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지에서 반사된 빛이 상대적 앎이다
스리 바가반(마하리쉬)은
<아루나찰라 8연시>의 제6연을
설명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하리쉬 :
전연(前聯)의 마지막에서는
"하나가 있습니까?"하고 물었고,
지금 이 연의 첫 마디는
"예, 하나가 있는데... "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뿐이기는 하지만,
하나뿐인 그것은
그 놀라운 힘에 의해
'나'(에고)라는 작은 점
(즉, '무지' 혹은 '잠재적 습의 덩어리')
위에서 반사되는데,
이 [반사된 빛]은 [상대적인 앎]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발현업'(지금 열매를 맺고 있는 과거의 업)
에 따라
'내적인 잠재적 습들'을
거친 외부 세계로 나타내고,
다시 거친 외부세계를
미세한 내면의 습으로서 흡수합니다.
그러한 힘을
미세한 차원에서는 "마음"이라고 부르고,
물질적 차원에서는 "뇌"라 부릅니다.
이 '마음 혹은 뇌'는,
저 영원하고 유일한 존재에게
확대경으로 작용하여,
그 유일한 존재를
확대된 우주로서 드러냅니다.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바깥으로 향하고
"잠" 속에서는
안으로 향하는데,
저 하나인 지고의 존재는
'마음을 매체'로 하여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는
'다양화'되고,
잠이나 기절등의 상태에서는
'흡수'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유일한 그것이며
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든
똑같은 하나의 존재는
당신 자신으로 남아 있으니,
당신 자신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연(前聯)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햇빛에 일단 노출되면 사진의 감광판은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당신의 '빛'에 노출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세계를 반사'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해는
당신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의 빛'도 너무 강해서
이미지들이 생기지 못하는데,
'당신의 빛'은
얼마나 더 강하겠습니까?
그래서 유일란 존재인
당신과 별개의 그 어떤 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연(제6연)에서
작은 점은 에고입니다.
어둠으로 구성된 작은 점은
잠재적인 습들로 이루어진 에고입니다.
보는 자인
'주체 혹은 에고'가 일어나면,
그 주체 혹은 에고는
보이는 것인 대상
혹은 내적 기관들로 '확대'됩니다.
에고가
일어날 수 있으려면
빛이 희미해야 됩니다.
<밝은 대낮>에는
밧줄이 뱀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는
밧줄 자체가 보이지 않고,
따라서
그것을 뱀으로 착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희미한 빛> 속에서, 어스름 속에서,
그림자로 어두워진 빛 속에서,
혹은 희미한 빛이 비치는 어둠 속에서만
밧줄을 뱀으로 보는
착각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순수한, 빛나는 존재가
'에고'로서 일어나는 것도,
어둠을 통해 흩어지는
그 순수한 존재의
빛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어둠을 다른 말로
근본 무지(원죄)라고 하며,
그 근본무지를 통과하는 빛은
<반사된 빛>이라고 합니다.
이 '반사된 빛'은 그 나름대로
○ 순수한 마음,
○ 이스와라,
○ 혹은 신이라고 합니다.
'이스와라'는 '마야'와
통일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반사된 빛'이 '이스와라'입니다.
(이것이 '내가 있다"는 존재 의식이다)
○ 1차 반사된 빛
= 이스와라
= 의식
= '내가 있다'는 앎
= 순수한 마음
그 이스와라의 다른 이름인
'순수한 마음'은
'불순한 마음'도 함축합니다.
불순한 마음은, 라자스적인,
즉 '활동적인 마음'이나 '에고'인데,
이 또한
앞의 순수한 마음에서
투사되어 나오지만
다만
또 다른 '2차 반사'를
통할 뿐입니다.
따라서 에고는
그 '두 번째 어둠'(무지)의
소산입니다.
그 다음에는
따마스적인 마음, 곧 둔한 마음이
'내적 기관'이라는 형태로 나오는데,
이것이
'세계'로서 나타납니다.
'거친 몸'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따마스적인 마음이
'뇌'에 의해
외부적으로는 세계로 빛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거친 몸은
마음에 속하는 것일 뿐입니다.
(넓은 의미의) 마음은
네 가지 내적 기관으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생각들로 구성되는 원리나
여섯가지 감각으로 구성되는 원리라
할 수도 있고,
지성은 에고와 결합하고
의식은 (좁은 의미의) 마음과
ㅡ 즉, 기억 기능이 사고 기능과 ㅡ
결합한다 하여,
두 부분(에고와 마음)으로
구성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
명지아(지적인 자아) 혹은 에고(보는 자)는
주체를 형성하고,
마음의 껍질(다섯껍질 중 세번째)
- 보이는 것 - 은 대상을 구성합니다.
생시, 꿈, 잠의 상태는
근본 무지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마음은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는
밖으로 나가서
'자신의 상(相)들'로부터
경험을 끌어내고,
잠 속에서는 안으로 들어가서
'마야의 상(相)들'을 경험하는데,
이 마야는
개인들과 우주의 모든 행위를
규율하는
독보적인 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스스로 빛나는 존재의 바탕 위에서
반사된 빛을 통과해 가는
현상들일 뿐입니다.
'밝은 대낮'에는
밧줄 상의 뱀이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는
밧줄 자체도 보이지 않듯이,
세계도
스스로 빛나는 순수한 존재의 삼매 상태나,
깊은 잠, 기절 등의 상태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근원에서
독립되어 있지 않은 세계는,
반사된 빛
(어둠이 섞인 빛이나,
무지에 의해 오염된 지(知))
안에서만 일어나고,
번성하고,
해체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다양성도
본래의 근원인 실재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유일한 존재가
다양해져서 대상화되었다가
다시 흡수되는
하나의 유희가 진행 중입니다.
그러자면
하나의 샥티(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놀라운 쌱티가!
(그러나) 그녀 역시
자신의 근원에서 독립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빛나는
순수한 존재 안에서는
이 샥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녀의 행위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요.
(그 행위들이) 얼마나 고상한지 !
그녀의 고상한
원초적 행위(즉, 진동하는 힘)로부터
'사뜨와'로 가득 찬
반사의 결과들이 나오고,
여기서
'라자스적인 에고'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따마스적인 상념 형상들'이 나오는데,
이것을 보통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확대경에 상응하는
빛에 해당됩니다.
인공적인 빛이
렌즈를 통해 화막에 투사되듯이,
반사된 빛은
생각(확대경)을 통과해 가서
그 앞에 세계로서 확대됩니다.
더욱이
그 자체로
'씨앗 형태의 세계'인
그 '생각'이
바로,
'광대한 외부 세계'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 엄청난 (창조적인) 힘이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이스와라, 개인 그리고 세계는
'반사된 빛'에 불과하며,
스스로 빛나는 유일한 존재를
그 바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생각(에고)이
무엇입니까?
사물들의 체계(즉, 세계) 안에서
그것은 주체입니까, 대상입니까?
그것이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
다른 모든 대상들을 주시하는 한,
혹은 여하튼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한,
그것은 주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진아를 깨닫고 나면
그 에고('나'라는 생각)는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 '나'라는 생각(에고)은
누구의 것인가?
이 탐색이 자기탐구입니다.
'나'라는 생각과
'이것'이라는 생각(대상에 대한 인식)은
둘 다 같은 빛에서
방사되는 것인데,
각기
라조구나와
따모구나에 관계됩니다.
라자스와 따마스에서 벗어난
반사된 빛(순수한 사뜨와)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반사된 빛)이
'이것'이라는 생각에 의해
단절되지 않고
'나-나'로서
빛을 발해야 합니다.
[이 순수한 상태가]
[잠과 생시 사이에]
[잠시 존재합니다].
그것이 연장되면
바로 '우주의식'이며,
심지어 '이스와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 빛나는
지고의 존재를 깨닫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또 깊히 잠이 들었을 때
했던 경험으로서
깨고 난 뒤에
기억되는 것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즉,
"나는 행복하게 잤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복'과 '무지'가 그때의 체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힘이
첫째는 '은폐'(어둠)로,
둘째는 '투사'(다양성)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투사의 결과입니다.
ㅡ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