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뚜리야는 영화의 스크린과 같다
마하리쉬 :
자유 의지와 운명은
육신이 지속되는 동안 지속됩니다.
그러나 지혜는
둘 다를 초월합니다.
왜냐하면 진아는
지(知)와 무지(無知)를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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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리쉬 :
마음은
생각의 다발입니다.
생각은
생각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 '생각하는 자'가 바로 '에고'입니다.
에고는 찾아보면
자동적으로 사라집니다.
에고와 마음은 동일합니다.
에고는
다른 모든 생각이 거기서 일어나는
뿌리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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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사람과 사물들이
마치 꿈속에서처럼 희미하게,
거의 투명한 형태로 보일 때가
더러 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바깥에서 바라보지는 않지만
그들의 존재를
수동적으로 의식하는데,
이때 어떤 종류의 자아성도
능동적으로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마음 속에는
깊은 고요함이 있습니다.
이럴 때 저는
진아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된 것입니까?
아니면 이런 상태는
불건강한, 자기 최면의 결과입니까?
일시적인 평안을 얻는 수단으로나마
이러한 상태를 계속 추구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
'마음' 속에
'고요함'과 함께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그대가 목표해야 할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아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 점에 대해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그 상태는 안정되어 있지 않고
우발적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뛰어들기'란 말은,
외향적인 습에 의해
마음이 흩어질 때
그것을
내면으로 돌려야 하는 경우에
적합한 표현입니다.
그럴 때는
외부적 현상의 표면 아래로
뛰어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의식'을 방해하지 않는
깊은 '고요함'이 지배한다면
뛰어들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그 상태가
진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을 깨달으려는 노력을
'뛰어들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상태를
깨달음이나 '뛰어들기'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따라서 그 말 가운데
마지막 두 질문은 불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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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
뚜리야(네번째 상태)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생시, 잠, 꿈의 세가지 상태밖에 없습니다.
뚜리야는 또 하나의 '네 번째' 상태가 아닙니다.
뚜리야는
이 세 가지 상태의 바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네번째 상태라고도 하고
유일한 실재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 어떤 것과도 별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건들의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일한 진리'이며,
'그대의 존재 자체'입니다.
세 가지 상태는
그 위에서
일시적 현상으로 나타났다가
그 속으로 가라앉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 세가지 상태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영상들은 스크린 위를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영상들은 (스크린 위에) 나타나서
앞뒤로 움직이고
이런 저런 모습으로 변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스크린은
내내 변함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습들은 실재하지 않고
화포(畵布)가 실재합니다.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현상은
- 내면세계든 바깥 세계든 -
우리의 진아에서 독립되지 않은,
지나가는 현상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실재한다고 보고
그것이 우리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습(習)이,
우리의 참된 존재를 가리고
타자(他者)들을 내세웁니다.
항상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 진아를 발견하면
다른 모든 비실재들은 사라질 것이고,
그것들은
다름 아닌 진아라는 지(知)가
뒤에 남을 것입니다.
뚜리야야 말로
진아에 대한 다른 이름입니다.
생시, 꿈, 잠의 상태를
알고 있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진아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진아는 지금 여기 있고,
그것은 유일한 실재입니다.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육신과의 동일시가 지속되는 한
세계가 우리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아를 깨닫기만 하면 그것은 없습니다.
ㅡ 라마나 마히리쉬 어록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