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1987년 9월 18일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사랑의 힘과 크기를 이해하려면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한다. 사랑의 문제는 사람들이 사랑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랑하려고 애쓰고, 심지어 사랑받으려고 애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것이 첫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사랑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당신의 삶은 더 즐거워지고, 사람들은 당신에게 더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더 사랑하면, 당신에게는 우정과 동료애가 더 깊어질 것이다. 만약 당신이 더 사랑하면, 당신은 더 직접적으로 신을 체험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렇게 접근할 때 문제는 사람들이 사랑하려고 노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현재 경험의 바탕 위에서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당신은 자기 경험의 바탕 위에 감정을 얹고 그 감정이 좋은 결과를 만들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사랑은 당신 앎의 표현이고, 당신의 참된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에게 더 정직해질 수 있도록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자. 정직은 당신이 실제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시작할 수 없으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있을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이 있는 곳에만 있을 수 있다. 지금 당신의 현재 상태가 깊은 사랑의 상태가 아니라면, 당신은 그 상태를 표현해야 하고, 그 상태를 건설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진전이며, 이때 당신은 자신을 관찰해야 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충분히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어느 정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당신은 자신의 현재 상태를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현재 상태와 맞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심지어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고 할 때조차 그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는 것은 효과가 없으며, 당신에게 불필요한 개인적 실패감만 더 키울 것이다.
사랑은 자기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찾아올 것이다. 당신이 사랑을 창조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은 조건이 맞으면 당신에게서 발산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반응할 것이다. 당신은 사랑하려고 애쓰거나, 친절하거나 착하거나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의 문제는 당신이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잃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은 자기 부정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현재 상태는 혐오스럽다. 나는 이 상태를 존중하지 않으며, 더 바람직한 상태에 있으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 바람직한 상태는 실제로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자기 부정을 통해서는 그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게 하는 준비 측면에서 사랑을 이야기하겠다. 사랑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 부정직이 없고, 자기 부정이 없다. 사랑은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 그래서 당신의 도전은 단지 사랑을 받아들여 발산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당신은 상대방만큼이나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에 관하여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말하겠다. 우선, 당신은 사랑을 창조하지 않으며, 사랑을 조종할 수 없다. 사실, 당신은 사랑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사랑은 당신과 함께 어떤 것을 할 수 있다. 당신은 사랑을 노력으로 얻을 수 없고, 사랑을 덧붙일 수 없으며, 사랑을 얻으려고 분발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사랑은 교묘히 달아난다. 만약 당신이 마음을 열고 자신을 올바르게 연마하면, 사랑은 자연스럽게 발산할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결과이자 원인이다. 앎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당신 내면에 잠재해 있는 힘이다. 당신이 사랑에 집중하고 사랑이 그 자신을 표현하도록 허용하고, 앎의 능력을 지닌 실질적인 사람이 될 때, 사랑은 자연스럽게 발산할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며, 항상 친절하지는 않다. 사랑은 한 모습만 띠지는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스럽다’라는 개념은 특정 형태의 행동과 태도, 특정 형태의 예의와 사회적 의무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사랑에 나타나는 행동일 뿐이다. 사랑은 매우 강력하고, 당신이 창조할 필요가 없다. 사랑에 필요한 것은 당신이 빈 그릇이 되어 그 그릇을 통해 사랑이 표현될 수 있게 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당신은 삶에서 몹시 힘들고 매우 도전적인 시기가 있었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견딜 수 없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기를 통해 사랑이나 관계를 더 깊이 경험하였다. 당신을 실망하게 한 그 “멋진 로맨스”들이 더 심각한 재앙에서 당신을 구하지 않았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신은 “맙소사! 하마터면 그 사람과 결혼할 뻔했어! 그렇게 되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끔찍하게 고통스럽지 않았는가? 그것도 행동하는 사랑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사랑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직 더 큰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볼 수 있을 때만 당신은 당신 삶이 계속 부드럽게 인도받는다는 것을 느끼고 안다. 그리고 삶이 부드럽게 인도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너무 멀리 빗나가 버렸다는 뜻이므로, 당신에게는 더 강력한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제 약간의 압박을 받는다. 그것은 그렇게 부드럽지는 않지만, 당신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앎에서 상당히 분리되었으므로 삶에서 강력한 교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비하다. 사랑은 항상 행복하거나, 항상 친절하지는 않지만, 항상 당신을 사랑 그 자체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삶에서 신의 목적은 당신 짐을 벗기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첫째 목적이다. 신은 당신이 짐을 벗을 때까지 당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 만약 당신 손이 당신 개인에게 필요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당신은 신이 준 선물을 지닐 수 없다. 처음에 사람들은 신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 나는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으니, 원하는 것을 꼭 갖게 해 달라. 당신이 진짜라면 나를 위해 이것을 할 것이다.”라고 요청한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그저 자신에게 짐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삶에서 헛되이 이런 것들을 갖기를 계속 요구한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최상의 이익이 되지 않을 수도 있거나,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할 때가 아닐 수도 있다.
신의 첫째 목적은 당신 짐을 벗기는 것이며, 짐을 벗기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다. 사실 당신이 일의 대부분을 할 것이다. 왜 그러는지 아는가? 왜냐하면 자아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도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오직 신만이 당신을 성취시킬 수 있고, 오직 당신만이 신을 성취시킬 수 있다.
신은 이것을 안다. 그래서 신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의 삶을 바로잡고 재조정하고 재정립하여, 자신의 관계나 직업 등을 통해 자아를 성취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심지어 당신에게 돈, 아름다운 배우자, 멋진 시간이 있다고 해도, 당신의 갈망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갈망은 삶에 큰 목적이 있을 때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이 가장 먼저 역점을 두는 일은 당신 짐을 벗기는 것이다. 신은 당신의 행복에 진정으로 이로운 어떤 것도 빼앗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신은 경험을 통해 이것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심시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짐을 벗을 때까지 당신은 자신의 짐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려달라고 신에게 요청할 것이다.
대개는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추구하는 큰 목적을 당신이 추구할 때, 자신의 방어막을 내려놓으므로 다른 것이 당신에게 제공될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이다. 당신이 가혹한 짐을 지고 있으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자신의 생존과 행복이 보장되리라고 확신하기 위해 삶을 통제하려고 할 것이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당신에게 반응할 것인지 알아내려고 할 것이며, 종종 서로 상충하는 결과를 얻으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짐을 진 자에게 주는 가장 큰 자비는 그들의 짐을 나누는 것이지만, 그 짐을 나누려면 그들이 자기 짐을 내주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예수는 나를 위해 내 짐을 짊어질 거야.”라고 말하면, 당신은 그 짐을 예수에게 주어야 하고, 예수가 그 짐을 어떻게 할지는 당신이 통제할 수 없다.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 짐을 넘겨줄지 누가 알겠는가? 그가 모든 사람의 짐을 다 짊어질 수 없지만, 그 짐은 더이상 당신 짐이 아니다.
당신이 어느 정도 짐을 벗으면, 신은 당신에게 새로운 책임을 줄 수 있다. 이 책임은 높은 목적, 즉 더 큰 책임을 뜻한다. 우리가 말하는 책임이란 당신 삶에서 속임수나 왜곡 없이, 진실하고 정직하고 효과적으로 신에게 응답할 수 있는 당신 능력을 뜻한다. 그것이 당신 책임이다. 책임은 높은 목적이다. 이제 당신은 큰 것을 받는 사람이자 주는 사람이다. 그것은 힘이고, 당신 앎이며, 우리는 그것을 당신의 사랑이라고도 한다. 이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짐을 덜어주고 싶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이 받은 것을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베푸는 자에게 항상 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 선물을 늘리기 때문이다. 신은 받는 자에게도 주지만, 그들은 그 선물을 경험하지 못한다. 신이 받는 자에게 주는 것은 베풀 기회이다. 받는 자가 경험해야 하는 것은 베풀어야 할 필요성이다. 왜냐하면 그 베풂이 그들을 복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베푸는 자가 될 때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전 과정이 진정으로 시작될 수 있다.
당신의 베풂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이 결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베풀어야 하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베풀어야 하고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지, 누가 받아야 하고 그들이 어떻게 받아야 하며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매우 강한 견해가 있다. 이 모든 요건을 충족하면서 베풀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감정과 사랑을 분리해 보겠다. 행복한 모습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과 사랑을 분리해 보겠다. 만약 당신이 모든 사람에게 미소 지으며 돌아다닌다면, 당신은 역겹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왜 사람들이 당신 곁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 삶에서 중요하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일, 그것에 대해 당신도 다른 누구 못지않게 놀라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당신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야망이나 개인적 욕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중요한 어떤 일이 당신 삶에서 일어나고 있다.
학생들이 이 준비에서든 다른 준비에서든, 앎에서 성장할 때,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경험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들은 중개자가 될 수 있다. 중개자는 앎을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전달하고, 신과 세상 사이의 다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사실, 신은 우리와 같은 더 높은 수준에 있는 내면의 교사들이 중개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이 당신 마음의 개인적 측면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개인적 측면이 없으므로, 신은 인간의 개인적 측면을 공감하지 못한다.
신을 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터무니없다. 왜냐하면 전능한 현존은 성격을 지닌 한 인간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이다. 신은 현존이자 힘이며, 모든 생명체 안에 있는 참된 끌림이다. 신은 내면의 교사들을 통해 당신에게 말한다. 왜냐하면 내면의 교사들이 이 수준의 삶에서 중개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은 중개자를 통해 당신에게 말한다. 왜 그러는지 아는가? 당신은 왜 신에게 직접 갈 수 없는지 아는가? 많은 사람이 “왜 내가 바로 직접 신에게 갈 수 없지?”라고 묻는다.
그 이유는 신은 당신이 다른 이들과 결합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신의 계획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역할과 역량으로 관계를 재결합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목적은 당신 짐을 벗겨내고 진정한 관계를 위해 당신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진정한 관계가 없으면 삶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총은 관계의 산물이므로 관계가 없으면 당신은 은총을 가져오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자신의 삶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고 무엇을 하는가? 당신은 지금 부정직하거나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보상을 경험하려고 무엇을 하는가? 여기에 작은 비밀이 하나 있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과 사랑을 경험하고 싶다면,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랑을 행동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경험과 반드시 연관시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 사람에게 현존하라. 현존한다는 것은 당신이 자기 생각보다는 상대방과 더 함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상대방에게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현존하고 있을 뿐이다. 현존한다는 것은 선호하는 것 없이 관찰자로 있는 상태이다. 이것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엄청나지만, 정신적 준비가 필요하다.
관계에서 겪는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만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서로에게 심지어 아무런 공감을 얻지 못할 만큼 그들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만 공감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상대방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들은 그 관계를 이용하여 서로에 대한 자기 생각을 입증하려 하고, 자신의 기대에 맞는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줄 수 있는지 등을 입증하려고 한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상대방에게 현존하면, 이 말은 당신이 선호하거나 판단하는 일 없이 관찰한다는 뜻인데, 그때 당신은 매우 큰 것을 경험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이것은 아직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지에 관한 것으로, 인지는 관계의 시작이며, 사랑을 진정으로 경험하는 것의 시작이다. 이것은 또한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에 관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공감은 다른 사람의 경험에 공감하는 것인데, 그 경험은 사실 그들보다는 당신에 관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분리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을 덜어주어 잠시나마 안도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것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훨씬 더 강력한 어떤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라.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말라. 어떤 것을 보려고도 하지 말라. 여기서 당신은 중요하지 않다. 지켜보고 귀 기울이고 느껴보는 데 정신을 온통 쏟으라. 어떤 것을 증명하려고 만남을 이용하지 말라. 이렇게 하면 결과는 바로 나타난다.
개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끌림이 반드시 이런 인지는 아니다. 이 인지는 열정적이지 않으며, 강한 마약을 복용하여 엄청난 열정의 회오리 같은 것에 휘감긴 미친 사람처럼 자신을 느끼게 하지도 않는다. 이 인지는 깊은 느낌이며, 조용하다. 이것은 자극이 아니라, 인지이다. 이것은 낭만적인 멋진 여행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당신 내면에서 조용히 안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참 자아는 이제 이 만남을 통해 존중받고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인지하는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 관계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거나 보장된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관계는 당신이 삶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에 기반을 둔다.
진정한 관계의 주요 요소는 더 깊은 화합이다. 더 깊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화합의 개념보다 더 크다는 뜻이며, 당신들의 본성에서 화합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신들이 자신들의 판단과 평가와 선호에서 반드시 조화를 이룬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당신 표면 마음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더 깊은 화합은 당신들이 함께 더 깊이 들어갈수록 두 사람 사이의 공명도 커진다는 뜻이다. 그 말은 당신들이 서로의 영적 부름에 대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당신들은 서로의 영적 부름을 보완한다. 이것은 항상 당신이 이해하는 것보다 더 크다. 더 깊이 화합하면, 두 사람의 본성은 서로 공명한다. 함께하는 것은 혼자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이제 당신 둘은 자신들에게 예정된 영적 삶을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인지가 있고, 더 깊은 화합이 있다. 더 깊은 화합은 시간을 거치면서 행동과 도전을 통해 발견되어야 한다. 실제로 함께 도전에 직면할수록, 당신들의 화합은 점점 더 깊어진다. 화합은 고갈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지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 이때 사랑이 드러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이런 관계는 흔하지 않다. 많은 사람과 이런 관계들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은 많은 사람에게 인지를 경험할 수 있지만, 물질 삶에서 더 깊은 화합은 더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삶에서 당신의 부름과 관련되어 있다. 당신이 부름을 받으면,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사람들을 만나도록 특정 방식으로 이끌린다. 당신의 부름은 신비롭지만, 삶에서 이보다 더 강력하고 이보다 더 마음을 끄는 것은 없으며,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에 이보다 더 관련된 것은 없다.
이제 여기서 자기 사랑의 문제로 넘어가 보겠다. 사랑은 당신이 자신의 본성을 존중할 때 생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본성을 존중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이 되기를 원하며, 자신이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담을 지니고 산다. 여기서 삶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삶은 당신에게 다른 것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으면, 그들의 문제는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왜 그러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정착해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통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평화를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단순히 참여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붓다나 예수나 성자처럼 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삶이다. 그들은 짐을 벗었으므로 삶을 따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소유물이 거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삶에 대한 고집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은 삶에 충분히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하기를 갈망한다.
당신이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현존하라. 그러면 결과가 있을 것이고, 그 결과는 당신이 자신의 의도에 매우 진지하면, 인지하는 체험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문제는 사랑은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당신은 자신만큼 사랑할 수 있는 큰 역량을 지닌 이들을 찾을 것이다. 관계는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고, 그 역량은 관계를 경험하는 역량이며, 참여하는 능력과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사랑을 경험하면 당신은 녹아든다. 당신이 사는 마음의 작은 부분인 당신의 개인적 측면이 당신의 비개인적 자아, 즉 참 자아 안으로 녹아든다. 왜냐하면 당신의 개인적 측면이 압도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양도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안녕, 행복, 성취, 장수가 전적으로 자아를 실현하려는 자신의 시도에 달린 것으로 정해 놓으면, 이 양도는 당신에게 매우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지치고, 의지할 곳이 없고, 할 만큼 충분히 하여, 이제 다시 시도해도 이전만큼이나 소용없을 것임을 알 때, 당신은 사랑이라는 신의 이 큰 선물을 받아들일 것이다.
사랑은 신이 당신을 따라잡을 때 있다. 당신이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때 당신은 개인적 성취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도움만을 원하고, 알기만을 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내가 졌다!” 그러면 매우 강력한 일이 일어난다. 사랑이 당신을 따라잡기 시작하고,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바로 이 유일한 방법은 당신 앎이 다른 사람의 앎을 활성화할 만큼 강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의식적으로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다른 누구에게도 놀라운 일이듯 당신에게도 놀라운 일이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기 계발이 자신을 위해 더 나은 영화 같은 삶을 만드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그것이 희망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신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당신의 개인적 측면에서 빠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의 개인적 측면은 파괴되거나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의 기반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면 당신 삶은 더이상 생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공헌에 관한 것이고, 그 공헌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신은 사람들의 짐을 벗기고 싶어 한다. 신은 그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정착하기를 원하며, “음, 나에게 이런 두려움이나 장벽이 없다면, 나는 완벽하고 빛날 것이며, 온종일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들 자신을 해체하려고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음, 만약 나에게 아무런 방해가 없다면, 나는 정말 훌륭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흔한 가정이다. 그것은 앎길이 아니라, 개인적 성취의 길이다. 그것은 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길이고, 자아를 성취하려는 길이며, 자신의 세상을 지구에 천국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길이다. 이런 일은 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난다.
신은 당신이 결합의 법칙과 결합의 현실을 배울 수 있도록 당신의 영적 가족과 결합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신에게 내면의 교사들이 필요하다. 비록 많은 이가 그들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왜 내면의 교사들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그들은 저승에서의 당신 삶에 대한 기억을 당신에게 떠올리게 하여, 이곳에 온 당신의 목적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당신은 운명과 기원에 대한 이 큰 의식 없이는 진정한 목적을 찾을 수 없다. 당신은 방문자이므로, 세상에서의 당신 목적은 당신이 온 곳이자 돌아갈 곳과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당신은 어딘가에서 왔고 빈손으로 오지 않았지만, 당신 선물은 당신 내면에 깊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당신 앎에 숨겨져 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하고 싶은 무슨 일이든 시도해도 되며, 그렇다고 자신의 선물을 못 쓰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실패할 수 있는 경우는 당신이 자신의 선물을 찾지 못하거나, 아니면 찾았으나 공헌할 수 없는 때이다. 신의 천사들이 특별한 성장 단계에 있는 다양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수준의 훈련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 실패를 하지 않도록 가능한 한 많이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신은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일한다. 신은 모든 곳에 있으므로 오지 않는다. 그러니 신이 어떻게 다른 곳을 떠나 이곳으로 올 수 있겠는가? 여기 왔다가 저기 가는 것은 신에게 의미가 없다. 신의 뜻은 모든 수준의 삶에서 분리된 모든 개개인을 조직하는 끌림의 힘이다. 이 힘은 모든 사람이 서로 완벽하게 보완하도록 조직하고,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신에게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사랑의 기반이다.
당신들은 세상에 있는 특사이므로, 내면의 교사들에게는 당신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당신들에게도 내면의 교사들이 필요하고, 내면의 교사들에게도 당신들이 필요하다. 의식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당신들 모두에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당신들 중 일부에게는 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참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므로 항상 당신이 관심을 두고 집중할 가치가 있다. 이생에서 교사의 현존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관계를 직접 체험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훨씬 더 큰 능력과 지략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준비할 것이다.
사람들은 내면의 교사들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면, 온갖 자기 생각들을 내면의 교사들에게 투사한다. 그들은 교사들을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교사들이 매우 천사처럼 행동하거나, 매우 강력하고 매우 위엄 있게 행동할 것으로 기대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사들이 작은 도우미가 되어 자신이 나아가는 데 약간 도와주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교사들에게 아이디어를 받았고 심지어 그들의 목소리까지 들었지만, 그 상대방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오로지 당신이 교사들과 실제로 무언가를 함께 할 때만 비로소 당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사랑의 기반이다. 사랑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은 당신이 사람들에게 현존하고, 삶에서 자신의 참된 성향을 받아들였을 때이다. 그때 사랑은 당신의 삶과 활동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사랑은 당신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머무는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여전히 어리석을지도 모르지만, 영적 현존은 점점 더 당신과 함께 머물고, 당신과 함께 다닌다. 단기간에 실제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과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것,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이 진보한 사람에게 응답할 때, 그들은 그 사람에게 응답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영적 현존에 응답하는 것이다. 종종 진보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나를 보지 말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것이 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삶에는 이 은총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텅 빈 곳이 넓다.
우리는 매우 축복받아 서로의 현존을 받아들이고, 삶으로 삶을 접촉할 수 있으며, 저승의 삶으로 이승의 삶을 접촉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접촉을 통해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우리가 하는 말이 들리며, 우리는 당신이 하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이 기회에 감사한다. 낫시 노바레 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