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생각만 지속되는 것이 명상이다
질문자 :
왜 개인들은
이 세상의 일들에 말려들어 있고,
그 결과로 괴로움을 받습니까?
거기서 벗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영적인 세계 안에 있으면
그들이 더 큰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마하리쉬 :
세계는 영적일 뿐입니다.
그대는 자신을
그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물질적이고
다른 세상은 영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영적일 뿐입니다.
질문자 :
몸을 떠난 영혼,
즉 영들은 더 깊은 통찰력이 있어서
더 큰 자유를 누립니까?
마하리쉬 :
그대가 자신을
그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몸을 떠난 영혼들을
영(靈, Spirit)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한계들(육신 등)을
토대로
그대는
그들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능력을 알려고 합니다.
몸을 떠난 영혼들조차
'미세한 몸'(subtle body)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몸을 떠난 영혼'이라고
말하지 않겠지요.
몸을 떠난 다는 것은
'이 거친 몸(gross body)을
벗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개인성을 부여하는 한,
그들은
자신의 '미세한 몸'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한계는
그들 자신의 상태에
따를 것입니다.
그대가
자신의 한계를 느끼듯이,
그들도, 즉 미세한 몸들도
자신들의 한계가 안겨주는
부담을 느낍니다.
제가
영이나 영적인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인 영이지,
상대적인 영이 아닙니다.
순수한 영으로서의
그대 자신을 깨달으면,
이 세계도
영적일 뿐이지
물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질문자 :
그들의 미세한 몸들도
우리의 몸처럼 일시적입니까?
그들도 환생합니까?
마하리쉬 :
이런 질문들은 그대가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 몸은
탄생과 죽음을 가지고 있고,
이 몸이 넘어지면
다른 몸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몸입니까?
만약 자신이
이 몸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발견하면
거친 몸이나
미세한 몸에서
벗어날 것이고,
그러면
아무 한계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한계가 없는 곳에
어디 물질적이거나
영적인 세계가 있겠습니까?
환생이라는 문제가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또 다른 관점에서 한번 봅시다.
그대는 꿈 속에서
자신을 위해 꿈-몸을 창조하고
그 꿈-몸을 가지고 행위합니다.
그 꿈-몸은
생시의 상태에서는
거짓임이 판명됩니다.
지금 그대는
자신이 이 몸이지
꿈-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꿈 속에서는
꿈-몸에 의해
이 생시-몸이 거짓으로 됩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이들 중 어떤 몸도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몸이나
한 때에는 참이고,
다른 때에는 거짓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영원히 진짜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나'라고 말합니다.
이 '나'라는 의식은
세 가지 상태(잠, 꿈, 생시)에
줄곧 존재합니다.
그 의식에는
어떤 변화도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입니다.
세 가지 상태는 거짓입니다.
그 세 가지 상태는
'마음'에게만 존재합니다.
그대로 하여금
자신의 참된 성품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대의 참된 성품은
무한한 영(靈, Spirit)의 성품입니다.
그 참된 성품은
그대가 잠들었을 때의
경우입니다.
다른 두 가지 상태에서는
그대가 한계를 인식합니다.
그 차이는 무엇때문입니까?
'잠' 속에서는
마음이 없었지만,
'꿈'과 '생시'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존재합니다.
한계가 있다는
느낌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이 무엇입니까?
찾아내십시오.
그것을 찾아보면,
그것은 스스로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런 실제적 존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각이 그치면
마음은 사라집니다.
질문자 :
그때도 제가 남아 있습니까?
마하리쉬 :
잠 속에서
그대가 하는 체험은
무엇입니까?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 마음도 없었지만,
그대는
그때도 남아 있었습니다.
질문자 :
명상을 하려고 해도
제 마음이 헤메어 명상이 안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리지 :
그대의 질문 자체가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먼저 그 질문의
앞부분에 대해서 보자면,
그대는 자신이 집중을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대'는 '자기'를 뜻합니다.
그대는 무엇에 대해 집중합니까?
지금 실패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어느 자기입니까?
두개의 자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자기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집중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그러나 그렇다면 왜 아무런 행복이 없느냐?"
고 묻습니다.
그대가 잠들어 있을 때와 같이
영(靈)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헤메는 마음이라고
그대 자신이 시인합니다.
그 마음을 찾아내십시오.
그 '헤멤'이 그치면
그것이 바로 진아,
즉 영원한 영(靈)인
그대의 '나'-의식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것은
지(知)와 무지(無知)를
넘어서 있습니다.
질문자 :
저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어
집중할 시간이 거의 나지 않습니다.
그에 대해 어떤 방편이 있습니까?
호흡제어는 좋은 방편입니까?
마하리쉬 :
쁘라나(생명기운)와
마음은
같은 근원에서 일어납니다.
그 근원은
호흡을 억제하거나
마음을 추적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을 추적할 수 없다면
호흡 억제가 분명히 도움이 되겠지요.
호흡제어는
숨이 들고 나감을 지켜보면 됩니다.
마음을 지켜보면
생각들이 그치고
평안이 자리잡는데,
그 평안이
그대의 참된 성품입니다.
자나까왕이 말했습니다.
"나에게서 '나'인 것을 훔쳐가던
도둑(즉, 마음)을 이제 발견했다.
이 도둑을 당장 죽여버리겠다."
생각에 기인하는 그 번뇌가
진아에게서
평안을 훔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번뇌'가 '마음'입니다.
그것이 그치면
마음이 도망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번뇌없는
바탕으로서의 진아가 남습니다.
(대화에 다른 사람이 끼어 들었다)
마음이 마음을 죽여야합니다.
마하리쉬 :
그렇지요
만약 마음이 있다면.
그러나 마음을 찾아보면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질문자 :
내심염송(內心念誦)이
구두염송(口頭念誦)보다 낫지 않습니까?
마하리쉬 :
구두염송은 소리로 이루어집니다.
소리는
생각에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내심 염송이
구두염송보다 낫습니다.
질문자 :
염송을 내관하면서
입으로도
그것을 염송하면 안 됩니까?
마하리쉬 :
염송이 마음 속으로 된다면
소리를 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내심염송이 될 때
염송은 내관(內觀)이 됩니다.
명상, 내관, 내심염송은
똑 같은 것입니다.
잡다한 생각들이 정리되고
한 생각이 지속되면서
다른 모든 것을 몰아내면
그것을 <내관>이라고 합니다.
염송이나 명상의 목적은
이런 저런 생각을 몰아내고
자기 자신을
단 한 가지 생각에
국한 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 생각도 그것의 근원,
즉 '절대적 의식'인
'진아' 속으로 사라집니다.
마음은
염송에 몰두하다가
나중에
자신의 근원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질문자 :
마음은 두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마하리쉬 :
두뇌는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몸 안에 있습니다.
저는 <몸> 자체가
<마음의 한 투사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대가
두뇌를 이야기하는 것은
몸에 대해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나 몸과
그 몸 안의 두뇌를
만들어 낸 것은
마음이고,
두뇌가
자기 자리라고 말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질문자 :
스리 바가반(마하리쉬)께서는
저작물들 중의 하나에서
염송을 그 근원까지
추적해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까?
마하리쉬 :
그런 생각들은
마음의 작용일 뿐입니다.
염송은
마음을 단 한 가지 생각에
고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생각은
먼저 (한 생각에) 종속된 뒤에야
사라집니다.
염송이 '내심염송'이 될 때
그것을 '명상'이라고 합니다.
명상은
그대의 '참된 성품'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노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잡다한 생각이 있는 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생각들이
그대에게 있기 때문에,
'한 생각만 지속되는 것'을
'명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명상이 아무 노력없이
저절로 되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정한 성품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ㅡ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