우 부적당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당신 삶의 변하는 상황을 보면서, 그것이 단순히 과거와 같은 순환, 즉 경제 순환이나 라이프 사이클, 사회학적 패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세상이 변하고 있고, 변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지구의 기후를 바꾸었고, 지구의 물을 훼손했으며, 지구의 토양을 파괴했다. 당신은 이제 쇠퇴하는 세상, 자원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자원이 훨씬 더 소중해지는 세상으로 진입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것이고, 특히 부유한 국가에서 더 그리할 것이다. 당신은 과거 교육과 이해가 별로 쓸모없게 될 수도 있는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상황에 적응하게 될 것이다.
변화의 큰 물결을 볼 수 있는 이들, 변화의 큰 물결을 미리 알아차리고 대비할 용기가 있는 이들, 다른 사람들에게 보는 법을 알려주는 용기, 봉사하기 위해 온 세상에 응답하는 법을 알려주는 용기가 있는 이들이 적응하게 될 것이다.
앎은 사명을 띠고 이곳에 왔으며,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앎의 초점은 단순히 이득을 얻고, 안전을 보장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앎은 아름다움과 부와 권력에 감명받지 않는다. 앎은 인류가 어떻게 스스로 노예가 되고, 자신을 속이며, 비하하는지 안다. 그리고 인간의 빈곤과 박탈이 초래하는 끔찍한 결과를 안다.
앎은 당신 삶을 새롭게 하고, 당신의 온전함을 회복하고, 당신 삶에서 신의 현존과 힘을 다시 구축하려고 이곳에 왔다. 이것은 당신이 어느 종교에 속하든 상관없이 일어나고, 심지어 당신이 명시할 수 있는 특정 종교가 당신에게 없더라도 일어난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복원의 힘이다. 앎은 당신의 이성이나 사회적 조건화, 다른 사람들의 견해나 가치관에 지배받지 않으며, 당신의 종교 이념이나 신앙에 지배받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종종 앎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데 장애가 된다.
신이 당신에게 큰 힘을 주었지만, 그것은 당신의 개인적 힘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지력이나 자결권을 행사하는 힘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다. 하지만 이 힘을 알고, 느끼고, 당신 주변 모든 곳에서 그 증거를 보려면, 당신은 다른 교육, 당신 내면의 순응 교육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생명의 창조주는 앎으로 가는 계단을 세상에 보내, 당신이 이 신성과 연결하게 하며, 당신 내면에도 있고 다른 이들 내면에도 있는 앎의 힘과 현존을 깨닫고, 인지하고, 체험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당신은 인식과 이해가 바뀔 것이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에게 진정한 이해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의 관념을 부드럽게 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의 믿음과 관념과 가정이 모두 상대적이고, 과거를 참조한 것임을 알 것이며, 당신의 생각이 두려움에, 또 대체로 그저 두려움의 반응일 뿐인 선택적 사고에 얼마나 많은 기반을 두는지 알 것이다.
당신은 이제 훨씬 더 객관적으로 주위를 둘러볼 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 마음, 즉 생각, 계획, 두려움, 걱정, 문제, 분노, 불용서에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있지 않다. 그들은 당신 앞에 서 있지만,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볼 수도, 들을 수도, 자신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도 없다.
당신이 사람들을 지켜보면,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하고, 상실에서 벗어나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하고, 욕망과 환상, 두려움, 욕구에 이끌리는 등 얼마나 자신의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지 당신은 알 것이다. 앎에 인도받는 사람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이 비록 호화롭게 살려고 하거나,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국가에서 살려고 하더라도, 그들이 사슬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앎은 당신에게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줄 것이다. 앎은 당신에게 어떤 것이든 직면할 힘, 전혀 예측 불가능하고 감당하기 힘든 것처럼 보이는 것을 헤쳐 나갈 힘을 줄 것이다.
당신의 믿음이나 이념, 사회적 배경이나 국가 유산이 무엇이든, 앎은 당신 내면에 살아 있다. 앎은 당신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며, 당신이 자멸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막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면, 앎의 강한 충동과 제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매우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당신은 단순히 세상에 반응하여 그 결과 세상을 비난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마음과 주변 세상을 관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답에 의지하지 않고 기꺼이 물음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당신 마음은 문처럼 닫혀 있기보다는 창문처럼 열려 있어야 한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의무와 관계와 활동과 헌신이 실제로 세상에 온 당신 큰 목적의 일부인지 알아보기 위해 재평가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당신의 이성에는 이것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앎에게는 대낮처럼 분명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을 통해 앎이 활동하는 방식과 이성이 활동하는 방식 사이의 차이점을 알기 시작할 때, 당신은 그 둘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당신 마음으로는 삶의 참된 진실과 참된 방향을 결코 알아낼 수 없으며, 당신의 큰 목적이 실현되고 성취될 수 있는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사는 법을 결코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이 여전히 더욱더 얻으려고 한다는 것을 당신은 알 것이다. 그들은 자원이 고갈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다가오는 것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큰 물결이 덮치고, 갑자기 경제적 어려움이 생길 때, 그들은 마치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한 것과 같다. 심지어 전문가들조차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앎은 당신에게 신호와 단서를 주고 있다. 세상은 당신에게 신호와 단서를 주고 있다. 하지만 만약 당신 마음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또 당신이 끊임없이 판단하거나 해석하는 일 없이, 지켜보지도 귀 기울이지도 않는다면, 당신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신호들은 당신에게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하는 자기 의존은 앎에 의존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당신이 매우 분명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본연의 당신은 당신 마음이 아니며, 당신 이성은 실제로 세상에서 소통하는 매개체라는 점이다. 이 매개체는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에 봉사하고, 당신을 세상에 파견한 큰 힘에 봉사한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당신 내면에서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 알 것이고, 당신 주변에서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 알 것이다. 누가 앎으로 강하고 누가 강하지 못한지, 누가 명백하게 볼 수 있고 누가 볼 수 없는지, 누가 겸손하고 누가 겸손하지 않은지, 누가 야망이나 사회적 조건화에 이끌리고 누가 이끌리지 않는지 알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관계에서 분별력의 기반을 얻는다. 이 분별력은 당신이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 또 당신에게 장래성이 없거나 진정한 운명이 없는 사람이나 환경에 당신 삶을 내주지 않기 위해 삶에서 실제로 개발해야 하는 중요한 기량 중 하나이다.
앎은 공포나 비난, 좌절이나 분노로 세상을 보지도 않으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믿거나 바라면서,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앎은 당신 이성이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즉, 앎은 명확히 볼 수 있다. 앎은 사명을 띠고 여기에 왔다. 앎은 세상을 비난하려고 여기 온 것도, 스스로 부유해지려고 여기 온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여기 온 것도, 권력과 지배력을 얻으려고 여기 온 것도 아니다. 당신은 이 힘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앎에 인도받으면, 그들의 생각은 앎을 표현하기 시작하며, 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변한다. 그들은 탐욕에 이끌리지 않고, 아름다움이나 부에 매료되지 않으며, 삶을 단순히 자신을 위한 부나 권력을 얻는 기회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귀하고 독특한 어떤 것이 있다. 그들과 함께하는 현존이 있다. 당신은 그들에게 신뢰를 느끼며, 그들의 지혜를 믿고, 그들의 겸손을 알아본다.
앎은 우주에서 가장 큰 힘이다. 왜냐하면 앎은 개개인을 통해 일하는 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앎을 알지 못하며, 그들 내면에 있는 앎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결정하고 행동할 때 앎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앎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거나, 아니면 특정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매우 신비로운 어떤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과 당신은 크고 독특한 목적을 위해 세상에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앎만이 이 목적을 알고, 당신을 위해 이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당신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고, 여기 온 큰 목적을 발견하고 체험할 만큼 당신에게 성숙함과 열망과 헌신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때때로 앎은 평생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의문을 갖기를 꺼리고, 자신의 견해와 판단을 재고하기를 꺼리고, 불확실성에 직면하기를 꺼리고, 큰 힘에 내맡기는 것을 꺼리면서, 겉보기에 영원히 낡은 사고방식을 고집스럽게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나를 따르라."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것은 "내가 따르는 것은 앎의 힘이니, 그 힘을 따르라."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신은 당신에게 큰 힘을 주지만, 큰 책임도 준다. 당신은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신에게 기도할지 모르지만, 신은 세상을 바로잡도록 당신과 다른 모든 사람을 이곳에 파견하였다.
당신은 세상에 있는 개인적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세상에 온 더 큰 이유가 있다. 그리고 당신의 큰 목적은 당신이 수도사나 은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제 역할을 하고, 세상을 상대하고, 세상에 봉사하면서 세상에 있어야 한다.
누가 환경을 회복할 것인가? 쇠퇴하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누가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꿀 것인가? 이곳에 인류의 미래가 있도록 지구의 토양이나 물을 누가 보존할 것인가? 누가 인간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고, 점점 더 가난해지는 세상을 마주할 것인가? 누가 변화의 큰 물결을 직시하고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그 큰 물결을 이용할 힘을 가질 것인가?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정부나 지도자들이 제공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기대한다면, 당신은 엄청나게 실망할 것이다.
답은 당신 내면에 있지만, 부름은 세상에 있다. 세상은 큰 선물들을 당신에게서 불러내야 하며, 이것은 당신이 세상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신은 세상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세상에서 물러나거나, 도망쳐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매우 다르다. 이것은 다른 동기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방식이며, 가장 근본적으로 당신 자신과 다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매우 다른 기반을 구축한다.
왜냐하면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누구와 함께 있고, 그들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앎은 당신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득이 될 이들에게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앎은 불안정에 동요되거나, 부나 아름다움이나 권력의 욕구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래서 앎은 이러한 것들에 속지 않을 것이고, 당신이 이런 것들에 속지 않도록 할 것이다.
여기서 자기 의존은 당신 혼자 힘으로 한다는 뜻이 아니며, 다른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확실히 그렇지 않으며, 앎이 여기 있는 것은 당신을 특정 사람들과 결합하게 하고, 세상에 온 당신의 목적과 결합하게 하며, 세상에 그 사랑과 현존과 봉사를 가져오기 위해서이다. 앎은 당신을 삶과 재결합하고,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며, 분리에서, 또 당신만의 고립이라는 지옥에서 당신을 해방한다.
오직 앎만이 이렇게 할 힘이 있다. 당신 마음은 놀랍고 환상적인 믿음 체계나 형이상학 이론이나 종교 이념을 생각해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앎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은 앎을 통해 분리된 이들을 회복한다.
앎은 단지 신의 앎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실제로 현재 위치에서 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앎이 세상에 와서 성취하기로 한 것을 따름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근원과 재결합하고, 세상의 비극과 유혹에서 해방되며, 당신 자신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과도 맺는다. 이 관계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구축할 수 없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직관을 훨씬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힘으로, 당신이 앎에 공간을 만들어 줄 때 당신 삶에서 드러날 것이며, 또 당신이 자신과 주변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체험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 기도에 이미 응답했으며, 심지어 당신이 아직 기도하지 않았더라도 응답했다. 신은 세상에 필요한 것에 응답했다. 그 응답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면서, 개개인의 내면에 살고 있다.
처음에는 당신이 사회적 조건화, 습관적인 사고 패턴, 의무감, 무력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당신은 삶의 환경을 바꾸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헌신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가족에 대한 의무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야 하고, 자신의 고정 관념과 그 관념에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의 첫 번째 목적은 당신 짐을 벗기고,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당신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르쳐 주고, 당신을 제지하는 것과 속박하고 노예로 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것들에 얽매여 있다면, 당신은 큰 목적이나 큰 힘에 봉사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 이성의 영역과 범위 너머에 있는 것, 당신 내면에 있는 깊고 신비로운 것을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의무의 굴레, 복종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는 굴레나, 당신 문화의 가치관이 앎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 경우에도 그 가치관을 유지하려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형태의 자기해방이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서 일하는 복원의 힘으로, 당신의 통제와 이해를 뛰어넘으며, 당신에게 문화에서 부과하고, 심지어 종교에서도 부과한 제약과 경계를 뛰어넘는다.
여기서 당신은 자기 내면에 있는 신의 힘과 결합하여, 그 힘과 그 현존을 당신 삶과 세상에 가져올 수 있도록 자유로워진다. 당신은 신앙을 옹호하거나 종교 기관을 홍보하는 일 없이 이것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과 함께 있는 현존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생각이나 두려움, 욕망에 지배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현존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침묵의 깊은 샘은 당신 표면 마음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곳에 이 현존이 머무른다.
표면을 뚫고 들어가면, 당신은 현존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표면에 산다면, 결코 당신 아래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바다 위에 작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당신 아래에 있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은 표면 마음 아래에 있는 힘과 은총이다. 그곳에 바로 현존이 있다. 당신은 단지 의지력을 사용하거나, 특정 방식에 따라 생각을 하거나, 어떤 이념을 채택하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그곳에 다다를 수 없다.
당신은 고요히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마음의 초점을 다시 맞추는 법, 감정을 다스려 지휘권을 회복하는 법, 이리저리 날뛰는 당신 생각을 데려와 당신에게 봉사하고, 앎에 봉사하도록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론 많은 의문이 있을 것이다. 많은 혼동이 있을 것이고, 많은 재평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면, 당신은 자신이 이전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었는지,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당신 내면이나 다른 사람들 내면에서 앎이 보내는 신호를 아마도 아주 드문 경우 말고는 보거나 인지할 수 없었음을 알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욕구와 두려움에, 또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얼마만큼 사로잡혔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해방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해방은 단지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해방으로 당신은 큰 역할을 하고, 여기서 당신의 목적과 운명을 나타내는 큰 방향으로 나아간다.
세상은 혼란스럽다. 세상은 신이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당신에게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을 주었고, 세상에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당신이 봉사해야 할 큰 목적을 주었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독특한 특성과 성격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목적을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설계를 인지하게 되면, 당신은 자신의 설계자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목적을 위해 독특하게 설계되었다.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자신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앎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변화의 큰 물결에 직면하여 당신 주변에 있는 그 어느 것에 의존하더라도 안정되고 안전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게으름이나 나태한 생각에 빠지면, 거기에서는 어떤 안정이나 안전도 찾을 수 없다.
여기서 변화의 큰 물결은 이러한 자기 의존, 즉 앎에 의존하는 것을 기르도록 요구하는 데 당신을 도울 것이다. 여기서 끔찍하고 충격적이고 위험하고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앎을 밖으로 불러낼 것이다.
변화의 큰 물결을 눈앞에 두고 빈둥거려서는 안 된다. 당신은 당신 삶과 시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하며, 의미 없는 것에 시간과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큰 물결은 당신의 부름이다. 즉, 당신이 내면에 있는 앎에 응답하라는 부름이고,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힘에 대응하라는 부름이다.
여기서 당신은 세상이 당신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세상은 당신을 준비시키려고 하고, 당신을 깨우려고 하고, 성취와 비극의 꿈에서 벗어나 삶에서 크게 봉사하고 참여하도록 당신을 불러내려고 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여기서 당신은 세상에 대한 비난과 거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을 그만두고, 명확성과 객관성, 겸손으로 세상에 직면할 힘을 찾아야 한다. 앎은 당신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앎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앎이 당신 내면에서 더 강해질수록, 앎은 다른 사람들과 더 공명할 것이고, 당신은 더 많은 힘과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며, 당신 삶은 세상에서 더 큰 봉사를 더 많이 실연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영적 가르침이다.
여기서 당신은 예수, 붓다, 무함마드를 인도한 힘, 그리고 지구에 와서 오늘날까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는 모든 성인을 인도한 그 힘을 따를 것이다.
당신 마음은 이의를 제기할 것이고, 의문을 가질 것이며, 의심하겠지만, 그것은 단지 당신의 사회적 마음, 표면 마음일 뿐이다. 물론 마음은 이런 식으로 반응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매우 불안정하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믿음은 단지 버팀목일 뿐이다. 마음의 근본주의는 앎의 대체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오직 앎만이 알기 때문이다.
마음은 믿고, 삶을 규정하고 결정하려고 하지만, 오직 앎만이 안다. 그래서 앎이 당신 복원의 원천이다. 그래서 앎이 당신 삶에 있는 신의 힘이다. 그래서 앎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