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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행복의 조건 / 법정

작성자山木|작성시간22.12.21|조회수134 목록 댓글 1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의 조건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없는 말을 하룻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 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말이 적은 사람,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초면이든 구면이든
말이 많은 사람한테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나는 가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말수가 적은 사람한테는
오히려 내가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고 싶어진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꼭 필요한 말만 할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말이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쏟아 내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습관이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불쑥 말해 버리면
안에서 여무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내면은 비어 있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 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침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불교 경전은 말하고 있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 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 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어떤 낡은 자로써,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며칠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이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트게 된다.
  
 
사람들은 삶을 제대로 살 줄 알아야 한다.
소유에 집착하면 그 집착이
우리들의 자유로운 날개를 쇠사슬로 묶어 버린다.
그것은 또한 자기 실현을 방해한다.
무엇을 갖고 싶다는 것은 비이성적인 열정이다.
비이성적인 열정에 들뜰 때
그것은 벌써 정신적으로 병든 것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
삶의 부피보다는 질을 문제 삼아야 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삶을 살 줄 알 때 사람일 수가 있다.
채우려고만 하지 말고 텅 비울 수 있어야 한다.
텅 빈 곳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려 나온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에 있다.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의 청정한 본성인
사랑과 지혜에 가치 척도를 둬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물질이나 정신이나, 밖으로나 안으로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또 온갖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에라도 얽매이면
자주적인 인간 구실을 할 수 없다.
무슨 일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 일을 하되 그 일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얽매이면 그 일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 일을 하되 얽매이지 않으려면 저마다
자신의 청정한 본성에,
곧 지혜와 사랑에 가치의식을 두어야 한다.
 
   
우리들 안에 영성이 있고 불성이 있다.
집에서 살림을 하든 밖에서 일을 하든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소재이다.
사실 따로 참선하고 염불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 심성 자체가 지극히 신령스럽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영성과 불성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대개 일시적인 충동과 변덕과
기분과 습관 등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일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자신을 맑게 들여다보는 그런 훈련이 필요하다.
 
   
인생을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선 자리에서 내 인생을 심화시킬 것에 마음을 둬야 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한지 아닌지, 수시로 따져봐야 한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다면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한 달 전의 나와 한 달 후의 내가 똑같다면
나 스스로를 그렇게 가두고 있는 것이다.
변화가 없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삶이 침체된다.
삶에 나날이 변화를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일상이 진부하고 지루하고 따분해진다.
삶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늘 유동적인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다.
이미 되어버린 것이 아니다.
삶은 늘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우주의 실상이다.
위로 오르든 날고 떨어지든
되어가는 어디에도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매달려 버리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정지되어 버린다.
우리들 자신을 안으로 항상 성찰해야 한다.
안으로 되살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잘 사는 사람은 한 번 죽지만,
잘못 사는 사람은 수백 번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을 아무렇게나
탕진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행복은 늘 단순한 데 있다.
가을날 창호지를 바르면서 아무 방해받지 않고
창에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 때 얼마나 아늑하고 좋은가.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 행복의 조건을 도배사에게 맡겨 버리면
자기에게 주어진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
도배가 되었든 청소가 되었든 집 고치는 일이 되었든
내 손으로 할 때 행복이 체험된다.
그것을 남한테 맡겨 버리면
내게 주어진 행복의 소재가 소멸된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결코 아니다. 그건 한때일 뿐이다.
욕망은 새로운 자극으로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을 채워가는 삶은 결코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이란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그리고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어디쯤에 왔는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법정 잠언집 『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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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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