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아를 아는 것은 진아가 되는 것을 뜻한다
질문자 :
스리 라마크리슈나 같은 분들은
집중을 수련했습니다.
마하리쉬 :
집중 기타 모든 수행법은
'무지'의 없음, 즉 부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존재》가 《앎》, 즉 《자각》입니다.
그 자각은
무지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누구나 당연히
무지의 부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런데도 왜 고통을 받습니까?
왜냐하면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잘못입니다.
"내가 있다"만이 있지,
"나는 이런 사람이다"나
"나는 저런 사람이다"는 없습니다.
존재가 절대적일 때는 옳습니다.
그것이 특정화되면 그릅니다.
그것이 진리의 전부입니다.
각자 자기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하는지 보십시오.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고
거울을 들여다 봅니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자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는 것을
육신 따위와 혼동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잠들었을 때
그가 자기 몸을 자각합니까?
아니지요.
하지만 그 자신은
잠 속에서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몸이 없어도
거기에 존재합니다.
잠 속에서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지금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면
거울이 필요합니까?
오직 자각하십시오.
그러면 그대의 존재가
그 자각 속에서 분명합니다.
질문자 :
진아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진아를 아는 것》은
《진아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대는 진아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대가 자신의 눈을 볼 수 없고,
들여다 볼 거울이 없다고 해서
그대의 눈이 있다는 것을 부인합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비록 진아가
대상화되지는 않는다 해도
그대는 진아를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그대는
그것이 대상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대의 진아를 부인합니까?
"나는 진아를 모른다"고
그대가 말할 때,
그것은
상대적인 앎의 견지에서 볼 때의
진아 없음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상대적인 앎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자신을 상대적인 앎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릇된 동일시로 인해,
이 분명한 진아를
ㅡ 그것이 대상화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ㅡ
모른다는 어려움이 생겨 났습니다.
그러고서도 그대는
"진아를 어떻게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대의 어려움은
"어떻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진아를 아는 것은 누구입니까?
몸이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몸뚱이더러 답하라고 하십시오.
지금 몸이 지각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이런 종류의 무지에 대응하기 위해
경전에서는
신의 릴라나 끄리다,
즉 유희라는 이론을 설정합니다.
신이
마음, 감각기관, 그리고 몸으로서
방사되어 나와
유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 유희가 그대에게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까?
그대가 누구이기에
신의 행위들을 문제 삼습니까?
그대가 해야 할일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이것이나 저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
(I AM THAT I AM)가
진리 전체를 요약해 줍니다.
그 방법은
"고요히 있으라" (Be still.)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고요함"이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그대를 소멸하라"는
뜻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관념을 포기하십시오.
우리의 경전에서는,
"그것은 '나'로서 빛난다"고 말합니다.
질문자 :
스푸라나(빛남)란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아함, 아함(aham, aham),
곧 '나-나'가 진아입니다.
'아함 이담'(aham idam),
곧 '나는 이것이다'나 '나는 저것이다'는
에고입니다.
빛남은 항상 있습니다.
에고는 일시적입니다.
그 '나'가
'나'로서만 유지될 때,
그것이 진아입니다.
그것이 옆길로 벗어나서
'이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에고입니다.
ㅡ 라마나 마하리쉬 어록 ㅡ