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이 아닌 무지의 제거다
마하리쉬 :
수행의 목표는
<무지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지
<깨달음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 항상 존재합니다.
만일
새로 얻어야 하는 것이라면,
깨달음이란
한 때는 없다가
다른 때는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영구적이지 않고,
따라서 추구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영구적이고 영원하며,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질문자 :
무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마하리쉬 :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은총은 항상 있습니다.
은총은 <진아>입니다.
그것은 얻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은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한 전부입니다.
예를 들어,
해는 밝음일 뿐이어서
어둠을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해가 다가오면
어둠이 달아난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지도
하나의 허깨비이며
실재하지 않습니다.
무지는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실재하지 않는 성품을 발견하면
그것이 제거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해가 있는데 빛나고 있습니다.
그대는 햇빛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그래도 만약 해를 알고 싶다면,
눈을 해 쪽으로 돌려서
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은총은 지금 여기 있지만,
노력해야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 :
저는 순복(내맡김)하려는 욕망에 의해
은총이 늘어나는 것을 체험했으면 합니다.
마하리쉬 :
단번에 완전히 순복하여(내맡겨서)
그런 욕망을 없애 버리십시오.
(자기가)
행위자라는 느낌이
남아 있는 한,
욕망도 있습니다.
그래서 에고도 있습니다.
만일 이 에고가 사라지면
진아가 순수하게 빛을 발합니다.
행위자라는 '느낌'이 속박이지
행위 자체는
속박이 아닙니다.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여기서 고요함이란,
개인성이 털끝 만큼도 없는
완전한 순복(진아에게 내맡김)을 말합니다.
고요함이 지배하면
마음의 요동이 전혀 없게 됩니다.
마음의 요동이 욕망, 행위자라는 느낌,
그리고 개인성이 원인입니다.
마음의 요동이 그쳐 보이면
고요해집니다.
거기서, 즉 고요함 속에서
<앎>은 <존재>를 뜻합니다.
그것은
앎, (아는) 주체, 그리고 (앎의) 대상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
'상대적인 앎'이 아닙니다.
질문자 :
"나는 신이다"나
"나는 지고의 존재다"하는 생각이
도움이 됩니까?
마하리쉬 :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I am that I am).
"내가 있다"가
"신"이지,
"나는 신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신은 아닙니다.
"내가 있다"를 '깨달을 것'이지
"내가 있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신임을 알라"고 했지,
"내가 신임을 생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말씀하셨다 :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나'로서 안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항상
그 '나'일 뿐입니다.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습니다.
환상에 빠져 있는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겠지만,
자신을 완전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진아와 비아의 그릇된 동일시가
그대로 하여금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게 됩니다.
또 나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
따루반나말라이로 오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어느 길로 오나
따루반나말라이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따루반나말라이에 있으면서도
따루반나말라이로 가는 길을 묻는다면
우스운 일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진아이면서
어떻게하면 진아를 깨달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대가 바로 진아입니다.
그 진아로서 머무르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질문들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와 육신의 그릇된 동일시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지입니다.
이것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진아만이 있습니다.
ㅡ 라마나 마하리쉬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